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마취 상태 은행나무세계문학 에세 9
이디스 워튼 지음, 손정희 옮김 / 은행나무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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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또다시 이디스 워튼. 좋지 않은 인상으로 시작했지만 어떻게 하다 정이 들어 이제 일곱 번째 워튼을 읽게 됐다. 이 양반이 1862년 1월 24생. 7개월 후 프랑스에도 천재 가운데 한 명이라고 일컫는 작곡가 클로드 드뷔시가 태어난다. 1862년이 좋은 해였던 모양이다. 청년기 황금시절엔, 물론 부르주아 인텔리겐치아 계급에 한하는 얘기겠지만, 벨 에포크 시대를 맞이하여 풍족한 문화의 향연을 누릴 수 있었고, 이후 1차 세계대전에는 시들시들한 척추와 쑤시는 무릎을 핑계로 참전하지 않을 나이가 된 이들. 전쟁이 끝난 후 새롭게 등장하는 젊은 세대의 방황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도무지 자신들이 살았던 문화와 이질감을 숨기지 못해 젊은 그들에게 과감히 로스트 제네레이션 Lost generation, 길을 잃은 세대라는 딱지를 붙여준 꼰대. 이런 꼰대 그룹에 이디스 워튼도 당연히 포함되며, 워튼은 핏제럴드, 더스패서스, 헤밍웨이, 포크너, 등의 세대가 갖는 조급성, 개인성, 변화추구를 발견하고, 직접 대면하고, 조금은 당황했으며 그것들과 거래를 하기 시작했다. 이들과의 거리감은 분명히 있되, 그들로부터 소외당하지 않으려 하는 기존 그룹과의 정치적, 문화적, 의식적, 의사소통적 휴전 상태가 워튼이, 실 생활에서는 모르겠고, 소설 속에서 취한 행동이 바로 “반 마취 상대” 아니었을까, 이렇게 읽었다.


​  나는 “반 마취 상태”가 어떤 상태인지 몰랐다. 마취가 덜 된 상태. 그러니까 아주 심하게는 아니지만 그래도 고통을 느끼며 수술/시술 등을 하는 걸 말하는지도 모른다. 혹시 수면 내시경? 프로로폴? 아, 모르겠다. 책을 읽으면 알게 된다. 23쪽 각주를 보면 “반 마취 상태는 여성들의 산고를 줄여주기 위해 마취제를 사용한 분만 방식”이란다. 그러니까 딱 짚어서 분만 방식인데 당시에 돈 좀 있던 가족들이 산모의 고통을 줄이기 위해 택하는 방식으로, 이 방식의 핵심은 고통을 줄이는 것이다.

  주인공 폴린 맨퍼드 여사를 이해하는 것이 제일 중요하다.

  폴린은 서부의 신흥 부르주아 출신으로 조상들이 펜실베이니아에서 탄광노동을 하다가 누군가가 자전거를 만들어 팔기 시작했고, 이 양반의 똑똑한 후손이 또 하나 나타나 자전거에서 자동차 회사로 일을 벌여, 지금 미국 최고의 자동차 회사 가운데 하나에 큰 지분을 가지고 있는 진짜 부르주아다. 폴린이 젊은 시절에 뉴욕에서 아서 와이언트라는 잘 생긴 남자를 만나 혼인을 했다. 아서는 동부해안에서 배를 내린 진짜 필그림파더스의 후예, 순종 WASP이지만 이젠 폴린이 ‘뉴욕 구혈통’이라 부를 뿐인데, 이렇게 얘기할 때 폴린은 그 계급에 대한 경멸과 자부심을 동시에 품으며 지칭하는 거였다.

  이들 사이에 아들 제임스가 태어났으나, 시더리지에서 농사를 짓다가 회계 잘못으로 아내의 돈을 탕진한 후엔 클럽에서 브리지를 하거나, 경마에 간헐적으로 관심을 쏟는 와중에 알코올 흡수 용량이 점점 커지고 있었지만 당대의 뉴욕 부르주아 사위로서는 크게 문젯거리가 아니어서, 폴린 역시 크게 신경쓰지 않았다. 그러나 남편 아서가 사촌 엘리너와 몰래 연애를 하는 걸 알게 되고는 그건 못 참아서 깔끔하게 이혼해버리고 말았다. 암, 당연하지. 부처님도 돌아 앉는다잖아?

