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도주병 공장 야유회 ff 시리즈 5
베릴 베인브리지 지음, 채세진 옮김 / 꿈꾼문고 / 2019년 12월
평점 :
절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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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포도주병 공장 야유회: 이하 “포도주병”>은 영국의 데임 작위 작가 베릴 베인브리지의 유일한 우리나라 번역서다. 독후감을 쓰기 위해 이이를 위키피디아에서 찾아봤더니 말 그대로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다. 문학적으로도 높은 평가를 받는 작가라고 한다. 2007년에 작가이자 저널리스트인 샬롯 히긴스는 베인브리지를 “국보”라 칭했고, 2008년에 더 타임스는 이이를 1945년 이후 가장 위대한 영국 작가 50인 가운데 한 명으로 올려놓았을 정도이다. 그런데 낯설다. 우리나라에 소개된 베인브리지가 수적으로 너무 적다. <포도주병>이 유일한데 그나마 이 책도 표지 그림 때문인지 작품이 묘사하고자 하는 독특한 그로테스크를 도무지 짐작하지 못한 채, 오히려 제목과 더불어 그저 가벼운 읽을 거리로 생각하게 만들어서 그런 줄도 모르겠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작가 스스로가 스물두 살부터 5년간 결혼생활을 한 첫 남편과의 사이에서 출산한 두 아이와, 60년대 초에 소설과 시나리오를 썼던 앨런 샤프와 연애 중에 생긴 아이, 이렇게 세 자녀를 혼자 키워가며 별의 별 일, 단역배우부터 이 책의 무대인 포도주 병입 공장의 공원까지 온갖 일을 하다가 결국 작가로 성공했다. 유일한 법적 결혼이었던 오스틴 데이비스와는 끔찍한 결혼생활이었던 듯, 당시엔 가장 흔했던 자살 방법 가운데 하나였던, 가스 오븐에 머리를 집어넣기도 하고, 시어머니가 찾아와 며느리 베인브리지를 향해 권총을 발사하기도 했던 모양이다. 자신의 경험은 결국 작가의 중요한 재료가 되는 법이라서, 이때 경험, 포도주 병입 공장 근무와 시어머니에 의한 권총 발사가 모두 이 책 <포도주병>에 삽입되어 있다. 인생 그렇지 뭐. 다 좋을 수 없듯이 철저하게 다 나쁠 수도 없다.

  책을 읽기 전에 미리 얘기할 것은, 원작의 제목이 “The Bottle Factory Outing”인데, 여기서 “Bottle”을 그냥 “병”이라고 생각하면 곤란하다는 말씀. 대신 “병입甁入”을 쓰는 것이 더 적절하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콜라 회사의 우리나라 공장에서 하는 일은, 콜라 병을 구입하고, 콜라 원액을 수입하여, bottling, 병에다가 콜라를 넣어 판매하는 일이다. 이때 액체를 병에 넣는 작업을 “병입”이라 한다. 마찬가지로 이 작품의 무대가 되는 회사는 이탈리아, 스페인 등지에서 생산한 포도주를 구입해 와 런던에서 병에 넣어 판매하는 파가노티 주식회사이다. 따라서 공장은 사온 병에 적절한 레이블을 붙이는 것과 벌크 통에서 750ml, 1liter 등 적절한 병에 적, 백포도주와 샴페인을 넣는 두 공정으로 되어 있다.


​  아주 상반된 성격을 가진 여성 두 명이 단칸 아파트에 산다. 브렌다와 프리다. 전직 나이트클럽 계산원이고 한때는 연극배우 지망생이기도 했던 178cm, 102kg의 스물여섯 살 건장한 체격의 미인인 프리다 혼자 살고 있었는데, 남편이 밤마다 재향군인회에서 술에 취해 돌아오다 집 대문 계단에 오줌누는 것을 견딜 수 없고, 새벽에 닭이 품은 달걀을 꺼내 볼펜으로 껍데기에 작은 얼굴을 그리는 취미를 즐기던 미친 시어머니도 견딜 수 없어 무작정 뛰쳐나온 작고 내성적인 브렌다를 시내 정육점에서 처음 만나 불쌍히 여겨 데려와 함께 지내기 시작한 거였다. 왈가닥이지만 심성이 착하고 매사 적극적인 프리다는 포도주 병입 회사 사장의 조카이자 수습 매니저인 비토리오에게 반해 있던 상황. 어떻게 일을 좋은 방향으로 진전시킬 수 있을까, 생각하다가 비록 벌써 10월이라 겨울이 시작되어 날씨가 좋지는 않겠지만 과감하게 사장 파가노티 씨에게 직원들의 사기진작과 생산성 향상을 위하여 야유회를 가겠노라고 건의했다. 세상 모든 회사의 사장은 영업일에 하루를 빼먹는 것을 끔찍하게 싫어하리라는 것은 프리다도 벌써 알고 있어서, 야유회는 일요일에 갈 것이니 대신 지원을 조금 해주지 않겠느냐고 했고, 사장은 흔쾌히 백포도주 두 오크 통, 적포도주 두 통, 물론 작은 사이즈의 오크 통을 내주었으며, 이에 질세라 매니저 로시 역시 소형 버스를 빌리는 것을 허락했다. (로시가 버스 빌리는 걸 무슨 권리로 허락했는지는 책이 끝날 때까지도 이해가 가지 않았다. 휴일에 로시가 자기 돈 내서 빌려주는 것도 아닌데 웬 허락?)

