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호실로 가다 - 도리스 레싱 단편선
도리스 레싱 지음, 김승욱 옮김 / 문예출판사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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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자 김승욱은 단편집 《19호실로 가다: 레싱 단편소설선 1》은 1960년대 런던을 배경으로 쓴 작품들을 모은 것이라 했다. 그러니까 지금부터 약 60년 전의 이야기들이다. 도리스 레싱의 소설로써 예상 외로 잘 읽힌다.
  작가는 이란에서 영국인 부부의 큰딸로 태어나 영국령 로디지아, 현재의 짐바브웨로 건너가 배우고, 자퇴하고, 타이피스트로 취직하고, 남자를 만나고, 결혼했다가 이혼하고, 서른 살이 되어 영국에 정착해 작가로 이름을 내기 시작한다. 어려서부터 유색인종들의 나라에서 성장해 그런지 레싱은 모든 차별의 철폐를 주장하거나, 적어도 주장하는 이들을 지지하는 입장이었다. 차별은 당연히 피부색, 젠더, 빈부, 성적 취향, 이데올로기 등을 포함한 것들이다. 시대는 1960년대. 지금의 시각으로 보면 초보적인 반 차별주의이긴 하지만.
  틀림없는 페미니즘 작품이다. 나는 제일 앞에 실린 <최종 후보 명단에서 하나 빼기>와 마지막 작품 <19호실로 가다>를 제일 재미있게 읽었다. 여기에서 ‘재미있다’는 말은 글을 따라가기가 쉽다거나 흥미롭다는 것도 물론 포함하지만 그것보다 다양한 해석이 가능할 것 같아서인데, <19호실…>이 더욱 그러했다. <최종 후보…>는 생각지도 않게, 주인공이 지질한 상대방을 제압하는 결말이 인상 깊었고.


  <최종 후보에서 하나 빼기>에선 결혼 20년차에 들어선 중년 남자 그레이엄 스펜스와 무대 디자인 쪽에서 재능을 드러내고 있는 바버라 콜스가 등장인물이다. 스펜스의 결혼생활은 폭풍처럼 고통스럽고 비극적이어서 헤어짐과 배신, 달콤한 화해로 가득했다가 10년이 지나고서야 겉으로 보기에 정상처럼 보이는 생활이었다. 일찍이 두 권의 책을 출간한 소설가였으나, 두 번째 책은 제발 사람들이 읽지 않아주기를 바라는 심정이었고, 이후로 예술적 자질이 밑천을 드러내 지금은 라디오와 TV, 서평 쪽으로 진출해 “예술의 변방에서 잔재주를 부려 살아가는 사람 중 하나”이지만 큰 체구와 훌륭한 언변으로 제법 괜찮게 살아가고 있다.
  스펜스가 파티에 참석했을 때, 파티의 호스티스였던 바버라 콜스에게 인사를 건넨 적이 있다. 이때 바버라가 매너 있는 미소를 지으며, 아뇨, 실례하지만 처음 뵙는 분 같은데요, 라고 응대를 한 적이 있다. 사실 이때 지질한 남자 스펜스는 언젠가는 바버라를 한 번 넘어뜨리리라, 하고 작정을 했던 거 같다. 감히 네가 나한테, 나를 알지 못한다고 할 수 있어? 하는 억하심정으로. 그러다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30분 분량으로 바버라 콜스를 인터뷰 해달라는 청탁이 오고, 인터뷰 당일 처음으로 콜스의 작업장에 가서 그녀와 직접, 시간을 두고 이야기를 나눌 기회를 갖게 된다.
  바버라 콜스는 무엇보다 일에 전념하는 여자였다. 그래 당연하게 일하는 현장에서 가장 자연스러운 모습을 드러내며 함께 일하는 팀원들과 농담을 섞어 논쟁하고, 의견을 적극 반영하는 것을 관찰하면서도 스펜스는 기어이 오늘밤 그녀의 침대에 올라가리라는 생각만 하고 있을 뿐. 물론 스펜스가 모든 면에서 지질한 건 아니어서 인터뷰를 성공리에 끝내고, 피곤한 콜스를 데리고 저녁과 술을 곁들이는 것까지는 그런대로 괜찮았다. 하지만 이후로 오직 하나의 목표만을 위해 치졸의 끝판을 보여주는 행태. 날이 밝고도 자신이 바버라와 관계를 가졌음을 만천하에 공개하기 위해 극장 안 현장까지 직접 데려다주겠다고 우겨댄다. 바버라는 앞에서도 말했듯이 일이 먼저다. 네가 그리도 원한다면 이까짓 몸, 네 마음대로 해보라는 식.
  마지막 장면은 알려드리지 않겠다.


