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먼 멜빌 - 선원, 빌리 버드 외 6편 현대문학 세계문학 단편선 17
허먼 멜빌 지음, 김훈 옮김 / 현대문학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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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멜빌의 중단편집.
 그래 책은 이렇게 만들어야 하는 거다. 이 책에 실린 두 번째 작품 <베니토 세레노>가 132쪽, 마지막 <선원, 빌리 버드>가 128쪽. 엔간한 출판사에서 이 분량이면 넉넉히 세 권은 만든다. 기막힌 편집으로 페이지 수 팍팍 늘려가며. 저번에 윌리엄 트레버에서 잠깐 거론했는데, 앞으로 외국 단편집을 고를 땐 현대문학의 ‘세계문학 단편선’을 제일 먼저 고려하기로 결심한 바 있다. 그리하여 허먼 멜빌을 이번에 읽었으며, 몇 주 후에 진 리스의 단편집을 또 읽을 예정이다. 몇 달 후엔 윌리엄 포크너, 그레이엄 그린 단편집도 일단 골라놓았다.
 멜빌의 단편집에서 기대했던 건 역시 아직도 읽지 않고 버텼던 <바틀비>와 <선원, 빌리 버드> 두 작품. 책의 첫 번째와 마지막을 장식하는 두 중단편이다. 읽어보니 이 두 개하고 두 번째 작품 <꼬끼오! 혹은 고귀한 수탉 베네벤타노의 노래>도 재미있었다.
 멜빌의 생몰이 1819~1891년. 당대로 치면 일흔두 살까지 살았으니 장수한 편이지만 일생을 그리 재미있게 보내진 못한 거 같다. 쓰는 글은 절대 안 팔리고, 심지어 인류문화유산으로 지정해야 마땅한 걸작 <모비딕>은 서점에서 수산업 관련 코너에 쑤셔 박히는 지경을 당했을 정도였으며, 큰 아들은 자살 비슷하게, 둘째 아들은 폐결핵으로 먼저 보내야 했고, 온갖 불행에 점점 우울증은 심해지는 와중에도 먹고 살기 위해 세관원으로 근무해야 했으니 거참. 그렇다고 초년 운이 좋았던 것도 아니어서 일곱 살에 성홍열에 걸려 평생 나쁜 시력을 가져야 했는데, 아버지가 사업을 하느라 온갖 동네에서 빚을 얻어 쓰다가 일찍 저 세상으로 가는 바람에 열세 살부터 식구 부양을 위해 잡일을 전전해야 했단다. 그러니 사람이란 건 어쨌거나 사주팔자가 중요한 거다. 생각해보라. 같은 인간이긴 하지만 당신 팔자가 좋겠어, 이건희 씨 외아들 팔자가 좋겠어.
 멜빌은 안 좋은 별자리를 타고 태어나서 그렇다 치고, 존 클래거트라고 하는 선임위병 부사관이란 인간은 뭐야?


내가 살아생전 한 번도 갖추지 못했던
아름다움, 용모, 선함!
난 나면서부터 타락의 세상 속에서만 살았어!
그 속에서 찾은 평화는 지옥의 율법 위에 있었다고.....
벨리포텐트 호의 선임위병 부사관, 나 존 클래거트는 권력을 가지고 있단 말이다.
반드시 널 파멸시키고 말리라!

 

화질은 별로지만 당대의 보탄이었던 제임스 모리스의 노래로 골랐다.


