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개월에 한 번 씩 이런 추천 비슷한 글을 올리는데, 올해 첫 3개월은, 허허허, 경사로 좀 바빴습니다. 정초부터 아이 이름 하나를 지어 주었고, 이달 말에는 큰애 잔치를 무사히 치뤘습니다. 그래 이래저래 바쁜 관계로 아무래도 읽은 책이 많지 않습니다. 권 수로 55권, 편 수로 51편을 읽었군요. 이 가운데 서재 친구와 하필이면 제 알라딘 서재에서 걸음을 쉬어가시는 분들께 추천할 만한 책을 골라봤습니다. 순서는 제가 읽은 날짜 순입니다. 조금이나마 읽는 분들의 독서생활에 도움이 되면 보람이겠습니다.



1. 윌리엄 스타이런, <소피의 선택>

 

아우슈비츠에서 생존한 여인 소피와 광기어린 천재를 지닌 유대인 남자 네이선. 둘의 광적인 사랑은 깊숙한 비밀을 은폐하는 '필연적 거짓'의 위에서만 이루어질 수 있다. 그리하여 이들은 사랑조차 절망. 그만큼 절대적인 사랑은 날이 갈수록 더욱 깊은 우울과 체념과, 이젠 더 이상 숨길 수 없는, 은폐해온 진실을 짊어져야 하는데, 결국 이들 사랑의 종착점은 어디일까.



2. 조르주 페렉, <어느 미술애호가의 방>

동네 양아치 형의 외모를 가진 유대인 작가 조르주 페렉이 입심을 다 해서 만든 한 편의 큰 구라. 70명의 부자가 가진 것보다 더 큰 부를 소유한 독일 출신 미국 이민자 헤르만 라프케. 그가 미국의 독일 주간German Week을 위해 자신의 초상화를 그리는데 배경을 빼곡 채운 자신의 콜렉션을 보란 듯이 과시하기에 이른다. 위대한 컬렉션들은 관객들에게 은밀한 합창을 들려주니,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3. 세르게이 도브라토프, <여행 가방>

 

소비에트에서 쫓기듯 망명길에 오를 당시 세관에서는 세 개의 여행 가방만 허락할 뿐이었음에도, 작가는 겨우 하나의 가방밖엔 챙길 것이 없었다. 하여간 미국에 도착해 어언 20년 가까이 흘러 새로 생긴 말썽쟁이 아들이 벌을 받느라 벽장 속 가방 위에 앉아 있는 바람에, 드디어 처음 열어보게 된 것. 속에는 소련 시절에 애지중지 했던 몇 가지 물건들이 들어 있고 이들마다 독특한 풍자와 허풍과 객기가 반짝거리는데.



4. 치누아 아체베, <사바나의 개미 언덕>

 

영국이 물러가 해방이 됐다고 해도 진정한 피식민은 끝나지 않은 것. 대책없이 주어진 해방을 맞은 아프리카 가상국에서 벌어지는 해방의 후유증과 반half식민의 상징적 체제인 독재 정권의 등장. 지식인들은 독재에 저항하거나 빌붙어야 하고, 인민들은 누백년 이어온 자신들의 정서와 독재 정권의 이해에 따라 갈등을 맞아야 하는데, 이걸 신생국가의 성장통이라고 가비얍게 누가 말할 수 있겠는가. 아체베의 팬이라면 놓치지 않아야 할 책.



5. 조너선 스위프트, <걸리버 여행기>

 

이 책이 아동들을 위한 동화라고? 천만의 말씀. 이 여행기는 해가 지지 않는 나라, 대영제국의 실체에 대한 신랄한 풍자다. 소인국과 대인국, 도덕적인 말horse들의 나라 등 네 번의 행해를 하면서 걸리버는 두 페이지에 한 번씩 영국과 유럽의 문화와 정치체제와 귀족들의 이면을 날카롭게 헤쳐가며 비틀어버린다. 다만 18세기 소설이라 읽기에 익숙하지 않은 분들은 조금 지루할 수도 있을 터.



