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시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203
저메이카 킨케이드 지음, 정소영 옮김 / 문학동네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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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국은 2차 세계대전 종전과 베트남전 중 ‘세계의 공장’으로 발돋움하는 과정에 노동인구의 부족을 체감하면서 이민정책을 전향적으로 바꾸어 많은 이민자를 받아들이기 시작한다. 우리나라도 주로 파시스트들의 공포정치에 불만을 품은 인텔리 계층을 필두로 많은 사람들이 아메리칸 드림을 좇아 미국 이민을 감행했다. 당시에 미국행 비행기에 가장 많이 오른 인종이 라틴 아메리카의 유색인들이었다. 저 아름다운 카리브 해의, 영연방 앤티가에서 열아홉 살 아가씨 루시 조지핀 포터도 섬을 나와 트리니다드 토바고의 수도 포트오브스페인에서 비행기를 타고 홀홀단신으로 미국 뉴욕주의 공항에 내려, 열아홉 평생 처음 북반구의 1월 겨울을 체험하면서 소설은 시작한다.


  고향인 앤티가 섬에서는 정말로 근사한 외모를 가진 덕택에 평생, 쉼없이 여자들에 둘러싸여 살던 아버지와, 남편 때문에 속을 썩이며 사는 것을 숙명으로 아는 어머니의 사랑을 받아가며 외동딸로 아홉 살까지 살았다. 그러나 심통맞은 삼신할매는 딸이 아홉 살이 되자 이제 산도가 막힌 줄 알고 살던 부부에게 내리 아들 세 명을 점지해주었으며, 첫아들이 태어남과 동시에 부부의 모든 기대는 한 순간에 아들(들)을 향하게 된다. 부부는 아들 출산과 동시에, 비록 잘 생긴 아빠가 다른 여자를 통해 낳은 아이가 얼마나 많은지 본인도 모를 정도이지만, 갑자기 금슬이 좋아져 아들이 자라면 여왕이 사는 영국에서 공부를 시켜 변호사나 의사로 만들기 위해 뒷바라지 빵빵하게 해주겠다는 다짐을 했으나, 이런 다짐을 옆에서 들은 열 살 먹고, 똑똑하기 이를 데 없는 누나는 슬슬 속이 뒤집히기 시작한다. 엄마, 아빠는 단 한 번도 나한테 의사, 변호사, 유학 얘기를 해본 적이 없잖아.

  전형적으로 할머니들이나 달고 다닐 구식 이름을 가진 루시가 얼마나 똑똑하고 공부도 잘 했느냐 하면, 퀸 빅토리아 여학교에 다닐 때, 학교 대표로 만장하신 귀빈, 학부모, 학생들 앞에서 영국시인이 수선화를 보고 쓴 길고 긴 시, 정작 루시는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장황한 시를 외워 한 단어도 틀리지 않고 낭송을 해 우레와 같은 갈채를 받은 적도 있었다. 그 시가 루시에게 조금의 감동이나 공감을 주기는커녕 왜 남의 꽃을 찬양해야 하는지 속이 뒤집히는 걸 그들이 알지는 못했지만.

  이런 딸은 고향 앤티가에선 당연하게 여겨진 딸 차별 속에서도 건강하게 성장해, 드디어 사춘기에 돌입, 정상적인 2차 성징이 도드라짐과 동시에 성격을 좀 삐딱하게 변해버린 것 같다. 이해 하시겠지? 하여튼 카리브 지역에서는 보통일지도 모르지만 동아시아에선 너무 일찍 아닌가 싶을 정도의 성적 경험을 솔직하게 적어간다. 열네 살 때 ‘태너’라는 남자 아이와 이른바 (*락* 님이 처음 언급하셨던)텅슬라이딩 키스를 경험하는데, 어이가 없거나 쇼킹하게도, 루시는 이 경험을 통해, 혀라는 부위가 별 맛이 없다는 걸 알게 된다. 이어서 진짜 성경험까지. 작가 킨케이드의 펜은 거침이 없다.

  이렇게 몇 년 더 살다가, 남동생이 셋 생기고 부부는 다 큰 딸까지 네 명의 아이들을 양육할 여력이 없게 되자 맏이에게, 살아가면서 한 순간도 좋게 얘기해본 적이 없는 간호사를 갑자기 여성이 택할 수 있는 가장 훌륭한 직업이라는 식으로 말하기 시작하더니, 미국에서 딸을 넷 키우는 중산층의 베이비 시터를 하며 야간학교를 다니며 간호사가 되라고 하면서 홀로 미국행 비행기를 태웠던 것. 이리하여 19세 젊은이 특유의 반항기로 똘똘 뭉친 루시 조지핀 포터는 결코 좋아하지 않는 이름이 쓰인 출생증명서와 여권, 체류 허가증 등등을 소지한 채 미국 땅을 밟은 것.


