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텔 월드
알리 스미스 지음, 이예원 옮김 / 열린책들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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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데어 벗 포 더>를 읽으면서 작가의 발상에 깜짝 놀라 곧바로 검색해 산 책. 이번에도 역시 앨리 스미스 특유의 전환적 발상으로 책 읽기를 끝내자마자 이이의 다른 책 <가을>을 또 샀다. 앨리 스미스의 작품을 명작이나 걸작이라고 하기에는 무리가 따르지만 이이만이 낼 수 있는 독특함의 향취는 세대를 넘어가리라고 기대한다. <호텔 월드>는 전환적 발상, 독특한 문장과, 작가의 지문이라고 일컫는 문단의 조화가 오, 읽기가 정말 좋았다. 적어도 읽는 동안은 행복했다. 이이가 쓰는 문장, 문단의 이어짐은 아일랜드와 잉글랜드 작가들에 의하여 활짝 핀 의식의 흐름을 생각하게 만든다. 시간적 공간과 등장인물의 독립적 시각 등의 혼용은 한 사건과 사건 이후 관련한 사람들의 사고가 어떻게 이어지는지 독자에게 호소하는 적절한 형태 아니었을까.
  앨리 스미스가 얼마나 기발한 작가인지 <데어 벗 포 더>의 ‘경악스러운’ 사건을 통하여 알고 있었다. 생전 처음 보는 남자가 디너파티에 참석해 사라지는 일. 집주인 부부가 다음날 일어나보니 남자는 어제 떠난 것이 아니라 2층의 예비침실에서 문을 닫고 나오지 않는 거였다. 이렇게 스스로 낯선 집의 낯선 방에 스스로 유폐된 남자. 황당한 집주인 부부. 이를 대서특필하는 언론과 구경꾼들. 남자를 방에서 나오게 하기 위해 소환된 엉뚱한 사람들의 난장판. 이 모든 것들의 사소한, 지극히 사소한 오해.

 

  <호텔 월드>는 더욱 우연하게 경악스럽다.
  세라 윌비라는 열아홉 살 먹은 아가씨가 글로벌 호텔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나보다. 원래는 버터플라이, 접영 수영선수와 다이빙 선수를 겸하는, 주변 지역에 물속에서는 당할 적수가 없던 활달한 아가씨라는 것을 나중에 알 수 있긴 하지만, 처음 장면에는 그런 거 아무 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독자는 세라가 아르바이트인지 인턴인지, 아니면 그저 룸 메이드인지도 모르는데, 우리나라의 경우에 2층이나 3층 식당에 가면 1층 주방에서 만든 음식을 나르는 소형 엘리베이터 보셨을 터, 그저 박스만 한 상자 안에 기어 들어갔고, 박스만 한 상자에 기어들어간 곳이 4층 꼭대기였지만, 명색이 호텔이니 1층 로비는 말할 것도 없이 층고가 높은 건물이어서 엘리베이터의 콘크리트 바닥이 있는 지하층에서 거기까지의 높이가 땅에서 무려 20미터 이상 30미터 이하 정도였고, 겨우 접시들이나 나르는 좁은 장소로 신체 건강한 세라가 무릎을 가슴께 까지 끌어올리고 고개도 무릎을 향해 힘겹게 구겨 넣은 순간, 음식과 접시를 나르는 용도의 스테인리스 박스와 세라를 합친 무게를 견디지 못한 소형 엘리베이터의 철선이 끊어지면서, 엘리베이터와 그 안에 잔뜩 몸을 구겨 넣은 세라가 자유낙하를 하기 시작해 불과 3초가 안 되는 사이에 세라는 등이 부러지고, 목이 부러지고, 얼굴이 부러지고, 머리가 부러지고, 심장을 감쌌던 새장(갈비뼈)까지 터져 심장이 쏟아져 나와, 가슴에서 튕겨 나와 입에, 심장이 덥석 물려, 난생처음, 그러나 너무 뒤늦게야 자기 심장의 맛을 알게 된다.
  나는 잔혹한 장면을 싫어한다. 위 장면을 얼핏 읽으면 정말 잔혹하다. 그런데 좀 이상하다. 과연 누가 이 죽음의 장면을 묘사했을까. 여름이 한창 절정에 올라 가지마다 푸른 잎사귀가 무성했던 시절에 벌어진 일을 지금, 겨울 한복판에 기억하는 건, 죽음이라는 처음이자 마지막의 호된 신고식이며 씁쓸한 최후로의 비행이며 몸을 실은 작은 박스가 지하실 시멘트 바닥에 부딪히면서 틀림없이 있었을 먼지와의 마지막 입맞춤을 되새기는 일, 이것을 유일하게 상세하게 묘사할 수 있는, ‘것’이라 하기에도 이상하고, ‘사람’이라고는 할 수 없어서, 그냥 ‘형상’ 또는 ‘존재’라고 부른다면, 바로 세라의 유령이다.
  이렇게 먼지의 맛을 경험하고 기억하는 세라의 유령의 다음 이야기는 시간의 흐름에 관한 이야기. 우리 주위에 흔하디흔하게 널려 있는 흐른 시간의 집적. 무엇일까. 먼지다.


