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데야와 그녀의 아이들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235
류드밀라 울리츠카야 지음, 최종술 옮김 / 문학동네 / 2023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

  류드밀라 울리츠카야. 1943년생 러시아 작가. 《우리 차르의 사람들》을 재미있게 읽었어도 날이 많이지나 기억나지 않지만 <커다란 초록 천막>도 그렇고 이 <메데아와 그녀의 아이들>도 그런데, 유대인들이 주목할 만한 배역으로 등장한다. 그러나 정작 울리츠카야는 <커다란 초록 천막>에서 시인이자 유대인인 미하 멜라미트를 등장시켜, 거의 모든 지식인이 소비에트 연방에서 탈출하려고 갖은 방법을 도모했던 1970년대에, 소련 당국이 미하더러 이스라엘로의 이민을 요구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모국어인 러시아어를 저버릴 수 없어서 끝내 소비에트에 남는 결정을 내리게 했다. 내가 아는 유대인 작가는 절대 이런 선택을 하지 않는다. 그래서 울리츠카야가 1970년에 지하출판물(samizdat)를 소유, 배포한 혐의로 직장에서 해고되어 9년 동안 결혼하고 두 아들을 키우다가, (책의 앞날개에 쓰인 것처럼) 유대 드라마 극장에 들어간 것이 조금 의아스러웠다. 폐쇄적인 유대인 집단이 러시아 사람을 채용했을까? 울리츠카야가 유대인 맞다. 그러나 기독교를 받아들였으며 구소련이 만든 공동체 집단의 한 명으로, 인종적, 문화적 측면에서는 유대인이라고 자신의 정체성을 밝혔다고 한다. 작품은 이탈리아에서 쓰는 경향이 있다는 울리츠카야는 그곳에 아파트까지 소유하고 있으며, 일년의 반은 모스크바에서, 나머지 반은 이스라엘에서 지낸다고 한다. 그러면 도대체 작품은 언제 쓰는 거지?

  류드밀라 울리츠카야는 빅토리아 토카레바와 류드밀라 페트루셉스카야와 더불어 내가 주목하고 있는 여성 작가이다. 이들의 공통점은 구 소련 시대에는 글을 쓰지 않았거나 검열을 당했거나, 써 놓고도 출간하지 않다가, 고르바초프가 제주도에 와서 노태우한테 30억 달러를 얻어가는 등 페레스트로이카가 진행되자 활발하게 출간을 해서 세계적으로 이름을 날린 작가들이란 점이다. 그러나 울리츠카야의 장편소설 작법은 다른 작가들과 다르다. 그는 한 판에 많은 사람을 등장시키고 그들이 가지고 있는 옛일이거나 새로 하고 있는 일을 좌르륵 풀어내는 데 집중한다. 주인공 한 명이 있기는 하지만 다른 작가와 차별이 될 정도로 주인공이 거대 서사를 독차지하지 않는다. <메데야와 그녀의 아이들>에서 주인공은 당연히 메데야이지만, 메데야 시절에는 두 번의 전쟁과 스탈린에 의한 이주 정책으로 크름 반도 안에서 사라진 타타르인 문제에 초점을 맞추어 독자는 작품의 가장 큰 이야기 줄기인가보다, 생각하게 만든다. 하지만 점점 새로운 인물들이 등장해서 그들의 사는 이야기를 빼곡한데 어느새 앞부분에서 관심있게 읽었던 문제들은 사라져버린다. 이런 건 사실 내 스타일이 아니다. 그럼에도 류드밀라 울리츠카야를 계속 읽고, 앞으로도 눈에 띄면 틀림없이 읽을 것이 분명한데, 그건 이이의 작품이 단단한 스토리라인을 구축하는 전형적인 장편소설이라서가 아니라 이야기를 조근조근 풀어내는 문장의 섬세한 날줄과 씨줄 때문일 것이리라. 세상에 글 좋은 작가들이 한두명이 아니지만 글 좋은 작가들이 만들고 그것을 우리말 솜씨가 좋은 역자들이 번역한 작품은 놓치고 싶지 않다. 스토리가 재미있어서 읽을 때가 있듯이 문장이 애간장을 녹이는 바람에 읽을 때도 있는 법이다.

