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의 평범성 창비시선 453
이산하 지음 / 창비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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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60년 당시 지명으로 영일군 죽장면에서 태어난 시인. 부산의 혜광고등학교와 경희대 국문과를 졸업했다. 이이의 10년 직속 선배로 신춘문예 삼관왕, 경희대 국문과를 빛낸 동시 시인, 서정시인이자 소설가, 정호승이 있다. 지금은 공장 프레스로 찍어내듯 비슷한 시를 무한 복사하고 있지만 한때 그의 시를 읽으면서 그렇게도 절절하게 공감을 했었다. 근데 이 유명짜 시인 정호승의 정반대 편에 본명 이상백, 필명 이륭이었다가 지금은 필명으로 이산하를 쓰는 시인이 있다. 정반대 편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검법은 달라도 고수는 고수를 알아보는 법. 이산하가 한라산 필화사건으로 수배 4년 동안 자신을 ‘은닉’ 또는 ‘묵인’해준 119명의 명단 속에 선배 시인 정호승의 이름도 들어있다.
  정호승의 시가 서정적이고 따듯하고 깊은 감수성을 지녔다면, 이산하는 정 반대라고 했으니, 서사적이고, 냉철하며 뜨겁게 투쟁적이다. 물론 개인적인 차이가 있겠지만, 조금 부담스럽다. 이산하의 《한라산》을 읽어보지 않았고, 그는 22년 동안 시집을 출간하지 않았기 때문에 《악의 평범성》이 처음 읽는 이산하다. 그러니 그가 한라산필화사건에 연루되어 모진 고초를 겪었고, 이후 붓을 꺾었었다는 것도 알지 못했다. 지금 생각하면 참 원시적일 때다. 그까짓 시 한 편, 시집 한 권 발표했다고 그걸 이유로 한 사람을 누더기로 만들다니. 안 그런가. 이산하는 22년 동안 그대로다. 아직도 그는 투쟁중이고 고문당하고 있다. 예를 들어 <나는 물방울이었다>에서;

 

  깊은 밤 내 이마 위로 물방울이 떨어졌다.
  천장에서 약 2분 간격으로 일정하게 똑, 똑 떨어졌다.
  (중략)
  한 시간쯤 지나자 물방울의 강도가 바뀌었다.
  작은 돌이 이마에 떨어지는가 싶더니
  세 시간쯤 지나서는 망치로 못을 박았고
  다섯 시간쯤 지나서는 도끼로 이마를 꽝, 꽝 내리찍었다.
  이제 이마는 물방울이 떨어지기 전에 이미 도끼에 찍혔다.
  이때부터 난 환청과 환시에 시달렸다.
  한 장수가 젊은 포로를 잡아 눈도 가리고 손발도 묶어
  적군의 매복지를 실토할 때까지 막사 추녀 밑에 세워놓았다.
  정수리에서 빗물이 일정하게 떨어지는 ‘물방울 고문’이었다.
  (중략)
  그날 이후 세상의 모든 것들은 물방울로 보였다.
  자세히 보면 맑고 투명한 물방울 속에는
  삶과 죽음의 경계를 허물고 고요해지는 그 무엇이 숨어 있다.
  (중략)
  그러므로 나는 여기서 계속 물방울을 맞으며 부서져야 했다.
  (하략)

 

  이런 미시적, 그러나 지속적인 고통은 시인의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비슷하게 영향을 끼치고 있다. 아직도 계속 물방울(고문)을 맞으며 부서지고 있으니. 이런 물방울 공포는 정말 물방울 고문이라는 것이 있어서인지, 아니면 본격적인 고문의 시작을 기다리는 예비적 공포심인지는 알 수 없고, 예비적 공포심 아닐까 싶긴 하지만, 만일 그렇다면 그건 김사인의 시집에서도 경험해본 다가올 물고문에 대한 공포심일 수 있다. 실제로 <나는 물방울이었다> 바로 다음에 실린 시 <욕조>는 이렇게 쓰여 있다.

 

  어렸을 때는 겨울 저수지에 빠져
  간신히 죽었다 살았고
  젊었을 때는 욕조에 빠져 평생 먹을 물을
  하루에 다 먹은 적이 있었다.
  헌법이 태어난 넓이 107x60cm, 깊이 50cm
  그 이후 이 세상은 작은 욕조였고
  이 세상에서 가장 깊은 곳도 욕조였다.

