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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와 개들 ㅣ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202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 지음, 송병선 옮김 / 문학동네 / 2021년 9월
평점 :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의 장편 데뷔작. 작가 본인이 레온시오 프라도 군사고등학교를 2년 다니다가 중퇴한 전력이 있다. 이 군사고등학교는 페루의 영웅 레온시오 프라도를 기리는 학교다. 레온시오 프라도는 쿠바와 필리핀 등지에서 스페인에 맞서 싸웠고, 태평양 전쟁에도 참가한 페루의 영웅이다. 여기서 말하는 태평양 전쟁은 볼리비아-페루 연합군이 칠레와 한 판 붙은 전쟁을 일컫는데, 이 전쟁의 결과 볼리비아가 해변을 빼앗겨 현재의 완전 내륙국가로 떨어진다. 내륙국가면서 아직도 해군을 보유하고 있는 것도, 언젠가는 잃어버린 국토를 수복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지만 세상사가 너네 마음대로 되는 거니? 페루는 이 당시 전쟁 당사국이 아님에도 이웃한 볼리비아를 소위 형제국으로 알고 자국 축구국가대표팀처럼 용맹한 칠레에 맞서 싸웠다가 쌍코피를 흘린다. 패전 후에 이웃 국가가 될 힘센 나라 칠레와 사이만 멀어진 뻘짓을 해버린 꼴이니 어이없다고나 할까.
이 군사고등학교에 입학하면 3학년을 부여하고, 5학년을 마치면 졸업을 하는 기숙학교다. 학교 안에 여성이라고는 왕뱀이라는 별명으로 불리는 생도가 왼손으로는 주둥이를 막고, 오른손으로 앞다리를 부러뜨려 ‘절름발이년’으로 불릴 개 한 마리밖에 없다. 표지에 맹견 도베르만 세 마리가 그려져 있어서 진짜로 개가 등장하는 줄 알았다. 하지만 이 책에서 말하는 ‘개’는 각종 약자를 총칭하는 말이다. 4학년 입장에선 신입생인 3학년이 자기가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괴롭힐 수 있는 개고, 5학년은 3학년과 4학년 모두 개이며, 장교에겐 생도 모두 개라고 부를 수 있다. 교장 대령은 학교의 누구라도 개라고 말하고 호칭할 수 있는 권력이 있지만 당연히 체면상 그렇게 하지 않는다.
작가 자신이 이 학교에 1950년부터 52년까지 두 해 동안 다니면서 학교 내에서 온갖 폭행을 경험해 그것을 소설로 쓴 것이니만큼 내용은 사실과 가까울 것이라고 본다. 작가 서문에 요사는 어린 시절에 군사고등학교를 함께 다닌 알베르토(시인)과 재규어, 시골 촌놈 카바와 노예, 작품의 무대가 되는 알레그레 동네의 미라플로레스 사람들과 카야오에 있는 라페를라 동네 사람들에게 소재를 얻었다고 밝힌다. 이 소재들을 가공하는 재료는 청년시절의 문학적 경험으로 수많은 모험소설, 참여문학에 관한 사르트르의 주장에 대한 믿음, 말로의 소설, 읽어버린 세대의 모든 미국 소설가, 포크너에 대한 존경을 기초로 해서 작가의 환상 약간과 젊은 시절의 꿈, 플로베르의 가르침을 섞어 소설의 진흙을 반죽했다고 썼다. 세계적인 작가답게 화려하게 말했지만, 그냥 어린 시절의 경험에 소설가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독서경험과 상상력을 보태 작품을 썼다는 말이다. 괜히 어려운 작가들 이름 나왔다고 쫄지 마시라. 다만 특별히 포크너와 플로베르를 거론한 것이 좀 캥기는데, 시도 때도 없고 순서도 없이 불쑥 나타나는 회상 장면 때문에 약간 헛갈릴 수는 있지만, 그것도 처음에만 그렇지 주욱 읽어나가면 금방 적응이 된다.
이 책을 탈고하고 30년이 흘러 페루 대통령선거에 출마해 일본계 후지모리에 이어 영광의 준우승을 차지하고, 20년이 더 흘러 노벨 문학상을 받은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의 데뷔작이어서 그랬는지 기대가 너무 컸다. 대표작이 데뷔작인 경우가 상당히 많고, 분량 또한 서문까지 합해 6백 쪽이 넘어가는 장편이라 더 그랬을 수도 있다. 물론 재미…는 있다.
우리말로 번역한 요사의 소설을 읽은 독자는 페루(판탈레온 특별 봉사대), 멕시코(세상 종말 전쟁), 도미니카 공화국(염소의 축제) 등 라틴 아메리카 국가들을 골라가면서 요절을 내는 요사 특유의 정치소설을 기대하게 한다. 그러나 이 책은 페루의 수도 리마 근방에 위치한 레온시오 프라도 군사고등학교에 재학하고 있는 생도들, 이들을 둘러싼 학교 내 폭력과 학교 밖 가정과 동네에서 벌어진 일에 관한 일들이 뒤섞여 있어서, 정치소설이라기보다 사회소설로도 읽을 수 있을 것 같다.