  미국 땅을 처음 밟은 1월 중순, 루시는 처음으로 경험하는 것이 몇 개가 있다. 엘리베이터, 아파트, 냉장고, 냉장고 속의 음식을 먹는 것, 자기 개인용 화장실과 욕실 등등. 취직한 가정은 머라이어와 루이스, 그리고 이들 사이에서 생긴 네 명의 어린 딸, 루이자, 메이, 제인, 미리엄, 그리고 요리사 겸 가정부와 이제 새로 베이비 시터가 되는 루시, 이렇게 여덟 명으로 구성되어 있다. 만일 여주인 머라이어의 말대로 그들이 루시와 가정부를 정말 가족으로 생각한다면 그렇다는 뜻이다. 머라이어와 루이스는 기본적으로 선량한 품성을 지닌 전형적인 60년대 백인 미국인 중산층 가정을 꾸려간다.

  그러나 카리브해와 서인도제도, 미국에 사는 문명인보다 훨씬 더 자연과 유사하게 살아온 루시는 선량한 미국인 주부 머라이어의 생각이 낯설다. 다행스럽게 루시의 생각을 별 필터 없이 그대로 밝혀도 이상한 생각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지만 사고의 차이를 인정하고 수용하는 머라이어도 참 괜찮은 여자다.

  루시의 생각은 참으로 다양하게 반항적이다.

  제일 먼저 고향에서 숱하게 경험했던 남자들의 바람기와 허세, 그리고 이런 점이 비단 앤티가 섬의 남자만 그런 것이 아니라 친절하고 선량하기 그지없는 미국 남자이자 자신의 주인집 남자이기도 한 루이스도 똑 같은 짐승이란 것.

  섹스에 관한 솔직하기 그지없는 묘사. 그렇다고 톡톡 튀게 야하거나 그런 거 아니니까 괜히 김칫국 마시지 마시라. 내 의견으로는 서인도제도 유색인종들이 적도의 태양 아래 세상 어디보다 자연과 비슷한 삶을 살아온 사람들의 건강한 자연으로의 섹스 관념이 아닌가 싶었다.

  백인들, 특히 식민모국인 영국과 미국적 네오 제국주의에 대한 반식민 의식, 미국 자본주의와 미국식 속물에 관한 서인도제도 사람의 시각을 통한 관찰 등등이 지금 이야기하고 있는 루시의 건강한, 그리고 스무 살 젊음 고유의 권리인 반항적 시각이란 의미다.


  짧은 작품을 시시콜콜 다 이야기하는 건 모든 이에게 공개하는 독후감으로는 바람직하지 않다. 루시가 미국 땅에서 벌인 좌충우돌에 관해서는 직접 읽고 확인하시는 것이 좋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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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2-07-12 08:53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텅 슬라이딩 덕분에 제가 소환되는 리뷰로군요. 마침 저도 이 책을 사둔 바, 이제 읽어보아야 겠습니다. 루시가 성장하면서 생각하는 바를 따라가는 게 책을 읽는 재미가 되겠군요. 후훗.

Falstaff 2022-07-12 12:18   좋아요 2 | URL
죄송합니다. *락* 이라고도 하지 않았어야 하는데, 그때 다락방 님의 얘기가 얼마나 재미있고 재치 있어서 뒷골이 땡땡해지던지 그걸 아직도 기억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슬쩍 그냥 쓸까, 하다가 알라딘의 눈 밝은 독자께서 혹시 표절 운운하실까봐, 그게 아니더라도, 어엿하게 그건 제 아이디어가 아니니까 원래 사용하신 분을 거론하는 것이.... 비록 ‘다*방‘ 이 아니고 ˝*락*˝ 이라 해 좀 더 알기 어렵게 하더라도 밝혀야겠다. 싶어서 말입죠. ^^;;;
이 책은 솔직히 별점을 세 개 줄까, 네 개 줄까, 고민하다가 재치있는 문장 덕에 하나를 더 줘서 네 개를 준 것입니다. 아주 편안하게 읽으실 수 있을 거 같습니다.

coolcat329 2022-07-12 15:2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골드문트님 글 읽어보니 소설에서 코믹함이 느껴지는데 맞나요?
루시라는 인물이 엉뚱하면서도 굿센 그런 여성같아요 ㅎ

Falstaff 2022-07-13 08:04   좋아요 2 | URL
오, 코믹하지는 않습니다.
루시는 기성세대의 눈길로 보면 삐딱하고 반항적이고 저만 잘난 젊은이일 수 있습니다. 문장은 그래서 시니컬합니다. 저는 문장이 마음에 들었습니다.
물론 글을 통해 여성차별, 남성 속물성과 남성 위주의 사회 (근본적으로 카브리에서도 그렇고 미국에서도 마찬가지인), 식민주의와 신제국주의, 섹스, 자연성 등등 많은 이야기를 자잘하게 풀어내는 것도 재미있습니다. 근데 분량이 너무 짧아 그냥 툭, 던져놓고 만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그게 아쉽더라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