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한 미국인
그레이엄 그린 지음, 안정효 옮김 / 민음사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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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레이엄 그린, 이라고 하면 당연히 <제3의 사나이>를 가장 먼저 떠올릴 수밖에 없을 것이다. 나도 흑백영화 <제3의 사나이>에서 결코 잊을 수 없는 두 컷의 장면을 담고 사는데, ① 폐허가 된 빈의 대관람차에 오른 해리 라임(오슨 웰스)가 평생 친구인 홀리 마틴스(조지프 코튼)에게, 지상의 바글바글한 사람들을 내려다보라고 하면서, 저 가운데 하나 혹은 둘이 지워진다고 한들 세상에 어떤 영향을 주겠느냐, 라고 했던 대사와, ② 말 그대로 비처럼 쏟아지는 낙엽을 뚫고 걸어와 차를 옆에 세워둔 채 담배 한 개비를 물고 그녀를 바라보던 장교 캘러웨이(트레버 하워드)를 완전히 무시하고 가던 길을 계속 걷던 애너 슈미트(알리다 발리)의 장면이었다. 나처럼 보통의 독자가 그린을 소설문학이 아니라 영화를 통해 처음 만나는 건 그리 드문 일은 아닐 것이다. 그러면서 살다가 우연히 책을 좋아하는 습관을 들였을 경우, 책 가게에서 그레이엄 그린이라는 이름을 발견하게 되면? 어떤 작품이 됐던 간에, 일단 구입을 하고 본다. 이게 정상이다. 나도 마찬가지라 여태 <권력과 영광>, <제3의 사나이>, <그레이엄 그린 – 정원 아래서 외 52편>, <브라이턴 록>을 사서 읽었고, 이제 다섯 번째로 읽는 그린, <조용한 미국인>은 동네 도서관에서 빌려 읽었다.

  역자 고 안정효의 해설을 보면, 그레이엄 그린 자신이 대중적 호소력에 의존하기를 전혀 주저하지 않은 대중 소설가였으며, 그런 화법의 추리소설들을 스스로 오락물(entertainment)라고 불렀다고 한다. 오락물로의 소설. 이건 필연적으로 다수 작품을 영화로 다시 만들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서, <조용한 미국인> 역시 스스로 “헐리웃 키드”인 안정효가 아주 재미있게 영화 버전의 그린 작품들을 비교해가면서 설명/해설한다. 진짜로 읽어 보시라. 대중예술로의 영화와 소설, 헐리웃 은막 위에서 펼쳐는 환상과 꿈이란 시각으로 보면 안정효의 해설과 <조용한 미국인>이 얼마나 재미있나 말이지. 이 작품의 무대가 1950년대 초반 인도차이나, 베트남에서의 대 프랑스 독립투쟁 시기였다. 안정효는 게다가 처음엔 카빈 소총을 들고, 후에 본격적으로 악명 높은 베트콩의 땅굴 소탕 작전 당시엔 M16 소총을 들고 베트남 전선에 직접 투입이 된 경험을 가지고 있는 작가이니 상황을 기가 막히게 잘 표현했겠다 싶다. 그러나 딱 거기 까지다. 그레이엄 그린도 마찬가지다.


  주인공 토머스 파울러는 영국의 신문사에서 사이공으로 파견한 종군 기자로, 우리가 알고 있는 전선을 누비는 종군 기자 말고, 베트남 전쟁이 늘 그랬듯이 똑부러진 전선이 있다고 말하기 힘들어 주로 사이공에 머물면서 이슈가 있을 때마다 간혹 전선을 둘러보고 기사를 쓰는 정도다. 나이가 지긋한 파울러는 영국에 아내와 다 큰 자식들이 있지만 도무지 가정에 정을 붙지 않아서 아주 오랫동안 베트남에 발을 붙이고 있다. 부부간에 금슬이 좋은 적이 없어 인도차이나로 오기 전에 앤이란 아가씨와 정분이 나기도 했으나 원래 불륜이란 것이 늘 그렇듯이 책임없이 헤어진 바 있고, 베트남에서는 후엉凰 암컷 봉황이란 이름의 날씬한 베트남 여성 특유의 낭창낭창하고 뇌쇄적인 여성과 동거를 하고 있다. 마음 같으면 아내와 이혼을 하고 후엉과 재혼을 하고 싶으나, 아내가 하필 성공회 고교회파라서 이혼은 생각도 하지 않고 있다.

