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과 영원의 시계방 초월 2
김희선 지음 / 허블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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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태 네 권의 김희선을 읽었다. 처음 낸 단행본 《라면의 황제》로 깊은 인상을 받았다. 장편소설 <무한의 책>은 요즘 작가들과 완전하게 다른 김희선 만의 세계를 과시하기도 했다. 그리하여 이대로만 하면 앞으로 30년 후에도 독자들이 찾아 읽을 좋은 소설가가 될 것 같다는 믿음이 있었다. 미리 얘기해두자. 여태까지, 그리고 앞으로의 내용 모두, 내가 건방지게 무슨 견해가 있어서 하는 평론질이 아니라 한 독자로 작품을 읽고 난 감상, 즉 한 아마추어 독자의 독후감일 뿐이라는 점. 이런 의미에서 조금 매몰차게 이야기하자면 세 번째 읽은 단편집 《골든 에이지》와 장편 <무언가 위험한 것이 온다>를 읽은 다음에는 그만 실망하고 말았다. 처음 두 권 이상을 기대했건만 작품(들)에 공감할 수도, 동의할 수도 없었다. 그래, 김희선은 조금 쉬고 나중에 읽자, 마음을 먹고 기다리다가 알라딘의 서평이 좋아 다시 이이의 단편집을 골랐으니 지금 읽기를 막 끝낸 《빛과 영원의 시계방》이다.


​  책을 읽은 “나의” 감상을 단 한 문장으로 쓴다면, “드디어 김희선이 돌아왔다.” 《골든 에이지》에서는 작품마다 억지와 작위 같은 것이 보여 즐거이 읽지 못했는데, 《빛과 영원의 시계방》은 전 작품을 통해 시간과, 인공지능과, 차원의 연속 또는 순환과, 현실인식과 사회성의 연관성을 발견할 수 있었으며, 이 요소들이 여덟 편의 단편 속에서 적절하게 변주, 연결되고 있어서, 작가가 하고 싶은 말을 최적의 상태로 이야기하는 결과를 만들기도 한 것 같다.

  단편 소설이라서 각각의 스토리를 소개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더구나 작품들이 독특한 주제를 갖고 있는 바에 미리 김을 빼놓는 것은 앞으로 이 책을 읽을 독자에게 욕이나 먹을 일이다. 다만 몇 가지만 말하자면, 두 번째 실린 <달을 멈추다>를 읽으면서 나는 최민식도 출연한 헐리웃 영화 <루시>가 줄곧 떠올랐다. 사람의 뇌를 슬라이스 해서 스캔한 후 컴퓨터에 저장을 하면, 육신은 숨을 거두어도 뇌의 활동, 인간이 “영혼”이라고 불리는 것은 영생할 수 있다는 아이디어가 <루시>에서 마지막 장면, 사람 자체가 컴퓨터와 결합하는 것과 매우 유사하게 봤으며, <무언가 위험한 것이 온다>를 이런 식으로 썼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고 아쉬워하기도 했다. 즉, 우주 바이러스를 이용하여 (이게 정확한 기억인지는 모르겠지만 하여튼 비슷하게) 한 인간의 영혼이 다른 사람의 몸으로 쳐들어가 원래 있던 영혼을 간단하게 제압해, 그 인간의 영혼은 육신을 갈아타면서 영생을 이룰 수 있다는 것보다 얼마나 설득력이 있었겠느냐, 하는 거다. 스웨덴의 뇌과학자가 저 통일신라 시대의 월명사와 같은 인물로 <제망매가>를 썼다는 것, 시간은 결코 한 방향으로 흐르지 않고 상호작용을 하기도 하는데 이게 윤회인가, 아닌가. 아니다. 시간의 다양한 흐름일 뿐이다.

