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1회 자음과모음 신인문학상 수상작
박솔뫼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0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1985년 광주 출생. 후장사실주의 멤버. 한국예술종합학교에서 예술경영을 공부했고, 난생 처음 써본 소설 <을>이 2009년 제1회 자음과모음 신인문학상을 수상하면서 데뷔한 재원. 이후 장편소설과 단편집을 활발하게 출간해 김승옥문학상, 문지문학상, 김현문학패 등을 수집하며 바야흐로 전성기를 달리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박솔뫼라는 이름은 자주 들어봤지만 이제서야 처음으로 이이의 책을 읽어볼 생각을 한 내 입장에선 좀 겸연쩍을 수밖에. 뭐 하여튼 그렇다. 안 읽어보는 것보다는 낫지 않은가 말이지.


  “이민주가 방을 떠났다.

  ‘민주’하고 불러주던 목소리가 있던 방이었다. 이민주는 방을 떠남으로 더 이상 ‘민주’일 수 없었다. 이제 누가 그를 ‘민주’ 하고 불러줄까. 그 목소리는 이제 그에게 닿지 못한 채로 방에 남는다.”


  책은 이렇게 시작한다.

  여기서 ‘방’이라고 하는 건 국적 불명 가상국가의 대학도시에서 절반 정도는 장기 투숙객이 머무는 호텔의 507호실, 2인용 방이다. 이민주는 이 방을 떠남으로 이제 민주일 수 없으니 한 인격체에게 이름을 부여하는 것도 다른 인격체가 아닌 한 폐쇄공간으로의 방일까? 아니다. 이렇게 작품을 시작한 작가의 의도는 그랬을 수 있어도, 독자는 한 ‘방’을 공유했던, 공유가 아니라면 적어도 일정 기간 같은 공간에서 일상을 소비하는 것을 허용한 다른 한 명의 인격체를 떠남으로써 이민주는 이름을 가지고 있었던 ‘방’을 나가 광장의 무명씨로 변용transfiguration된다고 봤다. 즉 한 관계가 끝난 상태를 작가는 이렇게 묘사했다고 읽었다.

  이민주는 오래 전 다른 ‘방’을 떠났던 경험이 있다. 어머니가 죽고, 운명하기 전에 고인이 깔끔하게 소지품을 정리해둔 유품 박스들 가운데 작은 박스 하나는 민주가 갖던지 그러고 싶지 않으면 주소에 적힌 이모를 찾아가 전해주라는 유언을 발견했다. 민주는 주소지를 찾아갔고 주소는 맞는데 어머니의 동생으로 보이는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대신 윤과 바원이란 이름의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이들에게 유품을 건네고 며칠을 함께 지내다 다시 돌아온 어머니와의 집. 이 집을 떠나며 이제 이민주는 어머니의 민주가 아니라 세상이란 크고 큰 벌판 속의 무명이 되어버렸던 경험.

  그러면 이민주가 떠난 방에는 누가 살고 있었을까? 노을. “노을이 이민주를 ‘민주’하고 불렀듯이 이민주도 노을을 ‘을’이라고 불렀다. 노을에게 이민주가 여전히 민주이듯, 이민주에게 노을은 을이다. 다만 이제 더 이상 서로를 바라보며 이름을 부르지 못할 뿐이다. 이민주는 방을 떠났고 노을은 그것을 허락했다.” 많은 독자는 책의 표제 <을>을 ‘갑과 을’, 할 때의 을로 생각했을 수 있을 것. 그러나 노을, 이 쓸쓸한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는 단어를 통째로 이름으로 만들어 갖고 있는 사람을 줄여서 ‘을’이라 불렀다. 그런데 “이민주는 방을 떠났고 노을은 그것을 허락했다.”라니? 을이 허락을 하지 않는 한 민주가 방을 떠날 수 없었다, 떠나기 위해서라면 허락을 받든지 을을 살해해버리는 수밖에 없었다, 라는 뜻인가? 독자여, 쉽사리 뜻을 확장하지 마시라. 그냥 떠났다는 거다. 을이 민주를 ‘기꺼이’ 떠나게 했다는 거다.

  태어나면서부터 아버지 얼굴도 모르고 이름도 모르면서 병약한 어머니와 함께 살아온 민주. 학교에서 집단 따돌림의 대상이 되어, 중환자인 엄마를 대신해 자퇴원서에 서명해준 외삼촌 덕에 명을 다할 때까지 엄마의 병수발을 할 수 있었고, 유품을 들고 윤과 바원을 찾아가, 한동안 그들의 모든 시간을 함께 했다가, 그곳을 떠난 후엔 아무나 해도 상관없거나 아무도 하고 싶지 않은 일들을 하며 살아가던 민주. 술집 주방에서 일하다 만난 친절한 부르주아 민하의 도움으로 외국어학원에서 서무 일을 하다 외톨이 일본어 강사 을을 만나 주로 밥을 같이 먹으면서 관계를 이어갔다. 몇 년 후 을은 타국의 대학에서 한국어 강사를 하고 있었으며, 호텔 2인용 객실에서 룸메이트가 여러 번 바뀌는 동안 장기 투숙을 하다가 민주더러 이곳으로 오라고 했는데, “아무나 해도 상관없거나 아무도 하고 싶지 않은 일들을” 하는 민주가 무슨 돈이 있어 비행 여비를 마련하겠는가. 민주보다 열 살이 더 많은 을이 비행기표와 돈을 보냈고, 아무리 활개를 쳐봐도 사방팔방 걸리적거릴 것이 없는 민주는 뒤도 한 번 돌아보지 않고 곧바로 을에게 달려가서, 을의 ‘방’에 든다.

