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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광기 그리고 죽음의 이야기 ㅣ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90
오라시오 키로가 지음, 엄지영 옮김 / 문학동네 / 2020년 8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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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초판이 2020년, 1년 후에 문학과지성사의 대산세계문학총서 169번으로 키로가의 소설집 《오렌지주를 증류하는 사람들》을 낸다. 나는 작년 1월에 대산세계문학총서를 먼저 읽었다. 스물두 달이 지나 개가실에서 책구경을 하다 또 ‘키로가’라는 이름이 눈에 띄었고, 《오렌지주를 증류하는 사람들》을 떠올리면서 서슴없이 대출해 읽었다. 《오렌지주를 증류하는 사람들》이 재미는 있지만 그렇게 인상적이지 않아서, 그저 참 꾸준하게, 일관되게, 변함없이 어쩌면 그렇게 사람 죽는 이야기만 하는지, 징글징글한 인상만 남아 있어 산뜻한 마음으로 읽기 시작한 건 아니다.
게다가 열람실에 올라가 정말로 책을 읽어보니까 누가 키로가 아니랄까봐 또 열심히 사람과 짐승들이 죽어 자빠진다. 별 이상한 생명체가 베개 속에 숨어들어 베개를 베고 자는 사람의 뒤통수에 아주 가느다란 구멍을 뚫고 밤새도록 피를 쪽쪽 빨아먹는 이야기도 나온다. 처음에는 아주 적은 양의 피를 빨다가 이제 체구가 좀 커지면 나중엔 벌컥벌컥 마셔버리는 수준으로 성장해 베개의 주인은 하릴없이 빈혈에 시달리다 스르륵 죽어버릴 때까지 흡혈의 축제가 이어진다는 이야기. 재미있겠지? 허무맹랑한 스토리지만 그래도 재미있다. 여름에 읽었으면 더 좋을 뻔했다. 이번 여름같이 죽자 하고 지지고 볶은 무더위라면 더 좋았을 뻔. 그러나 아뿔싸. 이 이야기는 이미 《오렌지주를 증류하는 사람들》에서 벌써 읽어본 내용이다.
백치로 태어난 네 형제가 부엌에서 하녀가 닭의 모가지를 식칼로 뎅겅 자르는 광경을 감명 깊게 지켜보는 일이 있었다. 그런가 보다 했다. 부모가 총명하고 어여쁜 막내딸만 데리고 시내 쇼핑을 가고, 하녀는 월차 휴가를 받아 옆동네에 들어온 서커스 구경을 간다는 핑계로 대낮에 온천장 모텔에 가서 3만원짜리 대실 빌린 날, 부모가 집에 오다가 통장네가 불러 세워 분리수거하는 요일 좀 지키라고 타박을 하는 걸 댓거리도 못하고 고스란히 뒤집어쓰고 있는 동안 다섯 살 먹은 막내 딸 혼자 집에 들어왔는데, 담벼락에 붙어 해바라기를 하던 4인의 백치 오라버니들이 난데없이 막냇동생 머리채를 휘어잡아 질질 부엌으로 끌고 들어가 찬장에서 식칼을 꺼내더니, 더 듣고 싶으셔? 아이고, 이것도 벌써 읽어본 이야기다.
오라시오, 영어식으로 하면 햄릿의 베프, 혹은 마이애미 과학수사대 반장 호레이쇼인 오라시오 키로가가 비록 미친 사람들, 광기에 휩싸인 열정에 그만 기가 넘어가버린 인간, 물을 무서워한다는 공수병이라고도 일컫는 광견병을 널리 퍼뜨리는 미친개와 미친개한테 물린 사람, 사랑에 빠져 허덕허덕 된장인지 (점잖게 쓰자) 청국장인지 모르는 (영어로 해야 맛인 단어가 있으니) crazy love 상태의 남녀, 마약, 이래 봐야 지금 수준으로는 우습기까지 한 모르핀 중독 같은 것에 집중한다. 그러니까 당신이나 나 같은 보통 인간들이 등장해 지지고 볶는 이야기는 하나도 없고, 없어도 진짜로 없고, 전부 좀 이상한 인간이나 동물, 심지어 다리 여섯 개 달린 곤충 같은 것이 나와서 죽고, 죽이고, 자살하고, 뜯어먹고, 빠져 죽고, 총 맞아 죽고, 치마를 훌떡 걷어 허여멀건 허벅지에 주사를 쿡쿡 찔러 대다가 마약에 쩔어서 죽고, 독한 사랑을 앓는다. 우리 같은 보통의 인간들은 사랑은 권태나 관성으로 끝나지만, 이 책에 나오는 연인들은 뭐? 그렇다, 광기로 자신과 상대를 미치게 만든다.
이런 그로테스크한 것들을 모아모아, 키로가는 그래도 참 절묘한 방식으로 나름대로 재미있게 스토리를 꾸려 열여덟 편의 작품으로 책 한 권을 만들었다. 그래 점수를 준다면 넷 정도는 받을 만하다고 생각하지만, 내 경우엔 22개월 전에 읽은 책에서 같은 작품을 여러 편 읽어서 작지 않게 실망한 터라 별 하나를 더 뺄 수밖에 없다.
근데, 작품보다 더 재미있고 기구하고 그로테스크한 건 작가 오라시오 키로가의 살아온 내력이란 말씀이지. 내가 살을 좀 붙여 오렌지술 독후감에다 써놨단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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