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개
박솔뫼 지음 / 스위밍꿀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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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음으로 해서 후장사실주의 소설가 가운데 두 권의 책을 읽은 유일한 작가가 박솔뫼가 됐다. 전에 자음과모음에서 출간한 장편 <을>을 나름대로 근사하게 읽어서 이번엔 박솔뫼의 단편집을 골랐는데,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짧은 단편 꼴랑 네 편 싣고 한 권을 내면, 거 참, 읽는 독자는 좀 섭하지. 다행스럽게도 편편이 참 기막힌 아이디어로 만들어서 그것 봐라, 내가 눈썰미 좀 있지, 라고 다독일 수 있었지만 말이다. <을>은 다른 후장주의 작가들하고 별 변별이 없었으나 《사랑하는 개》는 그렇지 않았다. 박솔뫼를 이제 겨우 두 권 읽었으며 정지돈, 오한기, 이상우의 책을 각 한 권씩 읽었을 뿐이라는 전제로 말하자면 《사랑하는 개》는 이들의 상상력에서도 방향을 좀 달리하지 않았는가 싶었다. 물론 책을 읽어보면 말이 후장주의 동인이지 서로 자주 만나지도 않고 교류나 의견 교환 같은 것도 생각만큼 잦지 않은 거 같다. 또 아무리 동인이라도 서로 추구하는 바가 달라야지 동인이라고 무조건 고지를 향하여 돌격 앞으로만 외치면 그게 무슨 재미일까 싶기도 하고.

단연 <고기 먹으러 가는 길>을 흥미롭게 읽었다.

남쪽이 고향이고 그곳에서 사는 것처럼 보이는 두 명이 북쪽의 숙소에 도착한다. 점심시간이 지나 갑작스럽게 폭설이 쏟아졌다. 이번 여행이 이들의 초행길이 아니라서 전에 왔을 때 밥을 먹었던 식당에 가고 싶었다. 그러나 폭설 때문에, 그리고 아마도 시간이 흘러, 장소가 어디 있는지 정확하게 기억하지 못한다. 점심은 대강 아무 곳에서나 먹고 싶다. 그래도 호오가 있어서 파스타를 먹고 싶다. 오다가 본 파스타 집이 있어 그곳으로 향하며, 생선구이 집이 보이기에, 파스타를 먹지 못하면 생선구이를 먹으면 되겠다 싶었는데, 파스타 집 현관에는 CLOSED 가 아니라 CLOSE 라고 쓴 보드가 걸려있고, 문을 열고 들어가봤자 아르바이트 생은 아르바이트 특유의 무표정하고 무관심한 표정으로 장사 안 하는 시간이라고 하기만 하고, 그러면서 안에선 한 노인이 커피를 마시고 있다. 어쩔 수 없이 생선구이 집에 들어가 결코 친절하지 않은 생선구이 집 사장의 눈치를 받으며 한 끼를 때우고 숙소로 돌아온다. ‘나’와 동행한 남자인지 여자인지 모를 뿐더러 그게 전혀 중요하지 않은 도형은, 곧바로 잠에 빠져들고, ‘나’는 그의 콧구멍에 손가락을 집어넣어 봤지만 후푸후푸 숨만 몇 번 쉬더니 그냥 그대로 자고 만다.

다음 장면에 등장하는 소도구. 커피 포트와 함께 있는 가습기. 가습기 세정액 때문에 호흡곤란과 폐질환을 유발하는 그런 가습기가 아니라, 작가 박솔뫼가 주목하는 건, 가습기 분출구를 통해 분사하고 있는 흰색 수증기. ‘나’는 겁에 녹차 티백을 넣고 포트에서 뜨거운 물을 붓는다. 그리고.

