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동어 - 초판본 지만지(지식을만드는지식) 소설선집
채만식 지음, 최유찬 옮김 / 지만지(지식을만드는지식)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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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나라 근대 문학 최고의 작가 가운데 한 명.” 이렇게 주장해도 별로 어색하지 않을 소설가일 것이다. 전북 옥구군 임피면의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나 중앙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와세다 대학에 유학할 때 갑자기 집안이 어려워져 (또는 자료에 따라, 관동대지진으로 인한 조선인 학살을 피하고자) 1학년을 마치지 못한 채 귀국해 동아일보, 개벽사, 조선일보 기자 등을 하다가 전업작가로 활동한 작가. 전라북도 옥구 출신이지만 조선 팔도 사투리 모두에 능해 작품 안에서 능청맞게 사용하는 것을 보면 차라리 천의무봉天衣無縫이라 할 만하다. 아쉽게도 이이는 1940년을 기점으로 작품 속에 친일적 요소를 삽입하기 시작하여 1942년 작 <아름다운 새벽>과 45년의 <여인전기> 두 편의 적극적 친일 작품을 생산해내기에 이른다. 채만식 스스로 1947년에 단편소설 <민족의 죄인>을 발표하여 작품 속에서 친일 행위를 고백하고 자신의 친일 행적을 최초로 인정한 작가가 되지만 그렇다고 친일 반민족 작가의 오명까지 벗어나는 건 아니다. <냉동어>는 1940년에 『인문평론』에 발표한 작품으로 “친일행위를 본격화하는 첫 작품으로 받아들여진다”고 엮은이 최유찬의 해설에 쓰여 있다. 평소에 채만식이 친일 작가 가운데 한 명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여태 읽은 그의 작품에서 그런 내용을 발견한 적이 없어 그리도 능란하고 골계적으로 사투리를 쓸 줄 아는 작가가 친일이라고 하면 얼마나 했겠느냐 싶었었다. 이 책 <냉동어>를 읽어보니까, 일본과 일본의 군국주의에 대한 노골적인 찬양이 아니라, 일본의 대륙 침략의 역사적 당위성, 조선의 내지화 같은 것이 노골적이지 않고 오히려 너무도 스스러워, 자연스러울 지경으로 언급을 하고 있어서, 여태 알고 있는 친일 문학과 구별이 되는 동시에, 친일 청산을 위한 평론가들로부터 더 높은 친일의 내면화를 가지고 있다는 평을 받았다(위키피디아).


​  <냉동어>, 얼린 물고기. 강시가 되어 창고에서 점점 더 딱딱하게 얼어가고 있으나 겹겹이 성에가 낀 눈으로는 푸르고 푸른 바다 속을 바라보고 있는 냉동어. 놀랍게도 <냉동어>는 연애소설이다. 식민지 조선의 수도 경성에서, 언제나 확실한 적자를 보증하는 기업인 잡지사 “춘추사” 사무실. 신년호를 교정하고 있는 중이다. 주필은 서른세 살 먹은 조선 문단의 혁혁한 중견 대가 문대영. 지금이야 서른세 살이라도 구상유취의 젊은이 대접을 받지 저 시절, 1930년대 말에는 혁혁한 중견 대가라는 타이틀도 어울렸던 때다. 사람들이 얼른얼른 죽어 주니까 후배들이 그만큼 쑥쑥 자라날 수도 있었다. 채만식 본인도 마흔여덟 살을 몇 달 앞두고 전쟁 터지기 전에 폐결핵으로 죽었지 않은가. 시인, 소설가가 주인공일 경우에 주인공이 육체 건강하고 일이나 사상적으로 전투적인 사람이 극히 드문 관계로 <냉동어>의 주인공 문대영 역시 본인이 스스로를 이렇게 평한다.

  “삐뚜러진 빈 집에서 호올로 거주하는 물락된 귀족의 신세로 세대의 룸펜, 즉, 거지beggar.”

  작가는 문대영더러 “모든 사물에 흥미나 관심이 없으며, 젊고 가정을 가졌으나 퓨리탄이 아니어서 ‘모든 남자’의 규범에서 벗을 것이 없다”라고 딱 잘라 말한다. 무슨 말씀이냐 하면 비록 집이 있고, 집에 가면 만삭의 아내와 곧 있을 출산을 위해 딸을 돌보아주려고 평양에서 내려온 장모가 당분간 함께 살지언정, 그리고 하루 뒤 첫 딸을 얻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첫 아이가 세상 구경을 한 바로 그 날, 새로 생긴 애인과 잠자리만 빼고 밤드리 노니다가 새벽 네 시 가까이에야 귀가해서 아이 구경을 했다 이거다. 즉, 1930년대 말 조선의 중산층 인텔리겐치아 답게 욕을 푸짐하게 먹을지언정 시대가 허용하는 방탕은 굳이 거부하지 않았다는 말이다.