  이때 폴린의 이혼을 맡아 재판없이 깔끔하게 처리해준 이혼 전문 변호사가 덱스터 맨퍼드. 폴린은 키 작고 머리숱은 바람직하지 않지만 일에 대한 열의가 자기 친정집 가문의 정서와 비슷해 스스럼없이 두 번째 결혼을 해버렸고, 이 사이에서 딸 니나를 낳았다. 그렇게 해서 폴린은 씨 다른 남매를 갖는다.

  이 희한한 집안은 대개 남자들 때문에 바람직하게 이루어지는 바, 전남편 아서는 주로 전시품 또는 ‘전리품 A’라고 불리기도 하지만, 하여간 A는 전 아내가 다른 남자한테 시집가서 낳은 딸 니나를 자기 딸처럼, 딸보다 더 중요한 피붙이처럼 여긴다. 두 번째 남편 덱스터 역시 결혼하기 전에 아내가 낳은 제임스, 짐을 자기 딸만큼 중요한 진짜 아들처럼 돌본다. 심지어 아서의 어머니 와이언트 노부인이 사망한 후엔 아내의 전남편인 아서를 자기가 책임져야 할 대상으로 인식하기까지 한다.

  하여간 아서와 폴린의 아들 짐은 어린 시절과 젊은 시절엔 다양한 관심거리와 야성적 불확실성을 가지고 있었지만, 의붓 아버지인 덱스터 맨퍼드가 합병신탁회사에 취직을 시켜준 이후로는 이런 것들이 사라지고 오직 순수한 경제적 유용성만 남은, 건실한 청년이 되었다. (로스트 제너레이션? 웃기네, 너네들도 한 번 먹고 살아봐라, 꼰대가 되는지 아닌지. 워튼의 이런 속내가 아니었을지 의심하지 않을 수 없음.) 짐이 은행원이 된 가장 중요한 이유가 개성있게 아름다운 아가씨 리타, 비록 돈 한 푼 없는 고아 출신으로 모든 것에 책임질 줄 모르는 ‘대단히 곤란한’ 이모 퍼시 랜디시의 보살핌을 받으며 성장한 이 자유분방한 여성과 결혼하기 위함이었다. 덱스터가 워낙 좋은 곳에 취직을 시켜주었고, 엄마 폴린이 또한 막대한 돈을 뿌려 지원해준 덕분에 모던 중에 모던하게 꾸민 집에서 집사와 요리사와 유모를 두고 편하게, 편해도 너무너무 편하게 살고 있다. 이들 사이에 6개월이 안 된 사내 아이가 있다. 이 아이가 태어날 때, 리타는 무통 분만, 마취제를 사용한 무통 분만을 해줄 것을 주장했고, 역시 아픈 건 눈 뜨고 보지 못하는 성미인 시어머니 폴린이 흔쾌히 동의하여 “반 마취 상태” 분만을 했다.


​  폴린이 가진 것은, 솔직히 말하자면 돈밖에 없다. 돈을 매개로 사회 각지에 권력을 쥐었고, 두 번의 결혼을 했으며, 아이들을 훌륭하게 키울 수 있었다. 눈에 거슬리는 것은 무조건 수표를 발행해 보기 좋도록 개선해야 하며, 주위 사람들이 겪을 고통 역시 거침없이 수표를 써서 최고의 조건에서, 제일 고통이 없는 상태를 만들어주어야 복장이 편하다. 그래서 기본적으로는 착한 사람이다. 여기서 ‘기본적으로는’이라는 조건을 빼도 마찬가지다. 착한 사람이다. 나는 모든 소설의 주인공 가운데 폴린 만큼 착한 사람은 본 적이 없는 거 같다. 뭐 착한 게 언제나 좋다는 건 아니지만. 하여간.

