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리의 일곱 개의 달
셰한 카루나틸라카 지음, 유소영 옮김 / 인플루엔셜(주)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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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셰한 카루나틸라카는 1975년 스리랑카 남부 골Galle에서 (부잣집 아들로? 맞을 걸?) 태어나 콜롬보에서 자랐다. 고등학교 시절 뉴질랜드로 유학 가 경영학을 공부하라는 집안 어른들 말씀을 귓등으로도 듣지 않고 마시(Massey) 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한다. 이후 런던, 암스테르담, 싱가포르 등지의 광고회사에서 일하며 틈틈이 가디언, 뉴스위크, 롤링스톤, 내셔널 지오그래픽 등에 특집기사를 실어 가외수입을 올리는 한편, 베이스 기타를 들고 스리랑카 록밴드와 공연도 하며 2010년 데뷔작 <차이나맨: 프라딥 매튜의 전설>을 발표해 여기저기서 여러 문학상을 받는다. 그러다가 2022년 세번째 소설 <말리의 일곱 개의 달>이 세상의 모든 영어 소설을 대상으로 하는 부커상을 받는 대박을 쳐 본격적으로 세계적인 스타덤에 올랐다. 부잣집 아들이지, 공부 잘해 여기저기 급여 좋다는 광고회사에 정직원으로 취직도 잘 하지, 록그룹에서 베이스 연주도 하지, 부커상도 받지, 게다가 위키피디아 가서 얼굴 보면 생기기도 잘 생겼다. 이런 인간들 정말 재수없지?


  이 책을 읽기 전에 스리랑카의 현대사를 조금 알면 훨씬 좋다. 스리랑카 사람들 이름이 우리가 듣기엔 매우 독특하다. 작가 셰한 카루나틸라카도 이게 원래 이름이 아닐 지도 모른다. 어쩌면 이름 full name 읽는 데만 1박 2일 걸릴지도 모른다. 그래서 앞 이름을 영어식으로 짧게 쓰고 중간 이름을 몽땅 생략하는 것을 여러 번 봤다. 그러니 사람 이름을 될 수 있으면 빼고 최대한 간략하게 소개한다.

  옛 실론 섬의 고원지대에는 불교를 믿는 다수민족인 싱할라 족과 북부와 동부 해변에 걸쳐 살면서 힌두교를 믿던 소수민족 타밀족이 있었다. 유럽 제국주의자들이 쳐들어와 네덜란드 식민지를 거쳐 18세기부터 영국의 식민 통치를 받았는데, 언제나 해변을 끼고 사는 부족이 혜택을 보는 법이라(치누아 아체베!) 타밀족이 고등교육을 받을 기회를 먼저 얻어 고위 관리직을 차지할 수 있었다. 싱할라족이 보기에 배가 아팠는데 실론이 독립을 하자 단박에 상황을 역전시킨 싱할라족은 곧바로 머릿수로 밀어 부쳐 권력을 얻었다. 모든 것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선이 있는 법이지만 수백 년 동안 상대적 불이익 또는 피해를 고스란히 당해왔다고 생각하는 싱할라족은 아예 법을 고쳐 싱할라의 언어만 국어로 채택하더니 점점 차별이 심해져 1972년엔 나라 이름을 스리랑카로 바꾸고 타밀족의 대학입학을 제한하는 법까지 만들어버렸다. 그리고 급기야 1977년과 81년에 싱할라족이 타밀족을 학살하는 사건이 벌어지는 등 두 민족의 갈등은 돌이킬 수 없는 골짜기로 빠져 버린다. 그리하여 1983년에 타밀족 분리독립주의자들이 “타밀 엘람 호랑이 해방군”이란 것을 만들어 스리랑카의 북동부 지방에서 세를 떨친다.

  1983년 7월, 타밀 엘람 호랑이 해방군은 북부 자프나 지역에서 정부군을 급습해 열세 명을 죽이는 일이 벌어졌다. 이에 정부는 총리가 걱정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죽은 병사 13명의 장례를 수도 콜롬보에서 치루기로 했고, 장례에 참석한 무수한 인파들은 순식간에 폭도로 돌변해 눈에 띄는 타밀족의 집엔 불을 싸지르고 사람들을 사정 없이 때려 죽이기 시작한다. 폭동은 전국으로 번져 7월 한 달 동안 정부 집계로 5,638명이 사망하고, 15만 명의 집이 불에 타버렸다. 동시에 중부와 남부 밀림지역엔 민족해방군, 북쪽엔 잔인한 인도 평화유지군이 나타나 스리랑카 내전은 Go go mountain, 갈수록 태산의 형국으로 치닫는다. 근데 우습게도 진짜 스리랑카 터줏대감 원주민은 내륙 산지 밀림 지역에 극소수만 남은 베다족이란 거.

