고슴도치
줄리안 반즈 지음, 신재실 옮김 / 열린책들 / 2005년 10월
평점 :
품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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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0년 이전 체코슬로바키아와 국경을 접한 구 공산주의 국가가 배경이다. 소설을 읽어보면 딱 여기까지인데 알라딘의 작품소개엔 불가리아와 마지막 독재자 토도르 지프코프가 작품의 모델이라고 한다. 작중 주인공, 실각한 마지막 공산주의 독재자 이름은 75세의 스토요 페르카노프. 89년 동구 혁명 후 법과대학 교수를 하다가 검찰총장 직에 지원해 자리에 오르고 전직 대통령 재판 담당 검사로 활약하는 인물에게는 페테르 솔린스키라는 이름을 주었다. 이렇게 해서 <고슴도치>는 법정 드라마가 되고, 동구혁명 후 재판에 넘겨진 앙시앵 레짐(공산주의 일인 독재체제)의 변명을 들을 수 있는 기회도 된다. 작품 속에서도 나오지만 실제 근현대 동구의 국가 수반을 지낸 사람 가운데 재판에 회부되어 선고를 받은 사람은 불가리아의 토도르 지프코프가 유일하다. 동독의 에리히 호네커는 모스크바로 도망쳐 칠레 대사관에 몸을 숨겼고, 헝가리 공산당 총서기 카다르 야노슈는 77세의 나이로 충격을 받아 자연사했으며, 구스타프 후사크 체코 공산당 지도자는 암에 걸려 신부에게 종부성사를 받고 곧 죽었다. 폴란드의 대통령 보이체흐 야루젤스키는 자본주의를 신뢰한다고 변절했고, 끝까지 투쟁을 포기하지 않은 루마니아의 니콜라예 차우세스쿠는 1989년 크리스마스에 전국에 생방송되는 가운데 아내 옐레나와 함께 각각 총탄 160발씩 맞고(위키피디아) 눈을 부릅뜬 채 죽었다. 지독하게도 많이 쐈다.

  이 작품의 주인공은 누굴까? 역자 신재실의 해설을 읽어보면 고슴도치는 자신의 방어에 털을 곤두세우는 동시에 고슴도치 글러브를 끼고 상대를 공격한다고 하면서 방어하는 전 대통령 테르카노프와 검찰총장 솔린스키 두 명 다 고슴도치이며, 이들의 대결을 TV 생중계로 지켜보는 학생 네 명이 검사측 관객, 한 학생의 할머니가 앙시앵 레짐을 응원하는 관객 역할을 한다고 썼다. 학생과 할머니에 관해서는 이의가 없다. 그러나 고슴도치의 가시-털 또는 털-가시는 공격할 때보다 아무래도 수비할 때 진가를 발휘하는 법, 곰곰이 생각해봐도 주인공은 검사가 아니라 피고인 스토요 페르카노프로 보는 것이 합당하지 않을까 싶다.


  12월. 6층 창문 가까이엔 흰 페인트로 반원이 그려져 있었고 높은 도수의 안경을 쓴 양복 차림 노인이 흰 선을 밟은 채 창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대천사 미가엘 성당 앞. 군주제 시절부터 군중집회 장소로 널리 쓰이던 곳. 오후 여섯 시에 메탈루르그 단지에 사는 여섯 명의 여성이 선두에 섰다. 이들은 두꺼운 사라사 드레스 위에 주머니 깊숙이 부엌 도구를 질러 넣은 앞치마를 두르고 보온을 위해 두터운 스웨터를 입었는데, 골목골목에서 빠져나온 여성들은 어느새 수천명에 육박했고, 남자들처럼 구호를 외치는 대신 스튜 냄비를 국자로 때리며 고고학 박물관 앞 광장을 지나 노인이 내려다보고 있는 건물인 구 국가안전부를 에워싸더니 그곳도 그냥 지나쳐 최근까지 공산당 본부였던 우아한 신고전주의 풍 대통령궁을 거쳐 국회건물 앞에 집결해 한 시간 동안 침묵 속에 서 있다가 여덟 시에 해산했다.

