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서
옌롄커 지음, 문현선 옮김 / 자음과모음(이룸)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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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풍아송>, <인민을 위해 복무하라>, <레닌의 키스>에 이어 네 번째 읽은 옌롄커.
  1958년 8월에 중국 허난성 뤄양시 쑹현현(현 정부는 청관진 소재)에서 태어난 옌롄커(閻連科). 내가 알 수 있는 옌 씨의 출생지는 쑹현 현까지다. 쑹현 현에 속한 마을이거나 현의 수도인 청관진(鎭)일 수도 있겠다.
  이렇게 자세하게 중국의 행정구역을 소개하는 이유는 이러하다.
  이 작품 <사서>는 중국에서 천지개벽, 즉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되어 전 중국 각지에서 먹물이 들었거나, 중산계급 이상이거나, 동네 이장에게 미운털이 박혔거나 하는 인물들을 몽땅 색출해 ‘하방’이란 이름으로 시골지역으로 이주시키고, 이들에게 “노동을 통한 재탄생”의 기회를 주었을 당시를 시간적 공간으로 한다.
  장소는, 중원 땅 황허 남쪽 본류에서 백여 리 떨어진 광활한 모래사장으로 명나라 시대부터 대표적인 유배지였으나 수백 년 동안 유배 온 죄수들의 제방공사와 토지 비옥화 작업으로 땅이 ‘땅의 꼴’을 잡자마자 중화인민공화국이 성립되어 이젠 유기수들이 노동교화로 곡식과 면화를 심는 대농장으로 이름을 위신구(育新區)라고 하는데, 이 안에 모두 99개의 구(區)가 있으며, 총 구성원 127명 가운데 95퍼센트를 중국의 최상급 지식인들로 모아놓은 마지막 제 99구를 만들었다. 작가 옌 씨는 이 제 99구를 책임지고 인솔하는 인물을 ‘아이’, 말 그대로 코밑에 솜털만 난 10대 초중반 남자 아이로 설정했다.
  이 문제적 아이, ‘아이’는 당연히 본명이 있지만 책에서 단 한 번도 이름을 소개하지 않는다. 이 아이는 공화국 설립 전에 한 여자아이가 일본인의 심문에도 정보를 말하지 않았다가 일본인에 의하여 작두로 목이 잘렸으나, 공화국 설립 후에 국가 영웅으로 추앙받는 것에 깊은 감명을 받아 자신의 99구가 수확 목표량, 달성 수준에 사활을 걸어 터무니없는 목표설정과 달성 재촉에 저항하는 구성원들에게 자신의 작두를 앞에다 내놓고 작두날 안에 자기 목을 집어넣고는, 어서 내 목을 잘라라, 아니면 달성목표에 동의하라, 이런 식으로 99구를 끌어간다.
  하여튼 아이가 이끄는 99구는 터무니없이 높은 목표량과 밀 농업 이후 강철제련 목표에서 훌륭한 달성률을 보여 자신의 상부인 진, 현, 시, 성의 칭찬과 시상을 성취하고, 이어서 베이징에 상부의 상부의 상부, 즉 마오로부터도 근사한 상을 받아내 본인이 영웅으로 불리기를 바라고 있다. 그런데 이런 야망은 혼자만 가지고 있나. 아이의 99구는 현에서 가장 특별한 성취를 올리기는 했으나 현장은 99구의 결과에 2등 상을 수여함으로써 아이의 베이징 행을 막아버리고 다른 당근의 제시하여 또 직사하게 일만 하도록 만든다.
  아이의 꿈. 진-현-시(책에서는 지구地區)-성-수도로 이어지는 영달의 로얄 로드가 작품을 이끌어가는 가장 중요한 동력이 되기 때문에 저 앞에서 행정구역 소개를 상세하게 했다.
  하여튼 이 왕도는 정말 대단한 것이라서, 전 세계를 대상으로 하는 수학, 화학, 물리, 생물 등의 올림피아드를 중국이 싹쓸이 하는 이유도 이 왕도를 또박또박 걷는 학생들만 선발하기 때문이다. 올림피아드 출전 대상자 서너 명을 뽑기 위해 전국 23개 성, 5개 자치구, 4개의 직할시에서 과목에 따라 다르겠지만 내가 들은 바에 의하면 딱 한 명만 선발해 모두 32명의 학생이 최종 시험을 치룬다고 한다. 중국 인구가 14억 명이다. 말이 14억이지, 우주공학적으로 설명하자면, 중국 땅에 사시는 모든 중국인들의 분변 슬러지를 드럼통에 담아 그걸 한 줄로 세울 경우 304일 만에 달에 도달해, 인류는 오직 중국인이 싸질러 놓은 똥오줌 슬러지만 부여안고 달까지 기어 올라갈 수 있다는 걸 감안해보시라. 그렇게 촌-진-현-시-성-수도의 왕도는 멀고도 먼 고난의 길이다.