독자로서의 나는 남자 기숙학교, 폭력을 최고의 가치로 하는 서열집단에서 벌어지는 야만의 광기에는 이미 익숙하다. 서열집단에 끼지도 못하고 학업 성취와는 관계없이 단지 힘이 없다는 이유 하나로 가장 비참한 ‘노예’ 신분으로 떨어져 집단 괴롭힘과 따돌림을 받는 현상 등도 마찬가지다. 요사는 이런 익숙한 그림에 사춘기 또는 사춘기를 갓 넘은 남자아이들의 맹목적인 사랑이란 감미료를 첨가했다. 그렇다고 남자 기숙학교의 풍경을 충격적이라거나 놀랍다거나, 아니면 신선하게 드러내지는 못했다고 읽었다. 작년 미셸 투르니에가 쓴 <마왕>에서도 작품 전체가 그런 건 아니지만 남자기숙학교가 등장한 바 있다. 이외에도 남자기숙학교의 만인에 대한 이리 상태는 많고 많은 작가들이 이미 썼다.
요사가 이들과 다른 점은, 다른 작가들은 주인공(들)의 성장에 한 과정으로 기숙학교 시절을 등장시키는데, 이이는 전적으로 기숙학교 시절‘만’을 대상으로 작품을 썼다는 점. 그것도 가장 폭력적인 ‘소총’을 상시 휴대하는 군사고등학교 학생들이라는 점에서 다른 작가들보다 더욱 위험 수위가 높은 곳에서 출발한다.
첫 장면은 화학 중간고사 바로 전날, 금요일 밤에 악동 넷 가운데 산골 촌놈 포르피리오 카바가 주사위를 던져 창문을 넘어 교무실로 잠입해 화학 시험지를 베껴오는 일을 맡는다. 걸리면 퇴학을 면할 수 없는 중대 교칙 위반인 건 당연하다. 카바는 성공적으로 화학 시험문제를 공책에 베껴 쓰는 데 성공하지만, 창문을 다시 넘어오면서 유리창을 밟아 깨고 만다. 이건 나중에 이들의 행위가 발각되리라는 것의 복선이고, 당연히 암시한 대로 발각된다. 왜 악동들이 이런 어처구니없는 모험에 목숨을 걸까? 악동, 왕초그룹이라고 이름 붙인 재규어, 카바, 왕뱀, 곱슬머리, 네 명의 구성원은 학급은 물론이고 신입생 시절부터 전 학년을 통틀어 가장 폭력적인 그룹으로 감히 손댈 수 없는 언터처블로 이름을 날렸지만, 그렇다고 돈이 궁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그래 이들은 시험문제를 빼내고, 그걸 같은 반 생도들에게 비싸게 받고 팔아, 매점에서 시내보다 두 배나 비싼 술, 담배를 사고, 외출할 때의 용돈으로 쓴다. 물론 이 시절을 건너온 남자들은 알겠지만 그런 것보다 더 중요한 건, 이 일 자체가 극도로 위험해서 자신들이 아니라면 감히 누구도 시도해보지 못할 남자, 아니, 수컷다운 행동 때문이었으리라.
반에서 몇 명 안 되는 금발의 백인인 알베르토는 ‘시인’이라는 별호로 불리는데, 아버지가 하도 바람둥이라 엄마하고 가장 사이가 좋지 않을 때 학교에 들어오게 된다. 이 학교는 완전히 문제아거나 너무 여린 성격의 아이라서, 양방향으로 성격교정을 위해 부모에 의하여 들어오는 것이 일반적이고, 알베르토와 반장(학생소대장) 아로스피데 등 몇 명은 가문의 전통을 잇기 위해서이기도 하다. 불행하게 용돈이 충분하지 못한 시인은 결국 화학의 정답을 사지 못했으나 시험시간에 노예가 해답이 적힌 쪽지를 던져줘 펼쳐보려는 순간 가장 엄격한 군인 감보아 중위에게 발각되어, 중위가 보았다시피, 아직 쪽지를 펼쳐보지 않은 시인의 시험지는 좍좍 찢어지고, 노예는 토요일 외출, 외박이 금지된다.
노예. 애초에 군인이 될 마음이 전혀 없는 내성적인 소년. 어려서 아버지와 떨어져 살다가 나이가 든 후 합치는 바람에 집에서도 별로 친하지 않은 괄괄한 성격의 아버지는 노예 리카르도 아라나의 성격개조를 위해 군사학교에 집어넣었는데, 이웃 여학생 테레사를 마음 깊이 사랑하고 있었던 터. 오직 하나 의지할 사람은 테레사 한 명. 지옥같은 학창시절을 보내는 노예는 오직 하나 토요일이 되어 테레사를 만나는 꿈 하나로 버티고 있던 터, 외출 외박 금지는 불쌍한 노예 입장에선 어떤 이유에서도 다시 찾아야 할 꿈이요 로망이었다. 바로 여기서, 가장 비천한 신분의 꿈이 무너지면서, 기숙학교 레온시오 프라도 군사고등학교의 가장 유명한 학년, 그중에서도 제일 남자다운 학급이 산산이, 아예 박살이 나고 만다.
요사가 썼다. 재미있다. 다만 큰 기대는 하지 않는 편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