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눈뜨는 봄
프랑크 베데킨트 지음, 김미란 옮김 / 지만지드라마 / 2019년 7월
평점 :
.
일천하게 베데킨트를 읽은 느낌으로 이 골치 아픈 극작가를 정의하자면, 가히 당대의 반항아, 정도로 요약할 수 있겠다. 1864년 독일 하노버에서 출생한 반항아는 후에 자신이 생산해낼 극작품에서만 반항아가 아니어서, 스위스의 김나지움을 졸업하고 법학을 전공하기 위해 뮌헨으로 유학을 했을 때부터 하라는 법 공부는 안 하고 미술, 음악, 공연 같은 예술 방면으로만 전력을 기울이다가 급기야 열 받은 아버지로 하여금 베데킨트 가문 족보에서 호적을 파버리겠다는 결심을 하게 만들기도 한다. 그러다가 화해를 하고 일년 남짓 다시 법을 공부하는 시늉을 하는가 했더니 그만 훌륭한 경제적 배경이 되어 주었던 아버지가 세상을 뜨는 바람에 다시 소위 예술을 향유하느라 물려받은 유산을 거덜내 버린다. 역자 김미란이 쓴 해설을 보면 이이가 짧게나마 직장생활을 하기도 했다고 하는데, 이 직장생활이라는 것이, 자신의 이름을 대면 가문에 누를 끼칠까 봐 그랬는지 “코르넬리우스 미네하”라는 이름으로 극장에서 소위 “낭독 예술가” 생활을 했을 뿐이다. 완전 거지꼴이 된 베데킨트는 진정한 예술가 답게 먹고 사는 데 가장 필요하지 않은 형이상학인 자존심을 버리고 누이동생한테 가서 빈대 붙어 살게 된다. 이 와중에도 유부녀인 스트린드베리히 여사와 불륜을 저지르며 아들도 낳고 그랬으면 누이동생 말고 여사님한테 용돈이나 좀 받아쓰든지 말이지, 쯧쯧.
하여간 프랑크 베데킨트는 잘난 직장생활을 하기 바로 전에, 즉 누이동생한테 빌붙어 살던 시절인 1890년에 최초로 자신의 이름을 단 극작품을 발표하니 <Fruehlings Erwachen: 눈뜨는 봄> 또는 <사춘기>. 지금 독후감을 쓰고 있는 희곡이다. 여기서 추리를 하나 하지 않을 수 없다. 프랑크 베데킨트 자신이, 당연히 본인의 성격이나 형질 또는 싹수나 싸가지는 감안하지 않고, 아들에게 기어이 법률을 공부하도록 강요했던 의사 아버지를, 당대가 빌헬름 2세 시절 ‘독일제국’ 환경이었음을 감안하면 어쩌면 당연하게 생각할 수도 있었건만, 과하게 완고한 기성세대, 즉 왕꼰대 정도로 결론을 내렸던 것 같다. 아버지 베데킨트 씨로 말할 것 같으면, 미국 시민증을 갖고 있었다가 헝가리 배우 출신의 스위스 여성을 만나 다시 독일로 이사해 아들 프랑크를 낳았는데, 프랑크가 하필이면 자유분방한 엄마의 유전자를 물려받아 독하게 사춘기를 앓는 걸 나름대로 마음 아파했을 수도 있다. 뭐 여기까지는 추측이다, 추측. 그러나 베데킨트는 사춘기를 겪었던 스위스의 김나지움 시절에 당시엔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는 생식의 문제, 성적 본능 같은 것으로 고통스러워 했을 것이다. 남자로 태어나면 다 그렇다. 그리고 갈증과 고통이 정말 끔찍스럽다. 그러나 딱 그 시절엔 성과 생식에 대한 갈증과 고통이 유독 자신만 덮치는 것 같이 생각하고는 한다. 이런 경험이 베데킨트의 데뷔작인 <눈뜨는 봄: 청소년 비극>에서, 김나지움에 다니는 남학생(들)과 같은 나이의 소녀들 간의 생식과 성에 관한 관심과 집착, 질풍노도처럼 휩쓸어 지나가는 삶의 종결에 대한 선망과 실행, 심지어 동성애까지, 빌헬름 시대의 시각으로 본다면 여차하면 맞아 죽을 수도 있을 이단, 반역, 전도가 청소년들에 의하여 저질러지고, 반면에 기성세대에 의하여 책임회피, 수수방관, 과도한 엄격과 처벌, 비겁함이 드러난다.
멜히오어 가보어, 열네 살의 김나지움 학생으로 학업성적이 뛰어나 학급에서 3등을 하지만 교사들도 이 아이가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1등을 할 수 있는 총명한 머리를 가지고 있음을 인정한다. 그런데 심지어 독일에서도 예외적으로 1등 실력의 멜히오어가 가장 친하게 지내는 모리츠 슈티펠은 학급에서 꼴찌 성적에서 벗어날 듯 말 듯한 성적이다. 여차하면 유급을 당할 위기에서 간신히 3개월 간의 유예를 받았지만 극의 후반부에 가면 기어이 유급을 거쳐 퇴학처분을 받는다.
