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기고 봉사하는 자, 그대의 이름은 괴물

- 송경아 소설 <나의 우렁총각 이야기> 읽기 -










들어가는 글 - 우렁각시에서 우렁총각으로의 진화




“호랑이는 가죽 땜시 죽고, 사람은 이름 땜에 죽는기라” - 영화 황산벌에서 계백장군의 부인 역으로 나온 김선아가 신라와의 대전을 앞둔 계백장군 역을 맡은 박중훈의 칼을 받기 전 하는 대사이다. 이 장면은 우리가 역사교과서를 배울 때 충신 계백장군을 더욱 우러르기 위해 반복해 교육받은 내용이기에 이 장면에서 김선아의 외침은 더욱 신선한 것이었다.

계백장군은 풍전등화의 나라의 운명을 깨닫고 적군에 의해 짓밟히기 전, 또 자신의 죽음을 각오한 항전자세를 가다듬기 위해 자신의 칼로 일가족을 죽이고 전장에 나갔다고 우리는 배워왔다. 그의 일가족 살해는 오히려 가족에 대한 지극한 사랑으로까지 읽히기까지 했다. 적군에게 기막힌 죽임을 당하거나, 능멸을 당하느니 명예롭게 죽을 수 있게 하였다고 해석해왔던 것이다. 몰락한 가장이 가족을 살해하고 자신의 목숨을 끊는 행위에 대해 ‘일가족 동반자살’이라는 용어로 이름 붙여 오던 우리의 정서와도 맞닿아 있는 이런 식의 해석에 대한 저항이 바로 영화 속 계백장군의 부인의 입을 통해 이루어진 것이다.

영화 ‘황산벌’에서 계백의 부인, 김선아는 이제 죽어야 겠다는 계백, 박중훈의 칼 앞에서 ‘뭐 한일이 있기에 무슨 자격으로 자신의 새끼들을 죽이려 하는지’ 소리친다. 그렇다 그들 남성영웅들은 조국과 가족을 위해 헌신한다면서 안하무인으로 행동해왔다.




남성에게 명예란 자율성, 자신의 태도를 정하고 스스로 결정하는 권력 그리고 다른 사람들에 의해 자율성을 인정받을 권리 등을 포함한다. 그러나 가부장적 지배 아래서 여성은 자신의 태도를 정하거나, 자신을 위해 무엇을 결정하지 못한다. 여성의 몸과 성적 서비스는 친족집단, 남편, 아버지의 처분에 달려 있다. 여성은 자녀에 대한 양육권과 권력을 갖지 못하거나‘명예’또한 가지지 못한다.1)





이렇게 역사자체를 창조한 가부장제 안에서 주인공이었던 가부장적 영웅에 대한 숭배가 조금씩 균열의 조짐이 보이기 시작하고, 거기에 설화-신화,전설,민담-마저도 다시 쓰여 지고 있다.

가장 먼저 활발하게 이루어진 부분이 이러한 가부장제에 의해 사라진 신화 속의 여성찾기이다. 현 여성가족부는 홈페이지의 이름을 ‘마고’라고 쓰고 있다. ‘마고’란 박제가의 ‘부도지’에 가장 자세히 언급된 창조주이다2). 그녀는 그 후 마고할미, 삼신할미 등으로 변형되어 그 역할이 축소되었지만 한국의 여성주의자들은 여신의 한국적 원형으로서 그녀를 다시 부활시켰다. 여기에 무당들의 내림신으로 가장 빈번히 등장하는 ‘바리데기’또한 신화의 위치로 끌어올리기위한 새로운 해석이 되어지고 있으며 여기에 더해 비운의 주인공으로 기억되는 여성들에 대한 새로운 조명이 다양한 문화적 영역에서 이루어지고 있다.3)

이 글에서 분석하려는 대상은 한국현대소설학회가 선정한 <2005 올해의 문제소설>4)에 최우수 추천작으로 실린 송경아의 「나의 우렁 총각 이야기」이다. 정통 역사 안에서 신화 다시 읽기를 하고 있는 작업과는 다른 방법으로 신경아는 기존의 설화에서 성역할을 바꾸어 발칙하고 도발적인 환상을 보여준다. 신경아는 이 작품에서 “결혼은 백년가약이 아니라, 떠난 사람의 절반 이상이 실망하고 길을 되돌아오는 불편하고 지루한 관광 코스 같았다.”5)면서 “우렁 총각이라면 하나 갖고 싶지. 내가 돌봐야 하는 남편은 싫어.”라고 선언하며 작품을 시작한다.

이것은 <나도 아내가 갖고 싶다>라는 영화가 나왔을 때 그 제목만 인용해서 여자친구들끼리 우리도 ‘아내가 갖고 싶다’고 얘기했던 맥락과 같은 것이리라. 왜 남자들만 ‘아내가’필요하겠는가, 여자들에게도 ‘아내’가 필요하다. 특히 슈퍼우먼을 양산하는 미디어의 홍수 속에서 여성들은 그 이미지에 부합할 수 없는 자신들의 무능함을 자책하며 오히려 남자보다 여자들에게 ‘아내’가 더 필요함을 절절히 호소하게 되었을 것이다.

