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발자취 창비세계문학 89
알레호 카르펜티에르 지음, 황수현 옮김 / 창비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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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을 읽기 전에 알레호 까르뻰띠에르의 가계를 알고 넘어가는 것이 작품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듯하다. 카르펜티에르는 1904년에 스위스 로잔에서, 프랑스 출신 건축가인 아버지와 러시아 출신 언어 교사이자 음악가인 어머니 사이에서 출생해, 곧바로 쿠바로 이민을 떠났다. 쿠바의 아바나에서 청소년 시절까지 보내는데, 그리하여 카르펜티에르는 에스파냐 어를 모국어로 사용할 수 있었으며, 능숙하게는 아니지만 새롭게 배우는 사람들보다는 훨씬 유리한 상태로 프랑스어와 가까이 지낼 수 있었으리라 짐작한다. 한편으로 제도 교육과 별개로 가정 내에서 아버지로부터 문학 수업을 받고, 어머니한테 음악을 배웠는데 일곱 살에 쇼팽의 전주곡을 연주할 정도의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건축가 아버지와 음악가 어머니가 이혼을 하고, 카르펜티에르는 마차도 독재정권에 대항하여 반정부 활동을 하다 구속 수감되지만 1928년에 프랑스의 초현실주의자의 도움으로 이후 11년 동안 파리에서 체류한다. 스물네 살부터 서른다섯 살까지 파리에서 체류하며 앙드레 브르통 등과 교류했다 하니, 프랑스어도 에스파냐어 만큼이나 구사했을 것이다. 쿠바로 돌아온 카르펜티에르는 37세에 결혼을 하고, 2년 기약으로 베네수엘라의 카라카스로 떠났으나 그곳에서 대자연의 위용에 마음을 뺏겨 14년을 거주하면서 문학동네에서 번역 출간한 <이 세상의 왕국>과 이 책 <잃어버린 발자취>를 쓴다. 카스트로가 쿠바 혁명을 성공하고 귀국, 이후 눈부신 활동을 하다 1980년 파리에서 숟가락 놓는데, 책을 이해하는 데는 도움을 주지 않으니 이후 행적은 생략한다.

  여기까지 카르펜티에르의 바이오그래피 가운데 <잃어버린 발자취>와 관계가 있는 것을 고르라면, ① 에스파냐어∙프랑스어∙영어, 그리고 독일어를 자유자재로 또는 약간의 어려움은 있지만 의사소통 정도는 충분히 가능한 수준으로 구사하는 것, ② 주인공 화자 ‘나’의 직업이 클래식 음악 작곡가로 현재 칸타타 <사슬에서 풀린 프로메테우스>를 작곡하다 중단한 채 영화와 라디오 음악으로 밥벌이를 하고 있는 것, ③ 아내 루스와는 영어로, 애인 무슈와는 프랑스어로, 새로운 현지인 애인 로사리오하고는 에스파냐어로 소통하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 ④ 세상의 최대 도시 뉴욕에 살다가 콜롬비아 동부(정도로 보이는) 지역으로 원시 악기를 발굴하기 위해 떠난 여행 중 진정한 사랑 로사리오와 만나고 아델란따도가 만든 원시공동체 산따 모니까 데 로스 베나도스를 이상향으로 생각하게 되는 점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가장 큰 허들로 등장한 것은, 나도 한 평생 클래식 음악을 들으며 살았다고 자부했으나, 여전히 제대로 악보를 읽을 줄도 모르고, 체계적으로 음악을 향유하는 딜레탕트 수준에도 미치지 못하는 아마추어 입장에서, 곳곳에 숨어있는 (극)음악적 비교, 굳이 발견하지 못해도 그냥 넘어갈 수는 있으나, 알아채고 해당 단어/구절이 왜 나왔는지 알면 몇 배나 즐길 수 있을 텐데 그러지 못했다는 점이었다. 주인공이 작곡가이고 여전히 미완성 작품 <사슬에서 풀린 프로메테우스>를 완성하려 하니 음악 관련 서사는 결코 피할 수 없기 때문이다.