  “돌돌 말린 머리카락과 바싹 마른 잡쓰레기, 한때 우리 피부의 일부였던 티끌 등등 그 정수만 남은 숨 탄 것들의 영화로운 잔존물들을 곱게 빻아, 닳아빠진 거미줄과 나방 찌꺼기와 투명하게 분해된 금파리의 날개 오리* 따위를 풀 삼아 덕지덕지 빚어낸 먼지더께.”


  모든 곳에 있으면서 빛을 반사해 시각이 가능하게 만드는 먼지가 이렇게 시간과 연계한 생명의 미학을 가지고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세상에. 글쎄 세상에, 언어, 문자로 아름답게 만들어내지 못할 미물이나 추물이 하나라도 있기는 있을까? 이런 환상 같은 문장이 쏟아지면서 세라의 유령이 어떻게 자신이 지난여름에 사고를 당했는지를 이야기하는 것이 1장, “과거.”

 

  다음 주인공은 엘즈베스Elspeth. 노숙자다. 글로벌 호텔 정문 밖에 마치 벽감처럼 몸이 있을 만큼만 쏙 들어간 공간의 터줏대감 까지는 안 되고 그냥 그 자리를 노상 지키며 구걸하는 병들고, 몸에서 독한 냄새를 풍기는 이다. 수시로 컹컹 짖는 수준의 기침을 해대, 기침 소리를 호텔 안 리셉션에서 근무하는 리즈Lise가 걱정이 되어 건물 안에 들어와 비어있는 방에서 몸을 녹이라고 권할 정도. 그러나 문제는 엘즈가 아니라 엘즈에게 돈을 몽땅 빼앗긴 구걸소녀한테 벌어진다. 누군가 하면 클레어 윌비. 지난여름에 사고가 나 죽은 세라의 동생. 엘즈베스 다음, 다음에 등장하는 주인공. 세라가 운송 엘리베이터에 들어가고, 쇠줄이 끊어지고, 과연 얼마동안 더 있다가 죽었을까? 그것을 알기 위하여 엘즈가 묶고 있는 호텔의 4층에 올라가 갖은 방법을 다 써서 결국 폐쇄한 엘리베이터 입구를 뜯어내고 신발을 벗어 떨어뜨려 3초 정도가 걸렸다는 걸 알아내는 동생.
  읽는 사람마다 다 다르겠지만, 나는 세라 동생 클레어가 이미 죽은 언니 세라에게 보내는 길고 긴, 약 50쪽 분량의 편지글이 심금을 울렸다. 아, 괜한 오해 마시라. 똑똑하고 공부도 좀 했을 거 같고, 체력이 좋아 수영 하나는 확실하게 끝내주었던, 매사 자신과 비교해 탁월했던 언니에게 늘 좋은 감정만 가졌던 건 아니다. 그리하여 신파의 골짜기로 절대 빠지지 않는다. 클레어는 이제 또 언니가 부럽기도 하다.

