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트맨 : 킬링 조크 - 디럭스 에디션 시공그래픽노블
앨런 무어 지음, 브라이언 볼랜드 그림, 이규원 옮김 / 시공사(만화) / 2018년 2월
평점 :
품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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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위 그래픽 노블. 우리말로 하자면 만화책이다. ‘그래픽 노블’이라고 하니까 폼은 난다. 하여간 21세기 접어들면 무엇이든 인플레이션이다. 그래픽 노블? 흐흐흐. 예전에도 만화책 표지엔 글, 그림 이렇게 구분을 확실하게 했었다. 이 책은 <젠틀맨 리그>, <왓치 맨>과 배트맨 시리즈의 글을 담당한 유명한 만화 스토리 작가 앨런 무어가 쓰고 볼랜드가 그림을 그렸다. 이럴 경우, 즉 만화의 경우엔 내 경험상, 스토리 작가보다 소위 ‘화백’이라고 칭하는 만화가의 이름이 우선하는 거 같은데 요즘엔 아닌 모양이지? 내가 가장 최근에 본 만화는 <비천무>, <불의 검>, 그리고 명작 <북해의 별> 등 김혜린이니 한 이십 년 만에 처음 본 거 같다. 그러고보니 이젠 김혜린도 환갑이 넘었겠다. 아이고, 세월이 무섭다, 무서워.

책을 보고 제일 먼저 놀랐던 것은, 아무래도 나는 ‘만화’라는 말이 ‘그래픽 노블’보다 더 친하고 좋아서 계속 ‘만화’라고 쓰겠는 바, 만화도 내가 보지 않은 사이에 상당한 수준의 ‘이야기’로 진화한 거였다. 물론 스토리 작가 앨런 무어의 의식에는 전혀 동의할 수 없다. 마찬가지로 <배트맨: 킬링 조크>가 사회적 주류 문화로 업그레이드되는 것도 “전혀” 찬성할 수 없다. 비록 불량하지만, 불량한대로 나름의 구조를 갖추어 이야기로 만드는 솜씨는 인정해야 하겠다. 얼마 전에 호아킨 피닉스가 주인공 역을 한 <조커>를 재미있게 봤다. <배트맨: 킬링 조크>도 이 영화와 마찬가지로 배트맨 시리즈의 중요한 악역 조커의 탄생을 이야기하고 있다. 영화 <조커>처럼 조커는 고담시의 희극배우 지망생이다. 다른 점은 3개월 후에 아내 지니가 첫 아이를 출산할 예정이고, 고양이 오줌 냄새가 풀풀 나는 단칸방에서 몇 달치 월세가 밀려 있다. 오디션만 보면 될 듯 될 듯하면서 이상하게 긴장하는 바람에 늘 마지막에 미역국을 마신다. 이런 비참한 환경에서 벗어나 조금이라도 깨끗한 곳으로 이사해 아이를 낳고 싶은 마음으로 사고를 친다. 두 악당의 보조 길잡이로 전에 다니던 화학공장을 털기로 한 것. 드디어 약속한 날짜가 되어 술집에서 이들을 만났지만 조금 후에 형사가 들이닥친다. 체포가 아니라, 몇 시간 전에 백만분의 일의 확률로 아내 지니가 젖병 보온기를 시험 작동하다가 감전되어 순식간에 즉사했다는 걸 알리기 위해.

이제 강도질을 할 이유가 갑자기 사라졌다. 하지만 악당들이 내버려둘 리가 없다. 약속은 약속. 이들은 계획대로 화학공장에 숨어 들어가고, 전에 다닐 때는 경비가 없었는데 그동안 바뀌었는지 무장 경비에게 들켜 총격을 받고 악당(들)이 총에 맞아 죽고, 길잡이는 살기 위해 화학 폐수가 잔뜩 들은 공장 옆의 호수에 빠져 오염수로 유전인자가 바뀌었는지 극악의 악당인 조커로 변신하게 된다. 당연히 영화보다 더 공상적이다. 만화라서 극단적인 공상을 허용할 수 있겠다 싶다. 개연성이 있거나 없거나 그걸 심각하게 생각할 정도로 막혀 있지는 않다. 그렇다고 세상의 루저가 극단적인 불행과 절망 앞에서 최고의 악당으로 변한다는 플롯에 찬성표를 던지고 싶은 마음은 조금도 없다. 세상엔 다행스럽게도 다른 선택지가, 그리 많지는 않지만 있기는 있기 때문에. 다만 만화를 더 만화답게 만들기 위해 스토리 작가는 악당으로 변신한 루저를 최고의 영웅 배트맨의 상대역으로 캐스팅한 것뿐이겠지.