  벌써 십년 가까이 외채가 늘어나 이젠 전 국민의 2년 연봉에 해당하는 수준에 육박했고, 공산주의 국가들 모두 비슷한 경제 위기를 맞아 예전처럼 같은 사상을 가진 나라들을 배려해줄 수 없는 처지에 빠졌다. 대부 격인 소비에트 연방마저 소비에트 루블화가 아닌 미국 달러화로 소련산 정유를 팔겠다고 선언해버린 상태. 도로에서 버스가 사라졌고, 상점엔 식료품을 찾을 수 없으며, 국가를 지탱하던 군인들조차 보급품을 지급받을 수 없었다. 건물 6층에서 시위대를 바라보던 일흔다섯 살의 전직 대통령 스토요 페르카노프는, 내가 집권했을 때는 다들 먹고 살았어, 이제 우리 민족과 국가에 남은 것이라고는 한 가지 전망밖에 없어, 진정한 마르크스 레닌주의의 과학적인 길 말이지, 이렇게 결론을 냈다. 그는 절도, 국고횡령, 부패, 투기, 통화위반, 부당이득, 시므온 포포프 살해공모, 고문 공범, 인종학살 미수 공범 등으로 기소되어 재판 중이다.

  이 재판의 담당검사인 페테르 솔린스키는 암 투병중인 아버지가 페르카노프와 함께 파시스트와의 격렬한 싸움을 벌인 동지였으나 숙청당해 농촌으로 보내져 만년을 보내고 있다. 검찰총장에 오른 후, 정부로부터 더 넓고 방도 많은 아파트로 이사할 것을 권고 받았지만 전 정부인사의 대규모 특권 남용으로 기소하면서 신정부에 의해 눈에 띄는 특혜를 받는 것이 부담스러워 제안을 거절했다. 대단한 투쟁경력을 지닌 할아버지를 둔 아내 마리아는 이게 큰 불만이다. 딸이 다 커서, 방도 더 필요한 걸 남편도 알면서. 아내는 그리고 할아버지를 닮아 조금은 앙시앵 레짐 편이고, 타협에 능하지 않다.

  여기에 중요한 인물 한 명. 육군 중위였다가 스스로도 겁이 날 정도로 고속 승진을 해 지금은 고도비만의 육군 중장이자 애국 보안사의 우두머리로 있는 게오르기 가닌. 중위였을 때도 비만이었던 가닌은 주도州都 슬리벤에서 소규모 데모가 벌어졌을 때 소심한 경비병 소대장으로 현장에 있었다. 시위대에 특이하게도 공산당 소년단의 붉은 보닛으로 머리를 치장한 일단의 ‘데빈스키 특공대’가 들이닥치더니 “우리, 충성스런 학생, 노동자, 그리고 농부들은 정부를 지지한다”라는 현수막을 펼치고 구호를 외치기 시작했다.

  “당 만세, 정부 만세, 모든 영광은 스토요 페트카노프에게!”

  이어서 외치기를:

  “물가상승 감사한다. 식량부족 감사한다. 빵 아닌 이데올로기를 달라. 비밀경찰 강화하라. 스토요 페트카노프를 공경하라. 총알 감사한다. 순국 감사한다. 우리는 비밀경찰 출동을 원한다.”

  이후 가죽코트를 입은 낯선 남자가 가닌에게 와서 낮은 소리로 명령을 내렸다. 시위대의 머리 위로 총을 발사하고, 그래도 흩어지지 않으면 그들의 발에 발사하라고. 소심한 가닌은 이 명령이 공산당수로부터 하달되었다는 점, 어떤 얼간이가 조준을 낮게 해서 처음부터 사람이 죽을 수 있다는 두려움, 그리고 병사들에게 총알이 별로 없다는 거였다. 가닌은 혼자 데빈스키 특공대를 이끄는 청년에게 걸어가 일단 해산을 명령한다. 청년이 몇 명이나 죽일 셈이냐고 묻자 그는 “솔직히 죽이는 건 불가능하다. 우리에게는 충분한 총알이 없다. 탄환부족이다.”라고 까놓고 대답한다.

