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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가 세상을 똑같이 살지는 않아
장폴 뒤부아 지음, 이세진 옮김 / 창비 / 2020년 10월
평점 :
2019년 공쿠르상 수상작. 책의 앞날개를 보면, 작가 장폴 뒤부아는 1950년 프랑스 툴루즈에서 태어나 아직도 그곳에서 사는 “프랑스의 국민작가”라고 요약한다. 그 나라 사람들이 신줏단지처럼 추앙해마지않는 프라이버시 때문인지 작가의 성장과 교육에 관해서는 입을 꾹 다물고 곧바로 그의 작품활동만 설명해놓았을 뿐이다. 흠. 그러면서 국민작가란다. 하긴 우리야 이이가 국민작가든 논두렁 작가든 그건 알 바 아니다. 그저 작품만 재미있으면 장땡이다. 그리고, 읽는 재미 하나만 가지고 얘기한다면 장땡은 아니더라도 구땡은 된다. 읽으면서 독자가 책에 열성적으로 몰입하게 만드는 건 아니고, 책의 띠지에 쓴 것처럼 문학성(이게 무슨 뜻인지 정확하게 아직도 모르긴 하지만)에 적절한 대중성이 합쳐져 안온한 트로트를 만들어냈다는 말씀. 그래서 쉽게 독자의 마음에 습기를 불어넣을 수 있을 듯하다.
1955년생 폴 한센. 그는 폭행범이다. 몬트리올 교도소의 1,357명 수감자 가운데 한 명으로 금고 2년형을 받고, 다른 방보다 약간 커서 ‘콘도’라는 별칭으로 불리기도 하는 감방에서 한 명 반 분량의 체구와 엄청난 완력을 보유한 헨스 엔젤스 갱단의 멤버 패트릭 호턴과 세면대와 변기를 함께 쓰는 생활을 하고 있다. 패트릭으로 말할 것 같으면, 등에는 “사는 건 엿 같고 그 다음엔 죽는다.”라는 글귀가, 어깨 곡선에서 가슴팍까지는 할리 데이비슨에 바치는 애정을 표현한 그림이 그려진 바이커 갱단의 일원으로, 그들의 적수 록머신의 몬트리올 지부 일원을 살해한 혐의를 받아 재판 대기중인 자로, 책을 시작할 당시엔 치아 농양이 제대로 무르익어 밤마다 타이레놀을 먹어가며 끔찍한 고통을 참아야 했다. 물론 조금 지나면 교도소 치과의사가 갖은 협박과 욕설을 무릅쓰고 깔끔하게 이를 뽑아 완치시키기는 한다.
폴 한센은 눈폭풍이 몰아쳐 영하 28도, 체감온도 영하 34도까지 내려가는 몬트리올의 한겨울에 실내온도가 14도가 넘지 않는 감방 속에서 얼어 죽지 않기 위해 희한찬란한 냄새가 나는 담요를 몇 장씩 덮고 자는 감방 안에서, 자신을 위안하는 모습을 눈으로 본다. 아내 위노나 마파치, 아버지 요하네스 한센 목사, 그리고 나의 개 누크. 이렇게 세 유령. 이 순간, 독자는 <모두가 세상을 똑같이 살지는 않아>의 스토리 라인은, ‘나’ 폴 한센이 왜 교도소에 들어오게 됐는지와, 이 세 유령과 폴의 관계를 밝히는 것으로 끝날 것임을 알아챈다. 그리고 사실이 그렇다.
하필이면 책의 첫 장면이 교도소. 그것도 살인혐의를 받아 재판 대기중인 흉악범(일 가능성이 큰 거한)과 주인공이 같은 방을 쓰는 것으로 설정을 해서, 독자는 일찌감치 별의별 상스러운 욕설의 론도를 견뎌야 한다. 뒤부아가 여태 써온 글의 방식을 몰라서 함부로 얘기하기가 조심스럽지만, 작가가 표현한 살인 용의자 패트릭 호턴은 퀘벡의 기술전문학교에서 기계공학과 교수 아버지가 가족들에게 거의 완벽하게 냉정해 사회적으로 용인이 되는 나이가 되자마자 독립해 지금까지 아버지는 죽은 사람 대하듯 하는 환경을 부여했다. 그러나 패트릭의 본심은, 그가 구사하는 찬란한 욕설과 관계없이 조금은 허풍스럽지만, 아이스하키와 할리 데이비슨에 몰두하고, 따뜻한 마음을 가졌으며, 순진한 구석이 여기저기 보이기도 해, 차라리 ‘순박하다’는 말도 쓰고 싶어질 정도다. 패트릭의 성격을 이렇게 부여한 건, 책이 앞으로 어떻게 진행될지 짐작하는 힌트가 될 수도 있다.
그럼 교도소 감방에 출몰해 주인공 폴에게 위안을 주는 세 유령을 찾아가 보자.
