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부 살인자의 성모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05
페르난도 바예호 지음, 송병선 옮김 / 민음사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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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2년 콜롬비아 안티오키아 주의 주도 메데인 시 보스톤 동네 페루 거리에서 태어난 페르난도 바예호는, 우연인지 의도를 했는지 작품 <청부 살인자의 성모>의 주인공 ‘나’, 페르난도하고 출생지와 이름이 같다. 이후 부모의 집과 엔비가도에서 사바네토 오는 길 왼쪽에 있는 외할아버지의 농장 ‘산타 아니타’에서 유년시절을 보낸 것까지 똑같다. 바예호는 아홉 남매의 장남으로 태어나는데, 많고 많은 동생들에게 질려서 그랬는지 모르지만 작 속에서 인간, 특히 가난하고 약한 사람들의 유별난 생식력에 끊임없이 저주를 퍼붓는다. 바예호는 콜롬비아에서도 대단한 부유층에서 낳고 자란 것 같으니까 당연히 자신이 속한 계급의 다산성은 저주에서 제외한다.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를 참 다양하게 다니며 졸업을 했고, 대학도 메데인 대학 법학과, 콜롬비아 국립대학 철학 및 문학, 로스 안데스 대학에서 철학과 문학, 다시 볼리바리아나 대학에서 철학과 문학을 공부하면서 하여간 연표에 표기되어 있는 것을 기준으로 졸업은 하지 않았다.

22세 때 처음 미국 여행을 하고, 23세 되던 1965년부터 1년 4개월 동안 이탈리아, 스페인, 프랑스에 체류했다니까, 그게 누구 돈이겠어? 부모 잘 만났다. 스물여섯 살 때는 동생의 돈으로 보고타에서 콜롬비아를 내전의 파도로 휩쓸어버린 호르헤 엘리에세르 가이탄 암살사건에 관한 기록영화를 촬영하는데, 사실 이이의 내력을 보면 영화 쪽으로 더 유명세를 탔다. 1971년 바예호는 열 달의 뉴욕 생활을 거쳐 멕시코시티로 건너가 이후 시나리오 작업을 하는 등 멕시코 영화계에 발을 들여 놓아 1980년엔 전년도에 촬영한 <붉은 연대기>로 멕시코의 아리엘 영화상을 받지만 조국인 콜롬비아에서는 상영이 금지된다. 그의 첫번째 소설은 마흔세 살이던 1985년에 출간한 <푸른 나날들>.

콜롬비아에서 집안에 돈 좀 있고 재주도 있는 사람 가운데 젊은 시절을 국내에서 콜롬비아 사회의 발전을 위해 이바지하기로 결정해서 나날이 절차탁마, 백두산석마도진 한 유명인을 아시는 분은 거수 바람. 20세기 후반을 살았던 콜롬비아 사람들, 특히 수도 보고타와 제2의 도시 메데인에 사는 부유층들은 자제가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북아메리카와 유럽 각국의 교육기관을 알아보기 시작해 거의 대학 재학 중에 유학을 보내버린다. 콜롬비아가 워낙 지옥의 불가마 같아서 좋은 신발 신고 외출했다가 나이키 신고 싶어하는 청(소)년의 눈에 띄어 눈 먼 권총 총알에 이마를 관통 당할 수도 있는 지경이었으니, 솔직한 마음으로는 나 같아도 그렇게 하겠다. 이게 다, 앞 문단에서 얘기했듯, 바예호가 동생 다리오의 돈으로 만든 기록영화의 주인공 가이탄이 암살된 후, 보수와 진보로 갈려 시작한 내전 상태, 이 혼란의 와중에 세계 최고의 마약 카르텔까지 섞인 지상 최대의 난장판이 무려 칠십여 년 이어져 생긴 일이다. 가브리엘 마르케스의 집안은 그리 부유하지 않았지만 본인 스스로 유명해졌고, 돈도 많이 벌었고, 그러다보니 콜롬비아에서 살고 싶은 마음이 똑 떨어져, 멕시코시티에서 살다가 죽었다. 페르난도 바예호 역시 무려 47년간 멕시코에서 살았다. 나중에 멕시코 국적을 얻었으니 정확하게 말하면 콜롬비아 출신의 멕시코 사람이다. 나중에 필생의 연인이랄까, 동반자랄까, 아니면 둘 다일지도 모를 다비드 안톤(액센트는 ‘톤’에 있습니다)이 죽자 47년의 멕시코 생활을 마치고 2018년, 그의 나이 76세, 영화와 문학에 종사하는 멕시코 사람이 되어 콜롬비아로 귀국한다. 이것마저 작중 ‘나’와 거의 비슷하다. 평생 외국 생활을 하다가 외국 국적을 갖고 모국인 콜롬비아에 돌아와 메데인 거리에서 별 해괴한 짓을 벌이는 늙은이. 직업만 문법학자로 바뀌었을 뿐. 심지어 게이인 것도 같다.

