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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우레처럼 다시 올 것이다 - 엄원태 시집 ㅣ 창비시선 363
엄원태 지음 / 창비 / 2013년 7월
평점 :
1955년 대구에서 태어나 지역 명문 경북고를 거쳐 서울농대에서 학사, 서울대 환경대학원 석사, 일반대학원에서 박사를 하고, 대구 가톨릭대학 환경원예조경학부의 조경학 교수로 재직 중이다. 동시에 대구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환경문화센터 소장으로 있단다. 이 양반을 아무리 검색해도 바이오그래피는 뜨지 않는다. 다만 1987년부터 만성신부전증으로 일주일에 세 번씩 혈액투석을 하며 교수 생활의 삶을 견뎌왔단다. 2013년에 나온 이 시집 《먼 우레처럼 다시 올 것이다》의 제일 뒤에 나오는 “시인의 말”과 실린 시의 내용을 유추하면 2007년 이후 대구 동북쪽 변두리 아파트로 이사를 해 고속도로 건너편 초례봉 산자락 들길을 오가는 산책을 즐겼으며, 지병인 신장병 때문에 특별히 병원치료를 받았던 것처럼 보인다.
이 시집이 시인 개인적으로 “생의 가장 중차대한 고비에 한 매듭처럼 묶이는 것”들로 모았다고 하니, 자신에게는 특별한 의미가 있는 시집일 수 있겠다. 다만 시인에게 중요한 의미가 있더라도 독자가 공명하지 못하면 오직 시인에게만 의미있는 시집이 될 우려와 염려가 드는 것도 사실이다. 세상의 어느 시인이 시집을 내면서 그 책자가 자신에게 가장 중대한 고비가 되리라 생각하지 않겠는가. 이 시집의 행간을 통해 읽을 수 있는, 시인이 그간 겪은 고초와 일신상의 변화가 안쓰럽기는 하지만 그것으로 시의 업을 변호하고자 하지는 말았으면 좋겠다.
내가 자주 이야기하는 분류법에 따르면 엄원태의 시는 착하다. 즉 독자가 시 읽기를 마침과 동시에 시인이 주장하거나 그린 현상, 사물 또는 감정을 즉각적으로 알 수 있다는 점이다. 그동안 우리 요즘 시의 난수표나 암호화, 파편화된 시를 읽느라, 아니, 읽어내느라 고생했던 걸 생각하면 이런 시집을 읽는 일이 반가울 수 있다.
그런데, 더욱 솔직하게 이야기하면, 그동안 요즘 시들의 특징을 그토록 비난했으면서도 정작 이런 시를 읽으니 조금은 촌스럽다느니 낡았다느니 하는 생각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새 나도 모르는 동안 요즘 난해한 시에 익숙해져서, 쉽게 말해 “겉멋이 들어서” 그런가보다, 하는 생각이 들었을 정도로.
《먼 우레처럼 다시 올 것이다》는 모두 4부로 만들었다. 이 가운데 1부에는 아픈 사람들과 병원을 소묘하는 시들이 포함되어 있다. 그래서 시들이 조금씩 아프다. 책 뒤에 실린 평론가 양경언의 해설 “수행의 미학”을 비록 읽어보지는 않았지만 첫 번째 실린 시 <타나 호수>의 부분을 제일 앞에 인용해놓았다. 나도 <타나 호수>의 전문을 인용해보자.
이제 너는 타나 호수로 돌아갔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타나 호수, 내 침침한 흉강 한쪽에 넘칠 듯 펼쳐져 있다. 거기에 이르려면 슬픔이 꾸역꾸역 치미는 횡경막을 건너야 한다. 고통의 임계 지점, 수평선 넘어가면 젖가슴처럼 봉긋한 두개의 섬에 봉쇄수도원이 있다. 우리는 오래전 거기서 죽었다. 파피루스 배 탕크와는 한때 내 몸이었다. 언젠가 다시 그곳에 가리라. 그때면 너는 물론 거기 없을 테지만, 한 무리 펠리컨들이 너를 대신해서 오천년쯤 날 기다려주리라. 그때, 내 입에선 문득 악숨 말로 된 노래가 흘러나올 것이다. (전문. 띄어쓰기는 본문에 따름. 다른 인용도 같음.)
타나 호수는 에티오피아에서 가장 큰 호수로 해발 1,830미터에 위치하며 청나일강의 유수지다. 사람이 태어나 죽기 전에 꼭 봐야 할 1,001가지 절경에도 든다는 관광지이지만, 설마 시인이 독자한테 관광지 광고를 하기 위해 시를 쓰진 않았겠지. 그에게 타나 호수는 청나일강을 시원하는 태고의 생명을 품은 곳이자 그리하여 이승을 마치면 돌아가야 하는 곳인지도 모른다. “고통의 임계지점”이라 하니 삶과 죽음의 바로 그 가는 경계선일 터. 수평선 너머엔 “젖가슴처럼 봉긋한 두개의 섬에 봉쇄수도원이” 있다는 클리셰를 어떻게 할지는 독자 각자가 알아서 하되(하여튼 뭔가가 둥글기만 하면 남자나 여자나 다 젖가슴 운운하는 건 말리지 못한단 말이지) 시인이 먼 훗날 타나 호수에 당도하면 한때 자신의 몸이었던 파피루스로 만든 배도 있고, 태고의 언어인 악숨 말로 만든 노래가 들린다니 아니 그러한가. 이건 우리나라 사람들이 말한 청산靑山과 매우 유사한 곳이리라.