 

  어느날 우연히 길거리 모조품 노점상에서
  내 영혼이 감전될 것 같은 게 눈에 띄었다.
  금방이라도 악의 평범성을 증명할 것 같은
  자코메티의 조각상 「걷는 사람」이었는데
  난 얼른 운구해 빈 욕조 안으로 입관했다.
  그때부터 욕조가 봉쇄수도원으로 바뀌었다. (전문)


  이 시집에서 “악의 평범성”이 처음으로 등장한다. 1연에는 이십여 년 전 자신이 당한 물고문을 묘사했다. 나는 이 시를 읽기 직전까지 이산하의 과거를 알지 못했다. 그리하여 1연이 물고문에 관한 것인지 1도 알지 못한 상태여서, 저 넓이와 깊이에 빠져 한도 없이 많은 물을 먹을 수 있는 젊은이가 있을까, 의심했으니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이 시를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다 두 번째 읽고, 앞의 시와 연계해보니까, 아, 이게 물고문 이야기였구나, 겨우 알아챌 수 있었다. 그랬더니 이번엔 2연이 기다리고 있었다. ‘악의 평범성’에 관하여 설명하고 있는 연이지만 빈 욕조, 고문대가 봉쇄수도원으로 바뀌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알아채지 못했다. 자코메티의 조각상을 검색해봐도 마찬가지였다. 철사 같이 가는 금속으로 만든 인간의 걷는 모습. 그게 뭐. So what. 그러나 내용을 알고나서는 왜 욕조에서 다른 것도 아니고 헌법이 태어났다고 했을까, 이걸 단박에 알아차렸다. 그럼 현재의 헌법, 국가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헌법은 여기서 죽었다는 말이다.

  저 뒤에 “악의 평범성”이란 제목의 시가 셋 실려 있다. 이 가운데 두 번째 것, <악의 평범성 2>를 인용한다.

 


  “불교 승려들이 숲을 지날 때 혹 밟을지도 모르는 풀벌레들에게
  미리 피할 기회를 주기 위해 방울을 달고 천천히 걷는다는 말에
  난 아주 깊은 감동을 받았다.
  우리는 그동안 아무 생각 없이 얼마나 많은 생물들을 밟아버렸던가.”

 

  득음의 경지에 이른 어느 고승이나 성자의 얘기가 아니다.
  유대인 학살을 총지휘한 나치 친위대장 하인리히 히믈러의 말이다.
  전 친위대원을 술과 담배를 하지 않는 채식주의자로 만들고
  가난하고 소박한 생을 최고의 삶으로 꿈꾼 사람이기도 했다.
  악의 비범성이 없는 것이 악의 평범성이다.
  우리의 혀는 여기서 한 치도 벗어나지 않았다.  (전문)

 


  지독한 악행을 저지르는 평범한 사람을 말하는 것일 수 있다. 그러니까, 젊은 시절의 시인에게 모진 물고문을 가해서 하루에 평생 먹을 만큼의 물을 먹이고, 그래서 머리 위에 떨어지는 물방울이 마치 돌이 떨어지고, 망치로 머리에 못을 박고, 급기야 도끼로 꽝, 꽝 내리 찍히는 것 같았다가, 결국 환청과 환시에 시달리게 만드는 스트레스 장애를 유발하고. 이렇게 만든 사람이 집에, 가정이란 울타리 안에 돌아가 소박하고 절제된 삶을 추구할 수 있다는 거다. 비단 친위대장 하인리히 히믈러나, 시인이 직접 답사를 한 아우슈비츠에서만 이런 일이 벌어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나라에서도, 광주시민항쟁과 세월호 희생자에 대해서도 적어도 비슷한 일이 벌어졌다는 증거를 보여주고 있지만, 너무 가혹해 <악의 평범성 1>은 소개하지 않겠다.
  이 골수 진보 좌파가 보기에 21세기 우리의 혁명이었다고 주장하는 촛불도 죽어버렸다. 장렬하게 전사할 심지와 근육이 있던 아날로그 양초촛불은 노동자에서 소시민적 인텔리로 동력이 바뀌는 바람에 디지털 LED 촛불로 바뀌어버려, 박종철과 이한열의 시체를 거름으로 피운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꽃은 피자마자 졌다. 박과 이의 희생이 있고 30년이 지나, 세월호 아이들과 백남기의 시체를 거름으로 피운 불꽃도, 피자마자 져버렸단다. 그리하여 비통에 싸인 이산하는 <촛불은 갇혀 있다>에서 이렇게 노래한다.

 

  앞으로도 우리의 입은 여전히 진보를 외칠 것이고
  발은 지폐가 깔린 안전한 길을 골라 걸을 것이다.
  촛불의 열매를 챙긴 소수 민주주의적 엘리트들 역시
  노동대중을 벌레처럼 털어내며 더욱 창대할 것이다.
  대한민국은 여전히 민주공화국이 아니라 의회공화국이며
  모든 권력도 국민이 아니라 자본과
  소수 좌우엘리트들로부터 나온다.
  그러니 심지 없는 촛불이 아무리 타올라도
  우리의 비정규직 민주주의는 여전할 것이고
  세상도 기득권자들을 위해 적당하게만 바뀔 것이다.
  그래서 난 촛불이 타오를수록 더욱 슬프다.  (부분)

 

