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1
오르한 파묵 지음, 이난아 옮김 / 민음사 / 200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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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르한 파묵은 서사로 끝장을 보겠다고 작정을 한 사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고는 했다. 달리, 더욱 솔직하게 말하자면, 그의 작품 대부분(그래봐야 이게 겨우 열 번째 독후감일 뿐인데) 읽어가는 도중에도 매우 탄탄한 구성으로 견실한 탑을 세우는 작가라고 감탄을 하고나서 정작 다 읽고 나면 그리 큰 재미를 찾지 못했다는 걸, 늦게야 알아차리게 되는, 이를테면 브루크너의 교향곡 같다는 느낌을 지우지 못했다. 이 범주에 들지 않아서 읽으면서도 재미를 찾을 수 있던 건 <제브데트 씨와 아들들>, <하얀 성>, 그리고 그의 대표작이라고 내가 부르짖는 <내 이름은 빨강>. 여기에 재미도 있고, 심지어 오르한 파묵의 대표작의 관을 쓸 수 있는 작품으로 나는 이 뛰어난 정치소설이기도 한 <눈>을 추가한다.
  지금이 2020년 말. <눈>을 쓰기 시작한지 21년이 됐고, 탈고한지는 만 20년에서 한 달이 빠진다. 이제 파묵은 더 이상 정치소설을 쓰지 않겠다고 다짐을 했다 하니 좀 아쉬운 생각이 들 정도. 하긴 우리 나이로 내년이면 일흔 살, 굳이 노익장을 바라지는 않는다. 늙어 무리하면 쉽게 상하는 법이라. 그래도 쉬엄쉬엄 남은 생에 한 편이라도 좋은 작품을 인류에게 선물해주었으면 좋겠다.
  전형적인 3세계인 터키. 유럽 사람들은 터키를 유럽 연합으로 받아들이려 하지 않고 있는 반면, 터키는 부득부득 유럽 국가가 되기 위해 나름대로 최대의 노력을 하고 있지만, 저 유라시아 대륙의 동쪽 끝에 있는 나는 터키가 EU에 가입이 되었는지 아닌지 알기 위해서는 검색을 해봐야 할 정도로 별 관심이 없기도 하다. 지금 검색해봤더니 1999년, 이 책을 쓰기 시작한 해에 EU 회원국에 신청할 자격은 부여하되 터키의 민주화와 인권을 위해 법령 등을 강화할 것을 요구했던 모양이다. 중요한 건 그 후 20여 년이 흐른 지금도 유럽 연합에 가입하지 못했다는 것.
  위대한 오스만 제국의 후예들. 그러나 서구 열강과 전쟁만 했다하면 얻어터지기를 몇 세기. 유럽 문명과 극명하게 다른 이슬람 전통 문화 자체는 별 문제가 아니지만 종교를 가진 ‘사람들’ 가운데 몇몇은 경전을 해석하는데 있어 극단까지 원칙을 따르고자 하는 이들이 있어 시대 변화와 충돌하는 경향이 있는 바, 유독 이슬람의 경우가 심한 것이 문제다. 거기에 터키는 빈부 격차가 상상을 하지 못할 정도로 심각하다고 하며, 책의 무대가 되는 국경도시 카르스는 또 테레케미아, 아제르바이잔, 이란, 쿠르드 인들이 각각의 민족주의적 성향을 지니고 있기도 하고, 유구한 터키 정치의 부패와 끊임없이 계속되는 군부 쿠데타로 인한 불안이 상존하고 있다.
  1980년의 군부 쿠데타 당시에 자신이 쓰지도 않은 정치 논설 때문에 문제가 된 논설을 읽어보지도 못한 상태에서 형을 선고받고는 냅다 프랑크푸르트로 망명을 해버린 시인 ‘케림 알라쿠쉬 오울루’라는 40대 초반의 남자가 주인공이다. 그는 자신의 복잡한 이름 대신 간단하게 알파벳 ‘카Ka'로 불리기 원했고 스스로 서명도 그렇게 하는 걸 고집하며 무려 12년 동안 프랑크푸르트에서 살면서도 독일어를 익히지 못한 고집불통의 사내이기도 하다. 하긴 모국어로 시를 쓰는 시인이 이방의 언어를 쓰면서 모국어를 잃어버린 순간 더 이상 시인이 아닐 수도 있겠지만 사실 그렇게 되기도 힘든 일인데, 그 어려운 걸 이 카는 해냈다. 그가 이스탄불에 왔다. 어머니의 장례식에 참석하기 위해. 그게 겉으로 내세우는 이유이고, 사실은 결혼할 터키 여자를 물색하기 위한 목적이라고 하는 것이 더 솔직하리라.