6. 쥘리앵 그린, <잔해>

 

소심한 인간의 저 깊숙한 형질 속에는 무엇이 들어 있을까. 키가 크고 건장하며 잘생긴 필리프. 결혼 첫날 밤의 침상에서 갑자기 높은 소리로 홍소를 쏟아내더니 딸꾹질을 시작하는 아내. 이후 아들을 낳고 부터는 전혀 한 자리에 든 적이 없는 건조한 부부. 이들 사이에 끼어든 한 명의 여인이 있으니 처형. 아무것도 결정하지 못하는 부유한 남자의 찌질함도 때론 소설의 매력적인 소재가 되기도 한다.



7. 니코스 카잔자키스, <그리스인 조르바>

 

드디어 출간한 그리스어 직역. 세 번째 읽은 <그리스인 조르바>. 주인공 조르바가 60대 노인이어서 그런가, 이 책은 나이가 들어 읽으면 더욱 좋다는 결론. 스스로 조르바의 팬이었던 고 이윤기 선생도 결국 못보고 갔지만 직역한 유재원 번역본이 나왔다는데 만족하리라 믿는다. 여태까지는 읽어보지 못한 프롤로그가 붙어 있는 것도 신기했다. 앞으로 그리스어-불어-영어-한국어 번역의 이윤기 본 <그리스인 조르바>는 잊으시라.



8.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백년의 고독>

 

이 책 역시 조주호에 의한 스페인어 직역이 나왔다. 만연체 문장을 될 수 있는대로 문장 본래의 맛을 느낄 수 있게 번역한 것이, 나는 진짜 좋던데, 일부 독자들에겐 해독상 어려움을 줄 수도 있겠다 싶다. 그러나 나는 이 책으로 <백년의 고독>이 정말로 빼어난 명작이란 확실한 동감을 표할 수 있었다. 마르케스가 만든 필생의 고향 마꼰도에서 벌어지는 부엔디아 일가 이야기, 정말 재미있다.



9. 존 파울즈, <만티사>

 

재미있다가 한 순간의 변주로 철학적 사변으로 넘어가는 소설. 주인공 마일스 씨는 자기가 마일스 그린인지 마일스 데이비스인지도 모를 기억상실증에 빠져 있는 환자. 놀랍게도 기억을 관장하는 뇌기관이 생식을 담당하는 중추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구라를 침으로 해서 소설의 전반부는 여간한 강심장이 아니라면 내놓고 읽기 힘들게 만드는데, 후반으로 가면? 상황 역전. 쉽게 읽히지도 않아 자신의 무지몽매를 한탄할 수도 있으니 주의할 일.



10. V.S 나이폴, <도착의 수수께끼>

나이폴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만든 작품. 그저 서인도 제도의 작은 섬 출신으로 별 재미없는 성장소설 쓰다가 운좋게 노벨문학상을 받은 인물인줄 알았다가, 화들짝 놀랐다. <미겔 스트리트>를 떠나 이제 코스모폴리탄 영국의 런던에 도착해 학교를 다니고, 글을 쓰고, 필명을 얻어 이제 스톤 헨지가 바라다보이는 시골에 정처를 정할 때까지 과거와 현재를 넘나들며 자유로운 글쓰기를 시도하는데, 자연을 바라보고 묘사하는 것을 감상하는 일이 이렇게 즐거울 수가 있을까.



11. 다니엘 페낙, <산문팔이 소녀>

 

솔직히 다른 작품에 비해 좀 떨어지는 품질이다. 당연 내 생각으로. 하지만 비교할 수 없이 탁월한 건 재미있다는 면. 일찍이 <몸의 일기>를 통해 청소년 시절부터 늙어 명이 다할 때까지 자신의 몸이 어떻게 기능하는지를 일기형식으로 쓴 전작을 생각하고 읽었다가 갑자기 프랑스판 누아르 소설을 읽게 되어 당황스러웠는데, 아이고, 당연히 억지와 무리가 뒤따르지만 정말 재미있어 그런 거 다 용서가 되는 거, 이거 이해하시겠지?



