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무 김민정 희곡집 1
김민정 지음 / 연극과인간 / 2011년 10월
평점 :
품절


 


  1974년 당진 출생인데, 이 당시에 당진 가려면 천안, 온양 지나 신창고개부터 비포장도로로 하루 왼 종일 가야 했던 오리지널 아부지, 돌 내려가유, 였다. 단국대 국문과를 졸업하고, 예종에서 박조열, 윤조병을 사사하며 본격적으로 희곡 쓰기를 시작했는데, 여러 장르 가운데 희곡을 선택한 것이 기가 막혀서 데뷔작인 <가족 왈츠>가 국립극단 신작희곡 페스티벌에 덜컥 당선, 2004년 극단 움툼*이 연우소극장에서 초연을 한다. 이 책 《해무》가 김민정의 첫 번째 작품집으로 표제작을 포함해 모두 다섯 작품이 실려 있는데, 모두 연극제 당선이나 연극상 수상, 문화재단의 창작지원사업 선정 등의 영광을 누린 것들이다. 이 정도면 가까운 앞날에 김민정이란 이름이 우리나라 연극사에서 반짝, 빛을 발하리라고 짐작할 수 있겠다. 실제로 연극관련 전문 출판사 ‘연극과 인간’은 《해무》를 찍고 9년 후인 2020년에 이이의 두 번째, 세 번째 희곡집 《너의 왼손》과 《하나코》를 출간한다.
  소설이라고 그렇지 않겠느냐만, 보다 다중에게 접근하는 극문학으로의 희곡이라서 그런지 작품마다 다 사연이 있다. 소설은 작가 한 명이 작품과 관련한 인터뷰나 자료조사 같은 작업을 위해 소수의 인물, 사건, 이야기에 접근을 하겠지만, 연극은 희곡의 집필부터 극에 올라갈 때까지 스태프와 연기자들과 많은 관계자와 복잡하고 다양한 얽힘이 있어서, 작가는 책의 뒷부분에 “극작과 공연에 관한 후일담”을 재미있게 적어놓았다. 이것도 김민정의 재치고 배려라고 생각할 수 있다. 후일담은 대개 재미있거나, 감동적인 스토리가 많으니.

 

  첫 번째 작품 <가족 왈츠>는 전직 경찰관이자 단란한 가족의 가장인 아버지가 18년간의 교도소 복역을 마치고 돌아온 이야기다. 한두 해도 아니고 18년 복역이면 당연히 중죄인이었다. TV <인간극장>에 소개된 실화를 모티브로 했다는데 말 그대로 모티브, 힌트를 받았을 뿐이지 정말 이런 가족이 있었다고 생각하면 오산일 듯. 아버지, 엄마, 이모, 그리고 인수, 이렇게 네 식구가 단란하게 생활하다가 새 집을 사서 이사한 날, 이모가 가르쳐주어 아버지와 엄마가 서투르게 왈츠를 춘다. 서로 발을 밟아가며. 그래서 제목이 <가족 왈츠>. 김민정에게 가족이란, 가족의 구성원으로 제일 중요한 것 가운데 하나가 식구들이 빠짐없이 모여 단란하게 저녁 식사를 하는 것 같다. 18년 만에 출옥해 돌아온 아버지가 집에 오니 엄마, 집엔 아내밖에 없다. 이게 작품의 시작이다. 인수는 벌써 남미, 자신을 아는 사람이 하나도 없는 완벽한 자유지대로 떠나버렸다. 식탁에 앉은 부부가 대화를 나누고 있는데, 날을 맞춰 터벅거리는 특유의 발자국 소리를 내며 아들 인수가 집에 돌아온다. 스포일러가 아니라는 믿음으로 한 마디만 보태면, 엄마는 3년 전에 이미 자살을 해버렸다는 점.