  사실 나는 유물론자로(20세기 말에 젊고 예쁜 문학 공부하는 한 여성이 나더러 그랬지, 흥, 유물론자 좋아하네! 그이는 지금 뭐하고 사는지 몰라.) 영혼 같은 건 뇌의 원자 신경조직이 만들어내는 화학작용이라고 생각할 뿐이다. 그러니까 영혼=생각. 더 쉬운 얘기로 하자면, “영혼이란 없다.” 하지만 내가 영혼 따위를 믿지 않는다고 해서 영혼이 있으며, 그것을 통해 영생을 이룰 수도 있다는 아이디어까지 무시한다는 말은 아니다. 이제 인간의 영혼이 AI화 하고, AI화 했으니 당연히 컴퓨터 기억장치에 내장이 되어, 즉 영혼이, 창조까지 하는 AI 단계로 들어가 전압이 흐르기만 하면 언제까지라도 영생하는 단계라는 건데, 사실 영생이라기보다 인간 문명이 유지되는 선까지이기는 하지만, 인간문명이 사라지면 전기를 만들어낼 수 없으니까, 기껏해야 대 빙하기가 도래할 3만년 정도라도, 그게 어디야 3만년이, 몸은 없어질지언정 영혼, 뇌활동, 생각일 뿐이겠지만, 그렇게 오래 살고 싶을까? 하긴 생로병사가 없으니 그럴 수 있겠다 싶다. 이제 겨우 수십 년을 산 나도 그동안 경험하고 배우고 읽고 해서 쌓인 메모리가 즐겁지 않은데 무려 3만년동안 이 짓을 한다고 생각하니, 아이고. 난 그저 때가 오면 소멸하는 그런 인류가 되련다.


​  시간 이야기가 나왔으니 조금 더 살을 붙이면, 일찍이 시간여행을 떠나는 소설작품은 좀 있었다. 저 멀리 <타임 머신>도 있고, 가까이엔 복거일이 쓴 <시간 속의 나그네>도 있었다. (모두 여섯 권으로 된 복거일의 매력적인 작품이지만 3권까지만 읽으시라. 20년 후에 완결한 후반부는 완전히 그냥 보수가 아니라 꼴보수로 자리를 굳힌 복거일의 신자유주의 신념 빼면 아무것도 없으니) 이 두 작품은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가지만 시간의 흐름은 딱 하나밖에 없어서 후세에 영향을 끼칠 수 있는 미래 제작물, 예를 들어 플라스틱이나 금속제품 같은 것을 절대로 남기지 않아야 하는 반면에, 김희선의 경우엔 아무 제재가 없다. 왜냐하면 시간이 흐르는 길은 다양하기 때문이다. 무수한 경우의 시간 길을 통해 우주가 흘러간다는 생각은, 또한 자연스럽게 현재의 우주가 커다란 거북이의 등껍질 위에서 벌어지는 일이며, 이 커다란 거북이는 자신보다 훨씬 거대한 다른 거북이의 등껍질 위에 있다는 생각으로까지 확장한다. 1990년대 초에 복거일의 시간여행에 매료되었는데, 이제 김희선을 읽으니 복거일도 확실히 낡았다. 근데 이 거북이 장면도 작품 속에 등장하는 영화 MIB, <맨 인 블랙>의 로커(사물함)을 차용한 것 아닌가 싶기도 하다. 로커 안의 로커, 그 안의 로커, 로커 밖의 또다른 로커.

  이 책에서 김희선의 시간에 대한 집요한 사색은 계속된다. 현상의 삼차원에 한 차원을 보태는 의미에서 시간이라면, 그것을 AI와 연결해, 당신이 이 글을 읽고 있는 모니터가 진실인지, 모니터 밖에 앉은 당신의 세계가 진실인지도 당연히 의문문을 던져야 하고, 김희선은 정말로 그러고 있다.


​  김희선이 돌아왔다. 이 책이 내가 아는 김희선이다.


  옥의 티.

