핀치콘티니가의 정원 인문 서가에 꽂힌 작가들
조르조 바사니 지음, 이현경 옮김 / 문학동네 / 2016년 6월
평점 :
품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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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것으로 우리나라에 번역 출간한 조르조 바사니 네 권은 다 읽는다. 책방에서 사서 읽은 <금테 안경>에 홀딱 반했던 게 2017년이니 6년 반이 걸렸다. 도서관 개가실에서 눈에 띄지 않았다면 그나마 모든 바사니를 읽겠다고 마음먹었던 것을 까맣게 잊고 있었을 지도 모른다. 아마 그랬을 거 같다. 그럼 책씻이로 쐬주 한 병 꽝? 참자. 요즘 맹렬히 살깎기 중이다.

  조르조 바사니 작품의 두 가지 키 워드는 단연 베네치아에서 7시 20분 방향에 있는 소도시 페라라, 그리고 유대인이다. 나는 <금테 안경>을 제일 먼저 읽어서 키 워드가 세 가지이고 앞의 두 개 외에 남성 동성연애자 게이도 포함인 줄 알았는데 바사니를 더 읽어보니까 유대인 차별법 시행 이후 고독을 이기지 못해 죽어버리는 이비인후과 의사 파디가티 선생만 그랬던 거였다. 이이는 <핀치콘티니가의 정원> 딱 한 컷에서 우정출연 하기도 한다. 이이 말고는 게이나 레즈비언은 등장하지 않더라. 비슷한 분위기를 풍기는 남자가 <핀치콘티니가의 정원>에 한 명 있기는 하지만 그렇다는 증거 없이 짧은 생을 마감할 뿐.

  의사 파디가티 선생 말고도 전작 <문 뒤에서>, <금테 안경> 그리고 소설집 《성벽 안에서》에서 읽을 수 있었던 다양한 등장인물과 장소 역시 <핀치콘티니가의 정원>에도 등장한다. 이럴 경우 전에 읽은 작품의 인물, 장소 등을 기억하면 소소한 즐거움을 만끽할 수 있지만 굳이 각주의 작은 글자를 보고서야 아, 전에 나왔던 인물/장소구나, 기억도 못하면 또 씁쓸하기도 하다. 난 거의 대부분 씁쓸한 쪽이다. 당연하지 네 권 읽는데 6년 6개월이 걸렸으니 그걸 기억하는 게 비정상 아냐?

  <핀치콘티니가의 정원>은 성장소설이다. 1929년부터, 주로 1938년에서 39년에 걸친 청년 화자 ‘나’와 핀치콘티니 집안의 막내딸 미콜 핀치콘티니의 연애담. 연애소설은 이미 웬만한 방법으로 거의 다 시도를 해서 여간 잘 쓰지 않으면 독자에게 흥미를 돋게 하는 데 실패할 확률이 높다. <핀치콘티니가의 정원>에 나오는 연애도 당연히 수다하게 읽어본 연애소설보다 더 드라마틱하거나 애잔하거나 심지어 야하지도 않다. 하지만 조르조 바사니의 책을 읽으면서 드라마틱을 기대하는 건 처음부터 번지수를 잘못 찾는 거다. 바사니는 참, 뭐랄까, 독특하게 스산한 아름다움을 문장 속에 집어넣어 글을 쓴다. 그렇게 쓰려고 아무리 노력을 해도 익숙해질 수 없는 것, 선천적으로 갖고 태어났다고 밖에 볼 수 없는 감각적 아름다움을 속삭이는 방법을 그냥 체득한 듯한 작가라고 하면 좋을까? 때는 1938년. 이탈리아에도 유대인 차별법이 발효되어 유대인은 다른 민족을 고용할 수 없고, 단체에 속할 수도 없는 등 노골적으로 사회적 멸시를 받아야 했던 시절. 바사니는 이 시기를 서술하면서 다른 유대 작가들처럼 그들이 받는 핍박, 피해의식 같은 것을 노골적으로 쓰지 않았다. 대신 유대인끼리 나누는 대화에서 애써 그다지 심하지 않은 듯, 그래도 살 만한 듯 현상을 회피하려는 모습 속의 불안을 기가 막히게 포착한다.