 

  제일 앞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겨우 네 작품을 읽고 옌롄커가 이렇다, 저렇다 하는 건 말이 안 되는 일이다. <사서 四書>는 제목만 딱 보면 『시경』과 매우 관련이 있는 <풍·아·송 風·雅·頌>과 유사할 거 같지만 내용은 <레닌의 키스>에 가깝다. <레닌…>에서 레닌의 시신을 망해버린 소비에트에서 구입해 와 현을 세계적인 관광명소로 키우겠다는 허황된 야망에 찬 현장 류잉췌의 도전기가, <사서>에서는 아이가 현장의 귀띔을 받아 맹목적인 도전을 감행하는 것과 유사하고, 실제로 중국의 현대사에 있었던 1950년대 대기근으로 곳곳에서 아사자가 속출했던 비극도 <레닌…>에 이어 다시 재현된다. 하방 지식인이 등장하는 작품도 낯설지 않다. 천쯔두와 주샤오핑의 공동작품인 <뽕나무벌 이야기>를 비롯한 드라마, 소설 등을 이미 읽었다.
  아직까지도 공산주의 체제가 과시해온 ‘프롤레타리아 독재’, 즉 한 명의 지배자가 불쑥 나타나 무진장 오랫동안 프롤레타리아를 대상으로 독재체제를 마음대로 펼치는 정치구조를 자랑하는 중화인민공화국도, 역사상 모든 프롤레타리아 독재국가가 그랬듯, 프롤레타리아의 생생한 모습을 드러내는 것을 유난히 싫어한다. 그런데 여태 내가 읽은 옌 선생의 작품을 보면 하나같이 지식인들의 타락과 도시빈민을 넘는 도시천민과 시골 극빈자들의 험한 광경을 날것으로 보여주기에 머뭇거림이 없다. 상황이 이러니 가뜩이나 정부의 눈치를 보느라 여념이 없는 출판업계가 흔쾌하게 옌렌커의 작품을 찍어줄 턱이 없어서, 옌렌커는 자신의 현실 풍자적인 작품에 대하여 수시로 자기 검열을 한단다. 오직 하나, 진짜 검열에 걸리지 않기 위해.
  그러니까 최고 지식인들의 하방, 농업이란 육체노동을 통한 의식 개조 또는 재탄생, 40년대 후반의 강철제련운동, 대기근 등을 거치며 중국에서 가장 위대한 <유물론>의 번역본을 낸 학자마저 풀씨를 먹는 참새의 똥을 삼키는 장면 역시 옌렌커의 자기검열을 통한 것이라 봐야 하니까 그의 자기검열 필터가 성기긴 한 모양이다.
  책에 등장하는 99구의 인물을 거론하면, 책임자이자 권력자인 아이, 구성원의 일상을 “죄인록”이라는 보고서를 통해 아이에게 일러바치는 작가, 참새의 똥을 삼키는 <유물론>의 대가인 학자, 학자와 사랑에 빠진 1세대 자수성가형 음악가이자 피아니스트, 성서를 발로 밟으면 혜택을 주겠다는 아이의 제안을 거절하는 종교(인), 한자 자전과 사전편찬에 권위를 떨친 바 있는 교수, 놀라운 아이디어로 성에서 최고의 철 제련 성과를 만들어내고 위신구를 빠져나가는 실험(조교) 등이다. 이들은 중화인민공화국 수립부터 문화혁명시대까지 막 섞여있는 것처럼 보이는 작품 속에서 매 페이지마다 희열 없는 고초를 겪으며 오직 하나, 집단 노동교화 농장 위신구를 벗어나 자기 집, 가족, 직장으로 돌아갈 희망 속에서 고난을 겪거나 고난에 대항해 부러져 세상을 뜨고 만다.