  고집 센 출판사 창비가 이 책을 출간하고 벌써 21개월이 지났음에도 여태까지 읽으려 생각하지 않은 것은, 카르펜티에르의 <이 세상의 왕국>을 안 읽은 것과 같은 이유인데, 라틴 아메리카 밀림과 늪지대 자연의 웅장함과 위대성, 야만 속의 인간성을 강조하는 작품일 것이라는 편견 때문이었다. 웬만하면 이런 선입견을 갖지 않을 터인데, 이 책은 특히, 표지 그림이 H.G.웰스의 <모로 박사의 섬>에서도 표지로 썼던 앙리 루소의 그림, <뱀을 부리는 주술사>인 데다가 <모로 박사…>의 밀림 속 엽기적 실험실이 저절로 떠올랐던 때문은 아닌가 싶다. 영화 <닥터 모로의 DNA>에 나온 그로테스크한 노인 말론 브란도가 불쑥 나타날 거 같은 그림 말이지.

  선입견 또는 예상은 틀렸다. 만일 <모로 박사…>류나 에벌린 워의 <한 줌의 먼지>같은 대책 없는 아마존 탐험, 호세 에우스타시오 리베라의 <소용돌이> 처럼 대평원의 풍광, 장마리 드 로블레스가 쓴 <호랑이가 제 세상인 나라>에서 보는 감칠맛 나는 재미를 기대했다면, 조금은 비슷할 수 있겠으나, 꽝이다. 이 책은 그렇게 쉽지 않다. 만만하게 여기고 들어갔다가 나처럼 코피 터지기 십상이리라.

  먼저 문장이 길다. 만연체를 구사하는 작가들한테 공통점은 한 사물이나 현상 또는 기분을 묘사하는데 상당히 구체적이다. 게다가 가끔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현학적 지식을 동원하여 묘사하고자 하는 것을 조금이라도 더 구체적으로 알려주려고 한다. 문제는 독자가 작가 수준이 아니라는 데 있을 뿐. 알레호 카르펜티에르는 묘사를 위하여 그리스 신화, 뒤로 가면 다이아몬드 채굴군을 그리스인으로 설정하여 적극적으로 그리스 신화를 인용하기에 이르기도 하고, 말한 바 있는 넘쳐 흐르는 음악 기호들과 음색, 오페라의 장면과 무대, 악기별 성격 같은 것을 난사한다. 그래도 내게는 다행이었던 것이 저 플라톤에서 시작하는 서양 철학의 인용이나 구사가 (거의) 없었다는 점이다. 이런 문장이 몇 개나 모여야 한 문단을 만들 수 있을까? 문단 하나가 다섯 페이지 정도 지속되는 건 다반사고, 대화를 따옴표에 묶은 다음에 줄 바꾸기도 하지 않고 같은 문단에 그대로 사용한다. 따라서 대화가 지속되는 일은 없다. 책을 선택하기 전에 인터넷 책방의 미리보기 기능을 사용하여 본문이 어떻게 생겼는지 미리 구경부터 하시고 견딜 수 있으면 구입하거나 빌려 읽으면 좋을 듯하다. 하지만 시간을 충분히 잡고 카르펜티에르의 아름다운 문장을 감상하는데 초점을 맞출 목적이면 머뭇거리지 않아도 좋다. 화려하고 현학적이고 탐미적인 문장과 이것들의 집합인 문단, 이것들이 다 아울러 작품이 독자를 몰입하게 만들 것이니.


  루스는 주인공 화자 ‘나’의 아내이며 연극배우다. 루스 앞에 이제 실험극을 막 마친 젊은 작가와 극단이 등장해 <남북전쟁>이란 비극의 초연을 할 것이니 좀 도와달라고 해서, 기껏해야 스무 날 정도면 끝나지 않겠나 하는 마음에 기꺼이 그러겠다고 허락을 했다. 그러나 웬걸.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공전의 히트를 쳐 무려 4년 7개월에 걸친 1,500회 공연을 하게 됐고, 얼떨결에 맺은 무한 연장공연 계약 때문에 루스의 넓고 넓은 연극 세계를 향해 열린 전망이 오히려 콱, 닫혀버리게 됐다. 아무리 유명 배우라 하더라도 서른 살부터 5년간 매일, 주말과 주일에는 심지어 하루 두 차례에 걸쳐 같은 대사를 해야 하는 고역이 되고 말았다. 이제 루스에게 <남북전쟁>은 연극을 통한 도피의 문이긴커녕 악마의 섬이 되고 만 거였다. 국민연극이 된 <남북전쟁>은 이번 공연이 끝나면 그길로 건너편 서부 해안으로 순회공연에 나서 ‘나’는 11개월 만에 집에서 혼자 지내야 한다. 이 생각을 하니 엄청난 고독감이 엄습한다고 엄살을 피운 후에, 오늘, 6월 4일 회사에서 3주일간 휴가를 내고 내 곁에 두고 싶은 오직 한 사람, 아내 루스의 행적을 쫓고 있다.