 

  두 번째 <십 년 후>를 제일 재미나게 읽었다. 극단 작은신화의 우리연극만들기 공모 당선작으로 아주 평범하지만 조금은 특별한 30대 중반의 여자들이 10년 만에, 10년 전에 약속한 대로, 만남을 갖는 이야기. 하필이면 폭우가 내리는 날이다. 수진, 주리, 희남이란 이름을 가진 이들에겐 공통점이 있었으니 한 남자를 사랑했다는 것. 수진과 주리는 몸과 마음으로 서로 사랑을 했고, 희남은 남자가 군대에 있던 시절 그이 앞에서 꼭지가 돌게 술을 마셨지만 남자는 앞에다 희남을 두고 두 여자 얘기만 했던 씁쓸한 기억이 있다. 이들 셋은 함께 그 남자를 보러 면회를 간 적도 있고, 주리는 부대 앞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제대하는 남자를 납치해 섬으로 떠났던 적도 있다. 이들 표현대로 한다면 적어도 수진과 주리는 ‘소시지 동서’ 사이다. 수진과 주리는 행복하지 못한 결혼생활을 하고 있고, 중절수술 후유증으로 불임 판정을 받은 희남은 여전히 혼자 산다. 수진은 유럽에서 유학 중인 남편이 연애중이고, 주리는 자기가 다른 남자와 연애중이다. 이미 30대 중반에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눈치를 챈 여자들의 수다. 10년 전의 복잡한 갈등도 이미 삶 속에 다 녹아버린.

 

  세 번째 작품이 조금 각색해서 영화로도 만든 표제작 <해무>. 앞의 두 작품과는 완연하게 구분이 되는 리얼리즘 극이다. 주로 학꽁치라고 부르는 공미리를 잡는 배 전진호에서 벌어지는 이야기. 가난이 죄다. 선장 강성진은 빚을 갚지 못해 이번에 공미리 만선을 하지 못하면 배를 빼앗길 처지이지만 이상기후 탓인지 공미리는 여간해 잡히지 않는다. 작품에는 선명하게 나오지 않지만 강선장은 ① 출항하기 전부터 이럴 때를 대비해서 공해상에 나가 중국에서 한국으로 밀입국하려는 조선족 서른 명을 태워주기로 약속을 했거나, ② 어획량이 턱없이 부족해지자 무선 암호로 밀항에 가담하기로 했을 것이다. 그래 원래는 잡은 생선을 보관해야 하는 밀폐 창고에 서른 명이나 되는 밀항자들을 싣고 상륙을 해야 했지만, 때마침 근해에서 해경들이 정기 훈련을 하고 있어 예상보다 오래 바다에 머물게 된다. 그러다 열대성 저기압이 태풍으로 변해 북상하기 시작했고, 안전을 위해 밀항자들을 창고로 내려보내고 비바람을 견뎌내는데, 그동안 그만 창고 안의 밀항자들이 전부 질식사해버린다. 강선장이 내린 결정은 수장. 모두 바다에 빠뜨려 상어 밥을 만들려는데 어쩔 수 없이 밀려드는 것이 있었으니, 바로 죄의식. 여기에 선원간의 갈등과 선장-선원 사이의 갈등, 그리고 빠질 수 없는 로맨스도 섞인다.

 

  네 번째 작품 <나, 여기있어!>는 여섯 그룹의 독립적인 이야기를 섞은 복잡한 구도를 한 작품으로 역시 삶의 고단함, 가난으로 인한 가족간의 살인과 합동 자살 시도 같은 우울한 이야기를 담았다. 아무리 예술이라지만 과장된 패륜과 폭력이 독자로 하여금 눈을 찌푸리게 만들어 개운하지 않았다. 도시 빈민의 삶을 생생하게 보여주고 싶었나 보다. 아무리 그래도 한 편의 희곡 안에서, 리얼한 폭력과 살인과 유사 섹스를 보는 독자를 이렇게 한 방에 훅 가게 만들면 되겠어? 마지막 작품 <길삼봉 뎐>은 선조 22년에 실제 있었던 기축사화를 소재로 한 허구다. 서인 송강 정철이 정여립의 난을 치죄한다는 핑계로 동인들을 잡아 죽이는 과정에, 신하들의 권력다툼을 즐거운 마음으로 지켜보는 임금 선조, 그리고 이에 반대하는 동인 측 사람들의 총체적 권력의지, 즉 더러운 정치판을 그린 사극. 결론은 정치엔 절대선도 절대악도 없고 오직 권력의지, 불나방같은 정치지향 뿐이란 건데, 새롭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다섯 작품을 실었고, 이 가운데 세 편의 작품이 좋았으면 독자 입장에서 상당한 성과라고 할 수 있다. 중요한 작품이라 여태 몇 번에 걸쳐 공연을 한 바 있는 <해무>를 보면, 나는 영화로도 봤는데, 이런 작품을 쉽게 영화로 만들면 오히려 지루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희곡을 읽은 후에야 확신했다. 소극장 공연을 조건으로 하고 쓴 희곡을 대형 스크린 상영이 목적인 영화로 만들기엔 무엇보다 장소가 너무 단조롭다. 영화를 보면 거의 시작할 때부터 끝날 때까지 그리 크지 않은 선박의, 벌써 여러 컷이나 찍은 같은 장소가 무수하게 나올 수밖에 없다. 기관실에서 동식과 홍매가 사랑을 나누는 장면에서조차, 조만간 비슷한 일이 비슷한 장소에서 벌어지겠다는 짐작을 할 수 있었을 정도였으니까. 그러다보니 배우들은 이를 만회하기 위하여 오버액션을 해야 하거나, 영화감독이 그렇게 주문을 했을 수도 있다. 하여튼 희곡을 읽으면서는 여러 가지를 생각하게 된다. 이것도 즐거움이라고 여겨야 할 듯.

