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부결 지만지(지식을만드는지식) 한국희곡선집
고동율 지음 / 지식을만드는지식 / 2014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우리나라 연극 역시 하루도 쉬지 않고 계속 공연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희곡을 읽을 기회가 별로 없던 것은, 그걸 기록으로 남기는데 조금 게을렀기 때문이라고 본다. 2021년에 희곡을 집중해서 읽은 건 내가 연극이나 드라마, 영화 대본에 각별한 관심이 있기 때문이라기보다, 엄연한 문학 장르이고 아마도 가장 오랜 문학의 형식 가운데 하나가 희곡이었음에도 그동안 지극히 적은 작품만 읽었다는 걸, 지난 몇 년간 중국의 현대 희곡 시리즈를 읽을 기회를 통해 깨달아서였다.
  정작 우리나라의 희곡에 관해서는 아는 게 별로 없다는 인식을 했다. 이때부터 우리 희곡을 찾아 읽으려는 마음이 생겨, 먼저 개관general overview을 위해 한양여대 김성희 교수가 엮은 <한국현대명작희곡선집>과 한국극예술학회가 두 권으로 펴낸 <한국현대대표희곡선집>으로 1910년대부터 60년대까지의 대표 희곡을 감상했다. 이어 최근의 희곡을 알아볼 요량으로 이유진 등의 작품을 수록한 <2020 희곡우체국 낭독회 희곡집>을, 이어서 이만희 이은준 김민정의 희곡집을 연이어 읽었다. 먼저 놀란 것은, 우리나라의 ‘대표’ 희곡들을 모은 선집이라서 그랬는지, 고급의 품질이라고 할 작품들이 상당수 있었으며, 그걸 여태 모르고 지났다는 것. 물론 오래 전에 최인훈과 천승세 등의 작품은 읽어본 바 있으나, 무려 한 세대에 달하는 세월동안 희곡을 읽지 않은 것이 작지 않은 손실이었음을 알게 된 일 하나만으로도 소득이었다.
  내년에도 우리 희곡 읽기는 계속할 예정이다. 우선 국립극단이 2018년부터 발간하고 있는 <희곡우체국> 시리즈와, 서울연극협회가 2011년부터 매년 내고 있는 <서울연극제 희곡집> 시리즈의 통독을 계획하고 있다. 사이사이에 희곡작가들의 작품집도 읽으려 생각하고 있지만, 고백하건데, 희곡 작가들을 별로 알지 못해 누구를 읽어야할지, 어떤 작품이 좋은지도 모르겠다. 아무쪼록 관심 있는 분들의 조언을 바란다.

 

  “지식을만드는지식” 출판사의 시리즈 가운데 ‘지만지한국희곡선집’이라고 있다. 이 시리즈에 1910년대부터 2000년대까지의 백여 편에 달하는 우리나라 희곡을 다양하게 담고 있는데, 문제는 이 집구석에서 만드는 책들이 오지게 비싸다는 점. 값은 이렇게 비싸게 받아먹으면서도 딱 한 편의 작품만 수록하고 있다는 거. 이것저것 다 합하면, “진짜” 비싸다. 그래서 내가 읽은 책 <인간부결>은 개정판이 아니라 구판이며(개정판은 정가 12,800원에 판매가 12,800원, 구판은 정가 10,800원에 판매가 10,260원), 구판은 절판이라 당연히 헌책을 샀고, 헌책값 5천원 줬는데, 새 책보다 더 새 거다. 그래서 앞으로도 지만지한국희곡선집 시리즈는, 이런 건 번호 붙여 강조해야 한다, ①구판 헌책 또는 ②도서관을 이용하리라고 굳게 마음먹었다. 아니꼬우면 책값을 좀 내리든지.
  근데 지만지 출판사가 망하면 안 된다는 게 책 좀 읽는 사람들의 고민일 듯. 이들이 아니면 누가 있어서 내 인생 책, 장용학의 <원형의 전설>을 초판 그대로 출판을 해줄 것인가. 말 그대로 <원형의 전설> 초판본 출판은 출판사 입장에서 독자가 없을 것을 확실하게 알면서도, 세상 사는데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그놈의 “문화적 사명감” 없이는 만들 수 없는 책이기 때문이다. 그래 지만지가 고맙기는 고마운데, 책값이 보통 비싸야지. 책도 겁나 못 만들면서 책값만 오지게 비싸게 받아쳐먹는 한O문화사에 비하면 틀림없이 하느님이거나 부처님 가운데 토막이긴 하건만, 조금만, 책값을 조금만 내렸으면 좋겠다.

