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문 뒤에서 ㅣ 인문 서가에 꽂힌 작가들
조르조 바사니 지음, 김운찬 옮김 / 문학동네 / 2018년 4월
평점 :
.
도서관 개가실에서 바사니 선집을 발견한 순간, 이 시리즈는 금방 읽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고, 아니나 다를까, 이제 선집의 4권 <문 뒤에서>까지 왔다. 이제 <핀치콘티니가의 정원> 한 권 남았다. 아껴가며 읽어야겠다. 마음에 든다고 한 번에 확 읽어 치우기엔 참 쓸쓸한 작가이고 문장들이다.
책 날개의 작가 소개에는, “바사니 문학의 원천은 ‘페라라’와 ‘유대인’이다.” 라고 쓰여있다. 실제로는 바사니가 그랬다는 증거가 하나도 없기는 하지만, <금테 안경>과 <문 뒤에서>의 주인공이 동성애적 성향을 가지고 있거나 가지고 있다고 암시하는 걸 봐서, ‘동성애’ 특히 남성 동성애자인 ‘게이’도 바사니 문학의 한 원천으로 생각해 봄 직하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바사니는 반파시스트 저항운동을 하다가 1943년 5월에 체포당했는데, 무소리니가 정권을 빼앗긴 7월 26일에 바로 석방이 되고, 이로부터 1주일 후에 발레리아 시니갈리아와 결혼해 딸, 아들 각 하나씩 두었다. 발레리아와 죽음이 둘을 갈라놓을 때까지 함께 살 줄 알았지만 인생이 어디 마음먹은 대로 되는 것이 아니어서, 죽음 대신 서류에 인감도장 찍는 걸로 갈라서고 예순한 살이던 1977년에 새로운 동반자 포르티아 프레비스와 여생을 같이 한 것으로 보아 이이한테는 동성애적 성향은 없었다고 봐도 좋을 듯하다. 뭐 그렇다는 거다.
1인칭 시점이다. 화자 ‘나’는 유년, 소년, 청소년, 청년, 성인 시절을 둘러보아도 여러 번 절망의 바닥을 찍었다고 엄살을 부리면서 시작한다. 물론 그렇기는 했다. ‘나’는 1913년 정도에, 유럽에서 그나마 유대인 차별이 덜 한 이탈리아에서 태어나 유년시절 이후, 페라라Ferrara에서 보낸 고등학교 1학년, 서기 1929년 10월에서 1930년 6월까지가 유독 암울했던 기억이 있다면서, 이 시기의 학창시절에 관하여 말하기 시작한다. 세월이 많이 흘러 ‘나’가 쉰 살도 넘긴 다음에 생각해보니 이 시절 이후에 흐른 세월은 결국 아무 소용도 없었다고, 그 정도로 온전히 비밀한 상처로 남은 아픔이었고 결코 시간마저 치료해주지 못했다고 주장한다. 아예 치료가 불가능한 상처.
처음부터 직진하자. 유대 디아스포라로 몇 천 년을 지내다가 할아버지 대에 와서 많은 돈을 벌어 이제 노동할 필요 없이 사는 유대 부르주아가 있고, 공부를 많이 해 의사가 되었지만 큰 도시에서 잘 나가는 의원을 차릴 돈이 없어 박봉만 받으며 산골 마을 보건소에서 왕진을 다니는 가난한 의사가 있다면 어느 것을 택할 터인가. 사는 게 다 그렇다. 유대 부르주아라고 해서, 가난한 유럽인 의사라고 해서, 아니 보통 인종 가운데 어찌 아픈 상처, 그것도 더럽게 아파 시간이 아무리 흘러도 아물지 않는 상처 하나 없는 인간이 세상 70억 인구 가운데 몇 명이나 있을 것 같은가? 만일 당신이 이런 사람을 알고 있다면 세 명만 나한테 소개시켜달라. 십만 원 줄게. 돈이 있건, 권력이 있건, 하다못해 돈도 없고 권력도 없지만 가방 끈이 길어 머리에 든 것이 많건, 아니건 간에 다 자기 나름대로 아물지 않는 상처가 있고 우리는 그걸 트라우마라고 하지 않는가 말이지.
