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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등산가의 호텔 ㅣ 스트루가츠키 형제 걸작선
아르카디 나타노비치 스트루가츠키 / 현대문학 / 2021년 9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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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빈기 관류 뮤르시 외곽에 비행물체가 출현했으며, 그곳에서 황록색 피부에 다리가 세 개, 눈이 여덟 개 달린 인간 형상의 존재가 내렸다. 스캔들에 목마른 삼류 언론은 앞다투어 그들이 우주에서 온 존재라고 보도했다.……”
책을 열면 1장 앞에 위와 같은 서문 격의 첨언으로 시작한다. 스트루가츠키 형제의 작품은 <세상이 끝날 때까지 아직 십억 년>, <노변의 피크닉>, <신이 되기는 어렵다>를 읽었고, 작품들을 통해 형제들의 주된 관심사는 외계 어딘가에 있을 지능을 갖춘 생명체, 그들과의 소통이라는 건 이미 알고 있었다. 그리하여 “관료적이고, 고결하고, 늘 광이 나는 단추를 달고, 불쾌할 정도로 법을 준수하며, 다정한 남편, 모범적인 아버지, 사람 좋아하는 동료, 정 깊은 친척”이라는 모든 구속을 탈탈 털어내 가볍고 경쾌하고 수정처럼 청결해지기 위해, 오직 홀로, 세상 모든 길의 종점, 온통 눈으로 덮인 산악지역에 자리한 “죽은 등산가의 호텔” 2층 건물에 주인공 ‘나’, 페테르 글렙스키 경위가 도착해 작품을 시작하면서도 이 책이 추리소설이 되리라는 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그것도 갇힌 건물에서 살인사건이 발생해 불세출의 탐정 푸아로가 독자들과 치열한 두뇌 싸움을 하는 아가사 크리스티의 작품 <스타일즈 저택의 살인사건>과 상당히 유사한 구성을 갖추었다는 것도. 물론 이게 다가 아니다. 스트루가츠키 형제들이 누군데 옛 추리소설 작가의 플롯을 베끼겠으며, 자신들의 관심사를 꽁꽁 묶어 두기만 하겠는가. 다만 독후감에서는 나중에 어떻게 마감할지에 관해서 말을 아끼고, 딱 이 선까지 하겠다는 뜻이다.
호텔 주인 알레크 스네바르 씨는 호텔과 주위의 골짜기, 그리고 저 멀리 병목고개까지 넓은 토지를 소유하고 있는 지역 유지다. 예전엔 그저 “쉼터” 정도의 의미를 갖고 있는 호텔이었지만 6년전 청년 한 명이 까마득한 암벽을 오르다가 (실제로도 이런 일이 자주 “있었던 바”)알루미늄 재질의 카라비너가 끊어지는 바람에 수직으로 2백 미터를 추락하고, 그가 지른 단발마의 비명이 눈더미를 진동시켜 순식간에 산사태가 일어나 눈 4만2천 톤과 함께 땅을 때린 이후 이름을 “죽은 등산가의 호텔”로 바꾸었으며, 그가 묵었던 객실은 당시 그대로 보존해 ‘객실 박물관’이라 칭했다. 이쯤해서, 스트루가츠키 형제의 책 두어 권 읽은 독자(나)는 몇 년 전에 눈과 함께 땅으로 자유낙하 했던 건 사람이 아니라 외계인일 것이며 당시 사고는 자신의 존재를 지우기 위해 일부러 만든 일로 사고 때문에 해를 입은 지구인은 단 한 명도 없었다는 것이 증거라고 생각할 수 있다. 사고자는 당연히 그곳을 기반으로 지구인 또는 지구의 특정 기구와 소통을 모색하며 일종의 대사 역할을 하고 있지는 않을까, 하는 기대심 말이다. 그리고 아니나다를까. 하나뿐인 샤워장에서는 이를 이용하기 위한 대기자가 줄을 섰음에도 불구하고 15분간이나 더운물이 콸콸 쏟아져 나오고, 콧노래도 불러가며 누군가가 샤워를 즐기고 있었는데, 기다리다 못한 대기자가 문을 벌컥 열고 들어가니 아무도 없는 샤워장에 고물 트랜지스터가 켜 있기도 하고, 사람이 지나간 적이 없는 복도에 물 묻은 사람의 발자국이 찍혀 있기도 한다. 여성 혼자 자는 방에 누군가가 침대를 사용한 것처럼 시트가 흐트러져 있기도 하고, 샤워 후에 몸을 닦기라도 한 듯 수건이 젖어 있었던 적도 있으며, 미모의 귀부인이 홀로 사용하는 방의 창문을 밖에서 누군가가 훔쳐보기도 하는 중세 마법의 시대에나 볼 수 있는 현상이 일어나니 그런 믿음이 강화될 수밖에.
등장인물은 호텔 주인 알레크 스네바르와 주인공 페테르 글렙스키. 그리고 몇 명 더 있다.
먼저 25세가량의 통통하고 땅딸막하고 혈색 좋은 가정부 겸 요리사 아가씨 카이사. 정조 관념이 없고 남자를 좋아하는 약간 모자란 여성이다.
6년 전에 죽은 등산가와 함께 도착해 여태 호텔에서 지내고 있는 세인트버나드 수캐, 렐.
유난히 큰 키, 연미복을 입고 다니며 서커스에서 최면술과 마술을 전문으로 하는 세계적인 마술사 듀 바른스토크르 씨와 그의 조카 브륜. 브륜은 알렉산더 대왕의 애마 부케팔로스라고 이름 붙인 오토바이를 타고 다니는 십대인데 남자인지 여자인지 잘 구분이 안 가서, 호텔에 묵는 휴양객의 관심을 받는다.