  이들 사이를 한 미국 남자가 파고 든다. 올든 파일. 32세. 미국 경제지원단 소속으로, 홍보나 연극 어쩌면 극동분야 연구에서 우수한 성적으로 학위를 받아 인도차이나의 발전, 그리고 작품 속에서는 한 마디도 나오지 않지만, 인도차이나의 공산주의화를 저지하기 위한 방법을 모색하고자 파견된 아주 진지하고 순진한 남성이다. (세상에 순진한 남자가 어딨니? 말이 그렇다는 거지.) 그러니까 늙은이 토머스 파울러와 연애를 하고 있던 후엉, 50년대 초반 작품의 여주인공답게 매혹적인 얼굴과 몸매에 어울리게 속이 시원할 정도로 무식한 지적 수준을 지닌 후엉에게 한 눈에 반해 기어이 파울러의 품에서 낚아채, 미국으로 데려가서 뉴 잉글랜드 부모님을 접견시키고 보스턴에서 신혼살림을 꾸리는 꿈을 꾸게 된다. 그리고 진짜로 파울러한테서 여자를 데려오는 데 성공한다. 파울러는 당연히 열통이 터지지만 나이든 영국인답게 며칠 후 이들의 관계를 인정하고 어차피 깨진 쪽박, 그나마 행복하기를 기원하는 수준에 이른다.

  그러나, 책을 열면, 불과 얼마 지나지 않아, 화자 토머스 파울러는 이 조용한 미국인 파일을 음침한 냉혈동물이며 겉만 번지르르한 허풍선이라고 단정해버린다. 이 때는 독자가 아직 갈피도 잡지 못하고 있을 즈음으로 파일이, 다카오로 가는 다리 밑 강물에서 익사한 변사체로 발견이 된다. 흙탕물에 빠져 질식사해서, 폐에 다량의 진흙을 발견한 것까지는 그럴 수 있다고 쳐도, 여태까지 파일을 설명한 구절들, 조용한 미국인이니 허풍선이니 하는 것과는 어울리지 않게, 파울러가 파일의 시신에 대고 독백을 하기를, 적어도 쉰 명의 목숨을 앗아간 장본인이란다. 그러니 어떻겠어? 이 작품은 파일의 정체, 그리고 어떤 방식으로 파일이 무려 50여 명의 사람을 죽였으며, 누구를 죽였는지를 밝히는 작업이 될 것이다.

  파울러의 파일에 대한 독백이 상당히 앞부분에 나와서 소개를 하는 것이지, 아니면 모른 척했을 텐데, 하여간 독후감 쓰기는 편해졌다. 파일더러 아메리칸 합중국에서 파견한 “경제지원단” 소속이라고 했는데 적어도 50명의 인명을 살상한다? 그럼 그는 경제지원단의 명함을 가지고 다니는 OSS(Office of Strategic Service: 전략사무국)의 후신인 CIA(Central Intelligence Agency: 중앙정보국)의 일원일 수도 있다. 책에서는 얼핏 가능성만 이야기하는 바, 파일 및/또는 파일이 속한 조직은 어차피 프랑스는 인도차이나를 무력으로 지배하는 데 실패할 것으로 전망하고, 만일 권력을 베트남 시민들에게 이양할 것이라면 공산주의를 주창하는 베트콩이나 베트민한테는 절대 집권을 허용할 수 없기 때문에 세력도 약하고 행동도 극악하지만 민족주의를 내세우는 테 장군을 지지하기로 결정해 대량 살상무기를 지원했다. 하지만 미국인들이 하는 짓이 다 그렇듯이, 이것들이 미국이 지원한 무기로 사이공 시내에서 다중을 향한 무차별 테러를 저지르는 거였다. 이 내용을 밝히는 것도 께름칙한데 어떻게 또다른 주인공 파일이 죽음에 이르는가, 하는 건 정말 말할 수 없다.

