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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의 길 ㅣ 휴머니스트 세계문학 19
그라치아 델레다 지음, 이현경 옮김 / 휴머니스트 / 2023년 3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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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휴머니스트의 세계문학 시리즈는 자주 낯선 작가를 소개하여 독자에게 다양한 읽을 거리를 선사해주는 미덕이 있다. <악의 길>을 쓴 그라치아 델레다Grazia Deledda도 처음 들어본 이탈리아 작가인데, 이탈리아 반도라기보다 반도 왼쪽에 떠 있는 두 개의 섬 가운데 아래쪽에 있는 샤르데냐 섬 특유의 문화와 민속을 작품 속에서 그대로 유지한다. 물론 제국 로마의 지배를 받았지만 순종 로마인들이 보기에 야만족들이 옹기종기 모여 살던 곳이라 세월이 많이 흘러도 본토와 많이 다른 독특한 문화와 단어 등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저자 그라치아 델레다는 1871년생이다. 조선이 제물포조약을 맺고 나라를 연 것이 1876년, 그 이전에 태어났고, 작품의 수도 만만치 않으며, 게다가 쉰다섯 살 때인 1926년에 노벨 문학상까지 받았는데, 아무리 이탈리아가 통일도 못하고 유럽에서 빌빌거렸다 해도, 이이의 이름이 아직도 귀에 설다면 이거 뭔 문제가 있는 거 아냐? 하여간 <악의 길>을 읽어보니까 여태 유럽의 문학작품에서 경험해보지 못한 이곳 샤르데냐 섬 문화와 사람들의 행동양식 같은 것이 색다르고 흥미롭다. 어떻게 보면 시칠리아나 나폴리 사람들하고 비슷한 면도 있는 거 같다. 19세기 여성 작가가 유럽에서도 유독 강한 벤데타 문화를 작품에 자세히 서술하기는 쉽지 않았겠지만 그런 것도 얼핏 체감할 수도 있다. 하도 오래 이 민족한테 얻어 맞고, 저 민족한테 코피 터진 세월을 보낸 지라 재까닥 적응하는 순발력, 반대로 주민들 특유의 텃세 같은 것도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다. 1871년생이 샤르데냐 섬에서 가정교사한테 이탈리아어, 프랑스어, 라틴어를 배웠다면 소위 은수저 계급이며 어린 시절부터 집안에 하인, 하녀를 두고 살았다고 봐도 무방하다. 이 책에서 이야기하는 가장 큰 갈등이 바로 주인과 하인 간의 계급 차이에서 벌어지니 하는 말이다.
때와 장소는 1896년 이탈리아 샤르데냐 섬의 작은 누오로 시. 작가 그라치아 델레다 역시 낳고 자란 곳이다. 세상은 소위 벨에포크 시대의 전성기를 누리고 있었지만 벨에포크의 은총의 손길은 저 변두리 샤르데냐 섬에서도 변두리 누오로 시까지는 미치지 못했고, 간신히 은총이 왔다 치더라도 일반 농민들한테 손길은커녕 고랑내 나는 입김이라도 한 번 훅 불어줄 수 없었을 터. 인민들은 그저 오늘도 어제처럼 죽느니 살거나 목구멍에 친 거미줄 걷어내기에도 허덕였던 건 꼭 눈으로 안 봐도 삼천리였다.
동네에 남의집살이 하는 피에트로 베누라는 청년이 있었는데, 예전에는 동양이나 서양이나 가난한 것들이 잘 생기면 여자나 남자나 팔자가 좋지 않게 풀리는 것이 일반 상식이었으니, 바로 이 피에트로 총각이 큰 키에 호리호리한 몸매에다 아름다운 얼굴을 지녔다. 청년은 어려서 조실부모하고 늙고 가난한 숙모 두 분이 지원을 해주어 그럭저럭 자라 이제 남의집살이를 하면서 그래도 언젠가는 집을 수리하고 마차와 황소 두 마리, 개 한 마리를 가질 수 있을 것이며 그때 비로소 결혼을 해 가정을 꾸리겠다는 바람이 있었다. 그래 지금 지내는 집보다 더 좋은 대우를 해준다고 해서 니콜라 노이나 씨 집으로 요새 말로 이직을 하러 가는 것으로 작품은 시작한다. 그가 면접을 보러 간다는 건 동네 사람들이 이미 다 알고 있었다. 니콜라 씨 가족과 먼 쇠락한 친척 사비나가 잡화점 여인에게 한 이야기가 퍼진 것이었다. 사비나 역시 호리호리한 몸매의 사랑스러운 금발 아가씨로 피에트로와 서로 고백은 하지 않았지만 은근히 눈이 맞은 상태였다. 피에트로가 청혼만 하면 ‘곧바로’ 응하지는 않겠지만 ‘거의 곧바로’ 승낙을 할 정도로. 이런 감정은 시간이 갈수록 두 사람 사이에 점점 더 고양되는 것이 일반상식이다.