“컵 안의 물은 점점 노란색에 가까워지고 간신히 김을 내뿜고 있는 가습기도 여전히 할 일을 하고 있다. 내 앞의 김은 가늘게 위로 올라가고 가습기에서 나오는 흰 수증기는 좀더 존재감을 드러내며 흰색으로 좀 더 오래 남아 그 색으로 존재감을 보여주고 있었고 하지만 그것은 다른 가습기와 비교하면 가습기라고 하기에….좀…. 이 방의 건조함을 막는 데 큰 도움이 아니라 작은 도움의 작은 도움의 작은 도움 정도를 줄 정도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게 했지만 그래서 자꾸 쳐다보게 하는 것인가. 한 번씩 부글부글 소리를 내며 김을 바라보며 창밖을 보면 이웃의 건물이 건물의 창이 아니라 벽이 보이고 그 사이를 눈들이 흩어지는 눈들은 마치 너를 내가 잠들어 있는 도형을 내가 잠든 도형의 꿈을 내가 말하듯이 지켜보듯이 지나가고 있었다.”

여기까지는 그렇다고 치자. 그러나 조금 사이를 두면 가습기에서 나오는 이 흰 수증기가 희한한 생명체로 변용한다.

“가습기의 김은 여전하고 나는 컵에 물을 담아 와 가습기 안에 부어주었다. 다시 침대에 등을 기대고 가습기를 바라보았을 때 김 사이에서 닭 세 마리가 나오는 것이 보였다. 닭은 병아리와 닭 사이 크기의 부리도 벼슬도 모두 만화처럼 귀엽고 부드러운 형태로 변한 닭이라고 해야 할지 좀더 병아리에 가깝다고 해야 할지였다. 세 마리는 테이블 위 가습기의 김 사이에서 피어 나와 한 마리씩 테이블 위에 종종종 선다.”

설마 정말로 가습기의 수증기가 닭으로 변했겠나. 주인공 ‘나’의 뇌 속에서 수증기가 이렇게 변용transfiguration한 것이지. 실제로 이후에 수증기의 변용인 닭은 ‘나’에게 무슨 고기를 먹겠느냐고 물어보기도 하고, 자신이 닭이라서 자기 앞에선 닭고기를 먹겠다는 이야기를 하지 않는 것이냐고 물으며, 고기 가운데 닭고기가 제일 맛있다고, 먹고 싶으면 먹고 싶다고 해도 괜찮다고 참견하기까지 한다.

나는 박솔뫼가 이 단편 <고기 먹으러 가는 길>에서 무슨 주장을 하고 있는지 이해하지 못하고, 굳이 이해하고 싶지도 않다. 심지어 작가가 작품에서 특정하는, 갑자기 대낮에 폭설이 내리기 시작하는 반도의 그나마 북쪽 지역에 실제로 가서 썼다고 생각하지도 않고 그렇게 생각할 이유도 없다고 여긴다. 그냥 작가가 고기가 먹고 싶었구나, 그리고 어느 날, 가습기를 바라보며 폭폭 쏟아져 올라가는 수증기를 바라보면서 이게 닭처럼 생겼구나, 라고 여겼을 뿐이고, 그걸 서로 섞어서 작품을 만들지 않았을까 한다. 그게 뭐 어때서? 괜찮지 않나? 좀 깨고. 어차피 세상을 바꾸려면 깨지 않고는 결코 바꿀 수 없는 법이니 말이지.

또 세 번째 작품인 <여름의 끝으로>에도 발칙한 상상력이 돋보인다. 물론 세상 사람들 다 그런 건 아니지만 일부 여유 있고, 그렇게 할 필요가 있는 사람들에 한해 선택적으로 동면할 수 있다는 가정. 동면冬眠, 즉 겨울잠이지만 굳이 겨울에 자야 할 필요는 없고, 무슨 이유가 있어서 아마도 배부른 사람들이나 향유할 수 있고 배가 덜 부르거나 고픈 사람들은 시달릴 수밖에 없는 소위 번아웃을 느꼈을 때, 자신의 사정에 맞춰 동면에 들어갈 수 있다는 참신한 아이디어는 어떤가?

