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온 뒤
윌리엄 트레버 지음, 정영목 옮김 / 한겨레출판 / 201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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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7세 때 펴낸 단편집. 12편을 실었다. 윌리엄 트레버의 소설은 여태 두 권을 읽었다. 둘 다 장편으로 <루시 골트 이야기>와 <여름의 끝>. 두 편 모두 참 아리아리하게 심장을 적시는 바람에 단박에 트레버의 팬이 되기로 결심을 했다. 그래 좀 더 알아보니, 트레버의 정수精髓는 장편이라기보다 단편이라 하여, 그의 단편집을 두 권 샀다. 먼저 읽은 책이 바로 이 <비 온 뒤>. 나는 여간해서 외국 단편은 읽지 않는다. 번역한 시는 아예 가까이 하지 않으려했다가 움베르토 에코가 너무도 찬란한 찬사를 보내기에 랭보의 <지옥에서 보낸 한 철>을 다른 사람도 아닌 김현의 번역으로 읽었고, 똥 밟았다. 내 인생에 더 이상의 번역 시는 없다. 단편도 비슷한 이유로 번역물은 잘 읽지 않는데, 단편은 장편에 비해서 문장 하나하나가 섬세하게 서로 얽혀서 만들어가는 조형미 또는 세련미, 혹은 감각적 화학작용이 대단히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런 걸 효과적으로 번역할 수 있을까, 하는 의혹. 솔직히 그런 면이 있었다.
 그런데 트레버의 <비 온 뒤>를 읽으며 확 다가오는 건, 원 작품이 정말 좋을 거 같다는 느낌. 알라딘의 빅 데이터를 보면, 내가 2017년에 가장 많이 읽은 책이 정영목 씨의 번역서였단다. 책을 많이 번역했다고 좋은 역자란 뜻은 아니지만, 이 정도면 정 씨의 문체에 좀 익숙해지지 않았겠는가, 싶지? 아님. 일단 이건 나중에 이야기하자. 즉, 역자가 한국말로 다시 쓴 우리문장이 가슴에 삼삼했다는 이야기는 아니고,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만들어내는 아일랜드 풍경화가 내 마음을 울렸다는 거. 딱 <여름의 끝>이 그랬듯이.
 첫 번째 작품이 <조율사의 아내들>이다. 조율사가 두 번 결혼했다는 뜻. 상처한 후 재혼을 했다. 60대 중후반의 맹인 피아노 조율사. 지금은 머리카락이 하얗게 세고 무릎 한쪽이 관절염에 걸려 눅눅한 겨울이면 고생깨나 하지만 한 때는 늘씬한 매력남이었다. 그때도 시력이 거의 없어 다섯 살이나 젊고 훨씬 더 아름다운 벨을 선택하지 않고 못생기고 뚱뚱하고 옷맵시도 전혀 없고, 집안일도 지저분한 바이얼릿을 선택해 삼십년을 너머 살다, 아내가 먼저 갔다. 두 해를 홀아비로 지내다가, 수십 년 전 조율사와 맺어지지 못한 다음에 결혼하지 않고 여태 혼자 산 벨과 두 번째 결혼을 했다. 그러니 조율사의 아내들이란 전처와 후처, 두 명의 정식 아내를 일컫는 것.
 이 작품집이 트레버가 67세 때 나온 것이니, 최종적으로 다시 고쳐 쓴 시기의 작가 나이가 노년이었다. 책을 읽어보면, 늙어본 적이 없는 사람이면 절대 쓰지 못할 작품들이다. 하나같이. 1928년생이니 동시대인의 67세면 호호 할아버지. 그러면서도 이리 풍부한 감성을 지니고 있었다는 것이 참 놀랍다. 죽은 전처가 조율사와 살아온 시절. 그 시절 속에 어느 날 갑자기 편입해온 후처. 남편은 맹인. 마음 같으면 집안의 모든 것을 바꿔버리고 싶은데, 그러자니 늙은 맹인 남편이 자기 집에 관해서 처음부터 다시 익숙해져야 하고, 참고 살자니 참 속이 아픈 상태. 짐작하시지? 이런 걸 얼마나 찬찬하게 써놓았는지 첫 작품부터 사람을 아리아리하게 만든다.



 근데 2017년에 내가 읽은 것들 가운데 가장 많은 책을 만든 정영목 씨. 그의 문장 하나 보자. <조율사의 아내들>에 나온다.