신경아의 ‘우렁총각’은 조금 더 넘어선 상상의 힘을 보여준다. 특별히 육아와 가사에 허덕이지 않으면서도 그저 독신의 생활에 남편을 대신하는 것으로 ‘우렁총각’을 실체화하는 것이다. 그러나 현대에 재현된 ‘우렁 총각’에게도 여전히 넘지 못하는 한계는 존재한다. ‘우렁 각시’는 ‘아내’를 완벽히 대체하는, 아니 ‘아내’를 수행하는 바람직한 모범사례로 존재했던 반면 ‘우렁 총각’은 여전히 완벽히 ‘남편’을 대체할 수 없으며, 결코 인간‘남성’이 되지 못한다. 그러한 한계가 생기는 지점에 대한 분석이 이 글의 주요 논점이 될 것이다.







설화가 창조한 무급, 무저항의 봉사녀들




어린시절 줄기차게 들어온, 읽어온 설화들에서 공통되게 우리가 학습했던 것은 착한 여자는  권력있는 남성으로부터 온갖 역경을 물리치고 구원받는 다는 것이었다. 그럼 착한 남자는 어떻게 구원받았을까. 바로 하늘로부터 ‘착하고 능력있는’여자를 하사받는 것으로 구원을 받았다. 가장 대표적으로는 전자의 예로 심청이가 그랬고, 후자의 예로는 선녀와 나뭇꾼이 있다. 여기서 주목하고자 하는 이야기들은 바로 후자의 이야기들이다.

가난하지만 착하고 효성 깊은 남성은 무조건적으로 그에게 봉사하는 여인을 얻게 된다. 그 대표적인 이야기가 바로 ‘우렁각시’이다. 이 이야기는 다양한 형태로 전해지는 ‘민담’의 유형에 속하는 것이다. <한국민족설화의 연구>6)에 따르면 “우렁 각시‘유형의 민담은 전국적으로 전승되는 이야기로서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민담 가운데 하나이다.’ 사람으로 변한 동물‘이라는 변신담(變身談)에 속하는 이 유형의 설화는 대체로 가난한 총각이 우렁이 속에서 나온 여자를 금기를 어기면서 혼인하였으나, 임금 혹은 관리가 색시를 빼앗아 파탄이 생겼다는 이야기가 큰 틀이다. ’우렁각시‘는 가난한 사내에게 각시의 역할을 한다. 매일 들에 나가 일을 하고 돌아오면 맛있는 밥상이 차려져 있고, 집의 온갖 궂은 일이 다 해결되어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일을 하는 것이 우렁이가 변한 예쁜 처녀임을 알고 사내는 이 처녀를 아내로 삼는다.

이러한 변신담에 등장하는 변신녀들은 아무런 보상을 바라지 않고 오직 사내의 착한 심성 때문에 그들에게 지극정성을 다한다. 우렁이였거나, 달팽이였거나, 잉어였거나 무엇이었든 그들은 자신들을 사로잡은 남성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받친다. 물론 착한 여성을 도와주는 이와 유사한 설화가 있다. <콩쥐, 팥쥐>에서 구박받는 마음 착한 콩쥐를 돕기 위해 여러 동물이 나오지만 그들은 그저 동물에 머무를 뿐이고 그들의 역할도 결국은 콩쥐가 멋진 남성을 만나기 위해 도울 뿐 동물이 남자로 변하진 않았다.

외국동화에는 남성이 되는 동물은 애초에 멋진 남성이었으나 악마의 사주로 잠시 외형만 바뀐 것일뿐 본질은 인간이었다. 이러한 예는 <개구리 왕자>, <미녀와 야수>에서 볼 수 있다. 즉 이러한 변신형의 설화에서 여성은 엄청난 힘을 갖고 있고, 그 힘을 이용해 남성을 위해 무급의 봉사녀를 자처하지만 그녀의 본질은 그저 한낱 미물일 뿐이다. 그래서 그녀를 한낱 미물이 아닌 여자가 되게끔 해준 인간 남자에 대해 무조건적인 헌신을 하면서 항상 남성의 삶을 채우는 완벽한 보조자가 되는 것이다.

이들 변신형 설화의 주인공 남자와 우렁 각시는 결혼해서 산다. 즉 그들은 자식을 생산하는 것이다. 여기서 더 논의를 진전시키면 그들의 자식은 ‘인간’인 것일까. 설화는 그렇다고 생각했으리라. 여자는 그저 씨를 받아 아기를 키우기만 하는 단지 ‘용기’일 뿐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니 여자가 본디 인간이 아닌 ‘괴물’이어도 상관없고, 설화가 만들어지던 시대에 여성은 자연의 일부였을 뿐이다. 오로지 ‘남성’만이 인간의 영역에 있었고, 재생산의 부분에서도 인간을 배태할 씨는 오직 인간 남성만이 가지고 있는 것이었다.    







‘총각’이라는 봉사남, 그는 왜 괴물인가




‘우렁각시’류의 변신형 설화에 등장하는 각시는 벌을 받거나 해서 동물로 변신한 것이