  프리다가 생각하는, 물론 속으로만 생각하는 야유회는, 비토리오를 야외로 데려가면 유혹할 더 좋은 기회가 생길 것이며 특히 웅장한 대저택을 방문하고 (튜더 왕조) 엘리자베스 시대의 정원을 손에 손잡고 산책할 때는 틀림없이 그럴 것이라는 그림이었다. 반면에 룸메이트인 서른두 살의 브렌다가 생각하는, 역시 속으로 생각하는 야유회는, 10월이라 당연히 비가 올 것이라서 쓸쓸히 잔디 위를 걸을 음울한 행렬이며, 남자들은 포도주 무게 때문에 미끄러지고 발을 헛디뎌 주둥이가 댓발 나올 것이며, 프리다는 날씨 때문에 얼굴이 일그러진 채 진흙탕 바닥에서 차가운 치킨을 비틀어대는 광경일 뿐이었다. 그래, 그래. 야유회, 단합대회, 수련회, 전진대회 등등, 이런 거 하면 누구나 다 좋아할 줄 알지? 천만의 말씀, 만만의 땅콩이다. 원래 그런 거다. 거의 모든 사람 가운데 반은 프리다와, 반은 브렌다와 비슷한 성향이며, 극히 일부는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다. 그럼에도 노동조합의 단체협약 요구사항에 야유회 성격의 체육대회, 단합대회, 수련회 이런 걸 돈 좀 들여 폼나게 해보자는 것이 빈번하게 등장한다. 노측이나 사측이나 협약에 나갈 정도의 고위급은 대개 적극적인 성격이거든. 프리다 비슷하거든. 그래서 다 자기들 마음이겠거니 싶어서 주저없이 요구하고 까짓것 그 정도는 받아주지, 해서 대개 통과된다. 웃기지? 아니라고? 하여간 나는 웃겼다. 수십년 동안 속으로 브렌다처럼 “세금 낼 테니까 차라리 비용을 현금으로 주지” 궁시렁거리면서.

  회사의 사장 파가노티 씨는 이탈리아 출신으로 빨간 적수공권에서 입신양명한 사람으로, 포도주 병입 회사를 차려 성공을 했는데, 아무래도 영국인들은 도무지 믿지를 못하겠는 거다. 그래서 볼로냐 시골 지역에서 밀, 옥수수, 포도를 재배하던 사람들을 데려와 친밀하지만 고립된 공동체를 형성하게 되었다. 이탈리아 사람들의 입장에서 보면 런던으로 이주해 와서 어쨌거나 집을 짓고 예전에 비하면 온갖 복지를 향유하고 있어서 만족하게 살고 있었다. 물론 자식들한테는 공부 열심히 해서 의사나 회계사가 되기를 권유했지만, 싹수가 보이지 않을 경우엔 대를 이어 파가노티 씨 공장에서 열심히 병에 포도주 채우는 일을 시키겠노라 결심하는 수준까지 되었다. 이런 회사에 주인공인 영국인 브렌다와 프리다가 처음으로 들어왔고, 특히 프리다가 보기엔 직원들 급여가 너무 적어서, 그들에게 그들이 얼마나 심하게 착취당하고 있는지, 이의 해결을 위해 조합결성의 필요성에 대해 이야기하려 애썼지만 말짱 허사였다. 그러니까 이탈리아 출신 직원 전체, 두 주인공과 아일랜드에서 온 운전수 패트릭을 빼고 나머지 전부가 회사를 위하는 충성심에 대해서는 짐작이 하시리라 믿는다.