  이런 나라의 특징은 권력을 순 깡패들이 잡고 있다는 점이다. 타밀 반군이라고 해서 타밀족에게 관대한 건 절대 아니다. 생포한 적을 잔인한 방법으로 죽이는 건 이 섬나라 인간들의 공통점이라 그냥 넘어가고, 적에게 타격을 줄 수 있다면 멀쩡한 같은 부족 사람이라도 그냥 쏴 죽여버리고 만다. 싱할라족도 타밀 반군에게 뒤집어 씌우기 위해 같은 부족 사람들을 기꺼이 학살해버린다. 인민해방군도 이하동문이다. 숱한 인민(정식 국가명: 스리랑카 민주사회주의 공화국)들은 밤에 자다가 누군지도 모를 사람들에게 끌려가 손가락마다 못이 박히고 관절이 부러지는 고문 끝에 살해당하고, 시신은 세계에서 세 번째로 심한 오염으로 악명높은 베이라 호수에 풍덩 빠뜨려버린다. 가히 1970년대 칠레와 동급이다. 같은 시기 우리나라는 얘네들하고 비교하면 유치원 학생 수준이었고.


  1955년, 이런 나라에 말린다 앨버트 카발라나, 줄여서 말리 알메이다라는 사내 아이가 태어난다. 고요하게. 영어로 하면 Still Born. 나오긴 했지만 울지도 않고 심장이 뛰지도 않는 사산아, 의료진은 급하게 인큐베이터로 신생아를 옮겨 호흡과 심장박동을 되살렸고, 35년 후에 아이는 그때 다시 태어나지 않는 것이 더 좋았을 거라고 땅을 치게 된다. 1955년에 인큐베이터 구경을 했으니 말리가 부잣집 아들인 건 맞다. 머리가 유난히 좋아서 체스는 2주만에, 컵스카우트는 한 달만에, 럭비는 3분만에 마스터해 버리고 이내 학교를 혐오하는 증상이 생긴다. 이후 다니던 대학에서 석사과정을 중단해 여러 직업을 전전하지만 그것도 다 때려치운 한량. 엄마와 이혼하고 애인과 함께 미국으로 날아가 딸 둘을 낳고 사는 아버지가 말리에게 카메라를 선물해 취미를 붙였고, 신기하게도 스리랑카 현대사의 극적인 장면을 함께 하는 운명을 지녔는지 위에서 이야기한 학살과 그늘 속에서 이루어지는 검은 거래 같은 것을 카메라에 담아 전세계 언론사, 정부 등에 좋은 가격으로 팔아, 호텔 레오에서 도박을 하고, 비싼 술을 마시고, 젊고 예쁜 남자를 사서 즐기고, 해시시를 하느라고 다 탕진해버린다. 그래도 부잣집 아들인 걸 뭐. 그리하여 직업이 사진작가, 도박꾼, 걸레.

  말리가 정신을 차려보니 아이고, 이런. 몸이 죽어 영혼이 이승과 저승의 중간지대에 가 있는 거다. 그러니까 우리의 주인공 말리는 사람이 아니라 아직 귀신도 되지 못한 중음신(이라고 치자). 여기서 일곱 개의 달, 달은 나오고 지는 것이니 일주일과 같은 의미다. 일곱 달, 7개월이 아니고, 7일 안에 과거의 트라우마, 지은 죄, 숨긴 죄책감 등이 새겨진(다고 스리랑카에서 믿는) 귀와 귓불 조사를 마친 다음 빛의 방으로 가는 중음신은 윤회를 할 것이고, 아닌 것들은 구천을 떠도는 귀신이 될 터인데, 귀신이 되면 또 큰 악마 마하칼리(비슈누의 화신)의 노예로 떨어지기 십상이다. 그러니까 이 소설을 쉽게 우리말 한 마디로 정의하자면,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다.

