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렌지만이 과일은 아니다 민음사 모던 클래식 10
재닛 윈터슨 지음, 김은정 옮김 / 민음사 / 2009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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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넷 윈터슨이라면 문학동네에서 찍은 <무게>를 읽고, 작품이 아니라 하도 널럴하게 편집을 한 출판사가 미워서 정나미 뚝, 신경도 쓰지 않았다. 근데 이번에 <무게>를 쓴 “재닛” 윈터슨의, 민음사가 이젠 종간/절판한 시리즈 모던 클래식 10번 <오렌지만이 과일은 아니다: 이하 “오렌지”로 씀>를 읽고 나서, 아 이 사람이 <무게>와 <예술과 거짓말>을 쓴 바로 그이구나, 하고 무릎을 쳤다. 심지어 <예술과 거짓말>은 독자들의 평이 좋긴 하지만 어째 혹, 하는 마음이 생기지 않아 여태 책방 보관함에만 몇 년째 묵히고 있다. 뭐든지 첫인상이 중요하다니까 그래.

  <오렌지>는 윈터슨의 데뷔작품으로 1985년 영국 문학계의 최우수 신인상 격인 휘트브레드 상을 받았다. 픽션이니까 반드시 작품과 같지는 않겠지만 작가가 작품에 실명 등장하는데 지넷 젤리다, 라는 이름이다. 윈터슨은 이이가 결혼해 시댁 성을 따른 것이겠거니 했으나, 열여섯 살 때, 위키피디아에 의하면 자신이 레즈비언인 것을 커밍 아웃하여, 책의 앞날개에 의하면 한 소녀를 사랑하게 된 것을 양부모에게 들키는 바람에 스스로 집을 나왔거나 쫓겨났다. 둘 다 그럴듯하다. 근데 왜 ‘양부모’냐고?

  지넷 윈터슨은 1959년 8월 맨체스터생이다. 낳자마자 버려져 보호소에 있다가 5개월 만인 1960년 1월에 독실한 성령강림교회 신자인 콘스탄스와 존 윌리엄 윈터슨 부부에게 입양되어 위에서 말했듯 열여섯 살까지 자란다. 그러니 책 속에서 ‘젤리다’라는 이름으로 등장하는 것은 픽션으로 보는 것이 마땅하겠다. 내가 지금 말은 ‘독실하다’ 라고 하지만, 책을 읽어보면 전형적인 교조적 목사에 의하여 세뇌당한 신자, 개신교니까 성도聖徒라고 해야 하나? 하여간 그런 부류다. 설마 성령강림회라는 교파가 그리 하겠는가? 하필이면 해당 교파에 속한 몇 목사들이 1960년대와 70년대 임에도 불구하고 지옥의 고통과 악마와 사탄에 의한 인격 지배, 마법사와 마녀 등등 19세기도 아니고 18세기에도 야만스럽다고 여겼을 무지막지하게 덜 떨어진 미신적 숭배의식을 지넷의 (특히) 어머니에게 주입시켰으며, 이에 몰두한 양어머니가 지넷에게도 애초에 <제인 에어>의 제인처럼 선교학교를 졸업한 후에 여성 선교사가 되는 방향으로 강하게 드라이브를 걸었을 것이다.  실제로 작품 속에서 목사와 지넷의 양어머니는 지넷과 다른 소녀에게 근엄한 엑소시즘 의식을 행하기도 한다. 세상에 엑소시즘이 어딨니? 그리스도교를 빙자한 주술일 뿐이고, 우리는 이런 주술을 동종의식, 엑소시즘 치료를 동종요법이라 칭한다. 자세한 것은 제임스 조지 프레이저의 역작 <황금가지> 참조하시라.


