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인생책

 인터넷 친구가 어느 날, 내게 있어 어떤 것이 인생책이며, 어떤 문장이 인생문장이냐고 물었다. 흠. 인생책. 인생책이란 것이 머리 속에 도사리고 있다가 단박에 나오지 않더라. LDT, 레르몬토프, 도스토예프스키, 톨스토이로 이어지는 러시아 작가들, 이에 못지 않는 영어, 프랑스어, 독어권 거장들. 세르반테스를 필두로 라틴 아메리카까지 아우르는 스페인, 포르투갈 언어권 작품들. 게다가 인생책, 자신이 여태까지 살면서 가장 감명깊게 읽은 책이란 뜻 비슷하리라 생각하는데, 그건 때에 따라, 처한 상황에 따라 변하기도 하리라. 철조망 있지? 그걸 왼쪽 관자놀이로 집어넣어 오른쪽 관자놀이로 뺀 다음 누군가가 양쪽을 두 손으로 잡고 뱅뱅 돌리는 것 같은 기분. 철조망? 철조망, 하면 생각나는 작품이 있으신가? 철조망에 눈알이 걸린 채로 죽어간 인간, 누혜. 그를 만들어낸 작가 장용학. 아주 예전에 신구문화사라는 출판사가 있어(검색해보니까 지금도 있다!), <현대한국문학전집>을 내놓았고 그 가운데 네 번째 책이 "장용학"이다. 1965년 출간. 모두 스물 몇 권의 책으로 되어 있으며 소설과 시를 망라했다. 이 책을 생각하면 슬프다. 집안이 거덜이 나 가족 해체를 당하는 와중에 친척집 지하 창고에 맡겨둔 정음사 세계문학전집과 이 신구문화사 전집은 10년이 넘는 세월을 당해 심하게 손상되어 기어이 버려야 하는 상황에 처했는데, 이 가운데 "최인훈"과 "장용학" 두 권만큼은 절대 버릴 수 없었다. 쥐똥을 까맣게 뒤집어 쓴 지하실에서 발견한 장용학. 바싹 말라 순식간에 바스스 헤질 것 같은 책을, 스카치 테이프로 붙혀가며, 그 후 네 번을 더 읽었다. <원형의 전설>. 인생책을 찾는 일. 그건 내 가슴 속에 묻어버려 이젠 더 이상 남들에게 보이고 싶지 않은, 거의 아문 상처를 다시 내보이는 일이었다는 걸 미쳐 몰랐다.

 

 

 책에는 <원형의 전설>과 중편 <비인탄생>, <역성서설>, 단편 <요한시집>, <현대의 야>, <상립신화>가 실려있으며, 여태까지 발표한 모든 장용학 평론 가운데 가장 훌륭하다고 일컬어지는 김현의 해설 <에피메니드의 역설>이 들어있다. 한자를 배우지 않으신 분들은 이 책을 읽을 생각조차 못할 것이다. 조사를 뺀 나머지 거의 모든 단어가 한자로 되어 있어서. 이후 두산출판에서 같은 목차로 완전히 한글로 바꿔 출간한 적이 있는데, 희한도 하지, 난 도무지 읽지 못하겠어서 술친구 줘버렸다. 몇 번 이야기한 가톨릭 환자 증세가 농후한 술친구. 그이는 무지하게 재미있게 잘 읽었단다.
 장용학은 환자였다. 무학여고 국어교사로 정년퇴직한 것으로 기억하는데, 97년이던가, 문학잡지에 마지막 인터뷰가 실렸다. 자신이 아직도 작가, 소설가로 불리는 걸 싫어했다. 이제 글을 쓰지 못하는데 무슨 작가며 소설가인가. 그는 이렇게 반문했다.

 


2. 인생문장
 숱한 문장 가운데 하나를 고른다. "희망을 가진 사람은 불행하고 희망을 가지지 않은 사람은 더 불행하다." 젊은 시절의 정호승이 쓴 시에 나온다. 이젠 비록 시 쓰는 기계에서 고치에서 실 뽑듯 비슷한 시를 가공 생산하는 업자지만, 젊은 시절 괜찮은 서정시인이었다. 이거? 아니. "이미 죽어버린 내 몸뚱이 위로 누군가 유유히 오줌을 갈기고 떠나갔어." 최승자의 처녀시집 <이 시대의 사랑>에서 나온 문장인데 꽤 근사하다. 이거? 이것도 아니다.
 대학에 입학했다. 당연하게 서클, 요즘엔 동아리라고 불리는 서클에 가입을 했다. 내가 활동하던 서클 바로 옆에 "철학연구회"가 자리하고 있었다. 그리 크지 않아 개방공간을 캐비닛으로 분리를 하고 지내던 시절이었다. 모두 가난한 시절이었다. 요새 학생들은 이해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철학연구회 캐비닛에, 이후 몇 십 년이 지나 이젠 내 카톡 소개말에도 적혀 있게되는 인생문장이, 멋진 그림과 함께 쓰여 있었다.
 "진로眞露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정말이라니까. 보실랴?