  그러다 길거리에서 대학에 속한 악기박물관에서 큐레이터로 있는 사람을 2년만에 우연히 만나 그의 사무실에 함께 가고, 대륙의 가장 원시적인 원주민들이 사냥하기 전에 성공을 기원하며 진흙으로 구워 만든 악기로 새의 노래를 흉내내는 곡조를 녹음한 레코드를 듣는다. 평소 ‘나’가 주장해온 음악의 기원은, “기본 리듬은 짐승의 걸음걸이나 새들의 지저귐을 모방하고자 하는 열망”이라고 주장해온 이른바 “모방→마법→리듬”의 독특한 과정이었다. 큐레이터는 이를 주장할 수 있는 방법 가운데 하나로 원시 악기를 발견하는 작업을 거론하면서 ‘나’의 동의 하에 즉각 대학 총장을 만나 ‘나’를 세계 유일의 아메리카 원주민 악기 전문가이자 학교에 아직은 부족한 사례를 찾아내기에 적합한 수집가로 소개하고, 성질 급한 총장이 그 자리에서 내일 당장 라틴 아메리카 오지로 떠나 아직 발견하지 못한 원시 악기를 몇 점 구해오라고 부탁한다. 넉넉한 출장비와 더불어. ‘나’는 무슨 원시악기에 대한 강력한 유혹이 있는 건 아니지만 마침 3주간 휴가를 받아 그 기간 동안 끝낼 수 있어 마땅한 거절의 구실을 찾지 못해 수락한다. 2년 전에 루스가 공연 때문에 집을 비운 여러 날 중 어떤 날에 처음 만나 돈독한 몸의 정을 쌓은 여자친구 무슈가, 나도 같이 가고 싶어, 하는 바람에 이제 무슈 역시 탐험길에 오르게 되고.

  성질 급한 총장이 그랬다고 당장 내일 출발할 수는 없어서, 6월 7일애 무슈와 함께 비행기를 타고 숲속의 도시에 도착한다. 8일엔 오페라하우스에서 도니제티의 <람메르무어의 루치아>를 관람하던 중 무슈가 까탈을 부려 도중에 그냥 나온다. 호텔에 들어 무슈가 잠든 다음에 악기점에 들러 원주민 악기를 찾아보려 서성이던 중에 갑자기 총소리가 나더니, 에그머니, 이 나라에 혁명이 일어난 거였다. 20세기 중반의 시대적 측면에서 라틴 아메리카 진보, 보수의 대립은 종교전쟁과 같은 수준이어서 아무도 말리지 못하는 상황이라 예정에 없던 곳에서 며칠을 더 보낸 후, 6월 10일 협괘열차로 밀림 탐험을 위한 베이스캠프라고 할 수 있는 마음에 드는 마을 로스 알또스에 도착한다. 2부 까지의 내용이다.

  3부에는 서인도 제도의 척추부분, 분화구의 가장자리, 오지 중의 오지이지만 새롭게 개척을 하고 교회를 짓고 있는 밀림 속 원주민 마을과 비교하면 엄청난 크기의 개화된 마을 산따 모니까 데 로스 베나도스에 도착한다. 가는 도중 원주민 여인 로사리오를 구조하고 (또는 원주민 입장에선 그냥 만나고) 못된 짓만 하던 무슈가 말라리아에 걸려 끙끙 앓는 사이에 서로 사랑해 만리장성을 쌓게 되고, 결국 무슈가 도중에서 베이스캠프로 떠나자 ‘나’와 로사리오, 마을의 개척자 아델란따도, 고집장이 신부 뻬드로 그리스인 다이아몬드 사냥꾼 야네스 등과 함께 도착한 꿈의 마을, 산따 모니까 데 로스 베나도스. 며칠 후 휴가기간 3주가 벌써 지난다. ‘나’는 어처구니없이 이 오지에서 로사리오의 사랑에 힘입은 것인지 거의 포기한 칸타타 <사슬에서 풀린 프로메테우스>의 중요한 테마를 작곡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나’는 이제 도시에서의 모든 것을 포기하고 오지 마을에 정착하기로 마음먹는다. 하지만 <한 줌의 먼지>에서도 그랬듯이 현대인이 어디 마음대로 아마존 오지에 머물 수 있나? 하루는 하늘에 헬리콥터가 맴맴 돌더니 마을에 내려 그를 데리고 현대 도시로 데려간다. ‘나’는 문화 발견을 위해 용감하게 오지로 투신했다가 원주민에 의하여 포로로 잡혀 있는 신세로 알려져, 유명 신문사에서 구출해오는 사람에게 거금의 현상금을 걸었다는 것. 이렇게 3부와 4부를 지난다.

