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닌의 키스
옌롄커 지음, 김태성 옮김 / 문학동네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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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8년 개띠 작가. 허난성 출생. 허난성은 서쪽과 남쪽으로 산이 많고 동쪽으로 평야가 펼쳐있다. 땅이 비옥해 이곳을 차지하기 위한 쟁탈전이 숱하게 벌어지기도 한 곳이다. <레닌의 키스>도 이 허난성 속 가상의 솽하이 현을 무대로 한다. 원래 제목은 ‘즐거움’이나 ‘기쁨’을 뜻하는 북부 허난성의 사투리 서우훠受㓉, 우리말 음가로 ‘수활’이다. 서우훠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 하나는 말 그대로 즐거움이나 기쁨. 다른 하나는 작품 속에 일종의 유토피아, 그러나 상처만 남은 옛 유토피아를 연상시키는 바러우 산맥 깊이 위치한 장애인 공동체 서우훠 마을이다.

  <레닌의 키스>는 세 번째 읽은 옌렌커의 장편 소설. 처음이 <풍아송>이고 다음이 <인민을 위해 복무하라>였다. 두 권의 책으로 옌렌커는 충분하다 싶었는데, 그만 서재 동무님의 낚시에 걸리고 말았다. 그래도 소득이 있었으니, 예전에 무척 기대하고 읽었다가 실망해 마지않은 <풍아송>을 다시 생각할 수 있는 계기가 됐다는 점. <풍아송>에서는 <시경>을 연구해 초절정의 논문을 쓴 양커 박사가 온갖 우여곡절을 겪고 산속에 들어가 유토피아를 건설하고, 또 다른 유토피아를 찾아 떠나는 이야기였다. <레닌의 키스> 속에서 바러우 깊은 산맥 속의 서우훠 마을이 바로 양커 박사가 이상화했던 율도국이었을 수도 있었겠다 싶었던 것.


  <레닌...> 속의 주인공 가운데 한 명인 마오즈 할머니. 69세부터 71세까지가 시간적 공간이다. 아주 오래전, 어머니와 둘이서 홍군을 따라 천리만리를 걸으며 혁명에 전력을 다했다. 그러다 하루는 엄마가 홍군에 잡혀 반역죄로 총살을 당하고 만다. 이들 모녀가 가는 곳마다 적들에게 위치가 노출되어 거의 괴멸하다시피 했으니 그럴 만도 했다. 그러나 총살 4일 만에 진짜 반역자를 발견해 누명이 벗겨져 엄마는 혁명 열사로 추인되고 자신은 혁명의 후손이란 명예를 얻었다. 하지만 이어진 악전고투로 패전해 병력이 뿔뿔이 흩어지면서 방랑하다가 바러우 산맥 속에서 기진해 쓰러져 있는 것을 지나가던 마음씨 좋은 석공이 업어와 석공의 노모와 함께 살았다. 이때가 마오즈 할머니가 19세, 석공이 35세. 이후 몇 년이 지나 노모가 혼인을 허락한 후에야 둘은 설레는 마음으로 방을 합치게 된다.

  서우훠 마을은 전형적인 장애인 촌으로 장애가 없는 남자들은 전부 짝을 찾아 외지로 나가고, 여자들도 외지로 시집을 가는 대신 새로 외지의 장애인들이 함께 살러 들어오는 곳이었다. 아주 오래전, 나중에 이야기가 나오듯 명나라 초기시대부터 몇백 년 동안 장애인 촌이 있었으며 특별하게 중앙이나 지방 정부의 관리를 받지 않고 촌민들만의 공동체로 나름대로 풍족하게 살아온 별유천지비인간. 이곳에 혁명 열사의 후손인 개화 여성 마오즈 색시가 입촌하면서 유토피아는 뿌리째 흔들리기 시작한다. 세상사에 아무 관심도 없어 시대가 바뀌는 것에도 관심이 없는 마을 사람들과 달리 장에 가는 길에 토지개혁과 집단농장, 계급혁명을 한 눈에 알아본 마오즈는 그길로 장애인 마을을 받아들이기 원치 않는 지방 향장을 설득해 솽화이 현, 바이수 향에 서우훠 마을을 귀속시킨다.