  책은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의 순서대로 모두 8부로 되어 있다. 이런 차례를 가지게 된 것은 양부모 가운데 아버지는 레슬링을 TV로 보기 좋아했고, 어머니는 레슬링을 하기를 좋아했기 때문이다. 나이든 어머니가 정말 레슬링을 했겠는가? 성격이 세상의 모든 사람을 딱 두 가지로 구분해서 오직 친구 아니면 적으로 상대를 했다는 말이지. 친구는 하느님과 키우는 강아지, 마지 이모 그리고 <제인 에어>를 쓴 샬롯 브론테, 민달팽이 퇴치용 알약, 그리고 주인공이자 화자 ‘나’이며, 쳐부셔야 할 적은 다양한 모습을 한 사탄, 옆집 인간들, 여러가지 형태의 섹스와 민달팽이다. 민달팽이? 그냥 생긴 게 징그러워서. 하여간 어머니는 적들이 판치는 세상을 상대로 벌이는 태그매치에 끌어들이기 위해 나를 입양해 그리스도의 딸로 키우는 거 같다. 어머니의 기독교관은 굳이 비교하지 않겠지만 철저하게 구약성서적이다. 즉, 온화한 부활절의 양sheep을 찾는 대신 예언자들과 함께 최전방으로 참전하여, 신의 저주와 파괴가 구체화되지 않으면 울화가 치밀어 버글버글 거품을 물기 일보직전까지 갔다. 이런 어머니가 화자 ‘나’에 관한 꿈이 있었으니, 아이를 얻고, 훈련하고, 단련한 뒤에 신에게 바치는 거였다. 전도하는 아이, 주님의 종. 그리하여 구약성서적이라니까 야훼의 은총을 받아 날을 잡아 별을 따라갔고, 별은 고아원 위에 멈춰 섰고, 구유에 누인 머리숱이 너무도 짙은 아이를 발견하여 집에 데려와, “이 세상은 온통 죄악으로 가득하단다, 네가 세상을 바꿀 수 있단다.”라고 반복에 반복을 거듭하며 뇌 속에 거듭, 거듭 새겨 자신이 원하는 아이를 만들었다니까, 어뗘? 하느님이 세상을 만든 ‘창세기’와 비슷해?

  어머니가 적들의 세상으로 진입하는 관문인 학교에 ‘나’를 보내고 싶지 않은 것은 당연한 일. 그러나 정부당국은 될 수 있는 대로 취학을 뒤로 미루는 어머니에게 드디어 최고장 비슷한 서신을 보냈다. 이제 지넷을 입학시키지 않으면 재판을 받아야 할 처지에 놓은 어머니는 눈물을 머금고 ‘나’를 학교에 입학시킬 수밖에 없게 됐고, ‘나’는 드디어 세상이 열려 본격적으로 집과 교회의 밖으로 나가게 된다. 그리하여 이 부part의 제목이 출애굽기. 구약성서에는 기記 마다 거의 빠짐없이 다 쳐죽이는 장면이 활발하게 나오지만 출애굽기의 모세만큼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애굽인들의 씨알까지 싸잡아 죽이는 일도 거의 없다. 그러니 모세도 아니고 하다못해 아론도 아닌 일개 어린 아이 ‘나’가 세상으로 나가는 일이 쉬울 수가 없을 터. 그래도 ‘나’를 도와줄 친구가 한 명 생긴다. 엘시 노리스라는 이름의 여자. 1차 세계대전에서 구급차를 운전하기도 했던, 이가 모두 빠져 호물호물한 잇몸으로 음식물을 대강 오물거리다가 꿀떡 삼켜버리고 마는 엘시는 시인들에 관한 이야기를 좋아하여, 살면서 우여곡절을 많이 겪은 윌리엄 블레이크를 들먹이면서, 세상은 괴짜들에게 아무도 귀를 기울여주지 않는 법이라고 충고한다. 왜냐하면, 어려서부터 끊임없이 교조적 기독교에 물들어 학교에서도 계속해 지옥과 악마를 언급하는 ‘나’가 시간이 조금 지나자 교사와 학생 모두가 ‘나’를 피하는 상황에까지 몰리게 되기 때문이다. 유대인들이 출애굽 시기에는 낮엔 구름 기둥이, 밤엔 불기둥이 이들을 인도해주었지만, ‘나’는 온통 혼란스럽게 만들 뿐인 견디기 어려운 안게 속을 헤매야 했다. 집과 학교가 서로 다른 가치와 윤리를 요구하니 말이지.

  엘시 노리스는 작품 속 교회에 속하는 인물 가운데 유일하게 ‘나’에게 애정을 갖고 진심을 다하는 인물이다. 저 뒤편으로 가면 작품이 끝나기 전에 생을 다 하고, 마지막 가는 길의 장례의식을 ‘나’가 바라다 주지만 그때는 이미 ‘나’의 동성연애가 발각 나, 사기꾼 급 교조주의 관점을 지닌 것처럼 보이는 핀치 목사가 시켜, 사탄에 의하여 저질러진 동성애를 고백하고, 반성하고, 회개하여 다시는 비슷한 생각도 행동도 하지 않겠다고 맹세하고도 또다시 비슷한 일을 저질러 집과 교회에서 추방당한 뒤라서 교회의 누구도 자신을 아는 체하지 않는다. 심지어 어머니까지. “저 애는 내 딸이 아니예요.”

  3부 레위기에서 사춘기를 맞기 시작한 ‘나’는 핀치 목사의 개소리를 듣게 된다.