니콜라 노이나 선생으로 말할 것 같으면, 젊어서 누오로 시에서 제일 잘 생겼다고 해도 시비 걸 사람이 거의 없었을 정도의 미남이었다. 그러나 누오로 지역 토박이가 아니라 램프용 기름 행상을 하는 떠돌이 출신으로 키 작고 좀 덜 생긴 부잣집 루이사 아가씨를 꼬드겨 결혼에 성공해 하루 아침에 시에서 일류 명사가 된 인물이다. 그도 그럴 것이 떠돌이 행상이 이 지역에서 최상급인 “프린치팔레” 계급의 아가씨와 결혼을 했으니 말 다 한 거지. 실제로 작가 델레다는 작 초반에 노이나 집안을 일컬어 “이 근방의 왕”이라고 했을 정도다. 물론 뒤로 가면 갈수록 앞에서 했던 건 좋게 말하면 과장이란 것이 들통나기는 한다. 이런 니콜라 씨가 하루는 포도주 사러 더 큰 도시 올리에나에 갔다가 잔뜩 취해 돌아오면서 말이 푸짐하게 싸 놓은 개똥을 밟았는지 푸드득 거리는 바람에 말 잔등에서 떨어져 다리가 똑, 부러지는 부상을 입었다. 따로 하인을 두지 않고 직접 일을 하던 니콜라 씨가 더는 일을 하지 못해 하인을 한 명 고용하려는데 피에트로가 지원을 한 것. 물론 합격이다. 미남은 미남을 알아보잖여? 그건 다음으로 하고, 이 집에 마리아라고 하는 젊고 예쁜 딸이 있다. 피에트로하고 딱 어울리는 나이고 아빠 닮아서 통통하니 상당한 미인이다. 엄마는 자신이 생기기만 멀쩡하지 글도 모르고 재산도 없는 남자와 결혼한 것을 후회해, 마리아는 부자 또는 대학 졸업생, 아니면 대학을 졸업한 부자와 결혼시키기로 작정을 해버렸다. 그리고 정말로 마리아는 피에트로를 단지 하인 그 자체로만 보고, 일을 시키고, 잔소리를 늘어놓고 하는 거다.
초반에 니콜라 씨 집으로 오는 도중에 피에트로가 이 집 따님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당연히 작품의 복선으로 둔 것이긴 하지만 피에트로가 하인 일을 시작하자마자 천성이 구두쇠이기도 한 마리아는 피에트로가 일 하는 곳곳마다 따라다니며 그가 작물을 가외로 챙기는지, 포도를 따서 먹어치우는지 끊임없이 감시를 하는 바람에 정나미가 똑 떨어져버리고, 갈수록 허해지는 마음을 마리아의 가난한 친척이자 역시 남의집살이를 하고 있는 예쁘고 착한 사비나 생각으로 채우고 있었다. 사비나는 마리아네 농원에서 배를 수확할 때 와서 일을 도와준 적이 있어서, 바쿠스의 후예들한테는 큰 축제를 겸하기도 했던 포도 수확에도 사비나가 올 줄 알았는데, 일이 바빠 올 수 없어 피에트로는 심통이 잔뜩 난 상태로 포도를 따야 했다. 그대로 인용하면, “슬프고 화가 났다.” 그리하여 일이 다 끝난 다음에 쓸데없이 “로사, 당신은 샤르데냐의 순례자……” 노래를 하며 길을 가고 있었는데, 진짜로 동네 아가씨 가운데 “가시돋친 로사”라는 동네에서 제일 심술궂고 질투 많고, 성질마저 드러운 아가씨가 나타나 피에트로의 개 옆구리에다 돌을 던지는 등 패악질을 하다가, 소설을 뒤흔들어버리는 게임 체인저 역할을 맡는다.
“사비나는 당신을 조롱하고 있어요. 당신만큼 가난하지 않고 거칠지도 않은 청년과 사랑에 빠졌으니까요……. 당신에게 가서 이 말을 전하라고 일러줬어요. 당신을 괴롭히고 화나게 하라고…….”
“누가? 사비나가?”
“아니요, 마리아가요. 피에트로 베누, 마리아는 사비나를 질투해요.”
“무엇 때문에?”
“당신 때문이죠, 멍청이!”
피에트로는 확 돌아버린다. 어여쁘고 마음씨 고운 사비나는 이 말 한 마디로 마음 속에서 거의 완벽하게 소거되고 이제 그는 주인 아가씨, 아름답고 풍만한 마리아와의 사랑을 꿈꾸며 키스 한 번 해보았으면, 몸을 한 번 만져봤으면, 하고 이루어질 리가 없는 허공을 밟기 시작한다. 마리아 역시 피에트로를 관찰해보니 잘 생기고, 정직하고, 튼튼하고, 일 잘하고, 돈 없는 거 빼고 어디 한 군데 빠지는 데가 없어 점점 호감이 쌓여가기 시작했던 차, 이들은 포도밟기와 압착기 작업부터 급격히 가까워지기 시작한다. 급기야 피에트로는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마리아의 허리에 손을 두른 채 키스하는 데 성공하고, 이때부터 일사천리 둘은 가망 없는 사랑을 시작하게 되니, 저 가시돋친 로사, 하긴 로사, 가시 없는 장미를 어디다 쓰겠는가만, 성격 좋지 않아 청년들한테 눈길 받는 법이 없었던 맹랑한 아가씨의 심통난 한 마디 때문에 두 청춘과 이어진 몇 명의 신세가 골로 가버리고 만다.
말은 언제라도 흉기가 될 수 있다. 삼가고 또 삼가야겠지만 그렇다고 하지 않을 수도 없는 양날의 검. 아무쪼록 내가 한 말 한 마디, 내가 쓴 글 한 조각에 마음 상하신 분들은 사과를 받아주시고 용서해주시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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