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리스 민음사 모던 클래식 46
유디트 헤르만 지음, 이용숙 옮김 / 민음사 / 2011년 5월
평점 :
절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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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 년 전 유디트 헤르만의 작품집 《단지 유령일 뿐》을 읽고 단박에 70년 개띠 작가에게 반해버렸다. 참 주책도 없이 독후감 끄트머리에 이렇게 써버렸다.

  “정말 오랜만에 유디트 헤르만, 낯선 여자한테, 단 한 번의 눈길로 사랑에 빠져버렸지 뭔가.”

  이후 또다른 단편집 《여름 별장, 그 후》도 찾아 읽었으나 《알리스》는 품절 또는 절판이라 도통 구할 수 없었는데 은퇴하고 다니기 시작한 도서관에서 발견해 상호대차를 통해 읽었다

  짧은 단편집. 또는 다섯 편의 단편으로 이루어진 연작 장편. 이번에 작품들을 관통하는 것은 죽음이다. 알리스Alice라는 이름의 여인이 주변에서 죽음을 맞는 다섯 명의 경우를 담담하게 서술하고 있다.


​  알리스는 남자 미햐를 만났다. 사랑했고 그렇다고 결혼한 건 아니었으며 함께 살았다. 2000년 6월에 둘은 여행을 떠났으며 즐거운 휴가를 즐기고 휴가의 마지막 날엔 괜찮은 식사에 괜찮은 와인을 마시면서 아무렇지도 않게 이별했다. 우리는 내일 헤어지는 거야. 그래. 미햐가 말한다. 내일 가서 집을 정리할 테니까 너는 며칠 있다가 와. 그렇게 둘은 마치 계약기간이 끝난 운동 선수들인 것처럼 그렇게 평화롭게 이별했다. 여전히 사랑하지만 뭐 그냥 헤어져보는 게 어떨까? 그래, 인생은 생각보다 길 수도 있으니 이렇게 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 같네. 집에 돌아간 알리스는 살던 집이 깨끗하게 청소되어 있는 것을 알았고 그의 물건만 정확하게 사라져버렸다는 것을 둘러 보지도 않고 순식간에 알아차렸다. 체온, 그거 하나 만이라도 남겨두고 갔으면 더 좋았을 텐데. 부질없는 생각을 한 번쯤 해보았을 지도 모른다. 그리고 여전한 삶은 계속됐다. 어떤 일이 있어도 생활은 계속 해야 하는 것이라서.

  몇 년 후, 마야의 전화를 받았다. 독일 남서부에 있는 자를란트 주의 츠바이브뤼켄에서 미햐가 죽어가고 있다고. 알리스는 알고 있었다. 마야를 만난 적은 없지만 그가 미햐와 결혼해서 등에 하트 모양의 반점이 있는 눈부시게 아름다운 아이를 낳은 지 얼마 되지 않았다는 것을. 미햐는 돌이킬 수 없이 암이 깊어져 이제 모르핀을 주사해 고통을 덜어줄 뿐 최후의 날이 내일 혹은 모레가 될 지도 모를 지경에 이르렀으니 그가 죽기 전에 한 번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고 했다. 알리스는 동의했다. 그리하여 기차를 타고 츠바이브뤼켄에 도착해 마름모꼴 무늬 환자복을 입은 미햐, 뼈가 앙상하게 드러날 정도로 말라 해골같이 보이지만 손은 언제나 그랬듯이 부드럽고 따뜻한 미햐를 정말로 볼 수 있었으며, 미햐가 듣기도 하고 감촉도 느낄 수 있다는 간호사의 말을 믿지 않으면서도 마야가 없는 틈을 타 입술에 평소 자기가 하고 싶었던 스타일의 키스를 하기도 했다.

  그리고 며칠 후, 미햐는 죽는다. 그날 오후 알리스는 기차를 타고 베를린으로 떠난다. 숙소에 앉아 더 이상 미햐가 누워 있지 않은 병원을 바라보며 하룻밤을 더 보낸다면 미쳐 버릴 것만 같아서. 가족인 마야와 아이는 남아서 처리할 일이 있다. 알리스는 마야와 베를린에서 만나자고 약속하며 기차역까지 가는 택시에 오른다.

  유디트 헤르만은 쉽게 감정을 내보이지 않는다. 죽어가는 모습이 사실 그리 아름답지 않다. 알리스가 전에 사랑하기는 했지만, 어쩌면 아직도 사랑하고 있는 지도 모르긴 하지만, 이미 죽음의 손톱이 어루만져 겨우 호흡만 이어가는 환자의 입술에 키스를 하는 장면만 빼면 심지어 드라이한 문장으로 죽음이라고 말하는 인생 자체를 간결하게 정리한 작품이라 할 수도 있겠다. 알리스는 그곳에서 한 주 정도의 시간을 보내면서 미햐의 마지막 곁을 지켰으나, 그의 숨이 넘어가자마자 장례절차에 전혀 개입하지도, 참여하지도 않고 곧바로 집과 생활이 있는 베를린으로 떠난다. 죽음으로 이미 모든 것이, 완벽하게 정리되었다는 것이겠지. 미련을 더 두어 무엇을 할까.