  폴린은 몸의 통감 신경에서 뉴런을 타고 전해지는 고통은 물론이고 마음의 부담도 만들지 않으며, 만일 만들었다면 빨리, 가능하다면 즉시 없애고 싶다. 그리하여 작중 초반엔 근사한 마인드 콘트롤을 하는 인도 사람, 마하트마라고 폴린이 줄여 말하는 사람의 운동 치료를 받고 있다. 그러다가 마하트마의 운영방식과 동원된 사람들과의 외설적인 사진 같은 것이 매스컴에서 보도하여 시끄러워지자, 이렇게 나대서 시끄러워지고 누군가 창피함에 노출되는 심적 고통을 견디지 못하는 폴린은 잘 나가는 뉴욕 로펌의 대표변호사인 남편 덱스터 맨퍼드를 설득해 재판이 열리지 않게 해달라고 부탁한다.

  그러나 천만에. 맨퍼드는 당장 큰 돈이 되고 사회적으로 관심이 쏟아진 사건을 수임하는 것이 돈과 명성에 얼마나 도움이 되는 지 너무 잘 이해하고 있었다. 일간 유야무야 아내에게 무질러 놓은 맨퍼드. 그는 의붓아들 짐과 의붓며느리 리타를 많이 사랑해서 저녁 먹으러 자주 아들네 집에 찾아가기도 했는데, 가다가 주머니에 넣은 신문을 펼쳐보니, 천상의 옷만 입은(쉬운 말로 ‘누드’) 여성들 사이에 아뿔싸, 며느리 리타의 얼굴도 보이는 거였다. 그래서 어떻게 되겠어? 변호사 맨퍼드는 의뢰인을 찾아가, 사건을 재판에 붙이면 이긴다 해도 결코 좋은 꼴을 보지도 못하고 오히려 의뢰인의 딸에게만 엉뚱한 꼬리표가 붙을 거라고 점잖게 설득, 사건을 무마시켜버린다.

  이디스 워튼이 이 다음에 준비한 아픔, 혹은 어쩌면 지독하게 아플 수 있는 일은, 자유분방하고 미국 역사상 거의 최초로 극도로 개인주의적인 리타가 성실한 짐을 버리고 이혼하겠다는 마음을 먹는 거다. 비슷한 성향을 지닌 부르주아 가족 구성원인 폴린과 맨퍼드는 리타-짐 커플의 이혼을 막기 위하여 두 주일간 리타를 현대적으로 개조한 시더리지 농장으로 함께 가 부활절 휴가를 보내는 거였다. 휴가 기간동안 리타는 덱스터, 폴린, 니나와 함께 충분한 대화를 할 수 있기도 하고, 여유롭게 인생을 생각할 수도 있으며, 어떻게 사는 게 더 본인한테 중요한 것인가를 숙고할 수도 있으니까.

  물론 이 꼰대들의 생각은, 수원 밑에 병점 찍고, 오산이긴 하지만.


​  아, 맞아. 나는 이렇게 돈지랄하는 아메리칸 부르주아 이디스 워튼을 좋아하지 않았었던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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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이 2023-06-29 09:1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마지막 문장 왜 이렇게 아재처럼 쓰셨어요. 한참 웃었잖아요. 전 이디스 워튼 별로 안 맞아서 하나 읽고 더 이상 읽을 마음 들지 않지만 소설 이야기 해주시니까 어쩐지 궁금해지긴 해요. 장마 무탈하게 잘 보내시기를~

Falstaff 2023-06-29 13:35   좋아요 1 | URL
˝오산˝ 때문에 그러시는 거죠? ㅎㅎㅎ

1954년에 밥 호프가 매릴린 먼로를 데리고 우리나라 오산 미군 기지에 와서 위문공연을 했습니다. 물론 이후에도 호프는 두번인가 세번인가 더 왔더랬습니다만, 하여튼 54년 공연에서 연병장에 빼곡하게 앉아 있는 미군 병사들한테 농담을 하기를,
여러분이 깔고 앉은 땅 이름이 오산인뎁쇼, 그게 영어로 하면 miscalculation이란 뜻입니다.
이래서 장병들이 눈알은 매릴린 먼로만 바라보고도 열심히 웃어주었답니다.
그걸 패러디해서 간혹 써먹는 귀절이랍니다. 그러니까 아재 개그를 넘어 할배 개그. ㅋㅋㅋㅋㅋ

그레이스 2023-06-30 06:33   좋아요 1 | URL
ㅎㅎ
리뷰도 재밌지만 댓글 넘 재밌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