  마오즈는 카를 마르크스와 레닌이 말한 프롤레타리아 천국을 바랐겠지만 어디 그게 마음대로 되나. 공산화된 중국은 모옌과 위화의 작품 속에서 몇 번 나오듯이 나라 전역에서 쇠붙이를 싹 거두어들인다. 거기까진 어떻게 넘어갔는데 불행하게도 1950년, 중국 전역에 걸쳐 기근이 닥친다. 숱한 사람들이 굶어 죽는 와중인데도, 하루는 현장이 와서 보니 서우훠 마을엔 새로 생긴 무덤이 없어 이들에게 양식 일부를 지원해달라고 요청을 한다. 있는 거 뻔히 아는데 안 줄 수 없어서 요구 양식을 내어 주고, 다음엔 더 많은 양을 달라고 떼를 쓰고, 나중엔 사지가 멀쩡한 장정들이 쳐들어와 폭력으로 마을의 모든 양식과 가축을 약탈해버린다. 이 와중에 주인공 마오즈 할머니의 자상한 남편 맷돌쟁이 석공도 굶어 죽는다. 사람들은 자연스레 평화롭고 상대적으로 풍요한 마을을 괜히 행정단위에 입사시켜 거덜을 내게 한 마오즈를 원망할 수밖에. 이때 마오즈 할머니는 행정단위에서 퇴사하는 것을 마을 주민들에게 맹세하고, 자신의 남은 인생을 거는 가장 큰 목표로 삼는다.

  마오즈 할머니의 강력한 맞수는 현장 류잉췌. 1960년생으로 자칭 진정한 혁명가. 일찍이 부모형제가 누군지도 모른 채 길거리에 버려진 아이를 솽화이현 사회주의교육원(社校)의 유일한 전문직원이었던 류선생이 거두어 기른 양자다. 1966년에 시작한 문화혁명 당시 인텔리 계급으로 당연히 인민의 적이었지만 이이 아니면 마르크스, 레닌을 가르칠 교사가 없어 끔찍한 모욕은 당하지 않았던 류선생은 그러나 아내가 딸 하나를 남기고 다른 남자와 결혼해 떠나버리고, 교육원에서 가차 없이 강등당하자 결국 자신의 하나밖에 없는 혈육인 딸의 평생을 부탁하며 눈을 감는다. 이들은 후에 자연스럽게 부부가 된다.

  류잉췌가 향의 하급 간부였을 당시 춘삼월, 서우훠 마을에 일을 보고 돌아가는 길에 눈에 들어온 아가씨가 있었으니 쥐메이. 동네에선 드물게 보이는 장애가 없는 처녀였는지라 춘정을 이기지 못하고 그만 밀밭 속으로 자빠뜨렸던 건데, 이 아가씨가 누군가 하니 바로 마오즈 할머니의 하나밖에 없는 딸. 그래놓고 아홉 달이 지나자, 류잉췌는 꿈도 꾸지 못한 사이에 쥐메이는, 놀라지 마시라, 무려 딸만 네 쌍둥이를 순산했던 거였다. 그러니 마오즈 할머니가 류잉췌의 장모가 되는 족보.

  류잉췌는 자기도 모르는 새 얻는 네 딸이 열일곱 살이 되는 동안, 향장이 되었다가, 현의 부현장으로 승차를 하고, 때마침 소비에트 땅 이곳저곳에서 레닌의 동상이 무너지는 와중에 소련 정부는 레닌 시신의 영구보존 비용을 감당하기 너무 헐떡여 곤란을 겪고 있다는 뉴스를 듣고는, 솽화이 현의 중흥을 위해 소련으로부터 레닌의 시신을 사들여와 레닌 기념 공원을 조성하면 현의 모든 인민들은 노동할 필요 없이 벌어들인 돈을 어떻게 써야 하는지 고민하느라 밤잠을 이루지 못할 것이라고 당서기에게 아이디어를 소개한다. 이를 들은 서기는 류잉췌에게 이것저것을 물어보고, 책 줄이나 읽은 걸 확인한 다음 슬쩍 현장으로 승급을 시킨다. 드디어 류잉췌가 현장이 되어 겨드랑이 사이에 숨겨두었던 날개를 웅장하게 펴 보일 순간이 도래한 것.

  단, 조건이 레닌의 유해를 사 오는 돈이 얼마가 됐든 현에서 비용의 절반은 부담해야 한다나. 그리하여 눈알을 번득이며 뭘 해서 비용을 마련하느냐, 방안을 찾고 있는데, 이때 생각지도 못한 화수분이요, 흔들기만 하면 가지에서 돈이 떨어진다는 전설 속의 나무인 요전수를 만나게 되니, 예부터 밀 수확이 끝나면 장애인 마을인 서우훠 마을에서 며칠을 두고 벌였던 축제에서 장애인들이 자기들의 장기를 자랑했던 것을 비장애인 도시인에게 공연하게 한다는 거. 이름하여 서우훠 묘기 공연단. 그들의 주요 레퍼토리는 이렇다.