앨런 무어가 썼건 다른 이가 썼건 간에, 이미 전작에 배트맨의 탄생은 분명히 밝힌 바 있을 것이다. 이 책에선 배트맨이 왜 조커와 서로 죽음을 나누어야 할 사이로 여기는지, 이게 불투명하다. 끝까지 말해주지 않는다. 그러면서 뒤로 가면 배트맨은 기껏 잡은 조커를 죽이지 않고 다시 사회화해 정상인으로 만들고 싶어 하는 희망사항까지 제시하는 것도 난데없기는 하다. 그러나 <배트맨: 킬링 조크> 이후 또 무슨 작품이 나와 그걸 설명하겠거니 여겨서 시비하지 않기로 한다. 킬링 조크, 농담 없이 킬링 타임 하기에 좋다. 그러나 자라나는 어린이의 손이 닿게 보관하고 싶지는 않다. 청소년이면 기쁘지는 않겠지만 봐도 뭐라하지는 못하겠고.

에잇, 김혜린의 <비천무>나 다시 한번 봐야겠다. 그새 얼마나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을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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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린, <비천무>

(2001년 5월, 모회사 사보 게재글)




새삼스레 만화를 고급스런 문화물로 추켜올리려는 속셈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1990년대부터 대중적 기반을 잡기 시작한 만화에 대해 억하심정이 있는 것 또한 아니어서 그저 있는대로 말하자면, 새로이 도래한 21세기에 만화는 활자 매체와 시청각 매체의 사각지대를 보완할 수 있는 새로운 대중문화 코드로 이미 자리하고 있다고 해도 그리 큰 착각은 아닐 것이다.
소년기에 한 번 쯤 만화에 몰입하지 않은 사람 누가 있겠는가마는, 하필이면 만화를 탐독하는 시기가 성인이 되기 전인 이유는 무엇일까. 영상매체와는 도저히 비교하지 못 할만큼 소박하지만 활자매체에 비해서 훨씬 설득력이 있어서,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을 이해하기 쉽게 만드는 힘이 그 이유가 아닐까. 이러한 어설픈 단정에 공감할 수 있다면 활자의 시대가 서서히 저물고 있는 세기에 대중문화의 저변으로 등장한 만화를 새로운 문화로 인식하는데 주저하고 있다면 차마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겠다.
그러나 제법 세상을 살아 <포켓몬스터> 류의 황당무계를 참을 수 없는 세대들이 즐거이 볼 수 있는 만화는 사실 드물다. 그리하여 아까운 지면을 빌어 오늘 소개드릴 작품은 약관 22세 때인 1983년에 데뷔작이자 문제작, 히트작이었던 <북해의 별>로 화려하게 등장한 김혜린의 야심작 <비천무 : 飛天舞>이다.


나의 서평이 언제나 그렇듯이 상세한 줄거리 소개는 직접 감상하실 분을 위해 생략하겠으나, 달리는 말 위에서 산 바라보는 식으로 훑어보면, 1343년부터 1368년 사이, 중국 원나라 말기부터 주원장이 명나라를 개국할 때까지의 격변기를 무대로, 멸망한 지방 족벌 유가장 출신의 떠돌이 무사 진하와, 몽고인 지방총독과 한족 사이의 혼혈 여인 설리, 그리고 한족 부흥운동에 투신하는 지방족벌의 계승자 남궁준광의 이야기라고 간단하게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책의 첫 장을 넘기자마자 김혜린이 작품을 절차탁마해가는 '내공'의 숨막힘으로 만일 여지껏 만화를 그저 우스운 저급문화라고 여겼던 분들은 낭패를 만날 수밖에 없을 것이다.