작품은 엔비가도에서 오는 길 왼쪽에 있는 산타 아니타 농장에서 띄운 풍등을 묘사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기억하기를 안티오키아의 하늘에서 본 것 중 가장 큰 풍등. 120개 주름으로 이루어진 엄청나게 큰 마름모 꼴의 빨간 종이 풍선 속 촛불 하나. 이 촛불로 데워진 따뜻한 연기로 하늘 높이 올라가는데, 풍등을 하늘로 올리는 연기는 그들의 영혼이요, 풍등을 예수의 성심처럼 고동치면서 불타는 가슴으로 하늘로 날아오르게 만드는 촛불은 사람의 마음이라고 비유하는 장면을 읽으면, 앞으로 벌어질 청부 살인자에 의한 연쇄 살인을 감히 생각도 못할 정도로 서정적이다. 그러나 이런 서정의 뒤를 이어 곧바로 연상하는 것은 콜롬비아의 폭력성. 풍등은 하늘로 날아 어떻게 됐을까? 타버렸을지도 모른다. 예수의 성심처럼 하늘로 날아가게 한 촛불 하나로도 타기 쉬운 재질인 종이를 순식간에 화르륵, 태워버리기에 너무도 충분할 터이니. 마치 1948년 4월 9일, 한 자유주의자의 척추에 박힌 불꽃 하나가 나중에 콜롬비아를 불태우고 ‘그들’을 불태우는데 충분했던 것처럼. 말은 ‘한 자유주의자’라고 했으나 자유주의자의 대표이며 유력한 차기 대통령 후보였던 호르헤 엘리에세르 가이탄을 말한다. 상세한 걸 재미있게 읽으시고 싶다면 후안 가브리엘 바스케스 작 <폐허의 형상> 참조하시라.

주인공 ‘나’는 수십년 동안 콜롬비아에 살지 않았고, 이제 늙어 죽기 위해 메데인으로 돌아왔다고 주장한다. 아마 필생의 연인(다비드 안톤, 액센트가 어딨다고요?)이 자신을 두고 먼저 명을 다한 것에 심상하여 가운데 중中, 중등도의 우울증에 시달렸던 거 같다. 자신은 정말로 죽을 준비가 되어 있는 노인성 우울증 환자. 콜롬비아식 조폭들이 총격전을 벌이는 와중에 납작 엎드리지 않고 고개를 발딱 든 채로 허리를 꼿꼿하게 세우고 직립보행을 멈추지 않는 노인. 이게 바로 ‘나’다. 차에 치고 폭우에 떠밀려 하수도 망에 걸린 채 고통스러워하는 개에 총을 쏴 조금이라도 더 편한 죽음을 맞게 하고는 곧바로 자신의 심장을 향해 총구를 돌릴 수 있는 노년의 남자.

