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전하라 한번도 실패하지 않은 것처럼 - 두려움을 긍정의 에너지로 바꾸는 마인드 컨트롤 10단계
수잔 제퍼스 지음. 하지현 옮김 / 리더스북 / 200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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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전하라 한번도 실패하지 않는 것처럼 Feel the fear and Do it anyway

- 두려움을 긍정의 에너지로 바꾸는 마인드 컨트롤 10단계


"두려움을 극복하는 것은 무력감에서 오는 근원적인 두려움을 안고 사는 것보다는 훨씬 덜 두렵다."
자기계발서라도 필요한 순간이 있다. 내가 좀 더 어릴때는 너무나 옳고 지당한 말씀만 있어서 오히려 저항감이 생기기도 했다. 삶의 당의정처럼 순간적인 마약의 효과만을 주는 것이라고도 생각했다. 그런데 어느순간부터 그 당의정이 절실히 필요하다고 여겨지기 시작했고 그것은 나름대로 긍정적인 역할을 한다. 그저 당신의 현재를 벗어버리고 당장 어디론가 떠나라는 황당한 주문서를 난발하는 그런 류의 '책'말고 현실의 고통을 인정하고 회피가 아닌 당당히 맞서라는 주문을 하는 조금은 인문학적 분위기를 풍기는 '책'들 말이다.

특히 나의 바닥을 보게하고 씁쓸하게 나를 성찰시키는 내용을 좋아한다. 그런 책들이 꽤 있었다. 내 감정의 쓰나미에 휩쓸려 사리분별이 힘들때 그런 책들의 구절을 쓰다듬는다. 요즘의 나도 그러했다. 일도 하기 싫고 무언가 자꾸 다른 곳을 꿈꾸고 달아나고 싶다는 생각만 들고, 그리고 주변인들에게 서운해 하면서도 관계를 풀기보다는 원망만 하고 있었다. 그런 나를 알면서도 심한 무기력이 잠식한 상태에서 메저키스트처럼 나를 벌하고 있었다. 그래서 설연휴를 기다렸다. 2011년의 5일간의 첫연휴엔 나를 감금시키고 더더 내안에 굴을 파보겠노라 계획을 세웠다. 그리고 식량을 비축했다. 그 첫 식량이 바로 이 책 <도전하라 한번도 실패하지 않는 것처럼>이다.  

늘 무언가에 빠져 허욱적대는 느낌이 있을때, 한 발도 앞으로 가지 못하고 그저 주변탓만 늘어놓고 있을 때 내 안의 근원 감정은 '두려움'이었다. 실은 내가 못났을까봐 두렵고 그래서 사람들이 날 싫어할까봐 두렵고, 결국은 어떻게든 실패할까 두렵고, 그 감정들은 나를 허망함으로 끌어들이기도 한다. 무얼해도 소용없으리라는 지독한 열패감에 시달리게 한다. 그런데 그 두려움을 마주하기는 또 어찌나 힘든지....하지만 너무나 노골적인 책제목이 오히려 '싸구려위안과 충고'로 느껴져서 이 책의 존재를 알면서도 선택하지 않았었다. 그러다 드디어 읽게된 책. 예상대로 참으로 당연한 내용들로 가득차 있다. 지금은 내가 나를 내려놓기로 작정한 순간, 그래서 수월하게 읽히고 고개를 끄덕이게 만든다. 이혼하고 다시 공부하고 그래서 두려움에 대한 강의를 최초로 시작하고 여전히 초월이성의 지배를 받기위해 훈련한다는 지은이 수잔 제퍼스의 담담하지만 강력한 권고에 귀를 기울이게 된다.

두려움을 이겨내는 것은 심리의 문제가 아니라 학습의 문제라는 그의 주장에 고개가 끄덕여진다. 두려움은 결코 사라지지 않고 두려움을 사라지게 하는 유일한 방법은 밖으로 나가서 그것을 하는 것 뿐이고, 두려움을 느끼는데 누구든 예외는 없다. 두려움을 극복하는 것은 무력감에서 오는 근원적인 두려움을 안고 사는 것보다는 훨씬 덜 두렵다고 한다. 이러한 기본 인식을 가지고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들이 뒤를 따라 나온다.

"천사들이 날아다닐 수 있는 것은 스스로 가볍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항구에 정박해둔 배는 안전하다. 그러나 그렇게 묶어놓으려고 배를 만든 것은 아니다." 내면의 힘을 키우고, 긍정적으로 사고하는 훈련을 하고 주변의 도움을 받고 자신감을 갖기 위해 그녀는 학습을 통해 변화를 가져올 수 있는 실천적 방법들을 제안한다. 그 중 내게 가장 솔깃했던 대목은 바로 제 8장의 "진정 원하는 것들로 삶을 가득 채워라"이다.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그것을 찾겠다고 마음을 먹는다면 빠른 시일 내에 그 꿈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원하는 것을 구하기 위한 노력은 하지 않으면서 항상 공허하다고 고민만 합니다. 우리 삶을 무엇으로 채울 것인지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 스스로 계속해서 풍요로운 삶을 위해 노력한다면 그 무엇도 우리가 기본적으로 완전하다는 느낌을 앗아갈 수 없습니다. 그러면 두려움 역시 사라지지 않겠습니까?"

