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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예보의 첼리스트
스티븐 갤러웨이 지음, 우달임 옮김 / 문학동네 / 2008년 12월
평점 :
품절
이 책을 읽은지도 벌써 한달...
이제야 이 책에 대한 이야기를 할 정도로 정리가 됐다.
작년에 나에게 올해의 책을 뽑으라고 한다면 단연 '천개의 찬란한 태양'과 '책도둑'을 뽑았을 것이다. 거기엔 전쟁의 상처와 그 상처를 딛고 일어서는 사람들.
오랑우탄과 유전자의 99%를 공유하지만,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1%의 유전자,
삶의 의미와 품위 그리고 긍지를 다룬 소설이기 때문이다.
전쟁이 지독하게 싫어서.. 전쟁에 관한 영화나 뉴스를 보지도 못하는 내가
(아..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련의 사회주의 실험이 실패한 이후 지구촌 어디에선가
끊임없이 전쟁의 포화가 울려서 서렵다. 얼른 가자지구의 빠르고 즉각적인 휴전을 바란다) 이 책이 출간되자 마자 사게 된 것은 저 책들, 천개의 찬란한 태양과 책도둑 때문이었다.
환경이 열악해질수록 인간답기 위해서 노력하는 인간들의 품위는
언제보더라도 나의 가슴을 촉촉히 젖시며 나에게 많은 용기와 의지를 선물한다.
21명의 목숨을 앗아간 폭파때문에
한 첼리스크가 21일동안 그 곳에서 첼로 연주를 하겠다 선언했다.
그리고 그 첼리스트를 보호하기 위해 한 저격수가 배치된다.
아무도 그 연주를 끊을 수 없도록...
이 줄거리에 낚여서 바로 구입후 쏜살처럼 이 책의 한자한자 집중해 나갔지만..
그러나 이 책을 읽으며 나는 또 불편해졌다.
이건 <내전>의 이야기다.
어제, 나와 함께 저녁을 먹으며 나에게 담배를 권했던 이웃이
오늘, 나에게 총부리를 겨누는 이야기다.
이 책의 저자가, '캐나다'출신인 관계로 평생 전쟁을 관념적으로만 인식하고
인터뷰를 통해서 그 가닥을 잡은 사람이어서 그런지 전쟁을 직접 경험한 사람들과는 전혀 다른 이야기를 그려나갔다.
예전에 내가 극찬하던 '책도둑'을 불편해 하던 친구가 있다.
그 친구 말이 '독일인들이 너무 착해!!! 유대인들이 이걸 보면 어떨까?' 라고 이야기 했다. (그 질문에 대한 답을 뒤로 하기로 하고..)
이 책을 읽으며 내 친구가 하던 말의 의미를 깨달았다.
이 책을 읽는 보스니아 사람들은 어떨까?
이웃집 할머니의 물병의 무게를 세포 하나하나가 느끼는 케난과
품위를 지키고 싶지만, 겁이 너무 많은 드라간이
내전에 떨고 있는 자신들의 삶을 극명히 보여준다고 믿을까?
이 책이 불편했던 이유는 非보스니아인의 소설이었기 때문이다.
왠지 그들의 전쟁을, 캐나다의 젊은 작가가 자신의 주제를 담기 위해 <보스니아 내전>을, 인간이 만들어낸 최악의 재난을, 그 불행과 공포를 소설의 수단으로 삼은 듯 했다.
애로의 신념이.. 케난의 품위가..드라간의 공포가 <보스니아전쟁>이라는 배경 속에서만 그 빛을 발할 수 있을까? 꼭 전쟁이 아니라, 자연재해 속에도... 그들의 품위나 공포 신념을 이야기 할 수가 있다.
인간이.. 나와 함께 살아온 내 이웃이 만들어낸 재난 그게 내전이라서 더 끔직하고 무서운 것인데 이 작가는 그걸 이해나 하고 있는지 궁금하다.
나는 내전을 겪은 나라의 후손이다.
나에게도 전쟁은 이 작가와 마찬가지로 머리속에만 존재하고 흑백 사진으로만 인식할 뿐이다.
그러나 나의 가족의 생명을 빼앗은 자들과 한 하늘에 맞닿아 살다보니..
치유하려해도 치유할 수 없는 상처가 있다.
그래서 휴전한지 반세기가 넘어도 휴전선 위의 사람들은 무조건 적이고
나와 다른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에겐 쉽게 '적'의 굴레를 씌운다.
외조부의 정치적 신념이 외손녀의 선행에 색깔을 입히는 무서운 현실이
휴전후 반세기가 지난 내전을 겪은 사회의 상처다.
그래서 드라간이.. 케난이.. 애로에게 동질성을 느끼기보다
관념적으로 느껴지는 이유인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