그럼 이 책 <문 뒤에서>는? 1920년대에 극심한 사춘기를 겪던 고등학교 1학년 학생들의 후일담이라고 간단하게 말할 수 있지만, 이렇게 책임 없게 이야기하는 것은, <안나 카레리나>가 “유부녀 바람나서 인생 조지는 소설”이라 하는 것과 비슷하다. 바사니나 톨백작이나 문제는 이야기를 꾸리는 재료인 문장과 서사구조, 그리고 호소, 이런 것들을 다 합해 우리가 흔하게 말하는 “문학”이다.
대개 이 시절을 그린 작품들은 학교, 교실이라는 정글에서 벌어지는 생존기가 대부분이라, 나도 바사니 표 고등학교 교실의 폭력적 만화경을 은근히 기대했지만, 아니었다. 이탈리아에서 갓 태동하기 시작한 파시즘 시절, ‘심각한’ 유대인 차별 역시 막 싹이 돋기 시작할 무렵, 아직은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특별하게 종교 수업을 면제해주는 관용의 시절이 유지되고 있을 시기였는데, 리차노인벨베데레 산골마을에서 박봉에 시달리며 십 년간 보건소 진료의사를 하는, 왕왕 심심풀이로 아내와 아이들을 때려잡던 풀가 씨가 솔가해 페라라로 이사, 아들 루차노 풀가를 ‘나’와 같은 학교, 학년, 반으로 전학시키면서 파도가 일기 시작한다. 한 달에 천오백 리라 가웃의 비용을 내야 하지만, 3류 선술집에 더 가까운 싸구려 호텔에 일단 짐을 풀자마자 풀가 씨는 아들 루차노를 책도, 공책도 없이 달랑 펜과 잉크만 쥐어 학교로 보내버렸다.
화자 ‘나’는 루차노를 위해 과제를 할 때 써야 할 필기용지도 주고 당분간 옆에 앉는 ‘짝’도 해주었는데, 루차노 풀가, 얘 좀 봐라, 아무렇지도 않게 ‘나’의 과제를 슥슥 베끼는 거다. 교실에는 페라라 최고 부자의 아들이자 중1 때부터 모든 과목에서 8~9점을 받아 언제나 모두 인정하는 우등생 카를로 카톨리카가 부동의 최고 권력을 누리고 있었고, 바로 밑에 화자 ‘나’가 어려서부터 인생무상의 참뜻을 숙고하느라 조금 삐딱한 시선으로 세상을 꼬나보기 ‘시작하고’ 있었다. 즉 다른 아이들보다 약간 늦되게 사춘기를 시작했다는 말이다. 열여섯 살이 되어 아직도 자위를 시작하지 않은 거의 유일한 학급 남학생. 이 학교는 남녀 공학이라 소수이기는 하지만 (그래서 작품 내내 존재감이 없기는 하지만) 학급에 여학생도 몇 명 함께 수업을 받고 있다. 카를로 주위에는 공부 좀 하는 아이들이 둘러싸고, ‘나’는 소위 독립군이었는데, 이제 루차노 풀가가 전학해 옴으로 해서 ‘나’의 집에 와서 숙제도 함께 하고, 등하교도 같이 하는 작은 또래를 이룬 것.
보잘것없는 외모에 변변치 않는 의복, 그리고 가난이 뚝뚝 떨어지는 머릿기름이 흐르는 목덜미 냄새 등을 장착한 루차노 풀가는 파시스트 아버지의 아들이라는 점을 기억해두는 것이 편하다. (그러나 루차노 또한 그 시절을 치유하지 못할 상처의 시간으로 기억하고 있을 듯) ‘나’는 루차노를 보자마자 그가 ‘나’에게 “우리 가족의 부르주아적 안정감과 경제적 안전, 사회적 신분”을 질투하면서 동시에 경멸하는 인상을 받았다. 유대인이라서. 유대인은 돈이 아무리 많을지언정 근본이 천하고, 성격도 막 돼먹었으면서 천성이 사기꾼이라 절대 가까이하면 안 될 인종, 이라고 생각하는 건가?
안 알려드린다. 이 짧은 장편소설에서 아무리 사소한 내용이라도 여차하면 스포일러로 작용할 것을 알고 있어서 조심스럽다. 그리고 만일 그렇더라도, 아니다,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 그걸 얘기하면 당신이 이 책을 재미있게 읽지 못하게 방해거리가 될 수도 있겠다.
아픈 이야기. 많은 사람들이 한 번 쯤은 알게 모르게 겪게 되는 소외와 단절의 이야기. 그걸 조르조 바사니는 이렇게 산뜻한 문장으로, 마치 수채화처럼 그려놓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