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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도라 ㅣ 서문문고 258
막스 프리쉬 지음 / 서문당 / 1996년 9월
평점 :
품절
20세기 스위스가 자랑하는 두 극작가가 있었으니 막스 프리슈와 프리드리히 뒤렌마트. 뒤렌마트가 프리쉬보다 열 살 아래인데 일 년 먼저 숟가락 놨다. 프리시가 초상집에 문상을 갔다고 치고, 그랬으면 뒤렌마트의 영정에 절을 두 번 반 했을까, 안 했을까? 그렇다. 나이 일흔 넘으면 형 아우는 입관 순이다. 지가 나이 좀 많다고 절 안 하고 배겨? 그지? 근데 'Max Frisch'의 표기를 보면, 고려대학 출판부와 책세상은 ‘막스 프리쉬’, 문학동네는 ‘막스 프리슈’, 이번에 읽은 서문당은 ‘막스 프리시’. 이거 작은 문제 같아 보이지만, 검색할 때 문제가 생긴다. 어떻게 같은 표기를 할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여태까지 프리쉬의 작품이라고는 소설만 읽어봤다. <몬타우크>, <나를 간텐바인이라고 하자>, <슈틸러>, 이렇게 세 편. 솔직히 이번에도 ‘막스 프리쉬’라는 이름만 가지고 책을 선택해서 <안도라>가 희곡인줄 모른 채 책을 폈다. 오, 어쨌거나 이래서 내가 프리쉬의 희곡을 읽게 되는구나. 기분이 괜찮았다. 나는 프리쉬의 책을 선택한 순간, ‘읽는 재미’는 일단 포기한다. 처음 경험했던 <몬타우크> 한 편을 읽은 다음부터 내내 그랬다. 이 책도 마찬가지다. 주제부터 묵직하다. 20세기 초중반에 있었던 유대인 학살을 다루었다.
‘안도라’는 가상의 작은 도시. 마치 폴란드나 체코를 염두에 둘 수 있으나, 작가 스스로가 사건이 일어난 곳 ‘안도라’는 사실상의 어떤 국가와 아무 관련이 없으며, 악의 상징으로 등장하는 ‘검은 나라’의 유니폼도 과거 어느 특정적인 사실(나치에 의한 학살)을 상기시키면 안 된다고 했단다. 이렇게 말함으로써 작가는, 작품 속 안도라에서 일어났던 일(유대인 처형)은 세계의 어느 곳에서나 일어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굳이 대상을 유대인에 국한할 필요도 없는 것. 1923년 9월 1일, 일본의 간토, 시즈오카 등지에서 발생한 대 지진으로 엄청난 재해를 당하자 일본인의 분노는 엉뚱하게 재일조선인이 우물에 독을 탔다는 유언비어로 확장되어 닥치는 대로 조선 사람을 색출해 꿰어 죽인 사건이 발생했으며, 근 백 년이 지난 2020년 5월 25일에도 미국 미네소타주 미니애폴리스에서는 건장한 백인 경찰이 무장하지 않은 흑인 청년 조지 플로이드의 목을 무릎으로 눌러 직실해 죽게 했다.
이런 점에서 <안도라>는 시대와 공간을 초월한 정치적 가치를 지닌 작품이라고 상찬해도 무난하리라 생각한다. 그러나 크게 기대하지는 마시라. 앞에서 말했듯이 프리쉬의 작품 속에서 ‘읽는 재미’를 구하는 건 나무 위에서 생선을 따는 것만큼 쉽지 않으니.
작지만 아름답고, 평화스럽지만 약하고 가난한 도시 안도라에 비교적 진보적인 성향을 가진 ‘캔’이란 이름의 교사가 있었다. 이이는 젊은 시절 자신의 신념과 정의라고 믿는 가치에 반하게 쓰인 교과서를 박박 찢어버리는 등의 과격한 행위가 시민들에게 알려질 만큼 나름대로 이름이 난 남자였다. 이이가 도시를 벗어나 공부에 매진하던 젊은 시절에 매우 예쁘게 생긴 아가씨와 사랑에 빠져 그만 아이를 낳게 되고 말았다. 그러나 ‘완고한’ 작은 도시 안도라에 아가씨와 갓 낳은 아들을 데리고 올 만큼의 강단이 있는 것은 아니어서, 저 검은 군대한테서 가까스로 살려낸 유대인 아이라고 소개하며 자신이 아들 삼아 키우겠노라 동네 사람들에게 일러두었다. 당시에 이런 행위는 시민들에게 ‘장한 일’로 칭찬을 받을지언정 조금도 손가락질을 받을 만하지 않아, 이름을 ‘안드리’라 지은 아이는 안도라에서 무럭무럭 자라 벌써 스무 살이 되었다. 그리고 20년 동안, 시절이 변했다.