  장례식이 끝나고 이스탄불에서 하릴없이 지내던 어느 날, 이스탄불의 줌후리엣 신문사 기자 친구 타네르가 난데없이 카르스에 가서 취재를 좀 해다 주지 않겠느냐고 제의를 한 것이다. 카가 다닌 이스탄불 대학의 최고 미녀였던 이펙이 이혼하고 아버지, 여동생 카디페와 함께 카르스의 카르팔라스 호텔에서 살고 있다고 언질을 주면서. 카에게는 일종의 강박관념이 있다. 짧았던 사랑의 순간을 단지 고통과 수치의 시간으로만 기억하는 사람들에게 생겨나는 직관 때문에 사랑에 빠지는 것을 죽도록 두려워하는 현상. 그럼에도 불구하고 카는 카르스 취재 여행을 결정한다. 자신이 결혼할 여자가 바로 이펙이기 때문에. 힌트를 준다. 12년 이상 만나지 못했고, 12년 전에도 친하지는 않았지만 이미 자신의 친구 무흐타르와 결혼했었던 이펙과 불과 며칠 만에 서로 사랑할 수 있으며 심지어 결혼에까지 이를 수 있을까? 답변은, 가능하다, 이다. 터키에서, 카의 집에 있는 이스탄불 시의 상류층 거주지 니샨타쉬가 아니라 터키 영토에서 가장 가난한 국경 도시 카르스에 사는 사람에게 유럽의 한 가운데인 프랑크푸르트에 사는 남자가 청혼을 한다면, 문제가 달라질 수 있기 때문에.
  그리하여 카는 이스탄불에서 에르주름을 거쳐 카르스까지, 오르한 파묵의 작품 속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버스를 타고 겨울여행을 떠난다. 무려 하루 반을 꼬박 달려서. 그것도 평생 경험해보지 못한 폭설을 뚫고. 근래 우리나라 소설에서 눈 내린 장관은 강릉 출신의 이순원이 독보적이다. 이순원 특유의 감각적인 문장으로 그려내는 한 길 이상 쌓인 눈이라니. 오르한 파묵의 눈 묘사는 이순원과 달리 감각적이지는 않지만 보다 더 장려하다. 해발 1,600 미터 고지의 도시 카르스에서 북쪽 시베리아로부터 몰려오는 습기 찬 거대한 저기압으로 촘촘하다 못해 빽빽하게 공간을 채우는 눈으로 인해 차창이 보이지 않는 상태에서 까마득한 산길을 운전해가는 버스를 타고, 우리의 카는 지방선거와 소녀들의 연쇄 자살 현상 취재라는 명목하게 장가들러 떠나간다.
  먼저 ‘눈의 궁전’이라는 뜻의 카르팔라스 호텔에 여장을 풀고 예실유르트(푸른 조국) 식당에 들어가니 큰 키의 잘 생긴 연극배우, 한 시절엔 국부 아타튀르크 역으로 영화를 찍는 영광을 누릴 뻔했으나 지금은 영락해 시골 변두리에 가설무대를 세우고 공연을 하는 늙은 배우와 그의 뚱뚱한 아내를 발견한다. 나는 이 책 <눈>이 정치소설이라는 걸 알고 책을 샀다. 그러나 사 놓고 두어 달 지난 후에 읽기 때문에 책에 대한 사전 정보는 까맣게 모르는 상태에서 읽는 참 괜찮은 습관이 있다. 그리하여 ‘수나이 자임’이란 배우가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하는지 감도 잡지 못하고, 덕분에 나중에 반전의 기쁨을 오롯하게 즐길 수 있었다. 중요한 인물이다.