이 책은 상위자아에서 흘러나오는 긍정의 에너지가 우리의 의식과 무의식 그리고 우주에너지를 하나의 흐름으로 움직이게 하라고 말한다 마음과 몸의 영역이 아니라 영적인 영역도 함께 의식하며 이를 위해서 늘 훈련을 하라는 것이죠. 그리고 마지막 장은 느긋하게 생각하기이다. 모든 일이 잘될거라고 믿으며 순리를 따르고, 참여하고, 움직이고, 행동하고, 글을 쓰고, 책을 읽고, 강의를 듣고, 자기주장을 펼치고, 하고 싶은 것을 하고 과정에 충실하라고 말한다. 그렇게하고 싶다. 그래서 나는 '강하고 다정한 사람'이고 싶다. 모든 지당하고 당연한 말씀들이 그렇듯 결국은 '행위'가 모든걸 가능하게 한다는 것, 왜 알면서도 이렇게 책을 읽고 매번 그 말들을 확인만 하고 있는 건지, 조금은 나아가고 있는 것이라 믿어야지. 어쨌든 두려움에 갇히긴 싫으니까. 도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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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기엔 좀 애매한 사계절 만화가 열전 1
최규석 글.그림 / 사계절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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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에서 대한민국원주민 내용중 '못된가시내3'을 보고 최규석, 그의 '리얼'에 치를 떨었었다. 그렇게 파편적으로 보아오던 그의 만화를 <습지생태보고서>와 <대한민국원주민> 단행본으로 만나면서 그는 나의 '스타'인 작가가 되었다. 

<대한민국 원주민>에서 나를 사로잡은 건 사람을 따스하게 쓰다듬는 그의 위로였다. 그는 자신을 위로하고 있는데 왜 나는 내가 위로받는 것같은지. 그래서 이 책은 내개 만화가 아니라 심리학 서적이었다. 시대와 사회와 가족이라는 개인이 어쩌지 못하는 그 관계와 맥락안에서 무기력했기에 더 아픈 상처들을 보듬어주는, 그래서 현재의 나까지도 그리 치유해주는 작품이다.

<습지생태보고서> 촌철살인으로 자신의 바닥을 냉소적으로 드러내는 '리얼궁상만화'다. 그런데 그 냉소가 나를 성찰하게 만든다. 크게 소리내어 웃으며 내 속물적이고 소시민적 근성을 맘껏 비웃게 한다. '논점이탈'은 있는거 자랑하는 넘들에 대한 비난에서 시작해서 서로서로 얼마나 잘나가는 사람을 알고있는가에 대한 자랑질로 침튀기는 상황으로의 반전이 허위의식에 빠진 우리를 보게하는데 그게 얼마나 '리얼'한지 짧은 컷 몇 개가 가진 스토리의 힘이 느껴진다.
최규석의 만화들은 정말 주옥같은 대사들이 넘실댄다. 그걸 다 옮기지 못함이 아쉽고, 다 기억하고 일상에 들이대지 못해 속상하다. "애들한테 잔소리 못해서 우월감 에너지가 바닥났다보다." "그런거 아냐!! 신자유주의 파고에 휩쓸린 지구촌의 미래가 걱정되서야"

<울기엔 좀 애매한>은 기다리고 기다렸던 그의 시간이다. 이제야 만난 이유가 '작업노트'에 나와있다. 수채화로 작업한거라는, 그래서 오래 걸릴 수 밖에 없었다는....왜 표지부터 느낌이 다른가 했더니만. 앞서 만난 작품의 감동의 파고가 너무 높았기에 그와 비교하면 좀 평범하다는 느낌마져 들었는데 그나마 '작품노트'를 읽으면서 이번엔 스토리보다 오히려 작업과정을 들여다보는 느낌과 '만화'에 대한 이해를 할 수 있었다는 것으로 평점을 커버한다. '리얼궁상'은 여기서도 빛을 발하고 너무 찌질해서 울기에도 애매하다는 작중 인물에게 마지막 '눈물'을 하사하는 훈훈함으로 마무리한다. 최규석의 작품은 에필로그가 늘 재미있고, 에필로그를 읽어야 작품이 완성된다. 섬세한 감성과 어긋나는 그의 외모가 삽입되었던 앞의 두 작품과 다른 매력으로 <울기엔 좀 애매한>의 에필로그인 '작품노트'는 만화가로서의 그의 성실한 모습을 보여준다, 게다가 겸손하기까지.

ps. 아마도 당신의 눈으로 보는 것보다 제 눈으로 보는 이 작품은 훨씬 멋진거 같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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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기고 봉사하는 자, 그대의 이름은 괴물

- 송경아 소설 <나의 우렁총각 이야기> 읽기 -










들어가는 글 - 우렁각시에서 우렁총각으로의 진화




“호랑이는 가죽 땜시 죽고, 사람은 이름 땜에 죽는기라” - 영화 황산벌에서 계백장군의 부인 역으로 나온 김선아가 신라와의 대전을 앞둔 계백장군 역을 맡은 박중훈의 칼을 받기 전 하는 대사이다. 이 장면은 우리가 역사교과서를 배울 때 충신 계백장군을 더욱 우러르기 위해 반복해 교육받은 내용이기에 이 장면에서 김선아의 외침은 더욱 신선한 것이었다.

계백장군은 풍전등화의 나라의 운명을 깨닫고 적군에 의해 짓밟히기 전, 또 자신의 죽음을 각오한 항전자세를 가다듬기 위해 자신의 칼로 일가족을 죽이고 전장에 나갔다고 우리는 배워왔다. 그의 일가족 살해는 오히려 가족에 대한 지극한 사랑으로까지 읽히기까지 했다. 적군에게 기막힌 죽임을 당하거나, 능멸을 당하느니 명예롭게 죽을 수 있게 하였다고 해석해왔던 것이다. 몰락한 가장이 가족을 살해하고 자신의 목숨을 끊는 행위에 대해 ‘일가족 동반자살’이라는 용어로 이름 붙여 오던 우리의 정서와도 맞닿아 있는 이런 식의 해석에 대한 저항이 바로 영화 속 계백장군의 부인의 입을 통해 이루어진 것이다.

영화 ‘황산벌’에서 계백의 부인, 김선아는 이제 죽어야 겠다는 계백, 박중훈의 칼 앞에서 ‘뭐 한일이 있기에 무슨 자격으로 자신의 새끼들을 죽이려 하는지’ 소리친다. 그렇다 그들 남성영웅들은 조국과 가족을 위해 헌신한다면서 안하무인으로 행동해왔다.