​  두번째 작품 <콘라트> 역시 죽음의 이야기. <미햐>와 마찬가지로 이 작품에서도 죽는 사람의 이름이 콘라트이다. 콘라트가 알리스를 초청한다. 마침 여름이라 북이탈리아의 호숫가에 있는 자기 집에 놀러와 휴가를 즐기라면서. 친구를 데리고 와도 좋다고 해서, 알리스는 안나, 루마니아 남자, 이렇게 세 명이 독일에서 차를 몰고 북이탈리아로 향한다. 사실 처음 가보는 집이다. 콘라트가 구식 방법인 편지를 써서 오는 방법과 약도 같은 것을 보내주어 그것만 보고 따라간다. 드디어 도착한 노랗게 벽을 색칠한 집. 벨을 누르니 나타난 사람은 콘라트의 아내 로테. 콘라트는 심하지 않지만 열이 올라 지금 2층 침실에 있다면서 지금 모습을 보이는 걸 싫어해 나중에 보자고 한다. 유럽 사람들은 그것이 예절인 모양이다. 그래도 이들은 어차피 휴가를 온 것이니 첫날부터 빙하가 녹아 모인 물이라서 차디찬 호수에 들어가 수영을 하고 일광욕을 하고, 가까운 식당에서 괜찮은 식사와 뻗어버릴 만큼 술을 들이켠다. 그러는 동안 콘라트의 열이 점점 더 높아지고 내일 아침, 거의 새벽에는 환자를 입원시켜야 하겠으니 루마니아 남자가 운전해 주는 일을 자원한다. 불과 몇 시간 남지 않았고 지금은 완전히 만취상태인데.

  그러나 만취/숙취 운전으로 사고는 발생하지 않았다. 정상적으로 병원에 입원한 콘라트 씨는 점점 상태가 좋아지지 않았고, 급성 폐렴으로 번졌으며, 며칠 후 세상을 뜨고 만다.

  휴가객들은 한 사람의 생명이 꺼져가는 상황에서도 여전히 찬 호숫물에서 수영을 하고, 위험해 보일만큼 멀리 헤엄쳐 나가기도 하고, 차례로 루마니아 남자와 관계를 갖기도 한다. 죽음은 죽음이고, 삶은 삶이니까. 콘라트는 관에 실려 알프스를 넘어 고향 독일로 향하고, 세 명의 여행객은 다시 차에 타서 지루한 운전을 시작한다.


​  세번째 <리하르트>에서는 리하르트의 커플인 마르가레테가 부탁 전화를 한다. 담배와 물이 필요하다고, 사실 그 밖엔 필요한 게 없지만 담배와 물은 정말, 당장 필요하니까 사다 달라고. 그래서 알리스는 동거인 라이몬트가 책을 보며 침대에 누워 있는 토요일 오후에 편의점에 들러 생수와 여자들이 피우는 슬림라인 담배 두 갑을 사서 중증환자 리하르트가 누워있는 병원으로 향한다. 그리고 언제나처럼 리하르트는 죽는다. 네번째 작품 <말테>는 이미 죽은 알리스의 외삼촌이다. 40년 전 3월에 스스로 목숨을 끊어 4월에 태어난 알리스는 말테 삼촌을 본 적도 없다. 살면서 누군가의 기억 속에서 슬금슬금, 가끔 기어나오기도 했던 말테 삼촌의 행적을 찾아보고, 삼촌의 애인이 삼촌보다 열 살 정도 많았던 프리드리히 씨였다는 걸 알아냈다. 그리고 세월이 흘렀고, 문득 기억이 난 알리스는 전화번호부에서 프리드리히 씨의 전화와 주소를 알아내 연락을 해, 만났다. 이미 40년이 흐른 오래된 죽음. 시간에 의한 부식된 죽음의 잔해. 그렇다. 덧없다. 마지막 <라이몬트>는 <말테>보다 더 세월이 흐른 날, 남편인지 여전히 그저 동거인인지 밝히지 않은 반려자 라이몬트의 죽음이다. 평소 알리스보다 오래 살겠다고 말해온 남자. 말 한 대로, 마음 먹은 대로 되면 그건 인생이 아니어서 라이몬트가 일찌감치 생을 접었다. 다시 홀로 남은 알리스. 이이는 자신의 삶 속에서 경험한 죽음, 또는 죽음과 관계된 일을 다시 한 번 회상하면서 마지막 작품 속에서 앞의 네 죽음을 소환하며 마지막 작품을 맺는다.


​  유디트 헤르만 다운 작품집, 혹은 연작 장편이다. 화려한 수사 대신 서늘한 바람으로 공간을 채우는 헤르만. 이이를 감상하는 포인트는 단연 문장, 또는 문체다. 냉정하고 간결한 문장으로 죽음을 이야기하면서도 궁극적으로 독자에게 죽음의 극복이나 삶의 연속을 생각하게 하는 작품들. 이렇게 글을 쓰니 어떻게 한 자리에서 다 읽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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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23-04-29 09:5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알리스> 망한 반디 통해서
어렵사리 구했던 기억이 납니다.

아는 지인이 한국에서 책은 일단
언제 절판될 지 모르니 당장 읽지
않아도 사두어야 한다고 했었는데
격공하는 바입니다.

저마니 스타일의 심드렁하면서도
뭐랄까 인간 내면의 무언가를 톡톡
건드리는 맛이 아주 기냥.

Falstaff 2023-04-29 17:16   좋아요 1 | URL
오, 반디. 오랜만에 듣는 이름입니다.
하여튼 유디트 헤르만, 독자를 은근히 끌어들이는 매력이 있는 작가입니다. 진짜 제 취향입니다. ㅋㅋ

coolcat329 2023-05-01 19: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단지 유령..골드문트님 강추로 사뒀는데 까맣게 잊고 있었네요.
이런 책도 있군요..
죽음을 소재로 한 연작소설이라니 끄립니다. 몽환적인 표지도 이쁘구요.
저도 일단 구해보고 못 구하면 나중에 도서관에서 빌려 읽어야 겠습니다.

Falstaff 2023-05-02 05:30   좋아요 1 | URL
제 취향에 딱 맞는 작가입니다. 다른 분들한테도 맞는지 아닌지는 잘 모르겠고요. 아무쪼록 쿨캣 님도 즐기실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전 이런 스타일을 꽤 좋아하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