아버지 요하네스 한센 목사는 1923년 덴마크 최북단 유틀란트 반도의 인구 8천 명의 소도시 스카겐 태생으로, 대대로 어부 집안이었다. 그냥 우리나라 어촌을 생각하면 오산이다. 북해에 면해 있어 황량하기 그지없고, 늘 불어오는 사구의 모래바람은 14세기에 지은 뱃사람들의 수호신에게 바치는 위풍당당했던 교회를 종탑 윗부분만 남기고 몽땅 삼켜버린 곳이다. 어업과 생선 가공공장 말고는 따로 할 것이 없는 스카겐에서 소년 요하네스는 모래에 묻힌 교회를 바라보며 역설적으로 목회자의 꿈을 꾸었고 그것을 이루었다.
1930년생 프랑스 사람인 엄마 아나 마르주리. 툴루즈 태생으로 외조부모는 ‘르 스파르고’ 즉 ‘나는 씨를 뿌린다’라는 뜻의 작은 영화관을 운영했는데 일찍이 정부로부터 ‘예술과 실험’ 인증을 받아 보조금을 받는 대신 예술영화, 독립영화, 실험영화 등 소위 고상한 영화만을 상영하는 곳이었다. 노부부가 1958년 당시 고급모델이었던 DS19 차량을 전속력으로 운전하다 플라타너스를 브레이크의 간섭 없이 들이받아 차에서 튕겨져나와 죽은 다음에, 딸이 영화관을 물려받았다. 요하네스의 장인, 장모는 그들의 종교인 가톨릭 의례에 따라 장사를 지냈고, 믿지 못하겠지만, 가톨릭이든 개신교든 엄마 아나 마르주리는 신앙을 도통 이해하지 못했으며 심지어 죄라는 개념조차 인정하지 않았다. 근데 어떻게 목사와 결혼해 아이까지 낳았느냐고? 비록 자신도 모든 남자의 시선을 끌어모으는 관능적 몸매와 아름다운 얼굴을 지녔지만, 요하네스 한센 목사의 잘생긴 얼굴에 반했기 때문이었다. 이건 그녀 스스로가 고백한 사실이다.
1968년의 파리혁명을 거치면서 한층 더 반교회적인 이념으로 무장하게 된 엄마 아나 마르주리는 1975년 여름, 당대 최고이며 아직도 클래식 포르노 영화의 대표작품인 <목구멍 깊숙이>를 상영하기에 이른다. 어엿하게 사목활동을 하는 현직 목사의 아내가. 그리하여 수십 년간의 노고에도 불구하고 툴루즈에 뿌리를 내리지 못한 목사는 이혼 후에 홀로 프랑스를 떠나 대서양을 건너 퀘벡 남쪽의 석면 광산 도시 셋퍼드 마인스의 작은 교회로 자리를 옮긴다. 나는 학교에 다니다 우연히 경마장에서 세 달 월급에 달하는 돈을 따 아버지한테 다니러 갔다가 그냥 눌러앉아 버린다. 폴이 경마에서 돈을 따 캐나다로 왔으니 자연스럽게 아버지에게 심심풀이 삼아 한 번쯤 경마장 외출을 권할 수 있는 거 아닌가. 그러나 한센 목사는 일언지하 거절한다. “한 종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 루카 16장 13, 14절.”
후에 아버지는 완벽하게 파산을 하고, 석면 가루가 공기 속을 배회하는 셋퍼드 마인스의 교회에서 마지막 목회를 끝낸 후 설교단에서 쓰러져 생을 마감한다. 목사의 시신은 도르발 공항, 제네바, 코펜하겐까지의 하늘길을 경유한 다음 영구차를 타고 그의 고향 스카겐에 이르러 가족묘지에 묻히고, 이제 홀로 남은 ‘나’ 폴 하겐은 몬트리올의 여러 직업을 거친 후에, 교도소에서 불과 1킬로미터도 떨어지지 않은 동네 ‘아헨트식’의 68가구로 이루어진 고급 아파트 렉셀시오르에서 까다로운 관리 실무업무, 즉 만능 집사이자 마법사 수위로 26년간 일을 한다.
그동안 아일랜드계 어머니를 둔 알곤킨 인디언의 후예이자 몬트리올에서 반경 3백 킬로미터 내의 호수 지역을 왕래하는 1947년산 수상비행기 비버 DHC2기를 운행하는 위노나 마파치를 만나 사랑을 하고, 함께 살고, 알곤킨 인디언의 율법에 따라 자연스럽게 부부가 된다. 11년 후 위노나가 세상을 접을 때까지, 한결같이, 사랑하면서. 그러다가 다친 다리를 끌며 호숫가를 배회하는 개, 누크를 발견해서 한 식구가 되고.
불행은 다른 불행을 몰아오는 법. 그리하여 늘 우리의 주변에서 보던 평범한 늙은이 폴 한센으로 하여금 돌이킬 수 없는 분노를 터뜨리게 하고, 분노를 참지 못한 대가로 몬트리올 교도소의 콘도에서 2년 형을 받게 된 것. ‘나’ 폴 한센이 드디어 형기를 마치고 다시 딛는 세상의 발자국은 어디를 향할 것인지, 그것은 안 알려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