이 늙은이가 먼 시절의 친구 호세 안토니오 바스케스(흠. 이름이 수상해. 또다른 콜롬비아 귀향작가하고 같은 성씨다)의 아파트를 찾는다. 호세는 ‘나’에게 이미 죽인 사람만 족히 열 명은 될 아름다운 사람을 선물로 준다. 알렉시스. 콜롬비아 사람의 이름이 알렉시스라고? 그렇다. 그 나라의 가난한 사람들은 자식에게 부자나 돈을 펑펑 쓰는 사람들 혹은 외국 스타일의 이름을 지어주는데 이 아이들은 대개 열두 살부터 열 다섯 살, 아무리 많아도 열일곱 살을 넘지 않은 청부 살인자가 되기 십상이라 한다. 원래부터 청부 살인은 청년도 아닌 청소년이 하는 것이라고. 거의 대부분이 스무 살이 되기 전에 다른 청부 살인자의 손에 의해 죽음을 맞으니까. 친구 바스케스는 알렉시스에게 ‘나’를 나비의 방으로 데려가라고 명령하고, 나비가 한 마리도 없이 커다란 침대만 있는 나비의 방에서 ‘나’와 아름다운 외모의 알렉시스는 첫 게이섹스를 치룬다.

다음날부터, 밑도 끝도 없는 폭력의 연속. 때와 장소를 가리지도 않고 대상도 특별하게 정하지 않는다. 라디오에서 쏟아져 나오는 유행가 볼륨을 낮춰 달라는 말에 격분해 오히려 최대로 볼륨 업을 해버리는 택시 드라이버의 이마에 사제가 재의 십자가를 긋는 바로 그곳에 작은 총알 구멍을 내버리고, 만일 이 장면을 본 증인이 있다면 그 증인의 이마에도 같은 피의 십자가를 그어준다. 죽이고 또 죽이고, 이유없이 죽이고, 재수없다고 죽이고, 죽이고 또 죽인다. 어디서 본 거 같지? 그렇다. 로베르토 볼라뇨의 장편소설 <2666> 4부, <범죄에 관하여>. 대책없이 이어지는 살인, 강간. 이것을 합해 강간살인. 페르난도 바예호는 알렉시스의 죽이고, 죽이고 또 죽이는 짓을 볼라뇨만큼 상세하고 장황하게 쓰기 싫어서 나중엔 그냥 250명가량 해치웠다고만 하는데, 아이고 이 양반아, 독자는 하도 죽이고, 죽이고 또 죽여서 눈이 다 지물지물해졌다.

이왕 볼라뇨 이야기가 나와서 말인데, 이미 볼라뇨를 충분히 읽었다고 생각하는 독자는 굳이 바예호의 책까지 돈 주고 사서 비슷해 별로 다를 것 없는 이야기까지, 지극히 건전하지 못한 피 튀는 장면을 상상해 스스로 자, 상할 해, 정신적 자해할 필요가 있을까 싶다. 그러나 당연히 개인 기호가 다를 터. 뭐 있는 척해가면서 되는 대로 마구 쏴 죽이는 장면의 애호가들은 읽어봄직하기도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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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amoo 2023-01-19 11:0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주 감사합니다~
바예호를 살까 망설였는데, 마지막에 아주 적절한 조언을 주셨네요..ㅎㅎ
볼라뇨 전집을 갖고 있어요. 충분히 읽지는 않았지만 어느 느낌인지 알겠어요..ㅎㅎ
아주 간단히 패수하겠습니다요~~!

Falstaff 2023-01-19 13:36   좋아요 0 | URL
볼라뇨 읽으셔요. 이런 종류의 책은 볼라뇨면 충분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

coolcat329 2023-01-19 13:0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 이 책 얇길래 도서관에서 빌려와 읽다가 너무 진도가 안 나가 포기하고 다시 반납했습니다. 글이 잘 이해가 안가서요... 😥 저는 볼라료도 읽을 일이 없는데 ㅋ 좀 더 내공을 쌓은 후 기회되면 다시 도전을 해볼까합니다.

Falstaff 2023-01-19 13:35   좋아요 0 | URL
그리 중요한 작품 같지는 않더군요. 저는 첫 부분의 서정적인 묘사가 참 좋아서 막 기대를 하고 그랬는데 점점 가면 갈수록 피가 철철 흘러서 좀 그랬습니다.
바스케스가 쓴 <폐허의 형상>이 장황하지만 이 책보다는 좀 더 좋은 걸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