  “떡갈나무 탁자는, 밀라노 칙령이 선포되고나서 얼마 뒤 아우구스투스 황제에게 바쳐졌다. 그가, 지금까지도 두고두고 인구에 회자되는 유명한 책 『고백록』을 그 떡갈나무 탁자에서 썼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기도 하다.” (p.49)

  :  『고백록』은 아우구스투스 황제가 아니라 성직자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작품이다. 많은 사람들이 헷갈리는 대목이기는 하지만 글을 써서 돈을 받는 사람은 늘 조심해야 할 터.


​  하나 더? 인류 최초의 우주인 가가린이 1962년 소련 과학 당국의 ‘꿈의 기록’에 관한 프로젝트에 참여를 강요당하는 과정에 뇌과학자가 “블랙홀”이란 단어를 자연스럽게 사용한다. 블랙홀이란 개념은 벌써 있었지만, 미국의 천체물리학자가 최초로 블랙홀이란 단어를 사용하자고 제안한 해가 1962년이다. 소련은 블랙홀이란 단어를 최강의 냉전 상대국인 미국인이 제안한 게 재수없어서 다른 단어를 사용한 걸로 기억하는데 어떤 단어인지는 잊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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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마요정 2023-05-04 22:3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오오 마음에 드셨다니 다행입니다!! 멋진 리뷰 잘 읽었습니다. 시간은 정말 어려워요^^

영혼(정확히는 뇌)가 AI에 올라타는 것으로 우리는 영생을 살 수 있을까요? 어떤 소설에선 늪 속의 유기물로 합쳐지고 어떤 소설에선 곰팡이 같은 균류에 합쳐지는데 이젠 가상세계에 남게 되겠네요. 뭔가 잊혀질 권리가 점점 더 중요해질 것 같아요.

Falstaff 2023-05-05 07:30   좋아요 1 | URL
오랜 인터넷 동무님하고 얘기하다가....
영혼이 AI에 올라타서 기계의 몸은 얻는 일, 다른 사람과 육체를 스왑하는 일은 이미 <은하철도 999>에서 나온 아이디어이며, 애거사 크리스티의 <네 번째 남자>에서 이미 다른 육체로 영혼이 옮겨다니는 빙의를 경험했다 등등....
저도 깜짝 놀랐습니다.제가 은하철도 이전 세대, 많이는 아니고 바로 전 세대라서 미처 몰랐거든요.

꼬마요정 2023-05-05 10:11   좋아요 1 | URL
아!! 맞네요. 은하철도999는 기계몸으로 가는 거였죠? 다른 사람과 육체를 바꾸는 이야기 중에 오래된 건 달마대사 이야기일 거 같아요. 갑자기 생각나요. 그리고 울트라맨도 있네요. 테레시아스는 남자 여자 모두의 몸으로 살기도 했죠. 오오 소름 돋아요. 세상에 옛날 사람들 천재인가봐요!!!

얄라알라 2023-05-07 18:4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cyrus님과 골드문트님,
알라딘 서재에서 너무나 중요한 역할을 해주고 계십니다. 물론 존재 자체로 감사드리지만, 이렇게 꼼꼼히 알려주신 덕분에 잘 모르고 실수할 경우를 줄여주시니까요. [고백록] 저자 이름 기억하는 데만도 3초 걸리는 저로서는 황제와 성직자를 구분해야함을 오늘 첨 생각해보았습니다.

김희선 작가님 골드문트님 리뷰 읽으면 기분 좋으시겠어요. ˝돌아왔다!˝^^ 애정 담뿍 담긴 응원!

Falstaff 2023-05-07 21:22   좋아요 2 | URL
아이고, 제가 어떻게 cyrus 님하고 같은 자리에 있을 수 있습니까. 그저 그냥 황감하지만 기분은 좋네요.
제가 김희선 데뷔 때부터 재미나게 읽었었는데 그만 최근 두 권이 마음에 안 들어 왜 이러나 싶었었거든요. 뭐 그저 아마추어가 책 읽은 감상이니 진지하게 생각하실 필요 없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