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녀, 여자, 다른 사람들
버나딘 에바리스토 지음, 하윤숙 옮김 / 비채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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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마디로 이 소설을 정의한다면, “강력한 한 방.” 관자놀이에 제대로 된 펀치 한 방을 맞은 느낌하고 비슷하다면 설명이 될 듯. 알라딘의 소설 MD 권벼리에 의하면 에바리스토가 “‘문학에 흑인 영국 여성이 등장하지 않는 게 불만스러워서’ 열두 명의 흑인 여성이 주인공이 되는 소설을 쓰게 되었다.”고 말했다 한다. 책을 직접 읽으면 두 개의 큰 그림이 있고 그림판을 구성하는 중요한 인물의 개별적인, 그러나 결국 두 개의 큰 그림과 교차되는 결론으로 구성되어 있다.
  조금 상세히 이야기하기로 하자.
  첫 번째 그림. 앰마 본수, 라는 이름의 유색인 레즈비언 여성. 그러나 아이는 갖고 싶어 속물 인텔리겐치아 롤런드와의 사이에 딸 야즈를 낳아 키우고 있다. 몇 십 년 동안 자신을 따돌리던 주류 연극계에 수류탄을 던지던 이탈자로 살아가다가, 내셔널 씨어터에 최초로 예술 감독 자리에 오른 다음에야 그곳에 입성할 수 있었고, 그 후 주류에 편입되어 어깨에 힘 좀 주기 시작했다고 주위 사람들이 말한다. 심지어 자기 딸 야즈까지.
  2019년에 이 책으로 부커 상을 받아 스타덤에 오른 작가 버나딘 에바리스토가 실제 살아온 삶이 앰마 본수와 많이 비슷하다고 해서 작가 자신의 이야기라고 믿을 필요는 없다. 하여튼 앰마는 작가와 유사하게 전교에 유색인이라고는 딱 두 명밖에 없는 학교를 다녔고(작가는 자기 자신 단 한 명이었다고 함), 연극학교를 졸업했지만 피부색 때문에 활동에 많은 제약이 따라붙는 것에 열을 받아 친구 도미니크와 함께 자신의 극단을 만들어버린다. 여기까지는 앰마가 에바리스토의 많은 부분을 빌려온 것이 맞다.
  이제 내셔널 씨어터에 입성한 앰마는 자신이 드라마를 쓰고, 연출까지 한 작품, 아프리카에서 직접 전투에 참가했던 여성 전사들의 이야기 <다호메이의 마지막 여전사>를 공연한다. 그것이 제1장의 첫 번 챕터인 ‘앰마’. 두 번째 챕터는 앰마의 딸 야즈의 탄생부터 대학에 다니는 현재 그의 친구들까지 발랄한 청춘들, 세 번째 챕터는 함께 극단을 만들기는 하지만 극단적 편집증이 있으며 폭력적이기까지 한 미국인 동성애자 은징가에게 홀딱 반해 미국으로 가서 온갖 고초를 겪지만 나름 성공을 거두는 도미니크의 이야기. 이렇게 앰마의 주변에서 어떻게든 연결이 되는 여성들이 제5장 뒤풀이 파티, 즉 첫 공연을 끝내고 이를 축하하는 파티에 다시 모이는 등장인물들이 만들어내는 씨줄과 날줄이 바로 첫 번째 그림이다.
  두 번째 그림은 19세기 초부터 영국에 거주한 아프리카 계 유색인종 가족의 후예인 해티를 중심으로 한다. 해티는 스코틀랜드와의 접경 부근인 북부 잉글랜드에서 몇 십만 제곱미터의 농장을 운영하다가 이제는 힘이 들어 황무지가 되도록 내버려두고 있는 아흔세 살의 노인이다. 해티의 조부모 시절부터 이이의 가족사를 언급한다. 이건 영국 내 아프리카 계 유색인종의 역사가 그리 만만하지 않음을 작품으로 써왔다는 에바리스토의 작업의 연장으로 보인다. 해티에겐 한때 손녀였던 메건, 지금은 모건이라 이름은 바꾼 손녀인지 손자인지, 아니면 손자녀 아무것도 아니고 그냥 해티의 3세인지 알 수 없는 노릇이지만 그따위는 전혀 중요하지 않게 생각하는 아흔세 살의 할머니가 평생 숨겨왔던 하나의 진실이 밝혀지는 과정이다. 이 진실은 제일 마지막 에필로그에 가서야 드러나게 된다.
  앰마와 해티를 둘러싼 아홉 명의 여성과 한 명의 자유 젠더는 현존하는 영국의 유색인 페미니스트들을 대표한다고 봐야 할까? 여성주의를 잘 알지 못하는 내 수준에서는 확실하게 그렇다. 더 이상 어떤 부류가 있을지 상상이 가지 않아서. 그래서 나는 이 책을 읽고는 한 방 제대로 얻어터진 느낌이 든 거다. 버나딘 에바리스토는, 바로 나 같은 사람들이 자기 작품을 읽고 조금이나마 깨달음을 얻기를 바랐던 것 같다. 깨달음, 까지는 아니고, 다양한 삶의 방법이 있다는 건 배웠다.
  동성애는? 나는 관심 없다. 동성끼리 연애를 하든, 같이 살든, 그건 그이들 문제일 뿐. 존중? 존중이고 뭐고, 그냥 내버려두는 것이 좋지 않을까 생각하는 인간이다. 즉 관심 뚝. 근데 문제는, 실제로 있었던 일인데, 동성애자가 나한테 접근하는 일. 세상의 남자들아, 이런 거 한 번씩 당해볼 충분한 이유가 있다. 나는 전혀 관심도 없고 눈길도 가지 않은 인간이 내게 연애감정을 갖고 접근하면 정말 기분 나쁘다. 나쁜 수준 이상으로 나쁘다. 그러니 당신 역시 함부로 여성에게 연애 감정을 표하지 말라. 여자들도 내가 느꼈던 나쁜 수준 이상의 나쁜 감정이 생길 지도 모르니까.
  이야기가 삼천포로 빠졌는데, 다시 책으로 돌아오면, 은고리로 만든 귀걸이를 달고 두툼한 아프리카 팔찌를 하고 독특한 패션으로 무장한 유색인 페미니스트들이 백인 페미니스트들의 달가워하지 않는 느낌을 받을 때, 이들이 페미니스트가 된다는 건 무엇을 의미할까. 에바리스토는 이런 문제만 제시하고 해결 방법은 찾지 않는다. 내 생각은, 백인 페미니스트들은 절대로 확실한 말이나 편지를 통해 유색인 동지들을 달갑지 않다고 안 할 것이다. 그렇다고 달가워한다고 믿는 건 바보짓이지만.
  이런 이야기들이 나온다. 그 외 아주 다양하게 아프리카, 인도, 중국 등지에서 유입된 유색인들과 그들의 혼혈들이 만들어 온 영국과 다양성에 관한 담론이 들어 있다.
  그런데, 이 책을 읽어보신 분들이 여기까지 쓴 소위 독후감을 읽으면, 내게, 차라리 논문을 쓰지 그러니? 라고 지탄의 말을 던질지도 모른다. <소녀, 여자, 다른 것들>이 2019년 부커 상을 받은 작품이다. 책을 읽으면 어디 한 군데 답답한 구석이 없다. 처음부터, 헌사를 읽기도 전에 ‘일러두기’를 통해, “이 소설은 운문 형태를 띠는 산문으로” 운운한다. 그럼 일종의 외국어로 쓴 시. 약간 긴장을 한 채 헌사를 읽고, 차례를 훑어보고, 드디어 본문을 읽기 시작하면, 첫 페이지를 다 읽기도 전에 글이나 문장의 형태에 관해서는 무감각해진다. 그딴 건 아무 상관없다. 오히려 단박에 이야기 속으로 빠져드는 걸 알게 된다. 그만큼 재미있다. 세상엔 참 다양한 인간들이 산다. 이 개별적인 인격들이 하나 빠짐없이 삶의 곤고함과 어려움에 찌부러져 살겠지만 그 속에서도 찬란하게 버티고 있다는 건, 지금 내가 만들고 있는 것과 모습만 다르지 똑같은 기적이다.
  지금, 쓴 걸 다시 읽어보니, 이 재미있는 소설을 읽고 이렇게밖에 책을 설명하려고만 했다니 참 바보 같다는 생각이 든다. 이런 책은 눈으로 읽고 곧바로 가슴에서 접수되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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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연 2021-02-22 11:0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다른 책을 물리치고 책장에 버티고 있는 이 책을 읽어야겠다... 라는 마음이 솟구치는 페이퍼.. ;)