 


3. 꼴값하는 영숙이
 영숙아, 어쩌려고.... 얘가 드디어 미쳤다. 그제 아침 변기 위에서 알았다. 염병할 계간지 '창피'가 영숙이의 중편소설을 실었단다. 창피도 미쳤다. 정말 개잡종들이다. 영숙이는 누차 얘기했듯이 데뷔작부터 플롯 표절로 시작해 오랜 세월 꾸준하게, 도전정신에 충만해 글 도둑질을 해 온 도둑년이다. 내 말이 비약이나 아마추어의 선입견이라고 생각하면 나무위키에서 검색해보시라. 어마어마하다. 근데 워낙 책이 잘 팔리는, 당연히 문학성 여부는 제쳐두자, 나는 영숙이가 쓴 <기차는 일곱시 반에 떠나네>이후 돈 아까워 절대 얘를 위해 돈을 쓰지 않았으니까, 하여튼 책이 잘 팔리니 백낙천, 글씨 잘 보세요, 낙청이가 아니고 낙천입니다, 낙천, 백낙천이 의붓딸을 삼았는지 어땠는지, 늙은 몸을 이끌고 맨발로 뛰어나와서, 세상 사람들아, 내 위대한 허명을 걸고 말하노니, 영숙이가 어떤 영숙인데 글도둑질을 하겠느냐, 절대 아니다, 라고 했으며, 애초에 그가 발행인이었던 출판사 창피 역시 그게 '문자적 유사성'이지 어떻게 표절이냐고 대한민국 국민과 독자를 정말로 우습게 본 적이 있었다. 그때부터 나는 언젠가 영숙이가 다시 나팔을 불며 "푸르스름한 말 한 필"(요한묵시록 6장 8절에서 인용) 위에 타고 등장할 것이다, 라며 걱정 비슷하게 했었는데, 이것 봐라, 이것 봐. 얘가 사람이야? 창피가 당대 지식인들이 모인 출판사야? 이 상녀러 연놈들이 지금 뭐 하는 짓인지, 뭐 애초에 이럴 줄 알았지만, 막상 당하니까 정말 우습고 가소롭다. 이러니 내가 우리나라에서 나오는 문학작품에 정이 가겠어, 안 가겠어? 영숙이 얘도 이젠 나이도 먹고 했는데, 나이는 항문으로 먹었는지 아직도 철없고, 얌전하지만 버르장머리라곤 아예 없는 열두 살짜리 털도 안 난 아이 같으면 어쩌겠느냔 말이지. 이게 투정 아냐? 뭐라? 작가더러 글 쓰지 말라면 죽으란 얘기냐고? 아니다. 쓰던 말던 관심이 없지만 죽지는 말아라. 써. 안 쓰면 죽을 거 같다며? 그럼 써. 그리고 자비 출판해서 아는 사람끼리 돌려봐. 무대에는 나오지 말라는 얘기다. 어려운 말로 이런 걸 뭐라 그러는 줄 알아? 자숙自肅이란 거다. 죽을 때까지 자숙하라고. 영숙아, 넌 애초에 작가가 아니었어.

 근데 영숙이가 정말 영숙이는 아닌 거 같다고요? 맞습니다. 영숙이 아닙니다. 본래 이름이 있었습죠. 얘가 몹씨 좋지 않은 일을 했거든요. 우리말 문법에 이런 경우에 적용되는 기가 막힌 현상이 있습니다. 다른 나라에선 찾아보기 힘든데요, 혹시 아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초성자음 부끄럼 탈락'이라고. 그래서 이름이 '영숙'이로 바뀐 겁니다.

