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은 언젠가 유시민 노회찬의 저공비행에서 소개된 책이다.
왜! 어떤 정치인은 다른 정치인보다 해로운가?
나쁜 것도 아니고 악한 것도 아니고 해롭다는 표현이 나의 흥미를 끌었다.
옳다 그르다의 가치 판단도 아니고 좋다 나쁘다의 감정 판단도 아니다.
해롭다는 과학적 판단에 기초하고 있다는 것이다.
담배가 몸에 해롭다는 것은 과학을 기초로 나온 결과고 김치가 항암에 효과가 있다는 것은 과학적인 실험을 통해서 얻어진 결과다.
다들 애국하고 민생에 보탬에 되겠다며 자신들을 믿어 달라고 소리치는 각 나라의 엘리트들이 왜!!!! 국가와 국민에게 도움이 되지 못하고 해를 끼치는 걸까?
그걸 과학적인 실험을 통해서 어떻게 얻어 냈다는 것일까?
이 책은 1900년부터 2007년까지 미국의 자살·살인(이 책에서 폭력 치사라고 부른다)의 통계를 분석했다. 미 행정부의 수장인 대통령이 공화당일 때와 민주당일 때를 나눠서 분석해 봤더니, 공화당 대통령일 경우에는 언제나 폭력치사율(인구 10만 명당 자살과 살인으로 사망하는 비율)이 높아지고 민주당 대통령일 경우 폭력치사율이 낮아진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자살은 한 개인의 절망적인 상황을 극복하지 못해서 벌어지는 일이고 살인은 한 개인의 폭력적인 성향으로 발생하는 사건이기 때문에 사회적인 책임보다는 개인적인 도덕성의 문제라고 여겼던 우리의 선입관에 KO펀치를 날린다. (적어도 나에게는 그랬다) 그 KO펀치의 무게는 거기서 끝나지 않는다. 우리는 대통령의 정당만큼이나 개인적인 성품도 중요하다고 여긴다. 그러나 20세기 12명의 미국 공화당 대통령의 개인적인 성격은 모두 달랐지만 공교롭게도 단 하나를 제외하고 폭력치사율을 감소시킨 대통령은 없다는 사실도 나를 얼떨떨하게 만든 사실이었다. (폭력치사율을 감소시킨 유일한 공화당 대통령은 아이젠하워다)
이 책의 저자 길리건 박사는 이 원인에 대해서도 과학적인 데이터를 기반으로 우리에게 설명한다. 미 공화당은 우리의 새누리당과 같은 1%를 위한 정당이다. 공화당은 그들이 말하는 것과 달리 경제마저도 능하지 못하다. 늘 살인적인 물가 성장률을 가져왔고 중산층과 저소득층의 실질 소득 향상에도 기여한 바가 없다. 늘 그들이 정권을 잡으면 부유층의 실질 소득 향상은 높아졌지만 극단적인 경제정책으로 경제 공황을 자초하기도 한다. (아들 부시의 어처구니없는 경제 정책이 2008년 글로벌 경제위기를 낳기도 했다)
경제적 공황은 실업사태를 야기한다. 해고는 우리와 같이 미국 사회에서도 ‘살인’이다. 직장을 잃은 가장은 가장으로 수치심을 느끼게 되고 자신의 무능력하과 쓸모없는 인간이라는 사실 때문에 괴로워하다, 스스로 목숨을 끊거나 혹은 수치심으로 인한 분노를 참지 못해서 다른 이를 해치게 된다.
한 흑인 가장은 2008년 글로벌 경제 위기에 실직을 했다고 한다. 가족에게 사실대로 말한 용기가 없어 다른 직장을 알아보지만, 경제 공황은 그의 재취업 기회를 주지 않았고 3개월 후에 그 사실을 알게 된 아내의 핀잔에 그는 집에서 보관한 총을 꺼내 들어 아내와 아들의 목숨을 빼앗았다.
한 개인의 폭력적인 성행 때문일까? 모든 해직자들이 살인과 자살을 하는 것은 아니지만, 직장에 다니는 사람보다 그럴 확률을 더 높다. 국가 안전망이 든실하지 못한 우리나라에서 무한경쟁으로 치닫고 있는 우리나라에서 해고는.... 살인이다.
폭력치사율을 높이고 늘 경제 공황을 야기하는 무능력한, 1%를 위한 정당이라는 것은 역사적인 결과를 통해서 입증됐음에도 불구하고 공화당은 교묘한 물타기를 통해서 집권한다. 지역간의 갈등, 빈부간의 갈등을 통해서 중산층에게 공포를 조장한다. 저들이 집권하면 너희들의 재산을 빼앗아 흑인과 라틴계에게 줄 것이다. 그러니 우리를 뽑아라, 우리가 너희들의 재산을 지켜줄께!!!! 우리에게 종북 빨갱이들이 있는 것처럼 공화당에는 늘!!! 흑인과 라틴계들은 언제나 그들에게 든든한 배경이 된다.
그렇지만 이 원인에 대해서는... 우리는 이 책을 보지 않더라고 잘 알고 있다. 우리 사회도 미국 사회를 닯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뭐든지 ‘내가 해 봐서 아는 대통령’을 둔 죄로, 노점상에서 대기업 CEO, 대통령으로 계급이 수직상승한 대통령을 둔 죄로, 뭐든지 제대로 되지 않는 것은 개인의 탓이 돼버렸다. 무한경쟁의 시대, 사회가 갈수록 각박해지고 숨 쉬기조차 어려워지는 것은 사회가 잘 못된 정책 때문이라는 생각 대신 개인이 무능력하고 게으르기 때문이라고 간주한다.