  그러니 처음부터 민주가 떠난 방은 을이 민주에게 ‘민주’라 불러 주던 방이었지, 방이 민주한테 ‘민주’라고 부르지 않았던 것. 이 이야기는 그리하여 민주가 ‘방’, 즉 민주를 ‘민주’라고 불러주던 을을, “을의 허락을 받고” 떠날 때까지의 이야기다. 민주가 올 때 비행기표와 돈을 보냈듯이, 을은 민주가 갈 때 역시 비행기표와 돈을 주어야 했을 것이니, “을의 허락”은 사실상 일정의 현금을 뜻할 수도 있다.


  을과 민주. 여기에 한 명만 더 보태보자. 호텔의 하우스키퍼 씨안. 씨안도 이방인이다. 세계여행 중에 이 나라에 와서, 이 호텔에 잠시 머물다가, 이 도시에 애착이 생겼는지 더 있고 싶어서 무료로 3인용 방의 한 침대를 사용하고 약간의 돈을 받는 대가로 방을 함께 쓰는 프래니, 주이와 함께 객실 하우스키핑 일을 하고 있다. 이방인의 숙명은 언젠가 떠난다는 것.

  씨안은 프래니-주이-씨안, 이렇게 룸메이트 세 명 관계의 일원이기도 하고, 작품이 진행됨에 따라 을-민주-씨안 3인의 일원이기도 하다. 한 시절 민주가 윤-바원-민주 라는 세 명 가운데 한 명이었고, 을 역시 룸메이트였던 린다, 린다의 남자친구 제이와 이루는 세 명 중에 한 명이었듯이. 하우스키퍼 프래니와 주니도 302호에 장기 투숙했던 30대 여자와 함께 트라이앵글을 만들었으며, 민주에게 친절했던 윤과 바원까지 윤의 어머니와 세 명의 관계로 이루어졌었다.

  씨안은 오전에 하우스키핑을 모두 마치고 오후엔 주로 극장에 들어 영화를 봤다. 책에서는 제목을 밝히지 않는 단 하나의 영화만 거론된다. 모든 동물이 사라진 미래에 유일하게 살아남은 것처럼 보이는 나이 많은 남자와 젊은 여자. 이들은 인류종말의 맞아 본능적으로 시간만 나면 서로의 몸을 섞는다. 둘의 관계는 밝히지 않겠다. 아직 상점의 인스턴트 식품들은 먹을 수 있는 상태라서 이들은 오직 먹고, 마시고, 생식 활동에만 전념한다. 그러다가 갑자기 젊은 남자가 이들 앞에 나타난다. 세 명은 이때부터 더 나은 생활을 모색하고, 농사 짓는 일을 이야기하기 시작한다. 그러다가, 암흑 속에서 누군지 모르지만 한 명이 다른 한 명의 몸에 길고 잘 드는 칼을 쑤셔 박는다.

  이 영화 이야기가 나온 후에야 독자는 박솔뫼가 혹시 3인으로 이루어진 공동체의 비극에도 방점을 두지 않았겠는가, 궁리하기 시작하고, 이들의 불안한 동거를 지켜보기 시작한다.


  등장인물들은 말이 거의 없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자신의 목소리를 내기는 하지만 그것보다 침묵의 행간으로 상대의 뜻을 짚어낼 줄 아는 일. 그걸 공평하고 사려 깊다고 해석한다. 을은 끊임없이 민주에게 말없이 요구한다.

  “나는 말하고 있지 않지만 그럴 때까지도 내 이야기를 들어줘.”

  을은 자신이 가장 싫어하는 것을 상대인 민주에게, 그리고 세상에게 요구하고 있었다. 언제나. 처음부터 끝까지 언제나.




댓글(4) 먼댓글(0) 좋아요(2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그레이스 2022-07-26 09:56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샐린저의 프래니 주이 인가요?
왠지 그 분위기가 떠오르네요

Falstaff 2022-07-26 10:36   좋아요 3 | URL
옙! ㅋㅋㅋ 그레이스 님은 모르는 게 없으셔요!
저도 한 번 읽어보려 합니다. (그럼 두 번 읽으려 했냐고요? ㅋㅋㅋㅋ)

mini74 2022-07-26 13:4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마지막 문단을 보면, 을이 알고보니 갑질하는 이야기같기도 하네요 골드문트님, 방이란 공간, 이야기 속 영화 등 궁금하네요. 그 와중에 프레니와 주이 찾아본 ㅎㅎ

Falstaff 2022-07-26 14:38   좋아요 1 | URL
ㅋㅋㅋ 분위기는 처음부터 끝까지, 요즘 젊은 작가들이 늘 그렇듯, 우울 또는 대체로 흐림 정도인데, 아무도 갑질은 하지 않습니다.
강추까지는 아니고요, 시간나서 도서관 가셨는데 눈에 띄면 읽어보실 만할 겁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