  4부는 다시 뉴욕으로 보이는 대도시. ‘나’는 ‘나’의 아이인지는 모르지만 하여튼 임신한 루즈와 이혼하고 얼른 아마존 오지로 가 로사리오와 평생 살고 싶다. 그러나 그게 쉽나. 하여튼 뉴욕에서의 장면인 5부.

  마지막 6부는 다시 아마존. 어떻게 되는 지는 당연히 안 알려줌.


  인상깊은 작품이다. 이 책에 별점을 준다면, 당연히 다섯 개 만점을 주어야 마땅하지만, 작품 때문이 아니라, 카르펜티에르의 현란하고 아름다운 문장을 충분히 즐기지 못한 독자, 내가 부족한 관계로 부득이 하나 뺄 수밖에 없다. 내 문학적 소양이, 아니, 아니다. 내 주제에 무슨 문학적 소양 운운. 그저 독자로서 내 소양이 조금만 더 높았더라면 기꺼이 별 다섯을 주었을 텐데, 나도 그 점이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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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lstaff 2023-10-13 05:59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다음 주 삽질:
화요일, 오에 겐자부로 <만년양식집>
목요일, 미시마 유키오 <금색>
금요일, 줄리언 반스 <사랑, 그리고>

그레이스 2023-10-13 09:25   좋아요 2 | URL
오에 겐자부로 기다리겠습니다~

Falstaff 2023-10-13 16:36   좋아요 1 | URL
읏.... 별점이 박하게 나갈 거 같은데요. ^^;;

yamoo 2023-10-13 09:1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듣보잡이면 창비...창비군요!

근데, 이 작품은 매우 지루하고 재미없을 듯합니다. 클래식 음악의 전문적 기술이라...ㅎㅎ 아무리 별5개라도 저는 패쑤해야 할듯한데...친절하게도 문학적 소양의 부족함으로 별 하나를 뺀다는 문장으로 인해 더욱 확신이 듭니다. 저는 읽으면 안된다는 사실을요!!ㅎㅎㅎ

Falstaff 2023-10-13 16:37   좋아요 0 | URL
듣보잡 아니여요. 지루하긴 합니다만 재미있습니다. 다만 다섯 페이지에 걸친 한 문단을 집중해 읽으려면 좀 피곤하더군요. 시간도 많이 걸립니다. ㅎㅎㅎ

yamoo 2023-10-13 17:10   좋아요 0 | URL
제겐 듣보잡이여요~~~^^;;

그레이스 2023-10-13 09:2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고집센 창비‘부터 ‘만들 것이니‘까지 문단때문에 읽고 싶어졌습니다.^^
그 만찬 즐겨보고 싶은데,,, 능력이 될지 모르겠네요^^

Falstaff 2023-10-13 16:39   좋아요 0 | URL
아이고 그레이스 님은 거뜬하실 겁니다. 한 번 도전해보시는 것도 좋을 듯합니다!

stella.K 2023-10-13 10:2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문학적 소양은 부족하지만 제목을 이리 쓰시니 왠지 읽고 싶다는 생각이 드네요. 제가 문장을 좀 중요하게 생각하는 편이라. ㅋ 친절한 조언 감사합니다.^^

Falstaff 2023-10-13 16:39   좋아요 1 | URL
문장이 중요한 분들은 당연히 한 판 붙어보셔야지요. ㅎㅎ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