 “그 시절 조율사는 맹인이었기 때문에 구호금을 받았으며, 이따금씩 일이 들어오는 대로 등받이 없는 의자나 일반 의자의 해초를 엮은 좌판을 배운 기술로 수리하거나, 이런저런 행사에서 어린 시절 어머니가 사준 바이올린을 연주했다.”


 나, 이거 적어도, 그러니까 최소한 20번은 읽었다. 그냥 읽으면, 읽는 대로 진도는 죽 나갈 수 있다. 근데 눈에 좀 힘을 주니까 문제가 생기더라. 앞에 구호금 받은 얘기, 뒤에 바이올린 연주한 얘기는 빼고, 쉼표와 쉼표 사이에 있는 것만 보자. 즉,


 “등받이 없는 의자나 일반 의자의 해초를 엮은 좌판을 배운 기술로 수리하다.”


 문제:  위 문장의 (생략된) 주어는 조율사. 술어는 ‘수리하다.’이다 다음 중 조율사가 수리한 것(문장의 목적어)은?


 ① 등받이 없는 의자와, 일반 의자의 해초를 엮은 좌판
 ② 등받이가 있거나 없거나 종류 불문하고 의자의 해초를 엮은 좌판
 ③ 등받이 없는 의자와, 해초를 엮은 좌판이 있는 일반 의자
 ④ 등받이 없는 의자와, 일반 의자에 붙어 있는 해초
 ⑤ 일반 의자 다음의 조사 ‘의’가 ‘를’의 오기typological error임. 따라서 등받이 없는 의자와 일반의자.


 여러분의 선택은? 나? 모르니까 묻습니다. 오죽하면 이 지랄을 허겄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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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 2018-08-31 09: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2번 같기는 한데... 수능이 이렇게 나오면 촛불켤지도?

Falstaff 2018-08-31 09:51   좋아요 0 | URL
저는.... 3번은 아닐 거 같습니다. 그거 말고는 하나도 모르겠어요.
그렇다면 이번엔 저도 촛불을 켜겠습니다. ^^

잠자냥 2018-08-31 10:1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ㅋㅋㅋ 국내에 번역된 윌리엄 트레버 작품 가운데 이 책이 가장 잘 안 읽히기는 하더라고요. 그런데 저는 저 문장, 예전에 읽을 때 조율사가 수리한 건 ‘의자‘가 아니라 어떤 악기(피아노)라고 생각했어요(그러니까 여기서 목적어는 숨겨진 것???ㅋㅋㅋ) 근데, 그 조율하는 기술을 정규 방식으로 배운 게 아니라 ‘등받이 없는 의자나 일반 의자의 해초를 엮은 좌판을 배운 기술‘로 이해했습니다. ㅋㅋㅋ 이로써 문제는 더 어려워지는 것인가???

Falstaff 2018-08-31 10:22   좋아요 0 | URL
아, 잠자냥 님 의견을 읽으니 눈이 좀 밝아오는 거 같습니다.
그러니까 ‘해초를 엮어 좌판을 만든 기술‘로 피아노 조율하는 방식을 배웠다, 이런 말씀이지요? 그럴 듯합니다.
‘이따금씩 들어오는 일‘이 의자 수리하는 것이 아니고 피아노 조율이라는....
하하하... 문장 하나 읽으며 꼭 이렇게 집단 스터디를 해야한다니, 참 재미있습니다.

세상틈에 2018-08-31 10: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문장 정말 정영목씨가 한게 맞나요?;;; 그냥 읽으면 1번으로 읽히는데... 자꾸 다른 해석을 생각하게 하는 문장이네요.ㅋ 5번은 초판이라면 그럴수도 있지 않을까 싶네요.

Falstaff 2018-08-31 11:06   좋아요 0 | URL
옙. 정말로 이화여대 통번역대학원 번역학과 교수로 재임중인 정영목 씨가 번역했다고 책 앞에 쓰여있습니다.
검색해보면 이이가 번역한 책이 수백권에 달하는 인기, 유명 역자입니다. 다만 이 양반도 사람인지라 가끔 삽질도 하는 것이겠지요. ^^;

세상틈에 2018-08-31 10: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참... 저도 번역 관련서 몇 권 읽고 외국시 번역본은 읽지 않기로 했습니다.ㅎ 과장 좀 보태서 완전 새로운 작품이라고 생각합니다.

Falstaff 2018-08-31 11:03   좋아요 0 | URL
시의 번역은 반역이다.
라는 교훈을 잊고 랭보를 읽은 것이 2018년에 가장 잘못한 일이었습니다. ㅠㅠ

2018-08-31 10:4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8-31 11:02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