Falstaff 2021-02-22 11:10   좋아요 3 | URL
한 번 책을 열면 끝까지 읽게 됩니다. 바쁜 일 없을 때 시작해보셔요. 후딱 하루가 지나갑니다. ^^

잠자냥 2021-02-22 12:4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도 리뷰 쓰고 나서 폴스타프 님 리뷰 이제 읽습니다. 이 책 정말 시원하게 술술 읽히죠?
저도 처음엔 마침표가 없다 뭐 그런 이야기를 들어서 읽기 전엔 뭐 골아픈 거 아니야?? 그랬는데 웬걸요 한 번 집어들으니 멈출 수가 없.....(아 물론 지난주에 제 고양이가 아파서 병원들락날락 하느라 좀 중간에 못 읽기는 했어요.)더라고요. 그만큼 대단한 재미였습니다.

그나저나 폴스타프 님 말대로 정확히 말하자면 열두 명의 여성이 아니라 한 명의 젠더프 리 인간이네요? ㅎㅎㅎ

Falstaff 2021-02-22 12:47   좋아요 2 | URL
ㅋㅋㅋ 저도 민음사 추천글만 안 썼으면 지난 주 초에 독후감 올렸을 건데, 그거 좀 아쉽더라고요. 다음이 궁금한데 이왕 쓰기 시작한 것도 마저 해야 하지 에고...

그죠, 젠더 프리라고 해야 마땅합니다.
그리고, 정확하게 흑인이라 꼬집으면 안 될 거 같아요. 그래서 계속 저는 ‘유색인‘이라고 썼습니다. ㅎㅎㅎㅎ

잠자냥 2021-02-22 12:49   좋아요 2 | URL
네 유색인이라는 말도 맞습니다. ㅎㅎ 우린 모두 유색인. ㅎㅎㅎㅎ 이 책 다 읽는 분만 아실 내용 히힛-