남성에게 명예란 자율성, 자신의 태도를 정하고 스스로 결정하는 권력 그리고 다른 사람들에 의해 자율성을 인정받을 권리 등을 포함한다. 그러나 가부장적 지배 아래서 여성은 자신의 태도를 정하거나, 자신을 위해 무엇을 결정하지 못한다. 여성의 몸과 성적 서비스는 친족집단, 남편, 아버지의 처분에 달려 있다. 여성은 자녀에 대한 양육권과 권력을 갖지 못하거나‘명예’또한 가지지 못한다.1)





이렇게 역사자체를 창조한 가부장제 안에서 주인공이었던 가부장적 영웅에 대한 숭배가 조금씩 균열의 조짐이 보이기 시작하고, 거기에 설화-신화,전설,민담-마저도 다시 쓰여 지고 있다.

가장 먼저 활발하게 이루어진 부분이 이러한 가부장제에 의해 사라진 신화 속의 여성찾기이다. 현 여성가족부는 홈페이지의 이름을 ‘마고’라고 쓰고 있다. ‘마고’란 박제가의 ‘부도지’에 가장 자세히 언급된 창조주이다2). 그녀는 그 후 마고할미, 삼신할미 등으로 변형되어 그 역할이 축소되었지만 한국의 여성주의자들은 여신의 한국적 원형으로서 그녀를 다시 부활시켰다. 여기에 무당들의 내림신으로 가장 빈번히 등장하는 ‘바리데기’또한 신화의 위치로 끌어올리기위한 새로운 해석이 되어지고 있으며 여기에 더해 비운의 주인공으로 기억되는 여성들에 대한 새로운 조명이 다양한 문화적 영역에서 이루어지고 있다.3)

이 글에서 분석하려는 대상은 한국현대소설학회가 선정한 <2005 올해의 문제소설>4)에 최우수 추천작으로 실린 송경아의 「나의 우렁 총각 이야기」이다. 정통 역사 안에서 신화 다시 읽기를 하고 있는 작업과는 다른 방법으로 신경아는 기존의 설화에서 성역할을 바꾸어 발칙하고 도발적인 환상을 보여준다. 신경아는 이 작품에서 “결혼은 백년가약이 아니라, 떠난 사람의 절반 이상이 실망하고 길을 되돌아오는 불편하고 지루한 관광 코스 같았다.”5)면서 “우렁 총각이라면 하나 갖고 싶지. 내가 돌봐야 하는 남편은 싫어.”라고 선언하며 작품을 시작한다.

이것은 <나도 아내가 갖고 싶다>라는 영화가 나왔을 때 그 제목만 인용해서 여자친구들끼리 우리도 ‘아내가 갖고 싶다’고 얘기했던 맥락과 같은 것이리라. 왜 남자들만 ‘아내가’필요하겠는가, 여자들에게도 ‘아내’가 필요하다. 특히 슈퍼우먼을 양산하는 미디어의 홍수 속에서 여성들은 그 이미지에 부합할 수 없는 자신들의 무능함을 자책하며 오히려 남자보다 여자들에게 ‘아내’가 더 필요함을 절절히 호소하게 되었을 것이다.

신경아의 ‘우렁총각’은 조금 더 넘어선 상상의 힘을 보여준다. 특별히 육아와 가사에 허덕이지 않으면서도 그저 독신의 생활에 남편을 대신하는 것으로 ‘우렁총각’을 실체화하는 것이다. 그러나 현대에 재현된 ‘우렁 총각’에게도 여전히 넘지 못하는 한계는 존재한다. ‘우렁 각시’는 ‘아내’를 완벽히 대체하는, 아니 ‘아내’를 수행하는 바람직한 모범사례로 존재했던 반면 ‘우렁 총각’은 여전히 완벽히 ‘남편’을 대체할 수 없으며, 결코 인간‘남성’이 되지 못한다. 그러한 한계가 생기는 지점에 대한 분석이 이 글의 주요 논점이 될 것이다.







설화가 창조한 무급, 무저항의 봉사녀들




어린시절 줄기차게 들어온, 읽어온 설화들에서 공통되게 우리가 학습했던 것은 착한 여자는  권력있는 남성으로부터 온갖 역경을 물리치고 구원받는 다는 것이었다. 그럼 착한 남자는 어떻게 구원받았을까. 바로 하늘로부터 ‘착하고 능력있는’여자를 하사받는 것으로 구원을 받았다. 가장 대표적으로는 전자의 예로 심청이가 그랬고, 후자의 예로는 선녀와 나뭇꾼이 있다. 여기서 주목하고자 하는 이야기들은 바로 후자의 이야기들이다.

가난하지만 착하고 효성 깊은 남성은 무조건적으로 그에게 봉사하는 여인을 얻게 된다. 그 대표적인 이야기가 바로 ‘우렁각시’이다. 이 이야기는 다양한 형태로 전해지는 ‘민담’의 유형에 속하는 것이다. <한국민족설화의 연구>6)에 따르면 “우렁 각시‘유형의 민담은 전국적으로 전승되는 이야기로서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민담 가운데 하나이다.’ 사람으로 변한 동물‘이라는 변신담(變身談)에 속하는 이 유형의 설화는 대체로 가난한 총각이 우렁이 속에서 나온 여자를 금기를 어기면서 혼인하였으나, 임금 혹은 관리가 색시를 빼앗아 파탄이 생겼다는 이야기가 큰 틀이다. ’우렁각시‘는 가난한 사내에게 각시의 역할을 한다. 매일 들에 나가 일을 하고 돌아오면 맛있는 밥상이 차려져 있고, 집의 온갖 궂은 일이 다 해결되어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일을 하는 것이 우렁이가 변한 예쁜 처녀임을 알고 사내는 이 처녀를 아내로 삼는다.