  비록 이 책이 예전 비채 출판사에서 《소네치카》라는 책에 든 세 작품, <소네치카>, <메데야와 그녀의 아이들>, <스페이드의 여왕>을 역자 별로 잘라서 두 권을 만들어 불만이기는 한데, 이 책과 동시에 문학동네가 찍은 《소네치카∙스페이드의 여왕》도 놓치지 않을 예정.


  메데야 멘데스. 벌써 20년이 넘게 과부로 살고 있는 작은 병원의 간호사다. 간호사라도 같은 간호사가 아니다. 전쟁 때 동네의 유일한 의료업계 종사자로 모든 환자들에게 심각하지 않은 수술, 진단, 처방까지 두루 허가가 났던 지역 명사 정도 된다. 무시무시한 소련 정부에 의하여 지명수배된 사람이 메데야의 집에 숨어들어도 메데야가 호통 한 번 치면 아무리 경찰서에서 나온 형사라 하더라도 찍소리 못하고 날이 밝아 손님이 아침밥을 다 먹을 때까지 기다려야 할 정도다. 이런 기운차고 압도적인 위세는 다분히 할아버지한테 물려 받은 것. 할아버지는 지금은 우크라이나 영토이지만 과거부터 따지면 고대 스키타이 인들의 땅이었다가 그리스와, 타타르, 오스만 제국을 거쳐 지금은 소비에트 연방의 국영농장 땅이 된 크름의 페오도시야에서 빈 손으로 출발해 페오도시야 항에 등록이 된 네 척의 상선을 소유한 부유한 무역상이었다. 그러니 살면서 얼마나 억척을 떨고, 가끔 독한 악행도 서슴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이런 기질 때문에 그 세대에서는 다른 건 몰라도 꼭 있어야 좋은 자식복이 없어 유일한 혈육인 아들을 하나 두었을 뿐이다. 그러나 부자의 아들로 태어난 게오르기는 아버지처럼 악착을 떨 이유가 없어서 마틸다와 혼인을 하자마자 1890년부터 1816년까지 짝수 해 여름마다 줄줄이 자식을 생산해 무려 열네 명의 손주를 봤다.

  이 열네 명의 손주들과 그 아이들의 아이들마저 오리지널 그리스인인 시노플리 할아버지한테 강인한 기질과 재능을 물려 받았으니, 이 재능이 남자들한테는 탐욕과 큰 에너지와 건설에 대한 열망으로, 여자들한테는 절약과 물건에 대한 비상한 관심 그리고 재기 넘치는 실용적 기질로 나타났다, 라고 하는데 책을 끝까지 읽어보면 그렇지도 않다. 그냥 해본 이야기이거나 작가가 작품을 쓰다가 이 내용을 잊은 거 아닐까 싶다.

  메데야의 죽은 남편 사무일 야코블레비치 멘데스는 스페인에서 이주한 유대인 조상을 두었다. 1장에 소개하기를 쾌활한 유대인 치과의사라 했으나 책을 더 읽으면 드디어 남편의 정체가 밝혀지는데 유쾌하다기보다 좀 산만하고 체신머리 없는 떠벌이 치과 기공사였다가 사회가 어지러울 때 자기는 별로 원하지도 않았지만 어영부영 치과 의사 자격증이 하늘에서 뚝 떨어진, 비밀스러운 바람둥이다. 그렇다. 바람을 피운 비밀 하나를 죽을 때까지 꽉 붙잡고 놓지 않은 인간.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고? 마누라가 워낙 무서우면 지가 안 그러고 배겨? 죽지 않으려면 어쩔 수 없는 것이지. 다른 사람들한테 우스워보일까봐 늘 전전긍긍하던 그가 미리 작성한 묘비명은 이랬다. “사무일 야코블레비치 멘데스. 특수부대 전사. 1914년부터 당원. 1890~1952” 묘비 꼭대기에 큼지막한 별 하나.