  하여튼 지방선거에 시장으로 출마한 후보 가운데 가장 유력한 이는 이펙의 쿠르드 족 전남편 무흐타르이며, 소녀들은 주로 가난에서 비롯한 원치 않는 결혼 때문에 신의 말씀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생을 접고 있는데, 특별하게 중요한 자살 건은, ‘테스리메’라는 이름의 소녀였다. 테스리메는 히잡을 벗지 않겠다고 결정을 했고, 소녀가 다니는 교육연구원은 수도 앙카라에서 내려온 지시에 따라 터키의 유럽화를 위하여 여성을 해방하는 측면에서 히잡을 벗지 않고는 학교를 다닐 수 없다고 퇴학처분을 하려는 와중에, 몸과 마음을 정갈하게 한 어느 밤에 바로 그 히잡으로 목을 매 자살해버렸다.
  산악지대이고 쿠르드 족들의 이슬람 원리주의 운동이 활발한 지역. 여기에 떨어진 프랑크푸르트에서 온 (사실은 가난뱅이 독일 망명객이지만 보이기는)부르주아 기자. 며칠 계속되는 폭설 때문에 카르스로 통하는 모든 도로와 철도가 폐쇄된 와중에 카르스 거의 유일한 밀렛극장에서는 수나이 자임의 극단이 카르스 최초로 생방송 공연이 예정되어 있고, 지역신문사 사장 세르다르 씨는 아직 시작도 하지 않은 공연 장면에 대한 예견 기사를 쓰는 이상한 곳에서, 하필이면 우리의 카가 도착한 다음날, 군사 쿠데타, 또는 반란이 발생해버리는 거다.
  그리하여 소설은 카와 이펙의 사랑과, 카가 아직도 모르는 이들의 복잡한 인간관계와, 종족 갈등, 빈부 갈등, 이슬람 원리주의, 터키의 미래로서 유럽 화, 군부 폭력, 처형, 사찰, 불법녹음, 도청 등 온갖 난맥상으로 이어진다.
  책은 오르한 파묵이 여러 단서와 인터뷰, 쓰인 메모 등을 참고한 작가 관찰자 비슷한 시점으로 쓰여 있어서, 불과 3일 동안 작지만 한 도시에서 벌어지는 복잡다단한 사건을 설명하기위해 불쌍한 우리의 카를 눈이 오는 그 추운 날, 방울 소리 나게 거리를 쏘다니게 만든다. 카는 짧은 시간에 안 가는 곳이 없다. 호텔, 식당, 몇 군데의 찻집, 극장, 극장 화장실, 자살 소녀 가족의 인터뷰를 위한 빈민가, 경찰서, 이슬람신학교, 온건한 이슬람 원리주의자 사혜띤 교주가 머무는 아파트, 과격한 이슬람 원리주의자 대표 라지베르트, 지방선거 사무실, 과자점 등을 걸어서, 군용트럭 또는 천막을 친 식재료 운반용 마차에 숨어서. 물론 후반으로 가면 파묵이 직접 등장해 마지막 정리를 해주긴 하지만. 그리 열심히 돌아다니고, 사람들 만나고, 오해 받고, 나중엔 얻어터지면서까지, 카는 군사 쿠데타의 와중에 자신의 임무인 지방선거와 자살 소녀들을 취재 했을까? 아니면 이펙과 결혼에 성공해 프랑크푸르트로 날아갈 수 있었을까?
  재미있는 작품이니 직접 확인하시는 게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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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20-12-10 16: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ㅋㅋ 브루크너 교향곡! ㅋㅋㅋ 아주 절묘한 비유입니다. 그래도 이 작품은 그렇지 않단 말씀이군요. 참고하겠습니다!

Falstaff 2020-12-10 16:40   좋아요 1 | URL
조금만 그렇다는 얘깁니다.
파묵인데 전혀 안 그럴 수 있나요, 어디. ㅋㅋㅋㅋㅋ

scott 2021-01-09 21: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팔스타프님
친절한 파묵씨에 ‘눈‘
이달의 당선작
추카추카~

Falstaff 2021-01-09 22:01   좋아요 0 | URL
ㅎㅎㅎ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