 

 

4, <분례기>에 관한 슬픈 이야기

 

 <분례기>에, 읽은 다음에 너무 오랜 시간이 지나 정확한지 모르겠지만, 정신지체 부부가 등장한다. 정신지체자도 자신이 약간 모자르지만 비장애인과 똑같이 희로애락을 느끼며 인생을 산다. 그래 부부 사이에 아이가 하나 생기는데 산통이 너무 커서 엄마가 아이를 보기만 하면 눌러 죽이려고 하는 거다. 그래 시어머니가 아이를 키우기에 이르는데, 문제는 퉁퉁 붓는 젖. 아이에게 젖을 먹이지 않으면 젖이 딱딱해지면서 고통스러운 유방통을 겪는다고 한다. 그래 이걸 짜주어야 하건만 어떻게? 이때 같은 정신지체 장애인인 남편이 아이 대신 젖을 쭉쭉 빨아먹는다. 근데 암만해도 밍밍하고 좀 느끼할 거 같지? 남편도 딱 그렇다. 그래 젖을 다 빨아먹은 다음에 충청도 예산 사투리로 아내에게 한 마디 한다.
 "짐치."
 표준어로 하면 '김치'. 이게 구개음화되어 '짐치'로 발음하는 것. 젖을 먹어 느끼한 입을 김치 한 조각 먹어 말끔하게 입가심 하는 장면. 이 얼마나 재미있는가. 그래 이 이야기를 마누라쟁이한테 해주었겠다! 이게 사달. 내 마누라, 가는 곳마다 이 이야기를 하면서 내가 문제의 이 남편이라는 듯이 마구 해댄 거다. 어쩐지 마누라하고 친한 여자들 나 보면 싱글싱글 쪼개는 게 이상하다 했더니, 이런 일이. 하이고 나 참. 쪽팔려 내가 사는 작은 도시에 함부로 나다니지 못한다.
 여기까지면 뭐 그러려니 할 수도 (없지만 굳이 이야기 하자면) 있지만, 작은 아이도 그게 나 젊은 시절 내가 저질렀던 만행인줄로 확신하고, 엄마 말씀이니까 분명히 사실일 거야, 자기 애인한테, 지금은 물론 엑스 걸프렌드지만, 고스란히 다 말해줬단다. 밥 먹다 그 이야기를 들은 나는 밥알을 튀어가며 길길이 뛰었다. 아니라고, 그건 방영웅이란 소설가가 쓴 <분례기>에서 나오는 일화라고. 네 엄마한테 물어보라고. 아이가 엄마 얼굴을 멍하게 바라보니까, 염병할 마누라가 배시시 웃으며, 그게 사실은, 이러더라.
 <분례기> 초판본도 역시 친척 지하실에서 전사해버리고 만다. 그래 새 책을 한 권 구하려 오래 알아봤다가 이제 한 권 발견했다. 6월이나 7월에 읽을 거 같다. 아 썅. 이 책 찍은 데가 출판사 '창피'다. 이 출판사가 환장하겠는 건, 맘에 들지 않으면 안 읽으면 그만인데, 도무지 읽지 않을 수도 없다는 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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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19-05-30 14: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전 장용학 책은 ‘책세상‘에서 나온 <요한시집> 밖에 없는데, 저 한자투성이 장용학 책은 정말 탐나네요. 탐난다고 그 한자를 읽을 자신은 없습니다만. ㅋㅋㅋ

그나저나 영숙이 ㅋㅋㅋㅋㅋㅋㅋㅋㅋ 백낙천ㅋㅋㅋ 창피 ㅋㅋㅋㅋㅋㅋㅋ 분노를 웃음으로 승화하셨군요. ㅋㅋㅋㅋ

Falstaff 2019-05-30 15:20   좋아요 0 | URL
ㅋㅋㅋ 웃으면서 읽으셨다니 저도 좋습니다.
저 한자투성이 신구문화사 전집의 ˝최인훈˝ 편에 실린 <광장>도 디테일이 문지에서 나온 것하고 좀 다릅니다. 이래저래 굉장히 귀한 전집으로 변신해서 신구문화사의 대표적 과거 업적으로 승격했더군요. 최악의 보관상태라서 버릴 수밖에 없었지만 지금은 생각날 때마다 아주 절통입니다.

syo 2019-05-30 23: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세로쓰기다..... 사진에서 굉장한 위엄이 느껴집니다.

요며칠 영숙이 사건에 관한 많은 글들을 읽었지만, 그 글들은 이제 하나도 생각나지 않습니다. ‘초성자음 부끄럼 탈락‘이라니. 으아아아아아아아(‘으하하하하하하‘의 초성자음 포복절도 탈락)

Falstaff 2019-05-31 09:33   좋아요 0 | URL
게다가 두 줄 세로쓰기랍니다. 그래 두껍지 않은 책에 많은 분량을 실을 수 있던 것이지요. 글씨가 너무 작아 이젠 읽지 못해요. ㅠㅠ

ㅎㅎㅎ 재미있으셨나봅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