  외다리 원숭이 청년 : 외다리로 빨리, 높이 달리기

  귀머거리 마씨 : 귀에다 대고 폭죽 터뜨리기

  외눈박이 : 외눈으로 한 번에 바늘 열 개 꿰기

  앉은뱅이 아줌마 : 나뭇잎에 수놓기

  맹인 퉁화(류현장의 맏딸) : 예민한 귀로 깃털 떨어지는 소리 알아 맞추기

  소아마비 소년 : 병(glass bottle)으로 신발 신기

  63세 맹인 아저씨 : 자신의 눈동자에 촛농 떨어뜨리기

  육손이 : 여섯 번째 손가락을 불에 달구기

  앞마을 외팔이 아주머니 : 무나 배추를 한 팔로 얇게 빨리 썰기


  이것들은 글로 써 놓으면 별로인 것 같아도, 옌렌커의 입담으로 과장을 더하고, 특히 이런 묘기가 장애인에 의하여 행해지기 때문에 비장애인은 놀라움의 인플레이션을 가져와 무려 반년 동안 중국 각지를 돌며 솽화이 현은 어마어마한 거금을 준비할 수 있게 된다. 그런데 동네 주민을 공연에 동원할 수 있게 해준 마오즈 할머니가 맨입으로 허락을 했겠나. 할머니는 조건으로 새해가 되는 날 서우훠 마을을 솽화이 현이란 행정단위에서 퇴사시키는 것을 문서로 확인해달라는 거였다.

  이리하여 류현장은 레닌의 유해를 사러 대표단을 모스크바로 떠나보내고, 마오즈 할머니는 평생소원이었던 퇴사를 이루고, 서우휘 마을은 전국 최고의 유토피아로 탈바꿈 할 수 있을까.


  우리말 제목을 <레닌의 키스>로 한 건, 류현장의 계획대로 레닌의 유해를 솽화이 현 바러우 산맥의 훈포산 꼭대기에 지은 기념관에 모시기만 한다면, 즉 레닌의 키스를 받기만 하면, 현과 서우훠 마을을 지상낙원으로 바꿀 수 있다는 집단 최면 상태를 의미했으리라. 그러나 사실 독자는 처음부터 서우훠 마을 주민들이 이미 대대로 몇백 년간 원시 공산주의를 이루어 살아왔다는 걸 알고 있다. 이후 국공내전이 끝나고 1949년 10월 1일 중화인민공화국을 정식으로 건국한 다음, 정부의 이름으로 행해진 많은 정치나 행정 절차들이 서우훠 주민들에게 가져다준 것은 오직 하나, 멸시와 수탈을 포함한 끝없는 고통, 단 하나였음을 옌렌커는 숱한 에피소드와 유머를 섞어(레닌의 유해를 돈 주고 사 온다는 발상보다 더 큰 유머를 생각할 수 있겠느냐는 말이지) 타래 실처럼 풀어놓았다.

  재미있다. 이 책이 마음에 들었다면 <풍아송>의 일독도 고려해봄 직하리라. 나도 <레닌의 키스 : 受活>을 먼저 읽었더라면 <풍아송風雅頌>이 더 재미있었을 거라고 조금 아쉬워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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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21-04-19 09:28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레닌의 유해를 사오겠다는 아이디어 자체가 기발했던 것 같습니다. 그걸 서우훠 마을 장애인들과 엮어서 이야기를 풀어가는 솜씨도 그렇고요.
저는 폴스타프 님 권유대로 조만간 <풍아송>을 읽어보겠습니다. ㅎㅎ

Falstaff 2021-04-19 09:38   좋아요 4 | URL
예, 정말 재미난 아이디어였습니다.
풍아송은 이 책보다 좀 더 거칠어요. 이이가 군대 생활을 오래해서 그런지 가끔가다 너무 수컷스러워서, 제가 읽기에도 이거 좀 심한 거 아닌가 싶을 때도 있습니다.
감안하세요. ㅎㅎㅎ 좀 걱정되기도 합니다. 제목은 진짜 예쁜데 말입죠. 풍, 아, 송!

레삭매냐 2021-04-19 09:41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저는 <레닌의 키스>에 앞서 <풍아송>
을 먼저 만났는데, 옌렌커 선생이 계속
해서 이런 체제 비판적인 작품을 발표
할 수 있다는 자체가 더 놀랍습니다.

레닌의 유해로 한 몫 잡아 보겠다는 발
상이 정말 기발했습니다. 곰은 프롤레타
리아 인민들이 부리고, 그에 따른 명예와
이익은 당간부들이 챙기는 현실 비판이
라고나 할까요.

Falstaff 2021-04-19 09:49   좋아요 4 | URL
그래서 이이 작품을 출간하기 쉽지 않았다고 하더군요.
저는 소위 혁명, 이라는 인위적 행위의 부당성에 방점을 둔 것처럼 읽었습니다.
혁명이란 이름으로 자행되던 폭력, 문화혁명을 직접 체험한 세대라서 더 그런 것도 같았습니다.

미미 2021-04-19 09:5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오 개띠작가의 책들 저도 읽어보렵니다! 덕분에 순서도 정해졌네요.ㅋㅋ

Falstaff 2021-04-19 10:01   좋아요 3 | URL
<레닌의 키스>를 재미있게 읽으셨다면, 이라는 단서조항을 꼭 달아야 하겠습니다.
ㅋㅋㅋㅋ 추천하기에 좀 위험한 작가 같아서 말입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