  말리는 다른 귀신들, 귀신들한테도 갓 죽은 영혼을 위한 선한 자원봉사 귀신이 있는데, 이들의 조언에 의하면 죽은 형태를 보아하니 누가 높은 곳에서 던져 죽임을 당한 거 같다나? 근데 죽을 당시의 상황이 전혀 기억나지 않는 거다. 책의 결말 부분에 가면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인물에 의하여 죽는 걸 알게 되지만, 물론 눈 밝은 사람은 중간에 눈치를 챌 수도 있지만, 말리 역시 동시대의 많은 실종자들처럼 모처에서 죽은 다음에 불법 죽음을 당한 시체를 전문적으로 처리해주는 청소부들, ‘발랄’과 ‘곧뚜’에 의하여 깊은 호주머니에 벽돌을 잔뜩 집어넣은 상태로 베이라 호수에 수장된 상태다. 1989년 12월 4일 화요일 새벽 네 시에.

  말리에게 몇 장의 중요한 사진이 있다. ① 83년 야만인들이 타밀족의 집에 불을 지르고 주민을 학살하는 동안 장면을 지켜보며 방관하는 정부 각료, ② 실종된 언론인과 사라진 운동가들이 재갈을 문 채 묶여 학살을 기다리는 모습, ③ 구금상태에서 사망한 사진, ④ 정부군 소령과 타밀 반군 대령, 영국인 무기상이 킹코코넛을 나누어 마시며 불법 무기 거래를 위해 한 자리에 앉아 있는, 해상도가 낮지만 충분히 알아볼 수 있는 스냅, ⑤ 스타배우 위자야를 죽인 사람들과 ⑥ 테러로 추락한 위팔리의 비행기 잔해를 찍은 것들로, 집의 운전수와 요리사가 쓰는 침대 밑에 보관하고 있다. 이 사진이 전시되면 참상이 정부에 의하여 조직적으로 자행된 것이며 사실은 정부군과 적군이 비밀리에 거래를 했다는 것까지 밝혀져, 네이팜탄이 쏟아지는 전장에서 달리는 나체의 소녀 사진이 베트남 전쟁을 종식시키는 불씨가 된 것처럼, 스리랑카의 폭력정권이 무너질 수도 있을 만한 자료였다. 당연히 말리는 자신이 사진 때문에, 그리고 잔망스럽게 그걸 떠들고 다니는 바람에 권력의 하수인에 의하여 죽었을 거라는 생각에 휩싸여 있다. 게다가 걱정이 한 가득이다. 내각의 유일한 타밀족 출신인 스탠리 다르멘드란 장관의 아들과 조카딸이자, 말리의 애인 딜런 다르멘드란과 말리의 절친 재클린 와이라와나단이 자신 때문에 위험에 처해 있기 때문에.

  이미 죽었으면 재빨리 과거를 잊고, 세상사도 잊고 저승으로 떠나 처분을 기다려야 하거늘, 오지랖 넓은 말리는 딜런과 재클린에게 자신이 가지고 있던 사진이 어디에 있는지 알려주려 애가 타고, 사진이 강제로 압수당하자, 이번엔 원판 필름을 어디에 숨겨놓았으며 어떻게 조치하라고 말해주기 위해 귀신 생명을 걸고, 말이 좀 이상하긴 하지만 구태여 이야기를 하자면 그렇다는 건데, 귀신의 목숨을 걸고 한 판 도박을 벌인다.


  스리랑카의 기구한 현대사에 관심을 갖게 되는 계기가 될 수 있고, 런던의 비평가들도 이런 점을 높이 사서 <말리의 일곱개의 달>에 부커상을 주지 않았나 싶다. 스리랑카에서 있었던 사건을 중심으로 작품을 구성했으면 더 좋았을 텐데, 남아시아 독자를 위하여 구상을 했기 때문에 그런지 웬 우라질 사후 세계 귀신 이야기가 이리 창궐을 하는지 나중엔 징글징글했다. 나는 유물론자란 말이다. 예를 들어 이사벨 아옌데가 이 작품을 읽고 다시 써보라는 염라대왕의 명령을 받았다면 어땠을까? 적당하게 소위 환상적 리얼리즘을 조금 가미하고. 귀신 이야기도 어쩌면 나올 지 모르지만 그게 산들바람이나 오렌지 향기를 타고 콜롬보 빈 하늘을 배회하기야 하겠어? 그래도 인정할 건 인정하겠다. 이야기는 겁나게 재밌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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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부만두 2023-11-07 06:5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읽고 싶은 책인데 소개글을 읽으니 맘이 더 급해지네요. 루슈디가 떠오르기도 하고요.

