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의 시간 암실문고
클라리시 리스펙토르 지음, 민승남 옮김 / 을유문화사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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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클라리시 리스펙토르의 데뷔작 <야생의 심장 가까이>를 읽고 화들짝 놀란 것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백일도 더 지났다. 왜 놀랐느냐 하면, 리스펙토르가 겨우 스물두 살 때 쓴 작품이면서 포스트모던, 그리고 경쾌한 문장이 매혹적이었기 때문이다. <별의 시간>을 읽으면서도 당연히 이런 것들을 기대했다. 그런데 발칙한 빨간 색 표지의 <야생의 심장 가까이>와 달리 검정 표지를 한 <별의 시간>은 다분히 음울하다. 1977년 작품이니까 57세의 작가가 난소암으로 생을 마감한 해이지만 정작 리스펙토르의 육체적 고통은 암에 의한 것이 아니라 1966년에 당한 사고의 후유증이었다. 난소암을 발견했을 때는 이미 치료불가의 판정을 받아 손쓸 새도 없이 죽음에 이르렀다. 암이든 사고이든 간에 만년의 지독한 고통은 작가로 하여금 옛 시절을 생각하게 했고, 당연히 죽음과 살아온 흔적 같은 것을 연상하게 만들었을 터이니, 암울한 작품을 쓴 것도 충분히 납득이 갈 것.

  리스펙토르는 자신의 마지막 작품을 한 편의 교향시, 아니면 적어도 음악 형식과 유사한 형태를 갖기 원한 것 같다. 그리하여 책의 제일 앞에 첨부한 “헌사” 가운데 이 작품을 헌정하고 싶은 작곡가만 나열해도 꽤 많다.

  지금은 슬프게도 유골로 남은 오래전의 슈만과 그의 사랑 클라라, 베토벤의 폭풍, 바흐의 중성색이 진동하는 순간, 나를 졸도시키는 쇼팽, 나를 겁먹게 했으며 나와 함께 불길 위에 솟구친 스트라빈스키,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죽음과 변용>, 드뷔시의 투명한 베일, 마를로스 노브레(브라질 작곡가), 프로코피예프, 카를 오르프, 쇤베르크와 12음 기법 작곡가들, 전자 음악 세대의 귀에 거슬리는 여러 외침들에게 <별의 시간>을 바친다고 썼다. 물론 이 외에 “혈기 왕성한 인간/남자인 나의 피처럼 짙고 검붉은 진홍색에 바치며 따라서 내 피에 바치는 것”이라고 분명히 하기도 했다.

  클라리시 리스펙토르는 1920년에 우크라이나에서 태어난 유대인 여성이다. 그런데 위 문단 안의 따옴표에 “인간/남자”라고 표기한 것은 포르투갈어 ‘homem’으로 ‘남자’ 또는 ‘인간’으로 번역할 수 있다고 영어전문 번역사 민승남이 각주를 달았다. 역자는 또한 이 헌사는 작품의 등장인물이며 화자인 호드리구 S.M.이 썼다고 볼 수도 있고, 작가인 클라리시 리스펙토르가 썼다고 볼 수도 있는 중의적 해석이 가능하다고 했다. 그런데 독자는 헌사의 마지막에 “클라리시 리스펙토르가 씀”이라고 박아 넣은 헌사를 누가 썼는지 굳이 구별할 필요는 없다. 작중 주인공인 브라질 동북부 알라고아스 출신 처녀, 처음엔 이름이 없다가 조금 후 고모한테 타이프를 배운 타이피스트였다가, 중간 이후부터 마카베아라고 불리는 어릴 적부터 고아였던 19세 여성의 보잘것없는 누추한 삶을 따라가고 있다.