이러한 변신담에 등장하는 변신녀들은 아무런 보상을 바라지 않고 오직 사내의 착한 심성 때문에 그들에게 지극정성을 다한다. 우렁이였거나, 달팽이였거나, 잉어였거나 무엇이었든 그들은 자신들을 사로잡은 남성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받친다. 물론 착한 여성을 도와주는 이와 유사한 설화가 있다. <콩쥐, 팥쥐>에서 구박받는 마음 착한 콩쥐를 돕기 위해 여러 동물이 나오지만 그들은 그저 동물에 머무를 뿐이고 그들의 역할도 결국은 콩쥐가 멋진 남성을 만나기 위해 도울 뿐 동물이 남자로 변하진 않았다.

외국동화에는 남성이 되는 동물은 애초에 멋진 남성이었으나 악마의 사주로 잠시 외형만 바뀐 것일뿐 본질은 인간이었다. 이러한 예는 <개구리 왕자>, <미녀와 야수>에서 볼 수 있다. 즉 이러한 변신형의 설화에서 여성은 엄청난 힘을 갖고 있고, 그 힘을 이용해 남성을 위해 무급의 봉사녀를 자처하지만 그녀의 본질은 그저 한낱 미물일 뿐이다. 그래서 그녀를 한낱 미물이 아닌 여자가 되게끔 해준 인간 남자에 대해 무조건적인 헌신을 하면서 항상 남성의 삶을 채우는 완벽한 보조자가 되는 것이다.

이들 변신형 설화의 주인공 남자와 우렁 각시는 결혼해서 산다. 즉 그들은 자식을 생산하는 것이다. 여기서 더 논의를 진전시키면 그들의 자식은 ‘인간’인 것일까. 설화는 그렇다고 생각했으리라. 여자는 그저 씨를 받아 아기를 키우기만 하는 단지 ‘용기’일 뿐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니 여자가 본디 인간이 아닌 ‘괴물’이어도 상관없고, 설화가 만들어지던 시대에 여성은 자연의 일부였을 뿐이다. 오로지 ‘남성’만이 인간의 영역에 있었고, 재생산의 부분에서도 인간을 배태할 씨는 오직 인간 남성만이 가지고 있는 것이었다.    







‘총각’이라는 봉사남, 그는 왜 괴물인가




‘우렁각시’류의 변신형 설화에 등장하는 각시는 벌을 받거나 해서 동물로 변신한 것이 아니라, 원래가 인간이 아니었다. 인간이 아닌데 인간으로 변신하는 것의 정체성은 무엇일까? 우리가 인간과 인간이 아닌 것을 가르는 기준은 무엇일까? 다윈의 진화론을 통해 인간의 조상이 유인원이라는 것이라는 과학의 증언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인간은 ‘인간’에 의해서만 창조된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인간’의 몸에서 만들어진 정자와 난자가 만나 결합하여 만들어진 것이 ‘인간’이라 불리운다.




인간과 동물의 구별에 관해서 일관된 답이 주어진 적은 없었습니다. 다만, 제 철학자들이 나름대로의 답을 내놓았을 뿐입니다. 유가에서라면 사람과 동물은 본질적으로는 동일한 이(理)에서 나왔으나 그 기(氣)가 다르다고 설명할 것이며(성리학), 인간에게는 사덕과 사단이 있어 나서부터 선하지만, 동물은 사덕과 사단을 가지지 못했고(맹자), 인간에게는 인(仁), 예(禮)가 있는데 동물에게는 없다(공자)라고 했습니다. 즉, 유학에서는 동물과 인간의 구별 기준의 '윤리'와 '도덕'으로 나누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서양철학에서 베이컨은 '아는 것이 힘이다' '이성을 가진 인간은 자연의 주인이 될 자격이 있다'라고 하며 '이성'이 인간과 동물을 나누는 기준이 될 것이다라고 했으며, 데카르트는 여기에 관해서 '인간과 가장 닮은 기계와 인간의 차이라면 '창조성'이다'라고 했습니다. 칸트는 인간이 가진 본유적 이성인 '순수이성'으로 인간과 동물을 나누었습니다. 플라톤은 그 유명한 '인간은 생각하는 동물이다'라는 명제를 제시했습니다. 즉, 서양 철학에서는 인간과 동물의 구별 기준으로 '이성'을 내놓았습니다. 어떠한 학설, 학자의 주장을 따르더라도 '철학적 의미'에서 동물과 인간을 나누는 것은

결국 '필연'이 아니라 '당위' 즉 규범적 판단(~해야만 한다)이므로 완전한 구별에는 무리가

있겠지요. 생물학적 의미에서 인간은 '동물계' '척추동물문'에 속하며 '영장동물과'인 생물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인간은 동물로 구분해야겠지요.7)






그렇다, ‘인간’이란 개념 또한 규범일 뿐이다. 때문에 시대마다 인간의 범위, 즉 ‘인간’으로 대접받는 범위는 매우 달랐다. 노예와 여성이 동급의 소유물로 존재하던 시대에 여성, 즉 ‘아내’들은 재산목록이었을 뿐이고 노예와 같이 평생 봉사와 헌신을 바치는 위치에 있었다. 때문에 그녀들은 우렁이와 같은 존재였다. 그래서 우렁각시에서 ‘우렁’과 ‘각시’는 전혀 모순적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우렁이이면서 각시일 수 있고, 따라서 실제의 ‘아내’와 같은 지위와 역할을 수행한다. 그 역할 수행은 헌신성에서 칭송을 받는 것이었고 부러움의 대상이 되는 것이었지 누군가의 손가락질을 받을 만한 것은 전혀 아니었다.




“남우세스럽게 그게 무슨 짓이야? 남자가 필요하면 차라리 결혼을 해라, 결혼을. 이건 동거하는 거나 마찬가지 아냐. 너 그러다가 혼삿길 막혀. 지영이는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런 선물을 했다니? 당장 돌려줘!”8)



11) 신경아,  앞의 책, 22-23P.




