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중 하나
윌라 캐더 지음, 정선우 옮김 / 아토북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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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윌라 캐더. 일찍이 <나의 안토니아>와 <대주교에게 죽음이 오다>로 내게 깊은 인상을 준 미국의 지방주의 작가. 지방주의? 쉬운 얘기로 (혹시 오해하실지 몰라 말씀드리는 건데, 다음 단어는 친근한 표현, 좋은 뜻으로 쓰는 말임) 미국 촌년이란 뜻이다. 버지니아 주 출생이지만 네브래스카 주립대학을 다니며 한참 감수성 짙은 시기의 십 년을 네브래스카의 광대한 벌판과 엄혹한 자연환경과 끝도 없는 농장을 보며 살았다. 이때 척박한 계절 속에서 생존해나가는 시골의 선량하고 건강하고 강인한 생활력, 여유 있는 자가 없는 자에게 삶을 계속해갈 수 있도록 도와주고, 좋은 길로 인도하는 선한 이야기가 위에서 말한 두 작품. 두 전작에 홀딱 빠져 이이에게 퓰리처상을 받게 해준, 그리하여 대표작 가운데 하나라고 말할 수 있는 <우리 중 하나 One of Ours>가 새로이 번역, 출간되었다는 걸 알자마자 어찌 서둘러 사 읽어보지 않을 수 있었을까.
  1922년 작품. 시대는 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세계의, 그래봤자 당시의 세계란 아메리카와 유럽을 말하는 것이기는 했지만 어쨌든 세계의 농장이자 공장으로 온갖 부를 쌓았을 때. 폐허가 된 유럽을 복구하기 위하여 여전히 북아메리카로부터 막대한 농업과 공업 생산품을 수입하던 시기의 미국은 새로운 해가지지 않는 나라의 왕좌에 등극한다. 이때 윌라 캐더는 1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네브래스카 출신의 장교 한 명을 그리고 있다. 책의 육십 퍼센트는 주인공 클로드 흴러가 징집을 하기도 전에 스스로 입대하여 참전하기까지의 심리적 변화를 그렸고, 사십 퍼센트는 유럽까지의 항해와 프랑스에서의 대 독일 전투 장면에 할애했다.
  네브래스카의 시골도시 프랭크포트에서도 (땅 좁은 우리 기준으로) 상당히 (그러나 넓은 미국 기준으로는 조금) 떨어진 흴러 농장에서, 심성은 좋으나 진심도 농담처럼 말하는 습관 때문에 세 아들로 하여금 도무지 진심을 알아채지 못하게 만드는 아버지 넷 흴러와, 기독교적 편향의 문제를 빼고는 현모양처임을 의심하지 못할 에반젤린 흴. 세상에, ‘흴’이란 가문도 있다. ‘휠’이 아니라 ‘흴’이다. 도대체 영어로 어떤 스펠링을 쓸까?