  1950년대 전 세계인들이 미국과 서유럽 헤게모니에 현혹당한 일은, 공산주의에 대항하여 투쟁한 것은 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부르주아 자본주의를 유지하기 위해서 였다는 거. 나중에 보니까 공산주의 하는 나라가 하나도 빠짐없이 극한의 독재를 했기 때문에, 말 그대로 어쩌다 보니 결과적으로 당시의 투쟁이 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해서 였다고 해도 그리 틀린 말이 아니게 되었다는 거. 세상 참 살기 어렵다, 그지? 뭐 그런 거다. 올든 파일은 1950년대 초의 미국이라면 당연히 행했을 세계질서 재편작업의 일환으로 매우 비도덕적이고 불법적이기도 한 행위를 하다가 미국 역사에 한 줄도 남기지도 못하고, 장가도 못 들고 그렇게 죽어갔다. 삼가 명복을?

  아무리 그레이엄 그린을 좋아한다고 해도 식민지에 관한 그의 시각에는 동의하기 쉽지 않다. 주인공 토머스 파울러가 인도차이나 독립전쟁의 당사국 국민이 아니라는 점을 감안해도, 파울러의 모국인 영국 역시 식민 논의에서 자유롭지 못한 바에, 식민지 베트남에서 파울러는 철저하게 국외자로만 존재한다. 베트남이 미래가 어떤 방향으로 결정이 될지, 거의 신경을 쓰지 않는다. 나중에 파일에 의해 대중 50명 이상이 희생을 당한 후에야 베트남 내 좌익세력과 모종의 일을 꾸미는 것을 빼고는, 처음부터 끝까지 아편 피우고, 후엉의 몸을 만지고, 파일에 은근한 질투를 하고, 이혼해주지 않는 아내 때문에 포기하는 마음이나 먹고, 뭐 이런 것이 주류다. 다른 건 아닌데, 이런 면에서 좀 그린 답지 않다. 하긴, 그린에게 무슨 철학적, 또는 역사적, 탐미적 작품을 바란 건 아니지만, 아니, 아니, 그러면 됐지. 세상 모든 작가가 다 진지해야 하는 건 아니니까.

  재미있게 잘 읽었다. 하지만 그린 치고는 조금 덜 재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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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lstaff 2023-08-04 06:51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ㅎㅎㅎ 오늘도 삽질해 봅니다. 다음 주 예정 독후감입니다.
화요일, 호세 에우스타시오 리베라 <소용돌이>
수요일, 스테판 츠바이크 <우체국 아가씨>
목요일, 윌리엄 트레버 <마지막 이야기들>
금요일, 쓰시마 유코 <빛의 영역>

stella.K 2023-08-04 15:35   좋아요 1 | URL
쉬엄쉬엄 읽으십시오. 눈에서 땀띠나십니다.ㅋㅋㅋ 죄송합니다. 제가 그만 더위를 먹은 나머지 골드님을 시기 질투하고 있는가 봅니다. 사탄 원수 마귀를 물리치십시오.ㅠ ㅋㅋㅋㅋ 😆
아, 빛의 영역 기대됩니다.^^

Falstaff 2023-08-04 15:43   좋아요 1 | URL
ㅋㅋㅋ 오늘은 하루 종일 책 한 페이지도 들춰보지 않았습니다.
어제 위스키 마시고 뻗었다가 하루종일 빌빌거렸습니다.
좀 있으면 또 쐬주 마시러 나가야 합니다. 매운 낙지가 안주로 좋으려나, 흠... 큰일입니다. 오징어, 낙지, 문어... 이런 종류 안주 싫어하는데 말입니다. ㅜㅜ

자목련 2023-08-04 08:3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마지막 이야기들>기대할게요. 시원한 하루 보내세요^^

Falstaff 2023-08-04 08:46   좋아요 1 | URL
앗, 기대하시면 안 됩니다. ^^;;
어제 위스키 좀 마시고 자버렸더니 지금 강시...처럼 변해서 도서관도 못가고요 흑흑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