<나의 우렁 총각 이야기>에서 주인공 이소현의 엄마는 배달된 ‘우렁 총각’에 대해 처음부터 무조건 부정적 반응을 보인다. 인간도 아닌 우렁이에게조차 엄마는 ‘총각’이라는 성별 하나만을 문제 삼아 이를 부정하는 것이다. 여기서의 총각은 그저 생물학적 숫컷의 느낌이지 결코 인간 남자가 아니다. 때문에 주인공 이소현조차 그의 역할을 가정부로 한정시키고 있다. 그래서 “나랑 있을 때는 그냥 좀 큰 우렁이야. 자, 봐. 가정부 하나뒀다고 생각하면 된다고. 동거는 무슨 동거야? 그냥 우렁인데.”라며 엄마를 안심시킨다. 만약 이것이 ‘우렁 총각’이 아니고 ‘우렁 각시’이고, 그리고 아버지와 아들의 대화였다면 어떤 대화가 오갔을까? 아마도 상당히 다른 차원의 내용이었을 것이다.

‘우렁 총각’은 결코 남성의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니어야만 이 모녀는 안심할 수 있스며, 엄마는 그가 수컷의 느낌을 주는 것까지도 혹시 딸의 명예를 더럽히는 것이 아닐까 걱겅한다. 그래서 우렁이가 자신을 보았으니 결혼해달라 애원할 때 소현은 결혼할 수 없다고 차갑게 얘기하는 것이다.




“이제 와서 우렁이 따위에게 포획될 수야 없지. 시댁도 없고 부담도 없지만 사회에서 아무런 지위도 가질 수 없는 우렁이. 그런 주제에 나에게 애정을 품었다는 이유만으로 나에게 새로운 관계의 부담을 지우려는 우렁이. 지금까지 나한테 손을 내밀었던 사람들에게 말했듯이, 나는 잘라 말했다. 아직까지 나는 우렁이가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어떤 면에서는더 쉬웠다.”9)



10) 신경아, 앞의 책, 16-17p.










왜 ‘섹스’는 ‘총각’의 봉사목록에 없는가




‘우렁 총각’과 ‘우렁 각시’의 가장 큰 차이는 무엇일까? 각시는 ‘아내’의 역할과 동급인데 비해 총각은 ‘아내’만큼 성실히 일하는데도 그녀의 파트너가 되지 못한다. 전통적인 남녀 역할을 하지 않기 때문일까? 여자는 집안일을 하고 남자는 바깥일을 해야 한다는. 이것도 중요한 차이이겠지만 지금은 2006년이다. 집안에서 집안일이라도 완벽히 해줄 수 있는 남성이 있다면 기꺼이 여성은 동반자로 그를 택하려 할 것이다. 그럼 왜일까? 여기엔 바로 ‘섹스’라는 영역이 문제가 되는 건 아닐까.




결혼은 백년가약이 아니라, 떠난 사람의 절반 이상이 실망하고 길을 되돌아오는 불편하고 지루한 관광코스 같았다....나는 결혼할 이유가 아무것도 없었다. ...지금 이대로라면 어영부영 영어 공부나 하면서, 좋아하는 영화를 보고 게임을 하면서 언제까지라도 시간을 보낼 수 있을 것 같았다....선을 보거나 연애를 해서 결혼을 할 수는 있겠지만, 마음에 드는 남자가 있다 해도, 결혼한 친구들을 보니 결혼할 수는 있겠지만, 마음에 드는 남자가 있다 해도, 결혼한 친구들을 보니 결혼은 과연 그 사람 하나하고만 하는 것이 아니었다. 시댁이 잘나면 잘난 대로 못나면 못난 대로 결혼한 친구들은 모두 시댁 스트레스를 겪고 살았다. 정말 나는 결혼할 이유가 없었다.10)



9) 신경아, 앞의 책, 31p.




주인공 소현은 결혼에 대해서 냉소적이다. 그렇다고 성녀처럼 살기를 바라지도 않는다. 그렇다면 ‘우렁 총각’이야말로 그녀가 필요로하는 부분만을 채워줄 수 있는 유용한 것이 될 수도 있을텐데 소현은 우렁 총각의 결혼해달라는 말에 결국 되팔아버리고 만다.




우렁 총각은 놀라웠다. 일주일이 지나자 집안이 머리카락이나 먼지 하나 없이 반들반들해졌다. 재활용 쓰레기도 종이, 병, 캔 등으로 나뉘어 차곡차곡 묶였고, 냉장고에는 우렁 총각이 만들어 두는 밑반찬이 가득했다....우렁 총각이 만든 음식은 맵거나 짜지 않고 깔끔하고 정갈했다. 가끔 몇 시에 일어난다고 말해 두면 아침을 차려놓고 사라지는 적도 있었는데, 어떻게 하는지 부엌에서 달그락거리는 소리도 내지 않고 국을 끓여, 우리는 귀잖아서 잘 TM지 않는 장식장 속의 고급 그릇들을 꺼내 맛깔스럽게 담아 놓고....개수대에 설거지거리를 담아 놓고 나갔다 오면 식기 건조대에 말끔히 정리되어 차곡차곡 쌓여 있고, 빨래는 빨래통에 쌓일 틈이 없이 베란다 건조대에서 햇빛에 반짝거리며 펄럭였다. 힌 빨래는 모두 한 번씩 삶는 것인지, 얼룩 하나 없어 눈이 부실 지경이었다.11)



8) 신경아, 앞의 책, 21p.




