뜨거운 양철 지붕 위의 고양이.유리 동물원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38
테네시 윌리암스 지음, 김소임 옮김 / 민음사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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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태 <뜨거운 양철 지붕 위의 고양이>를 읽었다고 착각한 것은 책 표지 그림으로 쓴 같은 제목의 영화를 봤기 때문이라고밖에 생각할 수 없다.


  <밤으로의 긴 여로>를 읽은 후로 유진 오닐, 아서 밀러, 테네시 윌리엄스 등의 미국 극작가들의 작품을 찾아 읽기 시작했다. 세계에서 가장 발달한 경제와 자본주의, 반공주의 체제 속에서 역설적으로 인간에게 제일 기초적인 단위인 가족 사이에서조차 의사소통 부재에 의한 단절과 소외, 물질에 대한 집착을 집요하리만큼 사실적으로 그린 미국의 극작가들. 그 가운데 인간의 허위의식과 그것에 대한 역겨움, 욕망으로부터의 소외, 단절, 탐욕 등을 노골적으로 보여주는 또 하나의 명품 극작 <뜨거운 양철 지붕 위의 고양이>를 보탠다. 물론 같이 실린 <유리 동물원>도 명품의 관을 써야 마땅하다.
  같은 제목의 영화에 대한 기억은 가물가물하다. 그래서 정확한 비교가 가능하지 않겠지만, 한정된 공간을 사용하는 희곡을 영화화한 것보다는 극작이 더 독자의 마음을 움직이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 든다. 물론 엘리자베스 테일러와 폴 뉴먼 등 빼어난 외모를 자랑하는 배우들을 감상하고자 한다면 어쩔 수 없겠지만.
  미시시피 강 연안의 델타 지역에 잭 스트로와 피터 오첼로라는 동성 애인 소유의 거대 농장에 일꾼으로 들어간 폴리트는, 탁월한 능력을 발휘해 관리자 자리에 올랐고, 세월이 흘러 잭 스트로가 죽는다. 애인이 죽자 외로움 때문에 그랬는지 거의 곡기를 끊은 피터 오첼로 역시 얼마 지나지 않아 숨을 거두고 만다. 그래 2만8천 에이커에 달하는 거대 농장을 소유하게 된, 천생 농장의 경영주이자 자본가인 폴리트 씨. 세월은 그에게도 손톱을 숨기지 않아 어느덧 예순다섯 번째 생일을 맞이하게 되고, 결장에 생긴 심각한 암종이 폐와 간, 신장 등 온몸에 전이가 되어 죽음을 예약하게 된다.
  변호사 큰아들 구퍼와 그의 아내 메이, 풋볼 해설가인 둘째 아들 브릭과 매기는 아버지와 어머니 아이다에게 아버지의 예비 개복수술 결과, 암이 아니라 단순한 결장 경련증이라고 안심시킨다. 그러나 이 와중에도 큰아들 내외는 아버지가 평소에 둘째를 편애해 그에게 농장을 물려주지는 않나 싶어 아버지의 마지막 생일 파티에 가假 유언장을 만들어 온다. 작은아들의 처 매기는 구퍼에겐 다섯 명의 자녀와 곧 여섯 번째 자식이 나올 예정인 반면에 자신들에겐 아직 아이들이 없는 것이 유산 상속에 걸림돌이 되리라고 생각한다.
  굳이 주인공이라면 둘째 브릭과 매기, 그리고 아버지 폴리트 씨라고 할 수 있다. 브릭은 타인들로부터 동성애 관계라고 의심을 받을 정도로 돈독한 우정을 쌓은 풋볼 동료이자 친구였던 스키퍼가 죽은 이후 알코올 의존증에 빠져버리는데, 자신이 술을 마시는 이유를 아버지에게 허위에 대한 역겨움이라 설명한다. 당사자인 브릭의 말을 제외하고 스키퍼와의 관계가 우정을 넘어선 동성애 관계였다는, 또는 아니었다는 아무런 증거도 극에서는 찾을 수 없다. 만일 동성애 관계였다면, 브릭이 주장하는 허위, 허위 행위를 스스로 행하고 있기도 한 것이리라.
  브릭의 처 매기가 바로 ‘뜨거운 양철 지붕 위에 오른 고양이’. 남부의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난 빼어난 미모의 소유자. 매기는 가난하게 사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너무도 잘 아는 삶을 살다가 부잣집 아들인 브릭과의 결혼을 통해 신분 상승에 성공한다. 브릭의 입장에서는 매기를 사랑해서 결혼했다기보다 그녀가 스키퍼와의 관계에 절묘하게 파고들어 어떻게 하다 보니 연을 맺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스키퍼의 죽음에 매기가 관련된 걸 안 이후 브릭은 여전히 빼어난 미모로 타인의 시선과 욕망의 한 가운데에서 남자들의 욕망이 가득한 시선을 즐기는 매기와의 접촉을 거부하고 산다.
  결혼 후에야 부유한 환경의 여유를 즐기기 시작한 매기 입장에서는 알코올 의존증에 점점 깊게 빠져가는 남편과의 거리감에도 불구하고 결코 부를 포기하고 싶지 않다. 그리하여 햇볕에 달궈진 양철 지붕 위에 오른 고양이처럼 가문의 상속을 받기 위해 팔짝팔짝 뛸 수밖에 없는 처지. 상속 논의가 결국 자손을 가지고 있느냐 없느냐에 이르자 건조한 결혼생활을 이어온 매기는 결정적인 마지막 뛰어오름을 감행하는데, 어떤 것인지는 매우 훌륭한 작품의 클라이맥스이니 직접 확인하시기 권하는 의미에서 알려드리지 않겠다.
  나는 예순다섯 번째 생일을 맞은 폴리트 씨가 상당히 인상 깊었다. 결장암인 것을 알고 난 뒤 집안 돌아가는 꼴이 마음에 들지 않았음에도, 내가 산다면 얼마나 더 산다고 하는 마음으로, 모든 것을 그저 지나가는 풍경처럼 바라만 보다가, 생일을 맞아 이젠 단순하게 결장 경련증에 불과하다는 판정을 받아 앞으로 적어도 십오 년이나 이십 년은 더 살 수 있다는 희망을 갑자기 얻은 천부적인 사업가이자 농장주. 폴리트 씨에게 주어진 허위의 새 생명은 그를 원래보다 더 공격적이고, 여태까지 참아온 것을 만회하기 위해 매사를 모진 눈으로 바라보게 된다.
  강했던 사람이 약자의 위치에 떨어졌을 때, 자신도 모르게 점점 공격적으로 바뀌는 것이 인지상정. 그도 역시 새로운 삶을 얻자마자 아들 브릭에게 젊은 여성을 향한 욕정과, 이젠 아내를 사랑하지 않는 마음, 며느리들의 이전투구 등 세상 잡사에 대한 속물적 욕망을 드러낸다. 말기 암이 수반하는 극심한 고통까지 조금도 의심하지 않은 채로. 자기의 2만8천 에이커에 달하는 거대 농장과 몇 천만 달러의 현금재산을 사랑하지만 알코올 의존증에 빠진 것 같고, 동성애 성향인지도 모르는 둘째에게 상속해주느니 자신이 직접 경영하는 쪽을 선택한다.
  애초에 정상적인 의사소통이 가능하지 않은 부르주아 가정 속에서의 불협화음. 이 혼돈의 와중에서 뜨거운 양철지붕 위의 고양이 매기는 매사에 의욕을 잃어버린 알코올 의존증 환자이자 남편인 브릭조차 어이없어 그냥 웃어버리게 만드는 마지막 발톱을 날리며 드라마를 완전한 비극 속에서 건져낸다.