  <19호실로 가다>에서 19호실은 디스트릭트 선 열차를 타고 사우스 켄싱턴까지 가서 서클 선으로 갈아타 패딩턴에서 내려 작은 호텔이 조밀하게 들어선 단지 가운데 더러운 유리창을 단 ‘프레드 호텔’의 19호실을 말한다. 나는 정신병원 19호실인 줄 알았으나 다행히 아니었다.
  수전과 매슈 롤링스 부부의 이야기다. 20대 후반, 비교적 늦은 나이에 결혼해 차례로 아들, 딸, 딸/아들 쌍둥이, 이렇게 네 남매를 둔 부부는 리치먼드에 정원이 딸린 크고 하얀 집에서 산다. 매슈는 런던의 대형 신문사의 차장급 기자로 재직하고 있었으나 유명한 기자나 부장급으로 올라갈 자질까지는 갖고 있지 않았고, 수전은 상업미술에 재능이 있어 광고회사에 다니고 있었지만 자신의 광고 일에 강한 애정은 없었다. 이들은 둘 다 고액연봉자였다가, 수전이 임신을 하는 바람에 아이들이 어느 정도 클 때까지 엄마역할에 충실하기 위해 경력을 단절했다. 여기서 방점. 1960년대라는 것. 지금이라면 아무리 임신을 해도 (특히 고액연봉자라면)자신의 일을 놓지 않을 것이 당연하겠지만 당시엔 퇴직을 하는 것이 또 당연했다. 여기서 가장 큰 문제가 발생한다.
  롤링스 부부는 런던에서도 지식인층에 해당하며, 실용적인 지혜를 가지고 있는 건전하고 성실한 배우자, 잘 크고 있는 네 아이들, 넓고 하얀 집, 정원 속에서 충만한 삶을 살고 있었다. 아이 네 명을 돌보느라 간혹 매슈 혼자 파티에 참석하는 일이 있었는데, 하루는 늦게 남편이 오더니 술이 깬 아침에 깜짝 놀라, 어제 파티에 갔다가 마이라 젱킨스라는 아가씨를 집에 데려다 주고 오는 길에 함께 자고 왔다고 고백을 했다. (이게 ‘진짜 실수’라면 고백을 하는 게 좋은지, 안 하는 게 좋은지 난 판단을 못하겠다.) 수전은 머리로는 이해가 되는 일이지만(혼자 파티에 참석한 잘생긴 남자를 보고 유혹해보고 싶은 여자가 있을 수 있으니까), 자기 인생이 갑자기 사막처럼 변해버린 느낌이 들었다.
  이어 쌍둥이가 학교에 들어가 드디어 부모의 손에서 떠났을 때, 수전은 자신만의 공간을 필요로 하기 시작한다. 자기만의 방. 글의 생산, 창작을 위한 울프의 자기만의 방과는 다르다. 오히려 후에 레싱이 집중하게 될, 아는 사람이 하나도 없는 곳에서 창문 하나를 빼고 네 벽으로 갇혀 있는 곳, 자아를 확인할 수 있는 유일한 곳으로 자기만의 방을 찾기 시작한다. 처음엔 넓은 하얀 집에서, 그러다 빅토리아에 있는 미스 타운센드의 호텔에서. 그러나 집에서는 아이들과 파출부, 남편 때문에, 빅토리아에서도 50대의 외로운 노처녀 미스 타운센드의 간섭으로 인해 가능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고른 곳이 패딩턴 부근의 프레드 호텔.
  가사는 스무 살 먹은 독일 아가씨 소피에게 맡겨놓고 아침 아홉시에 나가 다섯 시까지 오롯이 혼자 의자에 앉아 창문 밖을 내다보는 아내이자 어머니. 자신을 잃어버린 것 같다. 도리스 레싱은 서문에서 수전이 왜 19호실로 가야했는지 자신도 모르겠다고 했다. 내 생각엔, 아이들이 커 곁을 떠나고 보니 애초부터 자신은 아무것도 아니었다는 자각이 우울증으로 변한 것 아니겠나 싶다. 작품 속에는 상실과 소외, 이런 현상이 왜 여자에게 집중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심각한 물음도 포함되어 있다. 남편은 여전히 이성적인 판단을 하고 있다고 주장하면서 외도를 하고, 아내 역시 따로 애인을 두고 있다고 생각해 아내의 애인과 네 명의 만남을 제안하기도 하는 속물이기도 하다. 이 부부를 통해 여성은 육아를 포함한 가정생활에서 평등하지 못한 지위에 머물고 있음을 드러낸다.
  21세기 사람들은 다 알 것이다. 수전에게는 일이 없으니까. 그래서 자존감도 없어져 서서히 무너져야 했음을.
  롤링스 부부가 중산층, 즉 먹고 사는데 전혀 부족함이 없다고 해서 행복한 건 아니다. 일은 열심히 하되 책임에 관해서 엄격하게 선을 긋고 절대 넘어가려 하지 않는 파출부 파크스 부인이나, 자기를 버리고 다른 여자한테 장가든 남자를 잊지 못해 자신의 모든 현금을 가져다 바치는 (토카레바가 쓴 중편) <이유>의 마리나가 훨씬 더 자존감도 있고 행복하다는 데 만 원 건다. 세상이 배운 거하고 가진 돈만 따져서 행복하면 너무 지루하잖아?