살림을 완벽히 하는 것으로도 남성들은 충분히 ‘아내’로서 고려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주부’를 만날 수 있다는 것을 너무나 천운으로 여기면서 그렇지만 ‘우렁 총각’은 이것만이 아니다. 소현은 우렁 총각에 대해 “객관적으로 우렁이는 나쁜 남자가 아니었다. 얼굴은 잘생긴 편이고 키도 컸으며, 무엇보다 우렁이 특유의 자상한 성격이 여전했다.”고 말한다. 이런 조건인데도 ‘우렁 총각’에 대한 욕망은 털 끝만큼도 보이지 않는다. “난 처녀도 아니야! 연애할 때 그런 건 다 끝냈다”면서도 우렁이를 성적 끌림이 있는 존재로 보지 않고, 느끼지도 못하는 듯하다. 

남성들에게 ‘아내’역할을 수행하는 것에 가장 큰 부분은 성적 서비스이다. 물론 때로는 주부로서 ‘가사’역할 분담이 크기도 하고, 요즘은 경제적 책임을 함께 지는 것을 더 크게 여기기도 하지만 남성이 여성에게 바라는 서비스에서 가장 큰 부분이 아마도 성적서비스일 것이다. 때문에 ‘성매매방지법’이 서슬퍼런 시국에도 여전히 전국의 성매매업소는 남성들의 지갑으로부터 끊임 없이 돈을 긁어낸다. 요즘은 신종 성매매업소로 인형방12)이라는 것까지 등장했다. 손으로 또는 입으로 남성의 성기를 흥분시켜 사정하게 해주는 ‘대딸방’도 있다. 남성은 자신에게 서비스를 하는 여성에게 감성노동을 기대하고 성적서비스는 당연한 권리라 생각한다.

그런데 소현은 모든 면에서 완벽한 ‘우렁 총각’에게 그저 가정부의 역할만 기대할 뿐이다. 아마도 이것은 여전히 남성이 가지는 아우라 때문이 아닐까? 오랜 역사가 만들어 놓은 규범으로서의 아우라. 우렁이는 결코 여성에게 남성을 대체하지 못한다. 때문에 재생산으로 이어질 섹스를 나눌 수는 없었을 것이다. 거기서 태어나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아직 자신할 수 없었기 때문일까, 아니면 괴물과 섹스하기에 여성은 너무 ‘인간다운’것일까.







나오는 글 - 영웅의 서사에서 성찰의 서사로




<나의 우렁총각 이야기>에서 소현은 결혼에 냉소적이고, 인생을 즐기며 살아가고 있는 포스트모던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 듯보인다. 하지만 ‘우렁 총각’ 에 대해서는 아주 순결한 포즈를 취하며 관계 맺기를 적극 거부한다. 그에게서 받는 서비스는 그저 가정부로서 집안일을 말끔히 해주는 것만 바랄 뿐 유체적, 정서적 교감에 대해서는 진저리를 치는 것이다. 이 것은 여전히 여성은 남자와의 관계 맺기에서 자유로운 입장에 있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즉 그저 ‘섹스’를 즐기는 상대조차도 남자들이 만든 그 규범에 드는, ‘인간’이라 명명된 남자의 역할을 수행하는 일반적 남성이 아니면 결코 그녀의 파트너가 될 수 없다.

그것은 누구에게 치욕이 되는 것일까? ‘우렁 총각’과 동거하거나 ‘섹스’를 한다면 그것은 분명 인간 ‘남성’에게 버림받는 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 아닐까, 즉 ‘우렁 총각’을 ‘남편’과 동격으로 놓는 순간 인간‘남성’에게 그것은 치욕스러운 걱, 자신이 수행해온 남성 역할을 모욕하는 것이 되기 때문에 소현은 ‘우렁 총각’과의 관계에서 그토록 소극적이 될 수 밖에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 글의 미덕은 일반적인 선한 의지를 가진 주인공이 고난과 어려움을 겪다 결국 승리하거나, 결국 실패하더라도 미래의 영광을 약속하는 희생자가 되는 영웅서사(로망스)를 따르지 않고, 자신의 행위에 대한 성찰로 미래를 열어놓고 있다는 것이다.

‘우렁 각시’설화에는 주인공 사내는 착한 심성으로 ‘우렁 각시’를 얻었으나 우렁각시를 탐내는 권력자에 의해 시련을 겪지만 결국 이겨내고 ‘우렁 각시’와 행복하게 살았다거나, 비극적 결말로 끝나는 얘기에서는 결국 우렁 각시를 잃고 자신은 파랑새가 된다는 것으로 끝난다. 이 것은 전형적인 로망스 서사의 틀이다. 하지만 송경아는 <나의 우렁 총각 이야기>에서 ‘우렁 총각’의 애원을 밀어내고 자신에 대한 성찰로 끝 이야기를 한다.




결혼을 아닌데, 세상하고 관계를 조금 바꿔보긴 해야 할 것 같아. 내가 근 일주일을 우렁이를 등 뒤에 두고 지냈잖아. 아무리 사람 형상이 아니라도, 일 주일 동안 원망의 눈빛이 등뒤에서 번쩍거리는데 그거 참 못할 짓이더라. 그런데 그러면서 이런 생각이 드는 거야. 내가 책임질 있고 책임져야 하는 관계를 계속 피해다닌다면, 늘 이 모양 이 꼴이 아닐까. 항상 제로 상태인 것고, 주는 것과 받는 것이 플러스 마이너스 제로 상태를 이루는게 정말 같은 것일까. 어쩌면 상처를 주거나 받더라도 생활이라는 구덩이에 빠져야만 얻을 수 있는 게 아닐까......13)






여성주의가 추구하는 길이 바로 여기에 있을 것이다. 남성지배가 가져온 패권주의와 자본주의의 이전투구에 개입해 같은 방법으로 자리를 차지하거나 그러한 삶에서 타인의 피를 딛고 승리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자신의 자리에서 규범에서 소외되는 또 다른 자리를 돌아보고 성찰하는 것, 그 것이 이러한 성찰적 서사를 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이때의 성찰은 ‘반성’과는 다른 의미이다. 이전에 여성이 강요당한 부족한 생물학적 운명에 대한 반성이었다면, 그러한 비주체적이고 비자율적인 자세에서 벗어나 생산적 미래를 창조하고자 하는 자세가 바로 성찰적 서사를 만드는 본질일 것이다.