내가 이 책은 사랑하게 된 이유는 폭력치사율이 누가 집권하느냐에 따라서 높아지고 낮아진다는 것을 알려줘서도, 왜 미국 사회에서 1%를 위한 정당에 끝임 없이 투표를 해 주는 이유를 가르쳐 줘서도 아니다. 정말 제 정신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말을 막 해대며 우리를 공황상태로 몰아넣는 우리나라 대통령과 한 정당에 대해서 이해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윤리의식은 내가 생각하듯이 하나가 아니란다.
수치심의 윤리와 죄의식의 윤리로 나뉜다고 이 책에서 전한다.
이 책 132 쪽에 보면 (나에게는 마치 모세가 홍해를 가른 것처럼 세상에 대한 이해가 높아지는 기적의 순간이었다)
수치심의 윤리는 수치와 굴욕이, 다시 말해서 불명예와 치욕이 가장 큰 악덕이고 수치의 반대, 곧 자부심과 명예(존경)가 가장 큰 미덕으로 통하는 도덕체계다. 죄의식의 윤리는 죄가 가장 큰 악덕이고 죄의 반대, 곧 순결이 가장 큰 미덕으로 통하는 도덕체계다. (중략) 수치심의 윤리는 우월한 사람이 있으며 그런 사람은 자부심과 명예를 만끽하고 열등한 사람은 열등감과 수치심으로 느끼는 위계화 된 사회 체계를 미화한다. (중략) 자부심의 반대는 겸손이고 겸손은 순결의 필수 조건이므로 죄의식의 윤리에서는 겸손을 가장 높은 미덕의 하나로 꼽는다. 반면에 수치심의 윤리에서는 겸양은 자기 모욕에 맞먹기에 가장 몹쓸 악덕으로 본다. 이런 가치관의 차이로 생겨나는 한 가지 결과는 죄의식의 윤리로 살아가는 사람은 자부심을 누르고 겸손을 품는 길의 하나로 사회적 신분이 낮은 사람들에게 동질감을 느끼려 하고, 반대로 수치심의 윤리로 살아가는 사람은 자부심을 끌어올리고 자신의 수치심과 열등감을 누그러뜨리는 길의 하나로 사회·경제적으로 우월한 신분에 있는 사람에게 동질감을 느끼려 한다. (중략)
프랭클린 루즈벨트는 ‘진보의 성패는 많이 가진 사람의 풍요에 우리가 더 얹어 주는가의 여부가 아니라 너무 적게 가진 사람에게 우리가 충분히 베풀어주는가 여부에 달렸다’고 이야기 한 반면 레이건은 ‘우리는 사람들이 계속 더 부자가 될 수 있는 미국을 보고 싶어 하는 당이다’라고 이야기 했다.
이 이원화된 윤리의식을 통해서 나는 드디어 우리나라의 행정부 수장이 대통령과 제 1당을 이해할 수가 있게 됐다. 그들은 경제적인 성공만을 바라보며, 부자들과 동질감을 느끼며 빈자를 그냥 사고에서 삭제한다. 왜냐면 빈자의 존재는 그들의 무능력을 입증하는 결과지만, 개인의 탓으로 넘겨버리면 자신의 윤리체계 안에서 안전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명박 대통령은 ‘도덕적으로 가장 완벽한 정부’라는 실언 아닌 실언을 할 수 있는 사람이다. 왜냐면 그의 윤리의식과 우리의 윤리의식은 넘을 수 없는 4차원의 벽이 서 있기 때문이다. 부자가 아닌 사람들을 대변할 생각도, 그럴 능력도 없는 사람들의 모임이... ‘우파’들이다. 그것을 길리건 박사는 과학적으로 증명해 냈다.
나는 새는 좌우로 날개로 난다는 리영히 선생님의 말씀을 믿었다. 다양성은 한 사회를 건강하게 만드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 책을 다 읽고 나서는... 우리 사회는 새가 아니고 좌우의 날개 따위는 필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들에게 무한 경쟁을 통해서 승자와 패자로 나누고 모든 것을 승자가 독식하며 패자에게 수치심을 안겨주며 그들을 폭력적인 선택으로 이르게 하는 정치 세력은 필요 없다는 것이다.
200페이지의 길지 않은 책이고 읽는데 별 어려움이 없는 사회과학 서적이기에 많은 사람들이 이 책을 한번 일독하기를 바란다. 더 바라는 것은 군사정권 이후 20여년의 우리나라 정권이 향방에 따라서 자살율과 범죄율이 어떻게 변화했는지, 누군가 이 책처럼 연구를 해주는 것이다. 미국의 예가 아닌 우리나라의 예를 통해서 우리 사회를 과학적으로 분석해 줬으면 좋겠다.
작년에 우리나라 20대 젊은이들 중 300여명이 폭력적인 선택으로 자신의 목숨을 끊었다. 비상구가 보이지 않는 절망 속에서 극단적인 선택을 할 수 밖에 없었다. 그저 나약한 젊은이였을까? 쌍차 사태로 벌써 22명의 아까운 생명이 사라졌다. 22명의 죽음은 과연 무능력한 젊은이의 무력한 선택이었을까??
이 책의 7장의 제목처럼 정치가 삶과 죽음을 가른다.
4월 11일, 나와 다른 사람의 삶을 살리는 귀중한 의무를 할 시간이다.
꼭 투표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