12. 호르헤 볼피, <클링조르를 찾아서>

 

가상의 수학자 구스타프 링스를 등장시켜 20세기 중반의 유럽에서 벌어진 과학과 수학의 발전, 물리학자들에 의하여 진행되던 핵폭탄 제조 과정을 둘러싼 미스테리를 설명하게 구성된 첩보 소설. 링스 박사가 나치에 의하여 반역죄를 적용받아 분명히 사형 선고를 받을 찰나, 연합군의 폭격으로 건물 지붕이 무너지며 벽돌이 떨어지면서 판사의 해골을 쪼개는 덕분에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은 인물. 이제 원자탄 기술이 소련 연방으로 전해지려는 위험천만의 시절에 진짜 스파이는 누구일까. 궁리하지 마시라. 읽기 전엔 절대 알 수 없을 터이니.



13. 리처드 포드, <독립 기념일>

 

지난 삼 개월 동안 제일 재미있게 읽은 책. 전처와 전처의 남편이 자기 아이들 둘과 살고, 자신은 일정 기간에 한 번의 만남만 허락되는 이혼남 프랭크 배스컴. 이이가 독립기념일 연휴를 맞아 문제아 맏아들 폴과 함께 농구, 야구 명예의 전당을 찾아 길을 떠나는데, 당연히 우여곡절이 있어 재미있는 장편소설 한 편을 쓸만한 이야기 거리가 생긴다. 아들 폴로 말하자면 부적응증이 심해 매사 삐딱한 전형적 반항기 청소년. 오랜만에 만난 아버지와 아들의 험난한 연휴 보내기란?



14. 아리엘 도르프만, <블레이크 씨의 특별한 심리치료법>

 

친환경 기업정신과 윤리경영을 모토로 한 거대기업의 회장 블레이크 씨. 이이한테 난데없이 닥친 불면증. 이를 다스리기 위해 심리치료를 선택하는데, 있는 게 돈이니, 한 가정에 온갖 소형 CCTV를 설치해 가족의 일거수 일투족을 다 관찰할 수 있는 관음과, 돈을 매개로 해서 해당 가족의 행운과 불행을 조절할 수 있는 가히 신적 인간으로 등극하는 블레이크 씨. 무엇보다 역자 김영미가 번역한 한국어 문장에 대한 기억이 특별했던 책.



15. 미셸 오스트, <밤의 노예>

 

책 읽기를 마칠 때까지 절대 뒷표지에 쓰인 출판사 책소개를 읽지 마시라. 그것만 피해가면 당신은 참 좋은 소설 한 편을 감상할 수 있으리니. 내가 간직했던 우상, 책의 주인공 필립에게는 자신의 아버지인데, 우상이라 함은 그냥 내버려두고 마음 속에서만 자꾸 확장을 하게 해주어야지, 정말로 우상을 찾아 실체를 발견하면 누구든지 일정량의 우러름이 깎일 수밖에 없을 것. 이런 것이 재미있는 일화와 함께 등장해 재미를 더욱 배가시킨다.



16. 블라디미르 니콜라예비치 보이노비치, <병사 이반 촌킨의 삶과 이상한 모험>

 

붉은 군대의 제대 말년, 그러나 지독한 고문관 이반 촌킨. 그가 시골 한 구석에 불시착한 1차 세계대전 당시 사용하던 고물 복엽 비행기를 지키라는 보초의 명령을 받고 도착한 자리 바로 옆에는 숫처녀 뉴라 벨라쇼바가 혼자 농사를 지으며 살고 있었으니, 이미 배경부터 교통사고가 예약되어 있었음은 물론이다. 당시 붉은 군대와 농민들이 얼마나 어처구니 없었는가 하는 촌철살인적 농담과 재담들. 후회하지 않으리.