  완전함이란 흠이 없는 것으로, 우리가 간절히 바라야 하는 것으로 타락하기 전 남자의 지위가 그것이며, 오직 천국에서만 실현할 수 있는 경지라고.

  ‘나’가 보기에 남자는 그저 남자. 아무 의미도 없이 무해하게 존재하는 생명체일 뿐이다. 이때부터 ‘나’에게 동성에의 특성이 발현됐다고 볼 수도 있겠으나, 본격적으로 자신 스스로가 알게 되는 것은 4부인 민수기 부터이다. 민수기에 들어와서 ‘나’는 두 가지 특별한 발견을 하게 된다. 어려서 부터 어머니가 잠들기 전에 읽어주었던 소설 <제인 에어>를 정식으로 꼼꼼하게 읽어본 것. 선교학교를 졸업하게 독실하게 믿음의 길로 접어든 제인이 성자 존이 아니라 로체스터에게 돌아간 것에 ‘나’는 심각한 충격을 받는다. 이 충격을 얼마 전에 카드 새것 한 벌을 찾기 위하여 집안 구석을 뒤지던 중에 우연히 서명이 된 자신의 입양서류를 발견했을 때와 같은 정도의 충격이었다. 입양서류가 ‘나’의 출생의 비밀에 관한 것이라면, 제인이 로체스터를 선택한 것은 ‘나’가 만일 선교학교를 졸업하더라도 교회가 아니라 사랑을 선택할 수도 있고, 어떻게 보면 그게 더 바람직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사람들과 시내에 나갔고, 생선가게를 들렀는데, 우연히 가게 뒤편에 가보니까 생선을 손질하는 여자가 있었다. 옆집 고양이처럼 사랑스러운 회색 눈동자를 가진 멜라나. 멜라나에게 호감을 느낀 ‘나’는 멜라나를 “전도”하기에 이르러 함께 교회에 가기도 하지만, 급속도로 가까워지고, 이들을 깊은 관심과 우려의 눈길로 바라보는 많은 사람들이 있다는 걸 둘 만 몰랐다.


  작품의 주인공 ‘나’와 같이 작가 지넷 윈터슨도 이리하여 16세 때 집에서 쫓겨나, 처음 일자리를 갖는 곳이 장례업체였다. 장례식에 참여한 문상객들을 대상으로 아이스크림을 팔다가 업체의 일을 도와주기 시작한 것이지만. 이후 간호 조무사로 정신병원에 정직원으로 취직하는 한편, 애클링톤 앤 로젠데일 대학을 거쳐 옥스포드에서 영문학을 전공한다. 나중에 <오렌지>를 써 작가로 데뷔하고, 몇 년 후 <오렌지>가 드라마 영화로 제작되는 바람에 명성과 현금을 솔찮게 지니게 되지만, <오렌지>에서 ‘나’는 작가 데뷔 전에 양어머니를 찾아가는 장면이 나온다. 그냥 세월이 흐른 것이다. ‘나’를 쫓아낸 어머니도 나이를 먹었지만 여전히 교조적 기독교도로 있다. 다만 어머니가 의지했던 교회 목사들과 부속 단체들이 난감한 처지에 빠져버렸을 뿐. 세상이 다 그렇지. 사는 건 어떻게 해서든지 그렇게 행복하게 가지 않는 법이거든.

  재미있게 읽었다. 이제 그동안 미루어왔던 <예술과 거짓말>도 앞 순서로 옮겨야겠다는 생각이 들 만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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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lstaff 2023-09-22 08: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음 주 삽질
화요일, 다와다 요코 <글자를 옮기는 사람>
목요일, 리처드 파워스 <새들이 모조리 사라진다면>
금요일, 유이우 <내가 정말이라면>

자목련 2023-09-22 09:1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다와다 요코의 <글자를 옮기는 사람> 궁금하네요.

Falstaff 2023-09-22 10:59   좋아요 0 | URL
옙. 재미있었습니다. 도서관에 또 다와다의 다른 책 희망도서 신청했습니다. ㅎㅎ

coolcat329 2023-09-22 15:1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 이런 내용이군요. 각 챕터가 성경인 점이 특이하네요. 읽으면서 저 양부모때문에 혈압이 오를 거 같습니다.

Falstaff 2023-09-22 17:01   좋아요 1 | URL
양아버지는 레슬링을 보는 걸로 만족하는 부류라서 주인공 ‘나‘에 거의 영향을 미치지 않습니다. 우리 주변에 널리고 널린 아버지란 종족들처럼요. ㅋㅋㅋㅋ
하여튼 재미있습니다. 중고장터에서 살 수 있습니다. 도서관을 이용하시면 훨씬 좋고요. 쿨캣님도 즐기시면 저도 기쁘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