中原草草失承平 중원은 버려지고 오랜 평화는 깨져
戌火胡塵到南京 오랑캐는 남경까지 이르렀네.
扈 老臣身萬里 늙은 신하들이 군주를 따라
天寒來此聽江聲 한겨울 이곳에서 양자강 물소리 듣네.


 <비천무> 첫 장을 열면 작가는 위와 같은 남송 시대 사람 육유의 <용흥사조소릉선생 우거 : 龍興寺弔少陵先生 居>라는 시를 소개한다. 곧이어 이어질 스토리가 원나라의 4족 신분제(몽고족-색목인-한인-남송인)에 따른 몽고인에 의한 남송인 핍박이어서, 위의 한시는 본론에 들어가기 전에 독자로 하여금 스스로의 감정을 피압박인의 정서로 촉촉하게 적시도록 만들어주는 역할을 하게하는데, 이렇듯 시의적절한 한시의 소개는 심약의 <육억시 : 六憶詩>, 이욱의 <낭도사 : 浪淘沙>, 백거이의 <경비 : 輕肥> 등 수다하게 등장함으로써, 그녀의 만화에 충분한 감정이입을 부여하는 동시에, 비극적 흥취를 주고, 또한 시대극이기 때문에 충분히 감안했다고 김혜린 스스로가 밝히고 있듯이, 대사의 운율성을 부여하는 것에 타당성을 확보하게 한다.


그러나 김혜린의 나이 40세. 그녀는 자라면서 일본풍의 만화를 누구보다 많이 읽었을 터이고 바로 그 점 때문에 작가는 일본 캐릭터, 예컨데 <캔디>의 테리우스, <베르사이유의 장미>의 오스칼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더구나 <비천무>는 유럽 스칸디나비아 반도의 가상국을 무대로 한 열 여섯 권짜리 장편 극화 <북해의 별>을 끝마치고 곧바로 손 댄 작품이어서인지 몽고족과 한족, 그리고 고려족을 그렸음에도 각각의 캐릭터들은 서양인의 모습을 하고 있다. 특히 출연진들은 하나같이 머리카락을 길게 늘어뜨리고 있고, 이는 만화는 숙명적으로 그림을 매개로 하고있기 때문에 선의 운동감을 부여하기 위하여라고, 작가는 말하고 있다. 그러나 그녀의 다음 장편극화 <불의 검>의 경우 무대가 북만주 우리 조상들임에도 불구하고 극동 아시아 인의 특징인 광대뼈 돌출과 같은 특징을 찾아볼 수 없다는 것은 아쉬운 일임에는 틀림없다 하겠다.


김혜린. 그녀가 일본 만화에서 완전히 해방되지 못했음에도 우리 시대에 김혜린과 같은 만화 작가를 또 한 명 보탰다는 것은 대중문화를 올바로 바라보고 그것을 제대로 육성하는 토대를 만드는 또 하나의 벽돌이 제공되었음을 의미한다. 극화 <비천무>는 김영준 감독이 당대의 스타 신현준과 김희선을 캐스팅하여 동명의 영화로도 만들어 개봉관에서 절찬리에 상영하였으니, 이 자체가 이현세의 <공포의 외인구단>에 이어 만화의 대중문화적 위상을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하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무엇이 사람들로 하여금 <비천무>에 몰두하게 하는가. 그것은 작가 김혜린이 끈질긴 역사탐구와 고증, 상상력의 결집으로 만화작업을 하는 것에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다. <북해의 별>을 창작할 당시 그녀의 관심은 프랑스 혁명과 러시아 혁명의 정치적 휩쓸림이었고 만화작업이라는 기존 역사의 왜곡작업을 위해 수다한 서양사 관련서적을 탐독하는 동시에 복식사, 궁중풍속사에까지 관심을 쏟았듯, <비천무>를 그리기 위하여 김혜린은 원말명초 시대의 중국사와 민속사, 야사집까지 이 잡듯 뒤져 성공적으로 기존의 역사를 왜곡해내어, 그 결과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역사만화를 탄생시킬 수 있었다. 우리 만화작가 가운데 누가 있어 김혜린 만큼의 공을 들여 작품을 만들어낼 수 있을까.