  그러나 이 소설을 마카베아 아가씨의 스토리에 집중할 필요가 있을까, 이건 독자에 따라 의견이 조금 갈릴 것 같다. 이런 책은 뒤에 흔한 “역자 해설”이 붙어 있으면 훨씬 좋을 텐데, 한 부류는 분리를 할 필요가 없거나 할 수 없는 작가 리스펙토르와 화자 호드리구의 독백, 치통 같은 날카로운 고통과 귀에 거슬리는 고음으로 넘실거리는 당김음 선율 속에서 그가 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발견하려 할 지 모르고, 다른 한 부류는 북동부 알라고아스 출신의 가난하고 굶주린 하층 고아 여성 타이피스트 마카베아가 상징하는 것을 찾을 지 모른다. 나도 둘 가운데 하나, 아니면 둘 다였다. 독후감을 쓰기 위해 검색을 하다가 눈에 번쩍 뜨이는 것은, 평소엔 작가 소개 언저리만 읽고 마는데 오늘은 리스펙토르의 난소암 상태가 어때서 마지막 작품이 이렇게 암울한지 알아보려고 말년까지 읽다가 발견한 바, 책을 다 읽고 지금까지도 남아메리카 원주민인 인디오인 줄 알았다가, “마카베아”라는 여성형을 “마카베오”라는 남성형으로 바꾸면 “명백하게” 유대인 가족, 리스펙토르와 같은 정체성을 가진 인종이란다. 이걸 극동아시아 독자가 도무지 알 수가 있나? 게다가 마카베아 아가씨의 고향 알라고아스가 러시아 혁명 후 적백군 간의 내전을 피해 유대인 리스펙토르 가족이 배를 타고 길을 떠나 도착한 곳이라고 한다. 그러면 셈이 좀 복잡해진다.

  여기에 한 가지 의문이 더했으니, “마카베아”가 브라질 문학에서 상징적인 인물 가운데 한 명이라고 쓰여 있다. 마카베아가 <별의 시간>에 출연해서 상징적인 인물이 되었는지, 원래 상징적인 인물/이름이 있었는데 그걸 리스펙토르가 차용해 쓴 것인지, 이런 거 알려주라고 “역자 해설”이 있는 거 아닌가?


  화자 호드리구의 인생에 자신과 같은 고향을 가지고 있는 익명의 못생긴 타이피스트가 등장하기 전까지는 문학적으로 이렇다 할 성공은 거두지 못했어도 그럭저럭 만족스럽게 사는 남자였다. 말이 많은 것도 아닌데 줄곧 죽는 소리만 하다가 “금전적으로 가난하지 않은 사람은 영혼이나 열망의 가난에 허덕이게 되는데, 이들은 황금보다 소중한 무엇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이라는 헛소리도 서슴지 않는다. 외교관과 결혼하여 16년 동안 유럽과 미국 생활을 하고 귀국한 후 이혼을 하는 바람에 경제적으로 쪼들린 경험이 있는 리스펙토르의 수준에서 가난과 부유에 관한 이야기일 터, 진실은 가난은 사람의 영혼이나 열망까지 잠식해버리고 만다는 걸 작가와 화자는 몰랐을 것이다. 당시가 언제인지는 모르겠지만 호드리구가 말하는 시대엔 많은 여성들이 리우데자네이루 해변에서 선원들을 대상으로 매춘을 해 먹고 살았다는데, 그가 보기에 마카베아는 팔 수 있는 몸조차 갖지 못했고, 아무도 원하지 않아서 아직 처녀로 있어서 전적으로 무해하며 아무도 그리워하지 않을 거라고 단정한다. 게다가 가진 것도 없어서 빈민가의 공동주택이나 상점 계산대 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신이 너무도 쉽게 대체될 수 있는 소모품적 존재이며, 차라리 지상에서 사라져 버리는 게 나을 수도 있다는 걸 알아차리지 못한다고 말한다.

  마카베아는 조실부모하고 학교 교육도 3년 밖에 받지 못해서 글도 쓰지 못했지만 고모가 속성으로 타이프치는 걸 가르쳐 고모가 죽은 다음에 리우에 와서 도르레 유통회사의 타이피스트로 취직을 했다. 하필 사장 하이문두 실베이라 사장이 현학적인 단어 쓰는 걸 좋아해, 단어의 뜻을 전혀 알지 못하는 마카베아는 연일 오타투성이의 서류를 만들어낸다. 대화도 길게 하는 게 버겁고, 상당히 좁은 생활 말고는 기본 의식주 관련한 것에 대한 이해도 (부족한이 아니라)없는 마카베아는 네 명의 마리아와 함께  한 방에서 살고 있으나 친하지는 않다. 몸을 잘 씻지 않아 심상치 않은 냄새를 풍기면서도 다른 사람들이 가까이하지 않으려 하는 이유도 알지 못한다. 어려서부터 자주 씻지 않는 것으로 알았으니까. 고향에선 사람들이 다 그랬으니까.