 

  여기까지라면 아무 이의 없다. 근데 옌렌커가 좀 무리하는 게 눈에 띈다. 결정적 무리는 책의 마지막 장면에 나온다. 그래서 독자로 하여금 넋이 나가게 해, 에이 썅, 이게 뭐야 여기까지 잘 와서, 이런 생각이 들게 하지만 그것 때문에 이 책을 읽지 말라고 할 정도는 아니다. 아무리 중화인민공화국에 살고 있는 작가가 하더라도 3백 년 전에 옌롄커가 이 책을 썼다면 로마 교황청에서(교황은 무슨, 교왕이면 됐지, 라고 여기는 유물론자인 내가 보기에도) 보낸 암살자에 의해 쥐도 새도 모른 새에 죽어 자빠지든지, 이탈리아나 스페인까지 유괴당해 화형에 처해졌을 거라고 확신한다. 전혀 동의할 수 없을 정도로 근거 없고 난데없는 무리수라고 보이나 어디까지나 나는 아마추어다. 변죽만 울리고 입 싹 닦으면 얄밉기는 할 텐데, 그렇다고 왜 이런 의견을 피력하는지는 알려드릴 수 없다. 당연히 스포일러이기 때문이다.
  또 하나는 에필로그 격인 마지막 장 <시시포스의 신화>. 그걸 왜 넣었을까? 독자에 따라 상당히 의미심장하게 읽는 것 같지만 내 눈엔 진짜 잘 그린 뱀 다리다. 본문 가운데 아이와 작가가 수레를 끌고 40도 경사의 언덕을 오르는 장면 나오면 됐지 뭘 더 원하는 게 있다고 시시포스의 신화 운운하는지. 말이 나왔으니 하는 건데, 40도 경사는 언덕이라고 부르지 않고 “산” 메산山 자를 쓴다. 그런 경사를 무거운 수레에다 손만 척 얹고 슬슬 걸어가는 장면 나오잖는가 말이지. 제주도 가면 도깨비 언덕이라고 부르는 곳. 보기엔 오르막인데 차에 기어 빼 놓으면 차가 저절로 오르막을 기어 올라가는 착시를 유발하는 장소. 중국이라서 오르막이 40도 경사라고 우겨도, 중국인들의 유서 깊은 과장과 허풍을 미리 감안해서 들을 줄 아는 동방예의지국 사람들이, 구태여 시시포스의 신화라고 쓴 시시포스의 구라까지 읽을 필요는 없었을 거 같다는 촌평. 아쉽다. 이런 것들을 감안해도 참 잘 읽은 소설인데, 뱀의 다리가 확실히 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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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미 2021-09-07 12:5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음..리뷰읽고 달려가서 미리보기로 조금 읽어보니 재밌을것 같은데요. 풍자와 은유로 점철된듯한 느낌.
무리수가 심해 뱀 다리가 길다 하신거죠? 결정적 무리수가 너무 궁금합니다🤔

Falstaff 2021-09-07 13:00   좋아요 3 | URL
이 책은 제가 아는 분이 최고의 옌롄커라고 자신있게 얘기해서 선택했습니다만, 기대가 워낙 커서 그랬든지 하여튼 거기까지는 가지 못했습니다.
그래도 말씀하신대로 풍자, 은유, 해학 등등이 난만해서 끝까지 재미나게 읽히더라고요. 옌롄커가 워낙 입심이 좋은 작가라 일단 기본으로 별 두 개는 먹고 들어가니까요. ㅋㅋㅋ
도서관이나 중고책 구입하시면 좋겠습니다. 결정적 무리수는 사실 책의 앞에 조금 맛보기로 나오는 건데요 그걸 구체적으로 확 터뜨려버리는.... 하여튼 그런 거 있습니다. ㅎㅎㅎ

행복한책읽기 2021-09-07 13:20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검열 예방작에 저 정도 표현이 등장한 걸 보니. 과연 검열 그물이 성기나 봐요. 뱀이 예전엔 진짜루 다리가 있었대요. 과학적으로 증명이 됐다죠. ㅋ 저는 폴스타프님 리뷰로 이 작품 읽은 걸루^^;;

Falstaff 2021-09-07 13:43   좋아요 2 | URL
뱀한테 진짜 다리가 있던 때가 아마 6.25 전이죠? ㅋㅋㅋㅋ
옌롄커가 좀 거칠어서 안 좋아하시는 분도 많습니다. 괜찮은 선택입니다. ^^

coolcat329 2021-09-07 17:07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제가 가지고 있는 유일한 옌렌커 책이네요~^^물론 안 읽었지만요. 별4개니 그냥 기분좋네요.
사실은 이 작가 책 중 <인민을...>을 읽다가 도서관에 반납한 경험이 있습니다. 재미가 없더라구요🥱
사서는 기대해봅니다.

Falstaff 2021-09-07 19:28   좋아요 3 | URL
아후. 사셨으면 무조건 읽으셔야 합니다! 냅두면 나중에 애들이라도 읽겠지, 하는 건 걍 희망사항이예요!!!! ㅋㅋㅋㅋ
인민봉사하고는 많이 다릅니다. 그만큼 야~하지도 않고요. ㅋ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