  갑자기 이야기 가운데로 불쑥 들어가지 말고 차근차근 시작해보자.


​  <냉동어>의 시간적 공간은 1930년대 말의 연말이다. 신년호 교정을 하느라 바쁜 시간에 별로 상종 없는 영화계 관계자 김종호라는 일면식 없는 인간이 스미꼬라는 이름의 일본 여성이 도쿄에서 경성으로 이사했다고, 평소에 영화와 무대 예술에 대해 이해와 관심과 동정이 깊다고 굳이 소개를 해준다. 그래 그런가보다 했는데, 스물세 살을 먹은 스미꼬는 다음날 오후에 다시 사무실을 방문해 소파에 앉아 <성좌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시간을 보냈다. 바쁜 와중에도 코 앞에 앉은 여자에게 신경이 쓰이지 않지는 않아서, 대영은 값진 모피 외투와 윤潤gloss 좋게 새까만 모피자락으로 덮은 무릎 위에 놓인 흰 손가락에 상당히 굵은 다이아몬드가 빛나는 스미꼬 아가씨가, 어제는 못 보았던, 침울한 얼굴, 지적으로 세련된 총명함이 보이는 듯한 표정 등등 여성의 기상이 매우 노블하며 화장, 의복 등 전체 풍모가 기품이 있어서 전체적으로 미인이라 할 만하다는 게 눈에 들어왔다. 모든 남자의 규범에 벗어날 것이 없는 대영은 거의 모든 수컷들이 그러하듯이 암컷을 앞에 놓고 제대로 일을 할 수가 없어서 네 시 반밖에 안 됐음에도 책상을 정리하고 스미꼬와 함께 경성 시내를 구경하기로 작정을 한다.

  그럴 수 있겠지? 미인을 앞에 놓고, 비록 맞춤법 표준안이 나오긴 했으나 불평이 많은 동료들이,

  “뚫, 뚫…에잇 이놈의!… 온, 이게 글ㅅ자람!... 쌍 디귿에 이을을 하구, 또 그 옆댕이에다가 ㅎ을 붙이구, 이게 무슨 천하의 괴벽들이람!... 우리두, 요? 우리두 우리 춘추사식春秋社式 한글을 좀 만들어 가지구 이 흉악한 뚫ㅅ자 따위, 끊ㅅ자 따위 이런 괴물일라컨 뽀이코틀 합시다!”

  라는 주장이 귀에 들어오겠느냐는 말이지.

  그리하여 문대영은 스미꼬와 함께 자리에서 일어나려 하는데, 전화통이 울리더니 장모가 억센 평안도 사투리로 대영의 맏이, 첫 딸이 태어났다고, 그러니 얼른 들어와 아이 구경을 하라고 안달을 하는 거다. 대영은 그러거나 말거나, 아내는 원래 순종적이고 현명하고 기타 한국적 미덕을 모두 갖춘 아낙이라 조금도 걱정하지 않은 채, 스미꼬와 함께 종로통을 걷고, 그녀가 경성 시장major이라면 종로의 보신각을 단박에 헐어버리겠다고 구시렁거리는 것을 들으며 밥도 먹고, 술도 먹고, “스미꼬가 잠들 때까지 이야기 벗해주기”로 결심을 해서 스미꼬 혼자 사는 아파트에 함께 가, 또 차도 마시고 술도 마시고, 키스 한 번 하고 싶은 걸 꾹 눌러 참으며 노닥노닥 새벽 세시 반까지 머문다.


​  이런 것이 한 번이 힘들지 두번째는 아무 것도 아닌 거거든. 그리하여 다른 날도 아니고 바로 다음날, 문대영은 다시 스미꼬 집에 가서, 이번엔 할 거 다 한다. 비록 쁘띠 부르주아 인텔리겐치아라고 해도 ‘퓨리탄이 아니어서’ 죄의식이 전혀 없다. 문대영은 스스로를 생활을 잃어버린 인간, 그리하여 유령으로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조금은 가운데 중, 중급 정도의 세상 허무함을 갖고 사는, 물론 이게 진짜 허무함인지, 자신이 작가임을 나타내려고 보여주기식 허무함인지는 모르지만 하여튼 그거 비슷한 거에 항상 적셔져 있는 인간인 것을 기억해야 한다. 그러나, 이게 사람이 어디 배겨 나겠느냐는 거다. 오후 다섯 시까지 일을 하고, 퇴근해서 데이트를 하고, 여자 집에 가서 또 새벽 세시 넘어서까지 밤중에 체조를 하다가 새벽도 다 지나 처자식 사는 집으로 와서 눈도 못 붙이고 깔깔한 입에 밥이나 제대로 넘길 수 있나, 이럭저럭하다가 곧바로 출근을 하지만 당연히 지각이고. 사람 사는 꼴이 아니어서 결국엔 병이 나버린다. 꼴값을 한다.