몸이 불편하면 마음이 외로운 법. 이때 시인의 눈엔 자신 말고 또 다른 외로운 생명체가 눈에 띈다. <극지에서>라는 시에 외로운 포유류가 둘 등장하는데 북쪽의 북극곰과 남극의 얼룩물범이다. 북극곰의 외로움의 총량은 구백 킬로그램에 달한다고 한다. 그러나 따듯해지는 봄에서 다시 겨울이 올 동안 제 몸에 저장된 고독을 태워버리면 삼백 킬로그램 정도로 비쩍 말라붙는단다. 반면에 남극의 얼룩물범은 색다른 방법으로 외로움을 견딘다.
얼룩물범도 외롭기는 마찬가지다. 너무 외롭고 심심해서, 물범은 애써 잡은 먹이 목도리펭귄을 갖고 논다. 상처입은 먹잇감을 수면에 가만히 띄워놓고 무슨 공처럼 입으로 툭툭 치며 논다. 그 방심의 순간, 펭귄은 죽을힘을 다해 육지로 도망친다. 하지만 이미 치명적인 상처를 입어, 붉은 피로 가슴이 물든다. 도적갈매기들이 이를 놓치지 않는다. 물범에겐 미안한 일이지만, 더 많이 먹으려면 외롭더라도 물속 깊이 숨어서 먹어야 하는 거다. (<극지에서> 부분)
2부와 3부는 “시인의 말”에서 나오듯이 대구의 동북쪽 변두리 아파트 주민들과 초례봉 산책길에서 본 풍경들의 소묘가 많이 등장한다. 변두리라서 아무리 아파트에 산다 하더라도 자기 땅인지 아닌지는 다음으로 하고 하여튼 작은 짜투리 땅에 푸성귀 심어 먹는 할머니도 있고, 비닐하우스를 지키는 개도 있고, 목줄도 안 했지만 움직일 기분이 전혀 들지 않을 만큼 늙은 개도 등장한다. 그래 자기가 사는 아파트, 또는 살지는 않더라도 시로 쓰고 싶었던 작은 아파트 단지를 많이 등장시킨 2부의 첫 번째 시 <별마을아파트>를 인용해본다.
408호 꼬부랑노파별은 오년째 연락조차 없는 떠돌이별 아들 때문에 기초수급권 박탈은 물론 두달 기한 퇴거처분통보까지 덤처럼 받았다. 초신성 폭발이란 늙은 별의 장렬한 최루를 일컫는다는 다큐멘터리가 방영되던 밤이었다. 결코 이천만광년이나 떨어진 은하의 일만은 아니었다. 1509호 우울증아저씨별은 석달 전 폭발은커녕 한순간 소리조차 없이 명멸하는 별똥별로 스러져갔다. 재개발이며 재건축 따위는 그저 먼 이웃 은하의 얘기였다.
읍내 노래방 나가는 704호 도우미아지매별의 퇴근길 노래가 긁힌 엘피판처럼 밤 깊은 마포종점에서 몇번이고 되돌이표별로 흐르는 밤이었다. 살다보면 개밥바라기같이 외로운 행성이라는 걸 누구나 알게 될 테지만, 이 별마을은 자체발광 대신 자주 자가발광을 해서 생의 에너지를 보충하곤 한다. 부부별 싸움에 아래윗집별 싸움, 아이별 싸움에 어른별 전쟁이 그것들이다. 회사의 부도 소식이 전해진 날에도 별반 다를 바 없이 한판 악다구니가 휩쓸고 지나간, 들판 가운데 홀로 우뚝 선 별마을 임대아파트의 얘기였다. 뭇별이 총총한 밤이었다. (전문)
그런데, 엄원태의 시집은 처음 읽는 바, 저 위에서 <타나 호수>를 인용하면서 슬쩍 얘기한 것처럼, 수상경력이 많은 시인에게는 참 죄송한 마음을 금할 수 없는 불경한 얘기지만, 유난히 클리셰가 눈에 많이 띈다. 엄 시인을 좋아하는 분들은 도대체 어떤 시구를 클리셰라고 하느냐고 따질 수도 있으나, 그것들을 진짜로 밝힌다면 오히려 더욱 민망한 일일 거 같아 인용하지 않는 선의를 이해해주시기 바란다. 그렇다고 말을 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 내가 느낀 감상을 그대로 쓰는 것이 책이나 시집을 읽은 독자의 권리이기 때문에.
또 시 읽기 경험이 일천한 나는 과한 의미의 과장도 문제제기를 하고 싶었다. “촛불 앞에서”라는 부제를 단 <아름다운 얼굴>이 특히 그랬다. 시를 인용하지는 않겠다. “엄원태 아름다운 얼굴”로 검색하면 읽어보실 수 있다는 선에서 그만하겠다.
착한 시집이다. 착한 시집이라고 다 내 취향에 맞는 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