이제 저 너머 검은 군대가 쳐들어오면, 그들이 유대인들을 말뚝에 묶어놓고 목에다 총을 쏴서 죽인다더라, 하는 소문이 돌면서 여태까지 아무렇지도 않게 지냈던 이웃들의 시선이 달라진다. 그렇다고 지금껏 유대인 고아소년 의붓아들이라고 말해왔던 것을 사실은 자신의 친 아들이라고 말할 수 없어 진퇴양난에 빠진 진보적 교사 캔은 터지는 가슴을 식히기 위해 날이면 날마다 주점에 들러 떡이 되도록 술을 마시고 사람들에게 닥치는 대로 고함을 치며 어리석은 소리만 해댄다. 그러나 교사는 아직까지 정말로 자신의 마음을 뒤집어 놓을 충격적인 일 하나를 모르고 있는 상태. 여기까지 온 거, 다 말해버리겠다. 스무 살 안드리가 교사의 합법적 배우자이자 지금 함께 살고 있는 아내가 낳은 딸 바르플린과 사랑하는 사이이며 더구나 결혼을 약속해 가벼운 애무까지 진도가 나갔다는 사실.
아들과 딸이 서로 사랑해 결혼을 처음 생각했을 때, 자신들이 피는 섞이지 않았지만 법적으로 남매 사이라는 것을 떠올려 좌절한 나머지 독초를 먹고 죽을 생각까지 했을 때, 바르플린의 엄마가 이를 알고 걱정하지 말라고, 안드리는 사실 저 너머에서 아빠가 데리고 온 유대인 아이를 키운 것이니 너희들은 결혼할 수 있다고 말해준 덕분에 지금 큰 희망 속에 살고 있다는 것.
그러거나 말거나 이웃들이 안드리를 바라보는 시선은 날이 갈수록 이상하게 변해간다. 그쪽에 재능이 있어 목수가 되고 싶어 하는 안드리의 희망을 이루어주고 싶어 하는 교사는 목수에게 도제로 받아달라고 부탁하지만 목수는 엉뚱하게도 대가로 현금 50 파운드를 요구한다. 이건 정말 돈을 바라서가 아니라 안드리, 즉 유대인을 도제로 받아 나중에, 검은 군대가 쳐들어온 후에 복잡한 일에 연루될 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아예 아이를 도제로 받지 않겠다는 뜻임을, 이때까지는 교사로 알아채지 못해 기어이 자기 땅의 일부를 팔아 돈을 댄다. 그럼 지금 하는 일은? 의붓아버지이자 친부이기도 한 교사가 날이면 날마다 술 퍼마시는 식당의 보이로, 팁을 받을 때마다 주크박스에 넣고 음악을 듣는 일에 몰두하고 있다. 중간쯤으로 가면 목수의 도제로 들어가 곧잘 가구를 만들지만 목수의 엉뚱한 평가를 받고 좌절하기도 한다.
식당 주인, 목수, 말로만 용감하고 실제로는 비겁하기 짝이 없는 군인, 의사, 견습생 등등이 안드리를 보는 시각이 점점 외로 꼬아지는 상태에서 결정적으로, 사실 진정한 안도라 사람인 안드리를 유대인으로 만들어 놓는 인물이 등장하니 동네 가톨릭 신부다. 그는 안드리를 성당에 불러, 천주님은 안드리를 유대인으로 태어나게 했으며, 안드리가 스스로 유대인이란 걸 인정할 때 세상을 향해 비겁하지 않게 된다는 걸 확신시킨다. 즉, 빼도 박도 못하게 안드리를 진짜 유대인으로 만들어 버리는 것.
작품은 시작할 때부터, 한 챕터가 끝날 때마다 특정 발언자가 등장해, 이미 처형되어 죽은 안드리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즉 관객/독자는 결론을 아는 상태에서 어떻게 안드리가 유대인이 되었으며, 시민들로 하여금 소외를 받게 되었는지를 냉정한 방식으로 알게 만든다. 안드리와 바르플린의 사랑마저도 안드리를 유대인으로 아는 이웃 때문에 깨지게 되지만, 그의 장래희망, 정체성, 심지어 죽음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에 자신들은 책임이 없다고 발언하는 이웃들, 이들을 독자는 만나게 된다. 이건 거꾸로 유대인, 또는 1923년 관동지역에서의 조선인을 학살한 나치 독일과 전체집단 일본인들만의 죄가 아닌 모든 사람들의 포괄적인 책임이라는 것을, 막스 프리쉬는 선언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