  하여튼 흴 부부는 아들만 셋 두었는데, 첫째 베일리스는 소심한 편이라고는 하기 힘들지만 편협하고 신중하고, 좀 박완서 식 선병질적이라 농장을 이어가기는 힘들겠다고 판단해서 프랭크포트 시내에 농기계 도매상을 열어주었고, 맏이답게 부모의 기대에 부응하느라고 탄탄대로를 걷고 있어 도시(라봐야 그냥 동네 수준)에서 딸 둔 부모의 눈에 아주 맞춤한 신랑 후보로 이름이 났다. 게다가 담배도 안 피워, 술 마시는 건 경멸해, 여자관계도 깨끗하니 이게 웬 떡이냐 말이지. 물론 자빠뜨릴 수만 있으면.  둘째를 건너뛰고 막내 랄프는 기계를 좋아해서 어머니를 위해 식기건조기, 우유 착유기 및 선별기 같은 것을 자꾸 들여오는 바람에 오히려 타박만 받는 좀 허영기 있는 스타일. 흴러 씨는 막내의 독립을 위해 아주 멀리 떨어진 메인 주에 큰 농장을 구입해 랄프가 부모와 떨어진 곳에서 혼자 경영할 수 있게 돕기로 결정을 한다. 그러나 메인에서 농장에 성공을 했는지, 깨끗하게 말아먹고 말았는지는 책이 끝날 때까지 알 수 없다. 덜 중요한 조연의 숙명이다. 궁금해 하지 마시라.
  드디어 우리의 주인공 둘째아들 클로드. 좀 못 생겼지만 건장한 체격과 강단 있는 체력을 겸비한 클로드는 학교를 다니면서 틈틈이 농사일도 거들어온 착한 아들. 그런데 공부를 하고 싶어서 작가가 졸업한 네브래스카 주립대학에 보내달라고 부모에게 요구를 했으나, 원래 미국의 오래된 부자들이 항용 그러하듯 돈 한 푼에 벌벌 떠는 흴러 부부는 학비가 저렴하기도 하고, 무엇보다 주립대학에 가면 축구하느라 공부를 소홀히 할 거 같기도 해서 클로드를 신학교에 보내버리고 만다. 그런데 두 대학이 한 도시에 있어서, 우연히 주립대학의 역사학과 학과장의 강의를 들을 기회가 생긴 클로드는 주립대학의 도서관에 거의 살다시피 하면서 역사학에 대단한 관심이 생기고, 나아가 빼어난 논문을 써 학과장에게 제출하기도 한다.
  이 정도면 부모가 되어, 집에 돈도 많은데 말이지, 아이비리그는 아니더라도 주립대학 정도는 보내야 하는 거 아냐? 아버지 넷 흴러는 흠흠 하면서 그만이고, 어머니 에반젤린은 도무지 촛농 떨어뜨린 인삼주 병뚜껑처럼 요지부동이다. 그래 종교에 대해 회의하고 있던 클로드, 목사가 되느니 차라리 농사나 짓겠다, 하고 학교마저 때려치우고 농장에 전념하게 되는데, 농장일 하면 늘 조금의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 법, 한번은 팽팽하게 묶인 철사에 얼굴을 갈아버리는 일이 생겨 두문불출 몇 주를 앓아야 하는 일을 겪는다. (당시엔 항생제가 없었다.)
  이때 혜성같이 나타나는 누구? 맞습니다. 여성. 이니드. 어머니 에반젤린보다 더 찐 기독교 원리주의자. 장래 희망이 친언니처럼 중국에 가서 선교활동을 하는 일이다. 이니드가 매일, 하루도 빼지 않고, 어떤 땐 하루 두세 번씩 클로드의 방을 방문하여 간호해주고, 격려의 말을 해주고, 손도 잡아주니 한참 울뚝불뚝 리비도를 주체하지 못할 나이의 클로드가 오해하지 않겠어? 그리하여 결혼해버린다. 기독교 원리주의자 비슷한 이니드는 부부간의 성접촉도 불결하게 생각하는 여성. 2년 만에 중국에 있는 언니가 아프다니까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남편 팽개치고 중국으로 떠나버린다.
  그리하여 삶에 대하여, 운명에 대하여, 자꾸 꼬여버리는 자신의 인생에 관해 고민하던 클로드는 한참 절정을 향해 치닫던 1차 세계대전의 파도에 자진해서 휩쓸려버린다.