 

 


* 극단 움툼. ‘움툼’은 ‘움이 트다’와 전혀 관계가 없다. 영어로 자궁womb, 즉 수태에서 시작해 무덤tomb 죽음까지 한살이를 아우른다는 의미로 작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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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21-11-17 10:44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움툼의 작명 의미도 신박합니다.
읽어보고 싶은 희곡집이네요. 찜!
김민정 작가를
또 이렇게 소개받아 알게 되네요 ^^

Falstaff 2021-11-17 08:28   좋아요 4 | URL
저도 ‘움툼‘인지 ‘움틈‘인지 여간해 모르겠더라고요. 눈에 가물가물하게 보여서요. ㅋㅋㅋ 그래 검색을 해봐서 알아냈답니다. 좋은 작명입니다!
별을 하나 뺀 건, 다섯 작품 전부 다 좋다는 얘기는 아니라는 뜻입니다. ^^;;

프레이야 2021-11-17 10:46   좋아요 2 | URL
팔스타프 님 리뷰는 언제나 재미와 의미 모두 갖춘 완벽리뷰라 제가 좋아합니다.
눈이 ㅠ 고 심정 제가 넘 잘 알지요 ㅎㅎ
그래서 교정 보다가 요샌 놓치는 게 있어 파일로 받아 확대해서 본답니다 ㅋㅋ

Falstaff 2021-11-17 12:02   좋아요 0 | URL
아이고, 이런 황감한 말씀을 하시면.... 몸둘 바를 모르잖습니까. ㅎㅎㅎㅎ
눈이 참 기특하게도, 근시 난시에 노안까지 다 있는데요, 글쎄 책 읽는 거리만 딱 잘 보이는 겁니다. PC까지는 조금 촛점이 맞지 않아 요새 오타가 좀 많고요. ㅋㅋ

다락방 2021-11-17 14:3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해무>는 영화의 존재도 몰랐는데 희곡이 원작이었군요. 써주신 줄거리를 보니 뭔가 장편소설 됐어도 되게 좋았을 것 같아요. 무섭지만 뭔가 진한 소설이 됐을듯요.

Falstaff 2021-11-17 15:03   좋아요 2 | URL
예. <해무>를 장편소설로 썼다면 미스테리나 스릴러로도 좋았을 거 같습니다. 위에 얘기하지 않았는데 잔혹한 장면도 있어서 정유정이 썼더라면 말 그대로 피바다가 됐을지도 모르겠습니다. ㅋㅋㅋㅋ
서른 명이나 되는 밀항자가 죽음을 기다리고 있었으니 말입니다.

coolcat329 2021-11-18 08:0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1,2,3번이 저도 맘에 드네요. 전체적으로 어두운 분위기에 미스터리,스릴이 있는거 같아요.

Falstaff 2021-11-18 08:21   좋아요 1 | URL
연극이라는 장르가 사실을 좀 과장하는 측면이.... 있는 거 같아요.
저 잉글랜드의 셰익스피어도 예외는 아니었잖습니까. 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