우렁이의 원망의 눈초리가, 내가 응당 해야 할 일을 남한테 미룬 사람이 받는 업보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했어. 내가 먹고 자고 싸면서 나오는 것들은 기본적으로 내가 어떻게든 책임져 보려고 해야 하는 것인데, 그걸 남한테 미루려면 돈 뿐 아니라 감정까지도 오가는 것을 허용해야 하는 게 아닐까. 물론 우렁이가 나한테 결혼하자고 한 건 오버였지.....‘돈을 냇으니 서비스를 받으면 끝’이라고 생각하는 것도 어쩌면 그 못지 않은 오버일 수 있는 것 같아서.




‘우렁 각시’를 그저 ‘이게 웬 횡재’냐며 냉큼 아내로 맞아들일 수 있는 남성의 위치와 여성의 위치는 이렇게나 다르다. 단지 ‘가사서비스’만 받고는 여성은 이렇듯 불편해한다. 물론 아쉬움은 있다. 좀 더 적극적으로 ‘우렁 총각’을 남성의 지위에 올려놓고 주종 관계가 아닌 동반자 관계로까지 밀고 나가볼 수는 없었을까 하는 것 말이다. 사랑이 있어야만 ‘섹스’가 가능한 게 아닌데 감히 우렁이랑 어떻게라고만 생각하는 순결함도 아직은 여성이 부여잡고 있는 틀 또는 함정이 아닐까 하는 우려가 든다. ‘우렁 총각’, ‘우렁 각시’가 결코 다르지 않은 괴물이 아닌 ‘인간’으로 환골탈퇴할 그 날이 기다려진다.




1) 거다 러너, <가부장제의 창조>, 당대, 2004, 143p.

 

http://bc8937.pe.ne.kr/’」, 2006/2/17(금).










7) 인터넷, <네이버지식인>,  http://kin.naver.com/db/

 

 

 

 

 



13) 신경아, 앞의 책, 34-35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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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살인자를 변호할 수 있을까? - a True Story 어떻게 살인자를 변호할 수 있을까? 1
페르디난 트 폰쉬라크 지음, 김희상 옮김 / 갤리온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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옮기고나서 쓴 글의 제목 "멈춰라, 너 참 아름답구나!" 괴테가 한 말이라는데, 옮긴이 김희상의 이 말이 참 묵직하게 가슴에 놓이는 책이다.  

지은이 페르디난트 폰 쉬라크는 실제 형법전문 변호사로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쓴 글이라고 한다. 모두 11개의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다.  

이 책을 만나게 된 건 우연히 며칠전 보통은 차를 타고 다니던 거리를 차도 가져오지 않고, 택시도 타고 싶지 않아서 12월에 걸맞는 찬바람을 맞으며 걸었던 때였다. 걷는 중간에 서점이 있어서 그냥 잠시 추위도 피할겸 들어갔다가 신간코너에서 이 책을 보게 되었다. 제목이 일단 끌렸고 잠시 들어서 살펴본 책속의 문장이 꽤나 신선했다. 짧고 군더더기 없는데다 소재도 흥미롭고..... 12월 매일매일이 더더 여유없이 지나는 시간에 코를 박고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는 나를 잠시라도 해방시켜줄 것같은 강렬한 예감에 대부분은 할인이 확실한 인터넷을 이용하는데 잠시의 망설임 끝에 이책을 포함 총 3권을 그냥 질렀다. 커피한잔 안마시면 까짓거 할인율정도의 비용은 아낄수 있다는 얄팍한 위안을 하며 가방안에 묵진한 기대감으로 책3권을 찔러넣고 또 시간이 안나서 며칠을 그냥 가방속에 방치하다 12월의 일요일 어느 하루 오후를 <어떻게 살인자를 변호할 수 있을까>로 채웠다.  

스토리 하나하나 짧지만 녹녹치 않은 인생들의 무게가 그려지고 그것이 '범죄'라는 극단적 재현아래 드러난다. "우리는 노를 잡고 흐름을 거슬러 올라가기 위해 싸웠죠. 하지만, 언제나 쓸려 내려갈 뿐이었어요. 저 과거로." 동생을 욕조에 익사시킨 테레사가 줄친 위대한 캐츠비의 이 문장처럼 이 책에는 스스로 어쩌지 못하는 상황들에 처한 사람/삶의 진실이 그려지기도 하고, 감히 통쾌(?)하다고 생각되어지는 폭력이 등장하기도 하고, 법을 집행하는 사람으로서 지은이 쉬라크가 생각하는 형법에 대한 재판에 대한 가치가 이야기를 통해 전달되기도 한다.  

마지막 이야기 '에디오피아의 남자'는 이 책의 모든 이야기들을 아우르는 듯한 내용이 담겨있다. 여기서 난 예상치 못하게 눈물을 쭈르륵 훌리고 있었다. 책에서 보여지는 삶이 기괴하고 인생이 하도 초라하고, 인간이 너무 남루해서 견디기 힘든 정점에 가 있었는데 이디오피아남자에 이르러 살짝 그 긴장이 맥없이 풀려버렸다. 그래도 사랑하고 그래도 행복을 바라는 사람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지....무작정 마약같은 일시적 방편으로서의 허무맹랑한 위로가 아니라 사람/삶의 진실을 어떻게 바라보아야할지를 아주 슬쩍 이야기속에 풀어놓는 지은이 쉬라크에게 그저 미소짓게 만만드는 '에디오피아의 남자'. 끔찍한 삶의 진실과 동화같은 삶의 희망이 너무 쉽게 포개어져서 이건 꾸며낸 이야기야라고 생각하게 되는, 그래서 더 진짜 리얼스토리라고 믿고 싶어지는....법이라는 비인격적 실체에게도 쉬라크는 인생을 보아야한다고 주장한다. 죄가 있는지를 판단하기 위해서는 사실적 증거가 있으면 되지만 판결이란 각자의 인생이 감당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 처벌이 내려져야 한다는 것, 즉 범죄를 저지른 인간이 어떠한 맥락에서 살아왔으며 그 맥락이 그를 어떻게 범죄로 연결시킨 것인지를 봐야 한다는 것이다.  