  이러던 어느 날, 스미꼬는 문대영에게 세상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자신과 함께 도쿄로 떠나 버리자고 제의하고, 중요한 것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다고 착각하며 사는 대영은 그 자리에서 동의를 해버린다. 그래서 다음 날 자정 열차를 타고 부산에 가서 배를 타기로 약속한다. 이렇게 해서 길지 않은 연애소설은 대단원을 향해 막바지 기적을 울리며 전속력으로 질주를 하는데, 궁금하시지?

  자주 말했다. 연애소설은 결국 이별소설이라고. 어떤 이별일까? 스미꼬가 안나 카레니나처럼 부산행 열차가 다가오자 바퀴 사이로 몸을 날렸을까? 아내는 아니고 드센 평안도 장모가 문대영의 부랄을 잡고 너 죽고 나 죽자, 이랬을까? 관부연락선에 오른 문대영과 스미꼬가 윤심덕이처럼 현해탄 돌고래 노니는 바다 속으로 첨벙, 뛰어들었을까? 나도 시원하게 말해버리고 싶지만, 참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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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lstaff 2023-09-01 05:38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다음 주도 어김없는 삽질 :
화요일, 요제프 로트 <타라바스 - 이 땅의 손님>
목요일, 류드밀라 울리츠카야 <커다란 초록 천막>
금요일, JMG 르 클레지오 <원무, 그밖의 다양한 사건 사고>

유부만두 2023-09-01 05:5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결말이 궁금해서 전자책 결재했습니다. 얼른 읽으러 가야겠어요. 그나저나 아내가 첫아이 낳느라 고생하는데 술집에서 거리에서 방황하며 애쓰는 남편이라니, 오에 겐자부로랑 헤밍웨이 읽으면서 욕했던 기억이 납니다. 이런 애송이 남편/아빠라면 꺼져버리라고!

Falstaff 2023-09-01 06:04   좋아요 1 | URL
당시가 30년대 후반 식민지 조선입니다.
그럼에도 이건 시대 문제가 아니라 문대영이 ˝퓰리탄˝이 아니라서 여태 그냥 봉건적 사고에서 벗어나지 못한 인텔리라는 데 있다고 봅니다. 실제로 그날 아가씨와 밤드리 노닐 수 있었던 것이 맏이로 아들이 아니라 딸을 낳은 것도 크게 작용을 했으니 말입죠.

유부만두 2023-09-01 06:24   좋아요 1 | URL
그렇죠. 그런데 문대영은 직업에선 중견이었는지 몰라도 인생에서 책임감이라고는 조금도 지고 싶지 않아서 도망다니며 자기 연민과 변명에만 능한 사람이 아닌가 싶습니다. 이 줄거리는 어떤 전형 같기도 하고요.
결말만 읽고 왔는데 (아, 이럴줄 알았어요) 30년대 후반 아니라 다른 시대에 갖다놔도 비슷한 먹물 태도를 보일 것 같은 인물이에요. 그런데 스미코 편지 내용은 딱 채만식 스타일이네요.

Falstaff 2023-09-01 06:44   좋아요 2 | URL
21세기에 갖다 놓으면 문대영은 절대 그런 짓 안 할 겁니다.
인텔리들의 특징이 눈치 잘 본다는 거 아닙니까. 이혼 당해서 아이 달린 홀아범 될 텐데요. ㅋㅋㅋ

건수하 2023-09-01 06:33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이렇게 자세히 얘기하다가 갑자기 참지 마세요….. 🥲

퓨리탄이라고 굳이 강조하는 걸 보니 가톨릭은 역시 할 거 다 했나봅니다…

Falstaff 2023-09-01 06:46   좋아요 3 | URL
ㅋㅋㅋ 그래야 재밌잖아요. 스포일러는 아무리 좋아도 없는 게 더 좋지 않나요? ^^
가톨릭, 개신교 등등 모든 종교에 대한 코멘트는 생략합니다. ㅎㅎㅎ 전 유물론자예요. 사서 욕 먹거나 귀싸대기 맞는 일은 하지 않겠습니다. ㅋㅋㅋㅋㅋㅋㅋ

잠자냥 2023-09-01 08:2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체조 꼴값 ㅋㅋㅋㅋㅋㅋㅋ

Falstaff 2023-09-01 17:03   좋아요 0 | URL
ㅋㅋㅋ 예전엔 많이 쓰던 표현인데 요즘에는 잘 안 쓰긴 합니다. ㅋㅋ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