  작품을 발표한 시기가 1974년. 당시에는 영국, 런던에서도 성희롱에 머뭇거림이 없었던 모양이다. 이 회사에서도 매니저 로시가 같은 이탈리아 여성 말고 영국 여성인 브렌다를 끊임없이 더듬었다. 로시는 나이 많은 아내와 아이 없는 결혼생활을 하고 있다가 브렌다가 입사한지 3일 만에 치근덕거리기 시작했다. 작품은 프리다/브렌다가 사는 아파트를 마주보고 있는 노인 전용 아파트에서 한 할머니의 초상이 일어난 날 시작하는데, 이날 로시가 얼마나 브렌다를 더듬는지 이를 피하고자 하는 마음에 그냥 순식간에 “엄마가 죽었어요.”라고 해버렸다. 그리하여 죽은 엄마는, 이미 열두 살 때 숨을 거둔 프리다의 엄마가 다시 환생했다가 오늘 아침에 죽은 것으로 되고, 장례를 위하여 이미 출근해 괄괄한 성격에 맞게 괄괄하게 웃으며 하루를 시작했던 프리다는 얼른 조퇴하고 집에 돌아가 슬픔에 잠겨야 했으며, 함께 사는 브렌다 역시 룸메이트를 위로하기 위해 함께 조퇴를 해야 했다. 이후에 “엄마의 죽음”은 작품 곳곳에 웃음가루를 살포하게 된다.

  이렇게 이야기하면 이게 재미있는 유머를 담은 이야기라고 생각하기 쉽다. 맞다. 그리고 처음에 이야기한 것처럼 이 작품이 “국보”라고 불리울 베인브리지의 대표작이 되기 위해서라면 유머러스하면서도 뭔가 있어야 할 터이다. 이런 유머를 일단락하면 드디어 파가노티 병입회사의 야유회를 시작한다. 야유회가 중반 정도 진행한 다음엔 이제 유머는 유머러스한 그로테스크로 진입하고, 이를 위해서 한 명의 엽기적인 죽음이 필요한데 그게 누구일까? 문제는 그걸로 끝나지 않는다. 이 작품이 “영국의 가장 위대한 소설 100” 뭐 이런 리스트에 빠짐없이 올라간다고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 베인브리지의 <포도주병>에는 특정 집단, 즉 런던 노동자 계급의 공통적인 심리상태, 그것이 벌이는 엽기적이고 희극적인 사태가 기다리고 있다. 책 좀 읽는다고 생각했었는데 나도 깜짝 놀랐다. 세상에 이런 (그러나 가능한) 일이, 그것도 그럴 듯한 일을, 누가 있어서 이런 생각을 할 수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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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23-08-31 08:3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다른 작품이 국내에 더 소개되지 않는 게 아쉽습니다.

Falstaff 2023-08-31 12:14   좋아요 2 | URL
넵! 저도 이이의 글빨에 깜짝 놀랐습니다.
얼른 얼른 소개해주었으면 좋겠습니다. 이 작품의 새 번역도 포함해서요. ㅜㅜ

얄라알라 2023-08-31 12:2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국보˝라고 칭송받는데, 상대적으로 국내에서는 박한 대우를 받고 있다...
골드문트님 지적하신 대로, 표지만 보면 가볍고 나폴나폴 거려요. 그로테스크한 줄 모르겠어요.
가스 오븐에 머리를 넣었던, 파란만장한 삶을 산 작가가 쓴 줄 모르겠네요.

the Bottle Factory Outing

흥미롭습니다. 책 내용을 꿰고 계신 분만이 ‘병‘이 아니라, ‘병입‘이라고 명확하게 번역하실 것 같아요

Falstaff 2023-08-31 20:41   좋아요 1 | URL
우리말도 잘 쓰는 역자이긴 합니다만, 세부적인 단어 선정에 조금 불만이 생기더군요. 본문에서 중간 매니저 로시가 차량 임대를 ‘허락‘ 했다는 것도 단어 선택에 약간 덜 신중했던 거 아닌가 싶었고요. 뭐 그런 수준이었습니다.
이 책 재미있어요. 잠자냥 님 얘기처럼 다른 작품도 얼른 나왔으면 좋겠습니다.

얄라알라 2023-08-31 12:2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참. 생각이 났는데, ‘윌리엄 골딩‘도 노벨문학상 수상작가이면서도
한국엔 [파리대왕]만 많이 알려졌는지 다른 책 찾기 쉽지 않더라고요.
그 때도 의아하다 생각했어요

Falstaff 2023-08-31 20:43   좋아요 1 | URL
골딩의 <파리대왕>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저는 <상속자> 하나만 더 읽었습니다. 역시 제 취향은 아니더라고요. <핀처 마틴>과 <피라미드>도 나와 있으니 그래도 좀 있는 편 아니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