모리츠는 열네 살 소년들이 가장 궁금해할 여성의 몸에 관한 호기심으로 충만해 있고, 아마도 몽정일 것 같은데, 특정한 성징을 경험한지 얼마 되지 않아 생식과 성에 관한 것을 멜히오어에게 물어본다. 예나 지금이나 가장 은밀한 성적 지식은 교사, 부모가 아닌 친구를 통해 과장된 환상과 지식으로 포장되어 머리 속에 반입하게 되나보다. 그러나 멜히오어는 성적 지식도 나름대로 자연의 생물을 관찰함으로써 감을 잡고 여러 다른 책자와 개방적인 성향의 어머니를 통해 익숙해 있어서 모리츠에게 <동침>이란 제목의 성교육적 글, 말이 글이지 거의 논문 수준의 길이로 써 준다. 나중에 이 일 때문에 멜히오어의 젊은 청춘이 완전히 결딴이 나지만 미래에 어떤 일이 일어날지 세상에 누가 있어서 알겠는가. 다 팔자지. 그래서 함부로 글로 써서 남기지 말라는 거다. 하여간 모리츠는 멜히오어와 친하게 지내면서 생식과 유희로의 성에 관한 것 말고도 라틴어 작문 등 어려운 과목을 배우며 (내가 보기에)비교적 건전한 사춘기를 겪고 있었는데, 세상의 많은 극작품이 그러듯이 하루는 벼락을 맞고 만다. 학업성적 미달 사유로 유급에 이어 퇴학처분을 받은 것. 온 세상에서 자신이 제일 심각한 실패자라는 생각에서 헤어나지 못한 모리츠는 멜히오어의 엄마에게 아메리카로 가는 뱃삯을 부탁하면서 만일 가지 못한다면 자살해버리겠다고 편지를 보낸다. 모리츠 생각에 자신을 제일 인정해준 사람이 멜히오어의 어머니인 가보어 부인이었기 때문. 부인의 친절하고 애정 넘치는 거절 편지에도 불구하고 모리츠는 기어이 자기 머리통에다 권총을 쏘아 죽어버리고 만다. 열네 살 짜리가 학업 성적이 모자라다는 단 하나의 이유로.
멜히오어의 옆집에는 열네 살 동갑내기 건장한 여자애 벤들라 베르크만이 엄마와 함께 산다. 완전히 구세대인 베르크만 부인은 막내딸이 건강하게 생리를 시작했음에도 여전히 아이는 황새가 물고 온다고 말하고, 벤들라는 황새가 아이를 굴뚝에서 떨어뜨리는지, 창문을 통해 던져주는지 궁금해하다가, 급기야 열네 살의 진동이 충동하는 갈증을 이기지 못해, 엄마에게 어떻게 하면 아이가 생기는지 설명 해달라 조른다. 엄마는 먼저 ①결혼을 하고 ②배우자를 반드시 사랑해야 하는데 그러면 ③여태까지와 다른 방식으로 사랑하게 되고 ④이후에 어느 날 황새가 날아온다고 이야기한다. 그리하여 얼마 후 모범생 멜히오어가 사춘기적 고독과 소외감에 휩싸여 건초장 2층의 건초더미에 누워 있다가, 굳이 멜히오어 말고 아무도 없는 2층으로 사다리를 타고 올라와 엉겁결에 두 열네 살짜리가 첫경험을 하고 만다. 서로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했으면서도. 그러니 벤들라는 아무 걱정이 없다. 엄마가 이야기한대로 결혼하지도 않았고, 사랑하지도 않았으니 자신의 몸에서는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을 터이라서.
이렇게 비극은 19세기 말의 청소년들에게 스멀스멀 기어오고 있었다.
그럼 멜히오어는? 위에서 이야기했다. <동침>이란 소논문. 그리하여 이 아이는 모리츠의 죽음에 책임을 져야하는 제단에 올라야 한다. 멜히오어를 누가 심판할 것인가. 당연히 김나지움의 판관, 즉 교사들이다. 프랑크 베데킨트는 이 판관들, 율법의 개들에게 이런 이름을 지어 주었다.
교장 조넨슈티히(일사병). 교사 아펜슈말츠(원숭이 비계), 크뉘펠디크(몽둥이), 훙거구르트(굶주린 띠), 크노헨브루흐(골절상), 충겐슐라크(혀 놀림), 플리겐토트(파리 시체).
나는 다시 태어나지 않겠다. 내 별자리가 다행히 물고기자리라서 더 이상 윤회하지 않는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스러운지 모르겠다. 낳음을 당하고, 사육도 당하고, 교육을 받으며, 과거분사와 행렬을 공부하는 동시에 또다시 사춘기를 겪느니, 단테 알레기에리의 글이 진실이라면, 영원히 연옥의 문 앞에서 대기하고 있는 편을 택하리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