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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사로 가는길 ㅣ 범우문고 219
이상보 지음 / 범우사 / 2006년 1월
평점 :
저 먼 먼 시절, 중학교 1학년이었을 적, 부모가 읽던 잡지쯤에 이상보의 수필 <갑사로 가는 길>이 있다. 그리고 그것보다 더 멀리 대전인가 공주에서 한 밤에 택시를 타고 부모와 함께 동학사인지 갑사인지 비포장길을 달리던 기억도 있다. 그때 동학사에서 갑사로 넘어갔던가, 갑사에서 동학사로 넘었는가도 가물가물하다. 당간지주와 남매탑 앞에서 어린 내가 차려 자세를 하고 부모와 함께 찍은 사진이 앨범 어딘가에 있을 것이다. 흑백이었었나, 색 바랜 초기 컬러 사진이었나 그것도 정확하지 않다. 가을이었고, 산을 넘어 숙소에 도착해 우연히 만난 두 젊은 등산객이 굵직한 살모사를 잡아 껍질을 벗기고 휘발유 버너에 푹푹 끓여 기름이 뽀얗게 뜨는 곰국을 끓였던 건 확실하다. 계룡산 남매탑 앞에서 탑에 관한 전설을 이야기해주던 이는 국문과 나와 여고에서 교사를 하던 어머니가 아니라 아버지였다. 아마 그래서 중학교 올라가 우연히 잡지에서 찾아 읽은 <갑사로 가는 길>이 그토록 오래 기억에 남았었던 건 아닌지. 수필의 내용은 다 잊고 오직 제목일지언정.
이상보의 수필집 《갑사로 가는 길》을 본 순간 망설이지 않고 샀다. 조금쯤 설레는 마음으로. 내가 여태 재미있게 읽은 수필집은 사실 몇 권 되지 않는다. 문일평이 찬란한 산문으로 만든 《화하만필》, 이어령의 《바람이 불어오는 곳》과 《흙 속에 저 바람 속에》, 양주동의 《문주반생기》, 변영로의 《명정 사십년》 정도. 김소운의 《목근통신》과 이상의 《권태》, 무라카미 하루키의 《먼 북소리》는 이 목록에 들지 않는다. 《먼 북소리》는 읽다가 버렸다는 걸 굳이 밝힐 필요는 없을지도 모르지만. 한 마디로 수필이란 장르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그러나 《갑사로 가는 길》의 기억이 워낙 추억으로 저며, 사서, 이제 읽었고, 실망했다. 그냥 기억만 하고 있을 것을.
이상보는 1927년생이다. <갑사로 가는 길>를 발표한 해가 1972년. 나는 이 수필집에서 1970년대 이전의 수필을 기대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대다수의 수필이 1990년대와 2000년대, 주로 김영삼 집권 시기에 몰려있다.
그리고 <갑사로 가는 길>. 내가 여태 가슴을 저며 하고는 했던 갑사로 가는 길은 이상보의 글 속, 동학사에서 남매탑을 거쳐 갑사로 넘어가는 길이 아니라, 야심한 밤에 택시를 대절해 거의 완전한 어둠을 뚫고 달리던 기억 속의 비포장도로였던 거다. 아마 이상보와 같이 부모와 나도 동학사에서 출발해 갑사로 넘어갔을 것이다. 그럼에도.
차라리 읽지 말 것을. 그냥 마음속에 갑사 가는 길, 이라는 하나, 가상의 글을 담고 있는 편이 더 좋았을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