  유대인 사이에서도 계급은 존재한다. 계급 차이 때문에 맺어지지 못하는 인연도 있을 것. 낮은 계급의 아버지가 아들에게 완고한 벽처럼 존재하는 계급의 차이를 완곡하게 설명해주려 애쓰는 장면도 읽는 사람의 심금을 울린다. 게다가 아이 씨, 나도 경험해봤거든, 당해봤거든, 눈에 띄지 않지만 얼마나 아린 상처인지 알거든.

  그래, 바사니를 읽는 건 스토리 말고 이런 장면 장면을 읽는 일이다. 문장 하나하나가 그렇게 큰 쓸쓸함과 아스라한 아름다움으로 조각되어 있는지 넋을 잃는 일이다.


  1957년 4월, 로마에 사는 ‘나’는 친구 십여 명과 함께 소풍 갔다가 돌아오면서 훗날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이름을 올린 고대 에트루리아인들의 공동묘지를 방문한다. 기원전 9세기에서 기원전 1세기에 걸쳐 조성한 묘지를 보며, 고향 페라라의 몬테벨로 거리 끝에 있던 유대인 묘지를 떠올린다. 공동묘지 안에 크고 단단하게, 정말이지 위풍당당한 것이 <아이다>나 <나부코>의 무대장치에서 본 것 같은 대단한 핀치콘티니가의 가족묘지를 추억한다. 페라라의 에르콜레프리모데스테 대로 끄트머리에 있던 핀치콘티니가의 저택, 그리고 어린시절과 청년시절에 어울렸던 미콜과 알베르토, 에르만노 교수와 올가 부인, 외할머니 레지나 헤레라 노부인를 연상한다.

  저택은 1850년 알베르토의 증조 할아버지 모이세 씨가 구입하여 후손들이 수리와 개조를 계속했으나 1944년에 폭격으로 상당부분이 파괴되어 큰 건물 한 채만 남아 지금은 도시 빈민 오십여 가구의 피난민들이 차지했다. 저택보다 ‘나’의 기억에 깊이 각인되어 있는 것은 3만 평에 이르는 정원이었다. 출입구에서 5백 미터를 가야 도달하는 저택 ‘큰집’ 마그나도무스, 테니스 코트, 판필로 운하, 선착장과 마구간. 이 모든 것은 성벽과 이어지는 끝없는 담벼락과 육중한 나무문으로 고립되어 있었다.

  1914년 여섯 살의 맏아들 귀도가 미국발 소아마비로 급사하자 어머니 올가는 이후 평생 상복을 입기 시작했으며 사실상의 장남 알베르토와 미콜은 귀도처럼 공립학교에 보내지 않고 여러 명의 가정교사를 들여 홈 스쿨링을 하기로 결정했다. 틈틈이 ‘나’가 다니는 학교의 교사를 초빙해 이들의 실력을 점검하면서. 그러나 일년에 한 번 이상은 ‘나’의 학교에 마부가 진짜 말을 모는 고급 마차를 타고 와 진급시험을 치루기도 했는데, 이때 미콜이 조금은 관심있게 ‘나’를 본 것 같다.

  1929년에 자전거를 타고 성벽을 따라 핀치콘티니가의 담장을 따라 달리고 있을 때, 미콜이 담장 안에서 머리를 내놓고 ‘나’를 불러 세운 적이 있다. 미콜은 벽에 마치 발 딛개처럼 박혀 있는 철심을 밟고 담장을 넘어오라고 했으나 천성이 내성적이고 부끄럼이 많고 생각도 많은 ‘나’는 기어이 미콜의 제안을 거절한다. 이후 ‘나’는 볼로냐의 대학의 마지막 학년, 미콜은 더 멀리 베네치아 대학의 마지막 학년이던 1938년의 10월, 인종법이 발효하는 바람에 집에 와 있는 미콜과 알베르토 남매로부터 집에 와서 테니스를 함께 치자는 초대를 받고, ‘나’는 이를 수락해 다시 미콜과의 관계를 시작한다.