 

  극작가 고동율의 원래 이름은 양한석이다. 1929년 강원도 고성군 동리 밤나무골에서 태어났다. 훗날 극작가가 되어 작품을 발표할 때, 고성군에서 “고”, 동리에서 “동”, 밤나무골에서 “밤나무: 률栗”을 따 필명으로 삼은 인물이다. 1945년에 고성의 금강중학교 졸업. 17세. 그럼 5년 후 한국전쟁이 터졌을 때는 22세. 고동율이 참전을 했는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정확하게 4년 후인 1954년에는 강릉의 관동대학 상학과, 요즘말로 경영학과를 졸업한다. 하여튼 집안에 장정을 입대시키지 않을 만한 배경이 있든지, 입대는 하되 후방에 배치되어 대학과정까지 마칠 수 있을 금은보화가 있었든지, 일찌감치 참전해서 부상을 입어 개전 초기에 제대를 했든지 하여간 몇 가지 경우 중 하나다. 전화해서 확인해보려 했더니만 벌써 50년 전에 생을 마감했다.
  상과를 졸업한 고동율은 다수의 학교에서 교사로 재직한다. 속초중학교 국어교사, 주문진중학교 미술교사, 춘천중학교 미술교사. 상학과 출신이. 당시가 전쟁 후 극도의 혼란기여서 가능했다. 한 십 년 교사를 하며 틈틈이 작품을 써서 1965년 경향신문 신춘문예에 응모, 영광의 은메달, 가작 입선한다. 근데 당선이 아니라 상금의 절반을 받는 가작. 가작도 등단이다. 하지만 뭔가 좀 꿀리는 기분이 드는 건 사실이라, 일 년 후에 다시 같은 신문 신춘문예에 <동의 서>를 응모, 기어이 당선을 따낸다. 이 해에 극단 「광장」에 동인으로 참여하면 왕성하게 연극활동을 하다가 1972년 44세의 나이로 눈을 감는다. 그러니까 연극인으로 활동한 시기가 1966년부터 1972년까지. 완전한 박의 시대였다.

 