 무대는 18세기 말, 혁명 후 5인 집정관이 이끄는 프랑스 해군과 대치상태에 있는 지브롤터 부근의 영국 전함 벨리포텐트 호. 전임 부사관이 노령으로 은퇴를 하고 새로 마흔 살이 넘은 선임위병 부사관이 배를 탔는데, 이 인간이 어찌 된 일인지 아름다움과 선함만 봤다하면 알레르기 현상이 벌어진다. 프랑스의 인권과 자유사상이 들어오는 걸 바라지 않았던 영국 왕실과 귀족, 부르주아들은 집정제를 택한 프랑스와 한 판 전쟁을 벌이기 위해 마구잡이로 징병을 해, 불만에 가득 찬 젊은이들을 육군과 해군에 배치하기에 이르고, 포화상태에 이른 징병자들이 두 번에 걸쳐 해상반란을 일으킨 뒤끝이다. 이런 시기에 하필이면 클래거트 같은 인간이 있는 전함에, 잘생기고 천성이 선하고, 그냥 서 있기만 해도 주변이 화목해지게 되는 그런 청년 빌리 버드가 오르게 된다. 사건이 터지지 않을 수 없는 환경이 마련된 것.
 선임위병 부사관이란, 예전 말로 군대의 군기를 담당하는 부사관. 유럽에서 화약무기를 쓰기 전엔 뭐 칼이나 단도 같은 무기 사용법을 가르쳐주는 일을 했지만 18세기 말 영국해군의 주력무기는 16세기 말의 조선처럼 경쟁국과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우월한 대포였다. 그래 선임위병 부사관이란 이제 별로 할 일이 없어서 지나가는 사병들 세워놓고 단추를 목까지 채웠네, 안 채웠네, 흰색 바지에 줄이 제대로 잡혔네, 안 잡혔네, 이따위를 따지면서 해당 병사한테 엎드려뻗쳐, 일어나, 엎드려뻗쳐, 일어나, 앞으로 취침, 기상, 뒤로 취침, 어 이거 동작(반 박자 쉬고) 봐라, 뒤로 취침, 앞으로 취침, 자동, 이따위 짓이나 하면서 국민들 세금이나 축내고 있는 작자였단다. 그러니 클래거트도 나름대로 자만심이 상할 대로 상했을 수 있었겠지. 그러나 멜빌이 주장하고자 하는 건 그런 자격지심이 아니라, 혈관을 타고 흐르는 선함에 대한 본능적 거부. 선과 악이 특정 환경 아래에서 부딪혀 어떻게 결말을 맺는지에 관한 탐구다.
 <모비딕>을 쓴 세관원 멜빌답게 장황한 서술을 동반하지만 인간 본성에 관한 집중적인 모색을 시도한 <선원, 빌리 버드>는 세월이 흐르더라도 언제나 읽어볼 가치가 있는 작품이다. 벤자민 브리튼이 작곡한 오페라 <빌리 버드>의 원작인데, 두 가지가 원본과 다르니 ① 빌리가 탄 배 이름을 인도미터블Indomitable 호로 바꾸었고, ② 용감하고 현명한 함장 비어 대령의 노년이 완전히 다르다. 어떻게 다른지는 뭐 아셔도 그만, 모르셔도 그만이긴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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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19-03-14 09:5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현대문학 세계 단편선 가격대비 정말 훌륭한 책입니다. 웬만한 단편집에 있는 작품들은 다 수록되어 있고요. 번역질도 괜찮은 편이고... 전 이 시리즈 거의 다 갖고 있는데, 재미나게도 멜빌 단편선은 안 샀어요. ㅋㅋㅋ <필경사 바틀비>를 다른 책으로 읽은 터라 그랬나봐요. ㅎㅎ

Falstaff 2019-03-14 10:16   좋아요 0 | URL
예. 전 <윌리엄 트레버>로 이 시리즈를 읽기 시작했는데, 와, 다른 출판사에서 찍었으면 그 책도 아마 세 권은 넉넉하게 나왔을 겁니다. 참 좋은 시리즈예요. 진작 알았으면 좋았을 것을 말입니다.
전 포크너가 잠자냥 님하고 비슷한 이유로 갈등 중입니다. ㅜㅜ

잠자냥 2019-03-14 10:51   좋아요 0 | URL
포크너 이 양반, 참 넘어서기 어려운 양반이긴 해요. 포크너 단편집도 몇 작품만 읽고 일단 모셔두고 있어요. 이 양반은 단편도.... ㅋㅋㅋㅋㅋㅋ <소리와 분노>도 읽다 말았는데, 언젠가는 꼭 전작을 다 읽어야 할 작가이긴 하죠;;; 음.....

2019-03-14 10:5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3-14 11:0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3-14 11:19   URL
비밀 댓글입니다.

목나무 2019-03-14 11:2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두요! 정말 단편집하면은 이제는 현대문학 단편집 이렇게 됩니다! ㅎㅎ
제법 되는 두께로 인해 가지고 다니지는 못한다는 게 단점이지만.... 근데 그게 참 양심적으로 다가와서 이 출판사와 이 시리즈는 믿음이 가더라구요. ㅎㅎ
앞으로도 이 시리즈는 계속 나왔으면 좋겠어요. ^^
<허먼 멜빌>은 <필경사 바틀비> 책을 따로 갖고 있지만서도 <선원, 빌리 버드>때문에 구입해 두었는데 이참에 저도 읽어봐야겠습니다!

Falstaff 2019-03-14 11:31   좋아요 1 | URL
ㅎㅎㅎ 정말 좋은 시리즈예요.
교정 교열도 상당한 수준이고요. 현대문학이 사실 전통이 있는 책가게 아닙니까. 월간지가 먼저 떠올라서 그냥 잡지사거니, 해서 그렇지요. ^^

slobe00 2019-03-14 12: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드하우스를 도서관에서 빌려봤는데 어찌나 두껍던지요~

한 권씩 사 모으는 중인데 다음 타자로 멜빌 찜해둬야겠어요^^

Falstaff 2019-03-14 12:33   좋아요 0 | URL
ㅎㅎ 하여간 흥미로운 시리즈입니다. 요즘 같은 시대에 고맙기도 하고요.
<윌리엄 트레버>도 아주 좋게 읽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