  소위 진보 좌파진영이 180석을 장악한 의회민주주의의 2021년임에도 대한민국을 향한 이산하의 세계관은 밝은 전망을 보여주고 있지 않다. 되풀이할 역사를 되풀이해야지, 혁명을 원하고 투쟁해서 쟁취한 혁명가들이 정작 혁명을 성취하자마자 권력투쟁에만 몰두하여 반동의 길을 걸었던 것을 우리는 20세기 내내 보아왔지 않은가. 진보. 현상을 지양Aufheben하지 않는 진보는 죽은 진보이며 이미 보수다. 이산하는 촛불혁명을 성취한 현 정권, 열매를 챙긴 소수 민주주의적, 좌파적 엘리트들, 너희들도 이미 기득권이 된 건 마찬가지라고 일갈한다.
  이산하의 시를 읽는 일은 힘들다. 시인이 지나온 여정과 시에서 쏟아내는 고통과, 고통스러움 속에도 여전히 전망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 역시 슬프지 않을 수 없다. 이산하, 상처 입고 늙어가는 진짜 좌파 시인은 왜 전망을 제시하지 않는 것일까. 전망을 보여줄 수 없는 혼돈 속에 현재가 있다고 보고 있을까. 지난 아픔과 남은 상처, 현재의 질곡과 오류에 대해 개탄을 해도 시는 시고, 어쨌든 시는 된다. 그러나 기득권자들을 위해 적당하게만 바뀔 미래를, 다시 바꿀 비전을 제시하지 않으면 가까운 미래에는 결코 새로운 혁명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이 시집 《악의 평범성》을 덮으며 이런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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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1-12-03 09:01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이 시집 좋다는 얘기를 여러차례 들었기에 서점에 가서 슬쩍 들춰본적이 있어요. 제가 이해할 수 없을 것 같아 다시 꽂아놓고 나왔습니다.
그런데 오늘 폴스타프 님의 이 리뷰를 읽고나니 이 시를 읽을 수 있을 것 같아요. 폴스타프 님의 해설을 읽은 듯합니다. 저도 사서 읽을래요.

Falstaff 2021-12-03 09:11   좋아요 2 | URL
어렵지 않은 시들이지만 짊어지기 힘들 만큼 무겁더라고요.
마음이 너덜너덜해질 때도 있었습니다. 참고 하시기 바랍니다.

coolcat329 2021-12-03 09:02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악의 평범성. 정말 악은 이 세상 어디에나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거기다 평범한 얼굴을 하고 숨어 있기에 언제 어디서 튀어 나올지도 모르는거같아요.
하인리리 힘러가 저런 말을 했다니...하긴 히틀러도 채식주의자에다 동물을 참 사랑했다죠.
이산하 시인이 긴 공백을 끝에 발표한 시집이라 시인의 시를 기다린 사람들에겐 반가운 소식이겠으나 시의 내용은 희망이 보이질 않습니다.
물고문, 욕조...저는 가끔 심신이 너무 피로할때 따뜻한 욕조물이 정말 큰 위안을 주는데, 시인은 그 엄마 자궁 속 같은 물이 지옥같을테니 얼마나 슬픈지요.ㅠ

Falstaff 2021-12-03 09:14   좋아요 2 | URL
평범하다못해 경건하고 독실한 종교인인 경우도 많았습지요.
하여튼 세상 사는 거 어려워서 조심조심 살아야 합니다. ^^;;

행복한책읽기 2021-12-03 18:40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저 두근두근했어요. 폴스타프님이 어떻게 읽으셨을까. 좋아했을까 엄~~~청 궁금했거든요. 역시, 넘 명품 리뷰에요. 짱이에요. 제 리뷰는 감성 위주였건만 폴스타프님은 평론을 쓰신 걸요. 해박함. 분석력. 으뜸이십니당~~~^^ 저는 이산하 시인의 세계관이 한편으로 부담스러우면서도, 찌잉~~~~큰 울림을 줬어요. 비판의 칼날이 매서운만큼 아프기도 했구요. 저는 일개 독자로서 이 시인이 트라우마에서 조금 벗어나 웃는 날들이 많아졌으면 좋겠다, 행복해졌으면 좋겠다 바라게 되었어요.
폴스타프님 한라산도 읽어주세요. 저는 엄두가 안 나 리뷰 못썼어요. 폴스타프님이라면 잘 써주실 것 같아요. 말씀대로 이산하 시를 읽기란 힘들지만, 저는 올해 어떤 시집보다 좋았어요^^

Falstaff 2021-12-03 19:42   좋아요 1 | URL
에휴...제가 지금은 이거 말해야 하나 모르겠는데, 이른 시간에 엄청 취해서요... 댓글은 내일... 에휴... 제가이렇게 살아요.. ㅎㅎㅎ

Falstaff 2021-12-04 09:28   좋아요 1 | URL
에고. 맨 정신에 댓글 읽어보니까 이런 과찬의 말씀을 다 하시다니...
이 시집도 읽기가 힘겨웠는데 한라산까지 읽으라시면 우짭니까. ㅋㅋㅋ 읽더라도 나중에 읽어야지 싶습니다.
저도 이 양반이 얼른 회복해 평화로운 말년을 보낼 수 있기 희망합니다만 시 전편을 보니 그리 쉬워보이지 않아 안타깝군요. 트라우마가 그렇게 무서운 거란 걸 배웁니다.
휴일 편하게 쉬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