여기서 ‘나’는 여차하면 돈을 벌 수 있는 비상용으로 동면 관리사 자격증을 땄고, 딴 김에 치과의사를 하는 허은이 임신을 했다가 중도에 잘못되어 쇼크를 먹어 남편과 여전히 좋은 관계를 유지하기는 하지만 별거에 들어갔고, 일신상의 이유로 긴 휴식이 필요하다는 진단을 받아 허은의 친척이 경영하는 온양온천의 오래된 호텔 방 두 개를 빌려 이 가운데 한 방에서 40일 간의 동면을 취하기 위해 고양이 한 마리를 데리고 도착하면서 작품을 시작한다. 연말을 맞은 소도시 분위기, 오래된 호텔. 그리고 새해부터 시작하는 동면. 대전에서 KTX를 타고 우정 온양온천까지 와서 (그래야 20분 걸린다) ‘나’에게 밥을 사고 다시 전철로 서울로 올라가는 번역하는 선생님. 그러나 다른 등장인물은 별로 영양이 없다. 그저 동면. 사람이 동면을 한다는 아이디어 하나. 그거 가지고도 충분히 매력있지 아니한가?

나는 장편 <을>보다 더 재미있고, 흥미롭게 읽었다. 다만 후장사실주의자 소설답게 읽는 이에 따라 감상이 조금씩 다를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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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23-02-25 12:0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똥꼬사실주의.ㅋㅋㅋㅋ
정말 후장사실주의란 문예사조가 있긴 한 건가요?
한 10년전쯤 훅하고 튀어 나온 것 같은데 아무리 소설가들이라지만
말장난 너무한다 싶어 영 마땅치 않습니다.
골드님은 소설을 읽으신다면 외국 작품만 읽으시는 줄 알았는데
한국 젊은 작가들의 작품도 읽으시네요.
2, 30년에 욕했던 젊은 작가들 요즘 보면 나쁘지 않았는데
왜 욕을 했을까 싶을 때가 있어요. 물론 실제로 읽은 작품은 없지만...ㅋ
요즘 젊은 작가들도 앞으로 2, 30년만 버티면 그땐 추앙받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작품은 당대에는 인정 받지 못해도 훗날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요.ㅋㅋ

Falstaff 2023-02-25 15:30   좋아요 1 | URL
ㅎㅎㅎ 그냥 젊은 작가 몇명, 출판사 편집 직원, 평론가 말고 서평가 이렇게 몇 명이 모여 우리 친구 먹을까? 비슷하게, 볼라뇨의 <야만스런 탐정들>에서 나오는 ˝내장사실주의˝를 빌려서 우린 ˝후장사실주의˝라고 하자, 해서 시작한 거랍니다. 저는 불라뇨를 이미 읽었기 때문에 아무 거리낌 없이 받아 들였는데요, 그냥 처음 들으신 분들 가운데는 기분이 좋지 않은 분들도 있었을 겁니다. ㅎㅎㅎㅎ

전 우리나라 문학 좋아해요. 근데 요즘에 별로 안 읽는 건 우짜 그게 그거인 거 같은 작품들이 손에 계속 잡히더라고요. 이젠 출판사 광고글만 봐도 어떤 내용인지 짐작이 가서.... 아니더라도 뭐 그렇게 생각이 들어서, 우리 작품 고를 때는 아주 신중을 기하는 편입니다.
제 진짜 인생 책을 꼽으라면 장용학의 <원형의 전설>을 제일 먼저 거론하는 걸요!
ㅋㅋㅋㅋ

바람돌이 2023-02-25 13:0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전에도 골드문트님 글에서 후장사실주의란 말을 들었던 기억이 나네요. 딱히 의미는 없는 말이지만 이렇게 서로가 자신이 생각하는걸 자기 마음대로 열심히 진짜 자기 쪼대로 써보는거 뭐 나쁘지 않은거 같애요. 저는 한국문학의 경우 편식이 심해서 진짜 안읽은 작가가 많은데 이렇게 골드문트님 글을 보면 또 반성을 하게 되네요. (도대체 내가 읽은 것은 무엇인가 싶기도 합니다. ㅠ.ㅠ)

Falstaff 2023-02-25 15:32   좋아요 1 | URL
옙. 이이들의 작품을 보면 내용이 마음에 들거나 말거나와 관계 없이 주머니 속의 송곳 같은 면이 있더라고요. 이 박솔뫼는 이제 겨우 두 권 읽어봤지만 사물을 보는데 자연스럽게 그것을 변용시켜 이야기를 확장하는 특별한 시각이 돋보이고요. ㅎㅎㅎ 건방지게 아는 척했습니다. (에구 쪽팔려. ㅋㅋ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