시몬 시모네라는 이름의 인공두뇌 소속부대 대위이자 물리학자. 국가에서 가장 유능하고 천재적인 진짜 물리학자라는 건 저 뒤의 에필로그에서나 밝혀지지만 본문 중에선 압도적인 당구 실력을 갖고 있고 암벽 등반을 취미로 하는, 그러나 눈이 많이 온 관계로 암벽을 타지 못해 방에서 희한한 자세로 벽에 붙어 있고는 한다.
그리고 모제스 씨 부부. 모제스 씨는 전직 장군들이나 입는 금줄 두른 바지를 입고 다니며 안하무인, 목불인견이다. 반면에 부인 올가는 기묘한 미모를 갖고 있는데, 까무잡잡하면서도 푸르스름한 어깨, 우아하게 기다란 목을 지닌 미인 중의 미인이다. 반면에 호텔 주인 스네바르 씨가 글렙스키에게 해준 말에 의하면 아무래도 모제스 씨가 간혹 올가 여사에게 채찍을 휘두르는 것처럼 보인다고 한다.
우리의 주인공 글렙스키가 호텔에 도착했을 때 독자가 만날 수 있는 등장인물은 이게 다다. 아직도 마법사, 하느님, 악마, 유령, UFO 등을 모두 믿는 철학자 겸 시인 겸 과학자 겸 엔지니어이기도 한 호텔 주인 스네바르는 글렙스키에게, 은하계에 생명체가 살아 있는 태양계만 약 백만 개에 달하는데, 이 가운데 인간 이상의 지능을 갖고 있으며, 이들 중에서 또 지구에 관심을 둘 확률은 얼마나 되는지 묻는 장면이 나온다. 이에 물리학자 시모네는 곧바로 -e의 -1제곱, 즉 1/(-e), 굳이 비슷한 수로 말하면 2/3 정도의 상당히 높은 확률이라고 대답한다. 수학자 오일러의 수 e를 아시나? 약 2.72 정도를 말하는데 설명하자면 로갈리즘(로그)부터 시작해야 해서 되게 복잡하다. 그냥 넘어가자. 독자는 점점 외계인 또는 그들의 장비, 그것도 아니면 소모품 정도의 출현을 기대하게 되고. 일찍이 <노변의 피크닉>에선 지구별로 수학여행 왔다가 버린 쓰레기를 갖고 지구인들이 골머리를 썩인 경험이 있지 않은가 말이지. 그러나 여간해 장면을 보이지 않는다.
대신 눈보라가 극에 달한 어느 밤, 검정 택시를 함께 타고 도착한 두 사람, 바이킹이나 북국 신화의 신 같은 외모를 한 올라프 안드바라포르스 씨와 단단하지만 작은 체구의 볼품없는 사내 힌쿠스 씨가 등장하면서 작품은 전환점을 맞는다. 불과 다음날, 천둥 같은 소리와 함께 큰 눈사태가 병목고개를 덮친 밤, 천하장사와 거구의 아름다운 외모를 지닌 올라프 씨가 정면으로 넘어졌으나 고개가 완전히 천장을 바라보는 자세로, 즉 목뼈가 완전하게 부러져 죽은 모습으로 발견되면서 외계인에 관한 기대는 극적으로 애거서 크리스티 여사의 추리소설 <스타일즈 저택의 살인사건>과 닮아가기 시작한다. 과연 숙박인 가운데 누가 건장한 거인 올라프 씨의 목을 부러뜨려 죽일 수 있을까. 전혀 아는 사이는 아니지만 올라프 씨와 함께 택시를 타고 온 스스로 결핵을 앓고 있다고 주장하는 미성년자 전문 상담원인 힌쿠스 씨는 또 도착하자마자 이상한 짓만 골라서 하는데, 늘 독한 술을 벌컥벌컥 마시며 호텔의 지붕에 올라 뭔가를 관찰하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 무슨 일을 꾸미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숙박객 가운데 형사가 있으니 바로 주인공 글렙스키 경위. 그는 수표나 어음 위조, 세금 포탈 등의 경제범죄 전문 형사라서 난데없이 벌어진 살인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애를 쓰기는 한다. 그러나 아무래도 역부족이다. 나름대로 잠 한숨 못 자고 사건의 단서를 찾으려 전력을 기울이다가, 피해자 올라프 씨의 가방에서 이상한 형태의 장비를 발견하고 이를 증거품 가운데 하나로 호텔 금고에 보관한다.
이 와중에 눈보라는 더욱 거세지고, 이 눈폭풍을 걸어서 뚫고 또 한 명의 사내가 호텔에 도착하는데, 파랗게 얼고, 상처입고, 거의 죽기 직전의 루아라비크 L. 루아라비크 씨. 그는 눈동자가 하나는 A를 다른 하나는 B를 향하기도 하고, 오른팔은 어깨까지 없으며, 다리를 사용해 걷기에 상당히 불편한 몸을 하고 있다. 헐리웃 영화 <맨인블랙>에서 외계인이 간혹 연출하는 그런 모습을 상상하면 될 듯하다.
자, 이제 결말의 시간이 찾아왔다. 그러나 미안하지만, 그건 당신이 직접 읽어보셔야겠다. 하여튼 스투르가츠키 형제의 상상력은 아주 매력적이다. 내가 읽기에 결말 근처가 좀 과하게 작위적이지 않은가 싶은 아쉬움이 조금은 남았다. 그러나 다시 한번 이야기해도, 역시 스투르가츠키 형제는 매력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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