  우두머리 학생은 웃음을 터뜨렸고, 갑자기 가닌을 껴안더니 양 볼에 키스를 날려 가닌 역시 크게 웃을 수밖에 없었는데, 이게 스웨덴 TV에 고스란히 찍혀 전 세계로 송출되었으며 데빈스키 특공대는 새로운 구호를 외치기 시작했다.

  “군인에게 더 많은 실탄을 주라.”

  이후 벨벳 혁명이 일어나고 한 소심한 중위에 불과했던 남자의 아내는 하도 빨리 진급하는 남편 군복에 새 계급장을 바느질해 달아주느라 고생이 여간 자심하지 않았다.


  스토요 페트카노프는 35년간 장기 집권을 한 노회, 노련, 똑부러지는 독재자였다. 자신이 한 모든 일은 법적으로 완벽한 일이 되도록 만들었으며, 조금이라도 기억될 만한 서류에 단 한 번의 서명도 남기지 않았다. 정말? 아니다, 딱 한 번의 예외가 있었다. 국가 정보부에서 비밀리에 개발한 급성 심장병을 초래하게 하는 약물 개발. 그것 또는 가능한 모든 방법으로 정부나 대통령에 반대 또는 해가 되는 행위를 하는 사람을 제거하라는 서류에 SP, 라고 쓴 것. 이 서류를 발견한 사람이 바로 가닌이다. SP가 진짜 스토요 페트카노프일까? 자신이 서명한 서류 때문에 부하들이 알아서 대통령의 친딸이자 장관을 제거했을까? 그녀가 재즈 광에, 미국에서 햄버거를 비행기로 수입해 입에 달고 다니는 등 자본주의 물에 푹 적셔졌다는 이유로? 이 책이 지금 품절이지만 헌책으로 살 수 있으니 직접 확인하시라.

  그리하여 페트카노프 전 대통령은 유죄 판결을 받고 30년의 국내 유형에 처해진다. 실제로는 불가리아의 마지막 공산주의 대통령 지프코프는 1996년에야 마지막 재판을 통해 면소, 소를 면한다는 판결을 받았으며 1998년에 폐렴으로 죽었다. 무척 재미있다. 줄리언 반스, 정말 잘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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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23-12-07 11:1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책을 포함해서 열린책들에서 나왔던 반스 책이 더 찐이긴 합니다....(라고 느낌)
그 이후 타 출판사에서 나온 반스 책들은 뭐랄까 좀 싱겁...

Falstaff 2023-12-07 16:28   좋아요 1 | URL
옙. 열린책들에서 낸 반스의 초기 작품 쪽, 아마 신재실 선생하고 계약이 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많은 작가들이 전기와 후기 작품이 다른 경우가 있으니까 뭐 그럴 수 있다 싶습니다.

yamoo 2023-12-09 11:2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이 책 있지요...ㅋㅋ 열린책들에서 하드커버로 나왔던 반스의 초기작들...팩 표지도 좋고 번역도 괜찮아 소장중입니다..ㅎㅎ 이때 신재실 님이 주로 번역을 하셨는데...저도 이 고슴도치가 가장 좋았더랬습니다. 역시 별5개.. 근데 개인적으론 별4개 정도가 적당했던 느낌이에요..ㅎㅎ

당시 나왔던 반스의 책..
10 1/2 세계역사, 태양을 바라보며, 나를 만나기 전 그녀는, 플로베르의 앵무새, 메트로랜드, 내 말좀 들어와, 고슴도치. 사랑 그리고, 레몬테이블

Falstaff 2023-12-09 16:27   좋아요 0 | URL
맞아요! 신재실 선생 반스를 적극적으로 소개했습니다. 우리말 솜씨도 상당해서 번역 작품이라도 진짜 재미나게 읽고 있답니다. 이제 소개할 책 두 권 남았네요.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