  내용은 이정도만. 전쟁 나가서 어떻게 됐느냐 까지 말해버리면 곤란하다.
  문제는, 책의 앞표지, 뒤표지에서 이름을 발견할 수 없는 역자 정선우. 앞날개에 쓰인 역자 소개 전문을 옮겨본다.


  “대학에서 관광 영어를 전공했다. 좋아하는 일을 하며 살고 싶어 번역을 시작했다.”

  좋다. 경력이 어찌 됐든 번역만 잘 하면 장땡이지 뭐. 좋아하는 일이 번역인지, 아니면 좋아하는 일은 따로 있고 그걸 행하기 위해 돈을 벌려고 번역을 시작했는지는 역자소개만 읽어보고 접수가 되지 않는다. 검색을 해보면 <우리 중 하나>가 이이의 첫 번역이다. 근데 왜 하필, 적어도 나한테 무지 중요한 작가의 대표작을 첫 번역의 대상으로 했는지 아쉽다.
  물론 이이가 영어 하나는 당연히 나보다 월등하게 잘 하겠지. 근데 문제는 한국말 수준이다. 다른 거 다 빼고, 정선우가 사용하는 우리말 단어의 총량이 번역을 생업으로 하기엔 너무 적고, 그나마 적절한 장소에 적절한 단어를 사용하는데 연습이 덜 되어 있는 “것 같다.” 잘 연습이 되었지만 내가 알아내지 못했다는 뜻일 수도 있다. 그러니 고소sue하지 마시라. 그리고 인칭대명사와 지시대명사를 찬란하게 남발해 오히려 독자가 이해도 못하고 학을 질리는 경우가 많았는데, 영어를 우리말로 그냥 옮기기만 할 때 이런 '불통의 골짜기 현상'이 벌어지지 않을까?
  아래 예시는 책을 통해 대표적인 것들이 아니라 읽다가 하도 진도가 나가지 않아서, 문장이 이상하면 내용과 관계없이 진짜 진도 안 나가고 짜증만 나는 희귀 증후군 환자임을 먼저 고백하고, 하도 지루해 읽다가 하품 나올 쯤 해서 몇 문장 골라본 거다.


  “그의 어머니에게 수감된 영혼은 그녀의 육체적 자아보다 사람들 사이에 더 많이 존재했다.” (202쪽)


  “베일리스는 평화주의자였는데, 미국이 이 전쟁에 참여하지 않고, 유럽이 낭비하는 것들을 끌어모으면, 전 세계의 실질적인 수도가 될 것이라고 사람들에게 계속 말하고 다녔다.”  (227 쪽)


  “그녀는 그의 가치없는 손을 잡고 키스를 했다.“  (228 쪽)
 
  202쪽: 비문.
  227쪽: 주장하는 바는 알겠지만 매우 특색 있는 문장.
  228쪽: 가치 없는 손이 도대체 뭘꼬? 이해 불가.


  이 책을 통해 내가 새롭게 배운 것이 있으니, 번역도 습작이 필요하다는 것. 아놔, 참 언짢다. 하필이면 그 많은 작품 가운데 윌라 캐더의 것을 말씀이야, 쯧쯧쯧쯧쯧쯧쯧쯧쯧쯧쯧쯧.



  남자들 육군훈련소에 입소하면 군의관이 나와서 최종적으로 신체검사를 하는데, 243쪽에서 역자는 이런 의사를 이렇게 부른다. “검시관.” 웃기지?

 

 

 


* 어제 출판사 '한ㅇ문ㅇ사'가 자기네가 낸 책의 번역 흉본 것을 정중하게 항의했다. 이 포스트 같이 번역, 창작물 비난하면, 메이저 출판사는 오히려 안 그러는데, 작거나, 크더라도 덜 알려진 출판사에선 (포스트 수에 비하면)자주 항의가 오고 법정대응 어쩌구 하기도 한다. 거 참 찝찝하네. 이 출판사도 그럴까? 참 출판사도 힘들긴 하겠다. 명색이 문화사업인 출판업을 하면서 "야 썅, 이거 삭제 안 해?"라고 하지 못하고 많이 배운 척하면서 온갖 부처님 말씀을 해야 하니 말이지. 그런 게 그 사람들의 업이야 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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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1-08 10:2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1-01-08 10: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1-01-08 10: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1-01-08 10:2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1-01-08 10:3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1-01-10 12:35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다락방 2021-01-08 10:4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 저 이 책 샀는데... (시무룩)