  미콜의 친절하고 늙은 아버지 에르만노 교수는 저택과 정원 말고도 모이세 씨로부터 물려받은 농토 수백만 평에서 나오는 소득으로 평생, 평생을 넘어 자손 대대로 노동할 필요 없이 부르주아의 삶을 살 수 있는 최상급 유대인인 반면에, 젊은 시절에는 의사였지만 일찌감치 의사를 포기하고 여유롭게 살던 ‘나’의 아버지는 지금 유대인묘지 관리자 일을 하는 중간 정도의 중산층 유대인. ‘나’는 시간이 갈수록 미콜의 아름다움과 매력에 빠지고, 사랑하는 만큼 미콜을 만지고 싶어 지옥 같은 갈증에 시달리지만, 미콜은 그럴 때마다 빤히 눈을 뜬 채 ‘나’의 접촉을 (독자인 내가 생각하기에) 냉소하기만 한다. 그러다가 말한다.

  “네게 고통을 주어 미안해. 정말 미안해. 우리 둘이서 육체적 사랑을 하다니! 그게 정말 가능할 거라고 생각하니? 네가 뭘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해? 약혼이라도 하자고?”

  위의 따옴표는 긴 내용을 몇 문장으로 축약한 거다. 짧게 이야기해서 너하고 나는 동등하게 결혼할 처지가 아니라는 것. 그래서 좋은 말할 때 꺼져달라는 것. 그럼에도 ‘나’가 미콜을 사랑하게 만들어서, 그게 얼마나 힘든 일인 줄도 알기 때문에 미안하다는 이야기다. 세상 사는 게 다 그렇지 뭐. 화자 ‘나’는, 돌 맞은 개구락지? 그럴 수도 있고. 어느 시인이 그랬지? 안 넘어가는 나무는 백 번을 찍어도 넘어가지 않는다고.


  이렇게 1938년, 39년은 사랑과 함께 사라지고, 42년에 림프 육아종으로 죽은 큰아들 알베르토만 거대하고 화려한 가족묘에 묻힌 채 나머지 가족 모두는 1943년에 독일로 강제 이송을 당한 후 아무도 소식을 듣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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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olcat329 2023-11-09 10:0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도 <금테안경>으로 바사니를 처음 만났는데 정말 너무너무 좋았습니다.
‘스산한 아름다움‘ 맞아요. <문 뒤에서>도 참 쓸쓸했구요.
페라라도 가보고 싶은데 왠지 쓸쓸한 도시일 거 같네요.
저도 이 책 샀는데 정신없는 시간 다 지나면 젤 먼저 읽어보렵니다.

Falstaff 2023-11-09 16:56   좋아요 0 | URL
아휴, 가지고 있으시면 얼른 읽어야지요! 재미나게 읽으시기 바랍니다!!!!

yamoo 2023-11-09 12:1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바사니군요!
네, 바사니는 좋더라구요. 근데 문학동네는 너무 책을 얇게 만들어 비싸게 팔아쳐묵는 거 같아요..
타부키 책도 열받았는데...그냥 묶어서 좀 두툼하게 펴내면 안되나 봅니다...^^;;

Falstaff 2023-11-09 16:59   좋아요 0 | URL
ㅋㅋㅋㅋㅋ 제가 문둥이네 책이 너무 얇다, 얍삽하다..를 좀 심하게 썼다가 한 방 맞은 적 있습지요. 그게 뭐였더라.... <금테안경>이었나, <무게>였나... 아마 그럴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