  그래도 사랑은 피어난다. 고향에서 사람을 한 명 죽이고 리우데자네이루로 와서 공장일을 하는 올림피쿠와 연애를 시작하지만 도무지 대화가 잘 되지 않는다. 의사소통에 문제가 있으며, 사고방식이 완전히 다르고, 남자에 비하여 과하게 단순하기 때문에. 그러다가 올림피쿠는 마카베아와 한 사무실에서 근무하는 통통한 중산층 아가씨 글로리아와 데이트를 하고 싶어 마카베아를 걷어차 버린다. 그래도 글로리아와 우정을 유지하는 마카베아는 친구가 권하는 대로 전직 매춘부였다가 포주를 거친 마담 카를로타에게 가 앞날의 운세를 보는데, 이게 대박, 이 집을 나가자마자 한스라는 이름의 백인을 만나 결혼하고 부귀영화를 누릴 것이라는 예언을 듣는다. 그거 아시지? 소설 작법 2장 3항. 노파의 예언은 언제나 들어맞는다는 거. 근데 작가가 브라질 포스트 모던의 선구인 클라리사 리스펙토르인데도 마찬가지로 들어 맞을까? 그건 직접 확인해보시라.


  원래 책을 읽고 독후감을 쓸 때, “이 작품은 스토리 위주로 읽는 책이 아니다.” 라고 말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위키피디아에 쓰인 것을 보니까 그만 야코가 팍 죽어서 내 생각을 더 고집하지는 못하겠다. 솔직한 내 의견은 <야생의 심장 가까이>보다 덜 좋았는데 아직도 책 읽는 내공이 부족한 게 드러난 거 같아서 거 참, 겸연쩍기도 하고 뭐 그렇다. 나 잘난 맛에 사는 거, 그게 인생이지 뭐 별거 있어? 그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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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lstaff 2023-12-01 06:5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다음 주 삽질:
월요일. 문충성, 《허물어버린 집》
화요일. 김지하, 《구리 이순신》
수요일. 야로슬라프 하셰크, <훌륭한 병사 슈베이크>
목요일. 줄리언 반스, <고슴도치>
금요일. D.H. 로렌스, <다윗>

유부만두 2023-12-01 10:12   좋아요 2 | URL
골든삽질 기대하겠습니다.
연말 특집 올해의 삽! 선별 리스트도 만들어 주세요. ^^

수이 2023-12-01 11:24   좋아요 1 | URL
줄리언 반스랑 로렌스 기다리고 있을게요 폴스타프님

Falstaff 2023-12-01 15:35   좋아요 1 | URL
삽질은 계속 이어집니다. ㅎㅎ
11일. 앤 타일러, <바너비 스토리>
12일. 아모스 오즈, <블랙박스>
13일. 윌리엄 트레버, <운명의 꼭두각시>
14일. 조광화, 《조광화 희곡집》
15일. 줄리언 반스, 《레몬 테이블》
18일. 타티야나 톨스타야, 《톨스타야 단편집》
19일. 조지 엘리엇, <사일러스 마너>
20일. 하인리히 폰 클라이스트, <깨어진 항아리>
21일. 장 콕토, <무서운 아이들>
22일. 아우구스트 스트랜드베리이, <꿈 연극>
25일. 신현림, 《세기말 블루스》
26일. 줄리언 반스, <태양을 바라보며>
27일. 요나스 하센 케미리, <몬테코어>
28일. 압둘라자크 구르나, <배반>
29일. 산도르 마라이, <사랑>

그리고 내년의 첫 삽질은: 프란츠 카프카, <실종자>입니다.

반유행열반인 2023-12-01 08:5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아 리스펙토르 배수아 번역만 두 권 보고 이제 그만 볼게…했는데 오늘 팔백작님 독후감이 좀 꼬십니다?? 훠이훠이 나 쉽고 안 맵고 정신 사납지 않을 거 볼 거야!!!

Falstaff 2023-12-01 15:34   좋아요 1 | URL
리스펙토르, 읽을 때는 매력적인데 얼마 지나지 않으면 그냥 잊혀지더라고요. ㅜㅜ

수이 2023-12-01 11:2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역시 기대대로 높은 안목을 지니신 분 후훗, 리뷰 잼났어요.

Falstaff 2023-12-01 15:34   좋아요 0 | URL
헉. 재미나게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