12월 많이 울적해지는 시간, 이 책은 잠시나마 위안받고자 한 내 기대를 충족시켜 주었다.  땡큐 '쉬라크', 땡큐 이 책을 만나게 한 우연의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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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꽃들의 입을 틀어막는가
데이비드 뱃스톤 지음, 나현영 옮김 / 알마 / 2010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Not For Sale,

오로지 한  인간이 다른 인간의 소유물로 간주되는 세계를 인정하지 않으려 할 뿐이다.

; <누가 꽃들의 입을 틀어막는가> 데이비드 뱃스톤

세상엔 두 부류의 인간이 있는 것 같다. 나도 '인간'이라고 소리소리쳐야 하는 이들과 '인간'임을 굳이 밝힐 이유가 없는 이들. 자본과 권력을 가진 이들은 자신들을 '주인님'으로 신격화되는 자리에 있어서 굳이 인간일 이유가 없다. 지나친 '권리'의 행사로 늘 피로한 이들과 그들에 의해 여차하면 '노예'로 취급당하며 늘 피해의식을 지닐 수밖에 없는 이들. 이런 이분법으로 세상을 보고, 이런 이분법으로 세상이 돌아가지 않기 위해 역사는 이제껏 피를 흘리고 있다. <누가 꽃들의 입을 틀어막는가>는 그 피흘리는 역사의 현재적 상황을 보여준다. 인류모두가 인간으로서의 보편적 권리라는 '인권'을 가지고 있다고 얘기하는 2012년에 벌어지고 있는 일, 보편적 권리인 '인권'은 결코 그냥 존재하는 것으로 얻어지지 않는다는 걸 이책은 정말 박진감(?)있게 그린다.

 

1단원 '세상은 혼자인 아이에게 결코 관대하지 않다'와 4단원'꺽인 꽃은 더 이상 꽃이 아니다'는 우리에겐 익숙한 현실이다. 스스로 선택했다고 여겨지는 여성들의 구조화된 성적 인신매매의 현장에 대한 이야기, 그곳에 있는 이들은 "꾸준한 물갈이 때문에 여자들은 좀처럼 서로 신뢰하고 연대의식을 느끼는 관계를 맺지 못했다. 그들은 같은 악몽을 꾸었지만 각자 외로이 고통을 견뎠다."(53) "학대는 신체적 구타를 넘어 전 범위에 걸쳐 있다. 포주의 목적은 여성들의 감정과 정신을 완전히 장악하는 것이다."(86)

이러한 조건 속에서 포주들은 사람배달을 아웃소싱하면 전세계에 걸쳐 네트워킹을 형성해놓았다. 나쁜자본의 관례대로 움직이는 이들의 방식은 상대적 빈곤과 이를 방관하는 사회조건에서 끔찍한 속도와 위력으로 번성한다. "지하경제는 성 노예를 중심으로 구축된다. 착취를 통해 지하 경제를 살찌우는 것은 뮌헨이든 프놈펜이든 리마든 마찬가지다."(271) 여기에 덧붙여야겠지, 서울도, 대구도, 한국의 모든 곳도 마찬가지다.

3단원 '고통의 과거를 태우는 꽃들'은 아이들에게 가해진 폭력적 상황이 어떻게 이들의 영혼을 잠식하는지, 가해자가 되도록 강요된 아이들의 비극이 가슴을 처연하게 한다. 그 안에서 "여성들은 가난과 사회적 고립이라는 두 악마와 외롭게 싸우느니 이미 익숙한 악마와 함께 사는 편을 택"한다는 것, 우간다에서 만이 아니라 지금 우리사회 가정폭력상황에서도 이미 익숙하게 보아오던 장면이다.

 

6단원 '지금 이름 모를 꽃들이 죽어가고 있다'에서 인신매매에 대응하는 폴라리스의 다섯가지 전략이 나온다. 첫째, 노예제 폐지론자들은 자기 지역의 인신매매 시장 규모를 축소하는 데 주력해야 한다. 둘째, 인신매매 피해자들에 대한 인식을 바꾸어야 한다. 셋째, 누가 범죄자인지를 제대로 밝혀야 한다. 넷째, 법률의 제정과 사법기관중 법원이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다. 마지막 다섯째는 모든 소비재의 공급 사슬을 추적하여 생산 경로를 밝히는 것이다.

이미 우리는 알고 있고, 하려고 한다. 하지만 "포주들은 이제 기세가 오를대로 올랐습니다. 경찰도 사법제도도 전혀 무서워하지 않습니다. 감히 자기들에게 손가락 하나 댈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지요. 무법자들이 활개 치고 다니는 것은 다 우리가 자초한 일입니다. 문제를 인식하고 해결하지 못한 우리 미국인들의 잘못입니다."(316)라는 자백처럼 우리 사회가 자초한 일을 풀어나가야 한다.

 

전세계적으로 활약하고 있는 반인신매매 단체들의 활동이 정말 멋지게 그려지고 있다. 하지만 결코 그일이 멋지지 않다는 걸 안다. 하지만 해야 하는 일이기에 그들이, 우리가 있어야만 하기에, 그건 바로 우리자신을 지키는 일이기에 할 뿐이고, 할 수 밖에 없는 일인데 그래서 멋지게 보인다는 것, 참 아이러니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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