  여태까지 읽은 다섯 편의 장편과 두 권의 단편집 가운데 이 책의 책장이 제일 쉽게 넘어간다. 초기작이어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후에 레싱이 쓰게 될 음산하거나 피로하거나 많이 비관적인 것보다는 소프트한 느낌이 든다. 처음 레싱을 읽기 시작하는 독자에게는 맞춤하지 않겠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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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21-04-09 14:18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지난번에 읽으신 레싱 작품 다음으로 이거 읽었다면 거의 술술술~~~ 읽으셨을 거 같아요.
<최종 후보 명단.....> 이거 읽고 얼마나 빡쳤던지. 으으으. 정말 그런 남자가 실제로 눈앞에 있는 거 같았어요.

저도 <이유>의 마리나가 훨씬 더 행복할 거란 말씀에 공감 1000%합니다.

Falstaff 2021-04-09 14:40   좋아요 2 | URL
넵! 레싱의 다른 것들도 이 정도면 딱 좋았을 것을요!!
<최종 후보...> 이거 1960년대에 레싱이 아니라면 마지막 장면이 나올 수 있었을지 모르겠습니다. 끝까지 독자들 열 팍팍, 팍팍팍 받게 하다가 그런 식으로 찌질이를 백안시 해버리는 거, 참... 어제 얘기와 이어서 하면, 같은 60년대인데 김**과 달리 아직까지 장면이 살아 있잖아요. 장면을 덜 꾸며서, 다른 말로 ‘별로 감수성을 드러내 보이지 않아서‘ 그런 것 같기도 합니다.
<19호...>는 좀 답답했던 게, 아쒸, 빨리 신경정신과로 데려가야 할 텐데 천하의 속물 남편 새끼를 비롯해 아무도 신경을 쓰지 않는다는 거였어요. 어떻게 생각하면 집단에 의해 벌어지는 살인일 수도 있지 않을까 싶었습니다.

근데, 마리나는 쓰고 나니까 영 어울리지 않아서 어떻게 할까...하다가 이왕 쓴 거 지우기 아까워서 걍 내비둔 거랍니다. ㅋㅋㅋㅋ

(윽! 이 답글이 스포일러일 수도 있겠다는 느낌이.... 들지만 그냥 두겠습니다. ㅋㅋㅋ 어쩄건 전 읽었으니까요. ㅋㅋㅋㅋ 아 상쾌해!)

얄라알라 2023-01-11 00:4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 빨리 읽고 싶다.
2023년 읽은 첫 소설이 도리스 레싱 작품이었던 만큼 골드문트님 서재에서 이야기해주신 도리스 레싱 작품들 찾아 읽고싶습니다.

Falstaff 2023-01-11 05:45   좋아요 0 | URL
레싱.... 아오, 쉽지 않습니다. 근데 진짜 만나서 쐬주 한 잔 마시면 사람이 담백하고, 직선적이고, 활달하고, 정의감이 뿜뿜 뿜어져나오는 화통한 사람이라고 하더라고요.
근데 책은 여간해 잘 읽히지 않게 쓴단 말입니다. ㅎㅎㅎ
이 양반, 하여간 사람이 사람 차별 하는 거, 그건 눈 뜨고 안 봐준답니다. D.H.로렌스 작품 판금 소송, 루슈디 사형선고 규탄, 이런 데 무조건 앞장섰던 작가입니다.

그레이스 2023-01-11 11:3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토카레바의 이유 읽지는 않았지만 전남편에게 돈을 주는 아내의 자존감에 대해 잘 모르겠는걸요?ㅋㅋ
주는 순간에는 자존감이 잠시 높을지 모르나, 그 후엔 참담하지 않을까요.(제 생각입니다)
호텔 방을 자신의 공간으로 삼는 여주인공이 부러운 사람도 있겠으나, 돈으로 환원되는 것같아 저는 저항합니다.^^

표지는 호크니의 그림이 생각나네요...^^

Falstaff 2023-01-11 20:04   좋아요 1 | URL
ㅎㅎㅎ 저도 독후감을 쓰고 아직 2년밖에 안 됐는데, 토카베라의 <이유>가 생각나지 않는군요. 전 남편/여편 한테 의무가 아닌 한, 옛다, 용돈 써라, 하고 현금을 줄 정도면 폼은 나겠습니다. ㅋㅋㅋㅋㅋ 근데 전 그러고 싶지 않아요, 즉 이혼하고 싶지 않다는 겁지요. 웬수하고 한 평생 사는 게 더 나을 거 같아서 말입니다. 전생의 웬수하고 부부, 부모-자식이 된다고 하잖아요. ㅋㅋㅋㅋㅋ
성인이 된 후 자기 집을 갖지 않고 평생 호텔 방에 산 한 명을 알고 있습니다. 블라디미르 나부코프. 뭐 팔잡니다, 팔자. 뭐 다 이유가 있겠습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