  연극 <인간부결>은 고동율이 신춘문예에 당선한 1966년에 초연된 작품이다. 1966년 역시 혼돈의 시기였다. 1년 전에 한일협정이 있었고, 여전히 반대 데모가 치열한 가운데 정권은 국가보위법을 이용해 한국독립당 내란음모사건이라는 허무맹랑한 정치공작을 감행했으며, 베트남에서는 꽃 같은 우리 청년들이 산산이 부서지고 있었다. 동사무소에서 주민등록등본 한 장 떼려 해도 소위 급행료를 말단 9급 공무원에게 디밀지 않으면 한 세월을 기다려도 나올까 말까 했던 시기다. 산업 전반에 뇌물을 동반하지 않는 사업이 없었으며, 뇌물이 너무 활성화되어 모든 단계를 거칠 때 마치 윤활유, 그리스처럼 기능하기도 했다. 이건 우리나라가 후져서가 아니다. 전 세계 모든 나라의 역사가 다 마찬가지였다. 일제강점기를 거친 내 부모 세대는 이걸 엽전의식이라 비하하면서도 열라 뇌물 바치고, 받는 행위에 골몰했다. 사회 전반에 부정행위가 저질러지고, 모든 기능이 부패했던 시기. 이런 현상은 보통 시민들의 사고방식까지 부패시키는 악순환을 동반한다.
  국내에서 가장 좋은 대학인 신라대학에 교수로 재직하고 있으며 이제 60번째 생일을 맞아 파티를 준비하고 있는 한빈 교수. 아내 김여사와 놈팡이 장남 철, 사법시험에 네 번 미역국 먹은 차남 운, 미국으로 의사공부 하러 떠난 딸 혜원이 있다. 객식구로는 마흔세 살 먹었으면서도 장가도 못간 처남 사달이 함께 살고 있다. 장남 철과 처남 사달이 극 중에서 사달을 일으키는 장본인들이고, 이들의 행위를 뒤에서 조종하고 있는 인간이 김여사다. 김여사는 전쟁 중에도 무사했던 집을 겉으로 보면 여전히 한옥이지만 내부는 완전한 서양식으로 꾸미고 싶은, 가히 집착적인 열망이 있다. 대학 시험에 한 번 떨어지고 곧바로 대학진학을 포기한 철과, 어린 숫처녀 아가씨와 장가들고 싶으니 연락 바란다는 신문광고를 내는 사달은, 60 평생 양심에 따라 옳은 길만 걸었던 아버지, 매부 한빈 교수를 이용해 과감하게 사기를 치려 작당한다.
  신라대학에 뒤로 입학시켜주겠다면서 일정액의 대가를 요구하는 것. 어떠셔? 평생 명예를 먹고 산 한빈 교수가 그래, 알았다, 하고 이 높은 양반들의 자제들을 신라대학 뒷문으로 들어오게 해주겠는가, 아니겠는가. 마지막 장에 등장하는 딸 혜원이도 참. 얘는 원래 무용에 뜻이 있고 재주가 있는데, 어머니 김여사가 무용을 해봐야 무슨 소용이 있느냐고, 미국 가서 의사가 되어 돌아오면 대기업, 삼양무역의 강사장이 아들과 혼인을 시키면서 15층 건물을 지어 건물 통째로 병원을 만들어주겠다는데, 무용은 무슨 무용, 의사 공부를 하라고 닦달을 했다. 그래 정말로 의과대학에 다니기는 했지만 적성에 맞지도 않고 어렵기만 한 의사 공부를 하느라 헤까닥, 미쳐서 귀국했다.
  분위기가 좀 어두운 것 같으시지? 스토리는 그렇다. 하지만 시종 웃음을 자아내려고 애쓰면서 일견 사회극으로 만들려 노력했다. 박의 시대였다. 처음부터 끝까지 엄숙하게 내놓고 사회의 문제점을 제기했다면, 고동율 역시 중앙정보부나 경찰 또는 검찰의 두뇌를 통해 만든 가상의 국가전복 반란죄에 걸려 치도곤을 당했을지 모른다. 박의 시대를 건너는 최선의 선택이었을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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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1-12-23 09:1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박의 시대가 뭐지 너무 너무 궁금해하면서 보는데 마지막에 의문이 풀리는군요. 에잇 저리가 박!!!
저는 희곡은 호흡을 따라가기가 힘들어서 잘 안읽히더데 Falstaff 님 희곡읽기 계획을 보니 역시 Falstaff님이라는 생각이 막막 드네요. 문화적 사명감으로 책을 만드는 사람들도 있지만, 이렇게 문화적 사명감으로 책을 읽는 사람도 있어 그나마 출판계가 숨이라도 쉬는거겠죠.
내년에도 계속될 Falstaff님의 희곡 읽기를 응원합니다. ^^

Falstaff 2021-12-23 09:29   좋아요 1 | URL
ㅎㅎㅎ 고맙습니다.
우리말로 된 희곡 읽기가 쉽지는 않습니다. 문장이 거의 비슷한 꼬리로 끝이 나는 것도 큰 원인인 거 같습니다. 일단 재미가 적잖아요.
그래도 처음 한 순간만 견디면 나중엔, 서양 희곡도 마찬가지지만, 대사만 읽어도 누가 말하고 있는 것인지 아니까 쉽게 쉽게 넘어갈 수 있더라고요.
바람돌이 님의 응원을 받으니 어깨가 으쓱으쓱합니다. ㅋㅋㅋㅋ

dollC 2021-12-23 20:4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지만지 책값 보면 정말 정떨어지는데 또 얘네 없으면 어쩌나 싶어서 내적 갈등 장난 아니에요. 망할 놈들아 망하지 마 -이런 심정이랄까요ㅋ

Falstaff 2021-12-24 08:31   좋아요 1 | URL
ㅎㅎㅎ 재미난 표현입니다.
말할 놈아, 망하지 마!
정말 제 심정에 딱 맞는 말씀이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