그러나 <비천무>는 원말명초의 시대극이나 비천신검이 난무하는 무협활극, 그렇다고 흔히들 단정하듯 순정 멜로드라마는 아닐 것이다. 위에서 얘기한 미덕과 작가의 노력, 그리고 여러 가지 다른 의견에도 불구하고, 이 장편만화 <비천무>에서 우리가 무엇보다도 확실하게 직접 느낄 수 있는 것은, 바로 사람이 사랑하며 살아가는 세월, 그 쓸쓸함과 사무치는 정한일 것이다. 누구의 가슴에나 품고 있는 회한과 아스라하게 부서지는 모종의 기억들을 김혜린, 이 중년의 아주머니 화백은 정확하게 할퀴고 있는 것이 아닐까..... <비천무>를 읽는 깊숙한 재미는 진정 이러한 것은 아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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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3-02-23 07:4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영화 <조커>는 보면 기분 나빠질 것 같아 여태 보지 않고 있어요. 재미있게 보시는 분들도 많던데 말입니다.
그나저나 <비천무>개봉당시에 극장 가서 봤는데요, 정말 재미없게 본 기억이 나네요. 전 원작 만화를 보진 않았고요, 줄거리의 재미없음 이라기보다 두 주연의 연기 못함이 너무 당황스러울 정도였어요. 보다가 신현준이 칼에 맞았던가 화살에 맞았던가 김희선이 이름 부르며 우는 장면이 있는데 어찌나 몰입이 안되던지... 오늘 골드문트 님의 이 글을 읽고보니 비천무는 원작으로 봤어야 했던 거네요. 크..

Falstaff 2023-02-23 07:43   좋아요 1 | URL
영화 <조커> 재미납니다.
근데 영화 <비천무>는 망작입니다. 김혜린의 원작을 보시면 좋을 거 같네요. 순정만화예요, 순정만화. 제가 좋아하는 ㅋㅋㅋㅋ

붉은돼지 2023-02-23 13:1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고등학교 때 순정만화(그때는 여학생들이 보는 만화를 그렇게 불렀음)를 처음 봤는데요..이게 완전 신천지였습죠...당시 이재학, 하승남(맞나??) 류의 무협만화만 보던 고딩에게는 정말 놀라운 경험이었는데요..!!! 와아아!!!!!!!! 여학생들은 만화도 이렇게 수준높은 만화를 보는구나!!!!!!..혼자 몰래 감탄했던 기억이 납니다. 제가 특히 즐겨보던 만화는 제 스스로 여류3대가로 칭한 황미나, 김혜린, 신일숙이었습니다. 북해의 별, 불의검, 비천무, 굿바이 미스터블랙, 우리는 길잃은 작은 새를 보았다. 아르미안의 네딸들 등등등 정말 감동적이었습니다. 눈물 콧물을 줄줄흘리며 봤던 기억이 납니다.

Falstaff 2023-02-23 14:03   좋아요 1 | URL
아이고, 전 김혜린 말고는 모르겠습니다. 복학하니까 후배들이 공포의 외인구단이니 만화들을 보더라고요. 저는 결혼하고나서야 좀 봤습지요. ㅎㅎㅎ
눈물 콧물, 이게 스토리, 이야기의 힘 아니겠습니까.

잠자냥 2023-02-23 15:1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만화 <비천무>는 명작이지요.
만화 안 좋아해도 비천무는 정말 몰입해서 본 기억이 납니다.
근데 하필 다부장님은 만활 안 보고 그 영화를!!!!!! ㅋㅋㅋ

Falstaff 2023-02-23 16:34   좋아요 1 | URL
오, 잠자냥 님. 오랜만입니다.
김혜린 좋아하시는 분이 많아요. 영화는 정말 개떡, 만활 다 망쳐버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