  <유리 동물원> 역시 수작. 이 두 편을 함께 담아 책은 만든 민음사에게, 실로 오랜만에 고마움을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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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lstaff 2021-01-12 08:4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 가족간 막장 대화 한 장면

작은 아이가 오랜만에 집에 왔습니다. 때마침 양철지붕을 다 읽은 참이었습니다.
제가 이 책 표지를 보여주면서, 얌마, 너 말야, 이렇게 아름다운 여자가 눈에 욕망이 가득해서 얼굴을 어깨에 기댄채 바라보고 있는 거야. 해야겠냐, 안 해야겠냐.
아이 말하기를, 해야 합니다. 안 하면 천하의 나쁜 새낍니다.
근데, 저 폴 뉴먼이란 작자는, 안 해.
와, 때려 죽일 놈 같으니라고. 말도 안 됩니다.

이때 냉장고 문을 열던 아내가 책 표지를 슬쩍 쳐다보고 한 마디 합니다.
야, 나 같아도 했겠다. 그새끼 정말 나쁜 새끼네.

제가 이렇게 삽니다.

잠자냥 2021-01-12 09:4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이 책에 별 다섯 개 주시니 왠지 제가 다 기분이 좋군요. ㅎㅎ 여기 실린 두 작품 모두 제가 무척 좋아하는 작품이라서요. 저는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보다 여기 실린 작품들이 더 좋더라고요. <유리 동물원> 때문에 닥치고 테네시 윌리엄스 팬이 되었다는. ㅎㅎ

Falstaff 2021-01-12 10:42   좋아요 2 | URL
저는, 정情도 첫정이라고 미국 극작 가운데 <밤으로의 긴 여로>가 젤 좋고요, 양철지붕이 그 다음 순서 정도 되겠군요. 아휴, 괜히 버터 냄새 운운하면서 부정하고 싶은데 도무지 미국의 극작가들, 대단하다는 건 어쩔 수 없나 봅니다.
사실 윌리엄스는 욕망이라는... 때문에 그리 기대하지 않고 읽었습지요. 그래 더 화들짝 놀랐는지도 모릅니다. ^^

유부만두 2021-01-12 20:0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전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를 NT live 영상으로 보고 희곡을 읽어서인지 그 작품이 맘에 들었어요. 퇴폐적이고 출구 없는 지옥. <뜨거운 양철 지붕 위의 고양이>도 찾아서 읽어봐야 겠습니다.
그런데 전 그 지붕 위에 고양이 대신 바이올린으로 제목을 헷갈려 하고 있고요.

Falstaff 2021-01-12 20:17   좋아요 0 | URL
ㅎㅎ 유쾌하신 유부만두님. 뜨거운 양철지붕 위의 바이올린. ㅋㅋㅋㅋ
뭐 독자가 다 같은 감상이면 재미없잖아요. 전 욕망전차가 좀 폭력적이라서 그냥 에그머니, 했던 겁니다. 영화에서도 말론 브란도가 걍, 아이고, 그 아까운 비비언 리를 말입죠.
근데, 양철 고양이, 꼭 읽어보셔요. 물론 기대가 크면 안 됩니다. ㅎ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