  메데야의 열네 형제 자매 가운데 마지막 열네 번째는 세례도, 이름도 갖지 못하고 엄마 배속에서 나오다가 엄마와 함께 죽어버리고, 아빠는 1916년 10월 7일, 세바스토폴 만 근처에서 함선 황후 마리야 호가 폭발할 때 선박 기관사로 일하다가 아내보다 9일 먼저 세상 떴다. 오빠 셋 가운데 하나는 적군에게 죽고, 하나는 백군한테 죽고 다른 하나는 메데야의 가장 친한 친구 옐레나가 난관에 빠지자 옐레나한테 장가들라고 강권해서 지금은 우즈베키스탄의 수도인 타슈켄트에서 과하게 잘 나간다. 남자 형제 하나는 독일군이 징병했고, 다른 하나는 소비에트가 징병해서 끌고 갔고 다른 하나는 루마니아인가로 가서 수도사가 됐다. 남은 형제 자매는 친척들한테 보내고, 아버지 형제가 워낙 없어서 이제 겨우 열여섯 살이 된 메데야가 알렉산드라와 두 살짜리 막내 디미트리를 업어 키웠다. 아이들이 거진 크고 보니 어느새 자신은 영낙없는 노처녀가 된 것. 그리하여 유대인 치과의사가 더 고맙고 그를 더 사랑했는지 모른다.

  남편이 죽은 이후에도 메데야는 한때 헬라스 땅이었던 페오도시야 옛집을 떠나지 않아 가문에 마지막 남은 그리스 순혈을 지키는 여인이 됐다. 그렇다고 오리지널 그리스어를 사용하는 건 아니어서, 그리스어도 현지화 된 여러 그리스어가 있는데, 한때 그리스의 식민지 타브리다 그리스어, 정식으로 말하자면 폰토스 그리스어를 쓴다. 이제는 쓸 줄 ‘안다’. 그리스어보다 훨씬 자주 러시아어를 사용하니까. 혼자 산다고 외롭지는 않다. 매일 작은 병원 수납원으로 출근을 하고, 많고 많은 형제들이 낳은 자식과 손주들이 4월말부터 밀려들기 시작하는데, 워낙 활기차고 마음씀씀이가 큰 메데야는 언제나 기쁜 마음으로 그들을 맞아들여 마치 휴가 온 아이들의 집인 것처럼 스스로 요리하고, 잠자고, 빨래하고, 청소하며 살게 해준다. 가을바람 소슬할 때까지.

  그러니 형제, 자매, 조카들한테 얼마나 이야기가 많겠는가. 지지고 볶고, 그것도 모자라 무치고, 튀기고, 삶고, 조리고, 꾸덕꾸덕하게 말리는 일들이. 그걸 그렇게 조근조근, 나긋나긋하게 펼쳐내는 솜씨란. 다만 저 앞에서 이야기했듯, 이야기를 풀어내는 방식이 내 스타일이 아니라서, 별은 네 개에서 멈추고 만다.


.



댓글(4) 먼댓글(0) 좋아요(2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유부만두 2023-11-30 07:3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메데이야는 동생이나 자기 자식들을 죽이진 않나보네요. 간호사래서 은근 독살을 기대했는데요.

Falstaff 2023-11-30 07:32   좋아요 1 | URL
저도 그리스 신화 생각하고 피 좀 튀는 악녀가 나올 거라 예상했다가, 꽝이었습니다.
오히려 선하고 강한 여성이더라고요. ㅎㅎㅎ

stella.K 2023-11-30 10:0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거 완전 제 스탈인데요? 조근조근. 하지만 언제 읽게될런지 모르겠습니다.ㅠ 언제나 소설 읽기에 좋은 길잡이를 제시에 주셔서 감사하네요.^^

Falstaff 2023-11-30 16:26   좋아요 1 | URL
천천히 읽으셔요. 새털 같은 나날들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