 

  & 어쨌거나 어쩌면 이제 언니는 공기 위도 걸을 수 있을지 모르니까
  & 어쨌거나 언니가 이제 어디에 있건 우리를 나 & 엄마 & 아빠를 안전하게 보호해 줄 거란 걸 아니까
  & 어쨌거나 언니는 여기 있었으니까 분명히 있었으니까

 

  클레어는 글쓰기를 즐겨하지도 않았다. 그래 어눌하고 자주 어울리는 단어를 발견하지 못해 공란으로 그냥 내버려두는 문장으로 이제 다 끝났음을, 마지막 잠수를 하던 날, 두 다리 두 팔을 거꾸로 매달린 채 옴짝달싹 못하게 구겨져 있던 때, 언니가 진짜로 빨리, 진짜 진짜 빨리 떨어졌다는 걸 알려준다.
  4초도 안 걸렸더라 4초가 채 안 걸렸어 고작해야 3초하고 조금 더 그게 다였어 그것밖에 안 걸렸어 내가 알아 내가 언니 대신 재봤거든

 

  아, 정말 매력적인 작가다. 다음에 읽을 작품 <가을>도 기다려진다. 이 여름이 가고 가을이 쳐들어오면 <가을>을 읽어야지.


 

 

 

* 오리 : "오라기"의 방언. 실, 헝겊, 종이, 새끼 따위의 길고 가느다란 조각 (표준국어대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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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21-08-12 09:34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오, 저도 <가을> 사두고 아직 안 읽었는데, 이 작품도 별 다섯이군요! 이 작품도 잘 새겨두겠습니다.
<데어 벗 포 더>보다 더 경악스러운 작품이라니, 궁금합니다.
일단 다가오는 가을에 가을부터.... ㅎㅎ

Falstaff 2021-08-12 09:40   좋아요 4 | URL
ㅋㅋㅋ 경험상, 너무 상찬을 하면 나중에 읽는 독자들이 실망할 확률이 높아서 말씀입죠, 굳이 이야기하자면, 조금, 아주 조금 <데어 벗...>보다 ˝우연하게˝ 경악스럽더란 것이지요. ㅋㅋㅋㅋ
아, 기분 좋아. 이거 먼저 읽은 사람의 특권, 맞습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잠자냥 2021-08-25 13:25   좋아요 1 | URL
폴스타프 님 이번 겨울에는 이거... ㅋㅋㅋㅋ

http://aladin.kr/p/b4LXz

Falstaff 2021-08-25 13:48   좋아요 0 | URL
크.... 그것 참.
<우연한 방문객> 읽었거든요. 이제 알리 스미스의 어법이 눈에 들어오네요.
당연히 겨울엔 겨울을 읽어얍지요. ㅋㅋㅋㅋㅋ 고맙습니다. 낚시질. ㅋㅋㅋㅋ

coolcat329 2021-08-12 16:55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아 이 책 재밌을거 같아요. 경악스럽다는 표현도 너무 끌리구요 ~~^^
가을에 가을을 읽으시는것도 참 좋습니다.ㅋ
궁금하진 않으시겠지만 저는 요즘 여름을 읽고 있습니다.ㅋㅋ

Falstaff 2021-08-12 19:10   좋아요 1 | URL
아, 재밌습니다.
근데 책임지지 않습니다. 역시 쿨캣 님한테도 먼저 읽은 사람으로 폼을 좀 재야겠습니다.
ㅋㅋㅋㅋㅋㅋ 이디스 워튼은, 물론 백퍼 제 취향에 입각해 얘기하자면, 아예 비교를 하지 마세요. 글쎄 같은 영어가 아니라니까요.
흠흠흠... 들립니다. 돌 날라오는 소리. ㅋㅋㅋㅋ

Falstaff 2021-08-12 19:12   좋아요 1 | URL
으, 이 정도로 악담을 했으면 저도 양심이 있지 <여름>은 한 번 읽어봐야겠는 걸요.
아으... 또 워튼을 어떻게 견디나.... 저는 디킨스도 안 읽는 인간인데요. 흑흑....

coolcat329 2021-08-12 19:30   좋아요 1 | URL
어멋 폴스타프님 여름 안 읽으셨나요? 저는 당연히 읽으신줄 알았습니다 ㅎㅎ
악담 아니시구요~~저는 책에 관한 어떤 의견이든 다 감사하고 즐겁습니다!

Falstaff 2021-08-12 19:39   좋아요 1 | URL
ㅋㅋㅋ 전 워튼 안티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