Falstaff 2021-01-08 10:55   좋아요 0 | URL
뭐 사셨으면 어쩔 수 없는데.... 이런 경우가 가끔 있는데요, 괜히 미안해지더라고요. ^^;;

cyrus 2021-01-08 11:0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검시관은 시체를 보는 의사인데.... ^^;; 저는 서평에 이런 지적이 포함되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Falstaff 2021-01-08 11:06   좋아요 2 | URL
옙. 사이러스 님도 이런 것에 예민하시지요. 다른 분들도 사실 마찬가지일 거라고 보는데요, 굳이 언짢은 이야기 하기 싫어들 하시는 거 같더라고요.
전 이런 독후감을 자주 써서 출판사, 역자, 심지어 작가들로부터 항의를 적어도 연 1회 이상 받는데요, 올해는 1월부터 돌 날아오기 시작했습니다. ㅋㅋㅋㅋ

cyrus 2021-01-08 11:10   좋아요 1 | URL
연말부터 지금까지 제가 출판사 관계자나 역자가 불편하게 느낄 수 있는 글 몇 편을 남긴 상황이라, 언제 돌이 날아올지 몰라요.. ㅎㅎㅎ 그래서 경계 태세(?)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

Falstaff 2021-01-08 11:31   좋아요 3 | URL
ㅋㅋㅋㅋ 전 심지어 알라딘에 의하여 강제 비밀글 처리도 당해본 적 있습니다.
이 포스트, 제일 아래에서 두번째 줄에 나오는 단어 ˝썅˝이라 썼다고요. 물론 다른 건전하지 못한 단어도 조금 더 있었습니다만. 유명 출판사가 직접 제게 항의하긴 쪽팔리니까 알라딘에 대고 뭐라고 했던 거 같았어요.
다 인생입지요. 고소당하지 않은 것만 해도 다행이지요 뭐. 그렇게 알고 사는 게 편하잖아요. 일개 자유인 주제에 말입니다. ㅋㅋㅋㅋ

blanca 2021-01-08 15:2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아... 저 지금 윌라 캐더 <나의 안토니아> 시작했거든요. 너무 좋아서 아껴가며 읽는 중인데 별점 보고 어, 작품에 기복이 있나? 했어요. 저도 번역을 해보고 싶다고 생각한 적이 있는데 어휘량 및 절대 공부량 부족으로 시작도 하지 않는 게 낫다고 생각했거든요. 번역이라는 게 대단히 어렵고 어떤 의미에서는 문학 작품을 다른 나라의 언어로 재창조하는 수준까지 나아가야 하는데 요새는 아쉬운 번역들이 참 많더라고요.

Falstaff 2021-01-08 15:29   좋아요 2 | URL
일본의 초창기 영문학자이기도 한 나쓰메 소세키의 책에서 자주 등장하는 지식인 일인칭 화자들은 자주 영문 한 문장을 어떻게 자연스러운 일본어로 바꾸는가를 연구하고 토론하잖아요. 그것도 몇 날 며칠을 두고 말입니다.
그런 전통이 내려와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을 번역하는 속도가 한국보다 더 늦게 됩니다. 우리나라는 이윤기에 의하여 이탈리아-영어-한국어로 중역 코스를 밟았는데도요. 더 허기가 지는 건, 이윤기가 번역한 다른 에코의 책에 자신이 장미의 이름을 일본보다 더 빠른 속도로 번역했다고 자랑을 했던 겁니다. 그러나 결국 이윤기는 일본의 에코 협회의 초청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맙니다.
결론은, 한국에서는 자질이 되지 않아도 일단 번역 같은 건 하고 본다는 겁니다.

2021-01-16 05:0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1-01-16 09: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aoddlrj 2021-07-29 16: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갖고와서 옮긴이 소개보고 환불하려 가혀던 참에 검색해봤네요.. 본인이 하는 출판사가 아니련지…

aoddlrj 2021-07-29 17: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참고로 책 환불하는건 처음이네요

Falstaff 2021-07-29 17:13   좋아요 0 | URL
이 책 환불하시는 건 독자의 권리 행사라고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