Falstaff 2023-11-07 06:59   좋아요 1 | URL
근데요, 독자서평에 좋지 않은 평이 많아서 놀랐습니다.
제가 읽기엔 괜찮았습니다. 루슈디하고 (영광스럽게!) 비교하려면 신화성이 아무래도 부족하지않나... 싶습니다. 연륜 탓일 수 있겠습지요.

반유행열반인 2023-11-07 10:55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팔백작님의 질투가 좀 느껴지는 ㅋㅋㅋ엄친아 주제에 작가까지!!제삼세계 엘리트들은 이점도 있겠습니다. 자기는 그 난리통 안 휘말리면서도 옆에서 어떡해…관찰만 하다가 있는 일 주워들은 일만 써도 다른 나라 애들이 우와 입틀막 님좀짱 이러고 재밌게 봐주니까요…

Falstaff 2023-11-07 17:07   좋아요 1 | URL
ㅎㅎㅎ 제가 시방 겁나 취해서 말입죠 열반님 글씨가 막 날아 다닙니다. ㅋㅋㅋㅋ
이거 틀림없이 의존증 맞을 거예요. 그리하여 답글은 내일... 의존증이건 지랄이건 하여튼 지금은 천국이고만요. ㅋㅋㅋㅋㅋ

반유행열반인 2023-11-07 19:14   좋아요 1 | URL
아니 비인격 물질 한 가지가지고 원하면 언제든 숑 갈 수 있으면 그거 축복 아닙니까(천국도 숑 일찍 가는 거는 당장 알 바 아니고…) 책이랑 술이랑 하나만 골라! 이러면 팔백작님 뭘 놓으시겠어요? 엄마도 좋고 아빠도 좋아 이딴 거 말고요 ㅋㅋㅋ

Falstaff 2023-11-08 04:39   좋아요 2 | URL
의존증이라니까요. 둘 놓고 고르라면 당연히 술이지요.
근데 숑.... 차라리 약을 하면 더 빠르잖아요. 술, 안 마셔야 합니다. 줄이려 애쓰고 있는데도 그게 쉽지 않습니다. 인생에 술이 없었으면 좀 더 행복했을 거 같습니다.
정말 다행스럽게 주변 사람들 하는 말이, 술 마신 후에 사람이 더 귀여워진다고 하더라고요. 술 주사가 없고 곧바로 자는 편입니다.
알코올 의존자들도 술 마시면 심신이 괴로운 건 마찬가지랍니다. 지금도 속 쓰리고, 몸이 땡땡 붓고, 머리 흔들리고.... 이란 회교민주주의공화국으로 이민이라도 가야겠습니다. 술 마시면 짱돌 던져 죽여버리는 나라로요.

3세계 부르주아 아니면 또 누가 그 나라 난리치는 걸 세상에 알리겠습니까. 민중들은 워낙 교육이 안 되어 있는 걸요. 엘리트란 엘리트는 다 도망간 나라도 있잖아요. 콜럼비아. 그저 그런 시대를 안 산 것도 행운입니다.

coolcat329 2023-11-08 08:3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제목은 알고있었는데 스리랑카의 소설인지는 몰랐어요.
사후 귀신세계 얘기에 읽기 싫어졌는데 또 겁나 재밌다하시니 솔깃하기도 하고 스리랑카 문학인점도 끌리네요.
폴스타프님 덕분에 스리랑카 역사 조금이나마 알게되었습니다.
그 조그마한 섬나라에세 저런 엄청난 폭력이 일어났다니 아이구 정말 놀랐습니다.

Falstaff 2023-11-08 17:26   좋아요 1 | URL
재미있는 책입니다. 여태 몰랐던 스리랑카 현대사도 조금 알게 돼 신선했습니다. 권할 만한 책이지만 오직 하나, 제 스타일이 아니라는 것입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