17. 너대니얼 호손, <일곱 박공의 집>

 

욕심많은 유력가가 원래부터 터를 잡고 살던 목수를 마법사로 몰아 종교재판 끝에 목매달아 죽이고 집터와 샘을 빼앗아 그 자리에 박공이 일곱 개에 달하는 지역의 랜드 마크 저택을 지으니 바로 일곱 박공의 집. 목수는 죽어가며 신은 저자에게 피를 마시게 할 것이라고 저주를 퍼부었고, 유력가는 의자에 앉은 채로 넓은 넥타이에 많을 피를 쏟은 채 죽어 있는 상태로 발견된다. 두 집안에 오랜 세월을 걸쳐 내려온 저주와 복수. 이것은 어떻게 해소가 될지.



18. 허먼 멜빌, <허먼 맬빌 : 선원, 빌리 버드 외 6편>

 

양심적인 단편선. 다른 출판사에서 찍었으면 족히 세 권의 얇은 단행본으로 만들었을 듯. 총 일곱 편의 중단편이 들어 있다. <바틀비>와 <선원, 빌리 버드>를 읽기 위해 샀다가, 그것들은 물론이고 <꼬끼오, 혹은 고귀한 수탉 베네벤티노>도 재미있게 읽었다. 인류 문화유산으로 남을 <모비딕>을 쓴 작가가 중단편에서도 이리 흥미로운 시도를 했었다는 것도 인상적이었다.



19. 주나 반스, <나이트 우드>

 

여성 퀴어 소설. 아마 레드클리프 홀의 <고독한 우물> 이후 8년만에 발간한 두 번째 여성 퀴어일 듯. 여성 뿐만 아니라 남성간 동성애도 이제 새로운 소재가 되지 못하니 새삼스레 그런 방면에 관심을 둘 필요 없고, 딱 하나, 예스럽고 화려한 문장에 방점을 두어 감상하는 것도 매우 좋은 독서법이 될 것. 독자는 이 작품 역시 젊은 역자 이예원의 노고에 감탄하게 되리라.



20. 에리히 마리아 레마르크, <개선문>

 

40년이 넘어 재독한 인생책.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전 1년을 파리를 무대로 독일 출신 의사 라비크와 삼류 여배우 조앙 마두의 사랑과 복수를 그린 작품. 작가 스스로 나치의 등장과 더불어 망명길에 올라야 해서 라비크의 묘사가 더욱 충실해질 수 있었을 터. 역시 반전문학 하면 레마르크. 이제 그의 또다른 망명소설 하나를 보관함에 두고 있으니 늦어도 6월엔 읽을 거 같다. 안개낀 11월의 새벽, 파리 센 강의 우울. 이것 하나만 가지고도 <개선문>을 읽을 이유가 되리라.



21. 트루먼 커포티, <풀잎 하프>

 

반나절이면 계산 다 될 짧은 장편. 그럼에도 성장소설이 품고 있는 아스라함을 어찌 이리 잘 표현할 수 있을까. 어린 나이에 천애 고아가 된 '나'와 두 명의 당숙아주머니들. 이들과 함께 사는 늙은 흑인 하녀 캐스린. 이야기가 확장됨에 따라 등장하는 아들 둘로부터 소외당한 홀아비 옛 지역 판사, 어려서부터 정신 이상인 어머니에게 혹독한 훈육을 받고 자란 젊은 가장. 이들이 서로 연대하여 서로를 위무하고 어려움의 시절을 관통하며 성장하는 광경이 사람의 가슴을 띵, 하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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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극곰 2019-04-01 10:4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감사합니다.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라는 상투적은 댓글이지만, 진심이랍니다. ^^

Falstaff 2019-04-01 10:50   좋아요 0 | URL
고맙습니다. 좋은 표현을 많은 사람들이 쓰니 ‘상투적‘이 됐겠지요. ^^

싱클레어 2019-05-12 22: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조만간 민음사패밀리데이에 가서 담아 올 쇼핑 목록을 적고 있는데 도움이 많이 되었습니다. 레마르크 소설은 저도 정말정말 좋아하는데 <개선문>은 이번에 이벤트로 받았습니다. 치누아 아체베의 작품도 좋아하는데 <사바나의 개미 언덕>, <소피의 선택> 참고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Falstaff 2019-05-13 09:15   좋아요 0 | URL
책 선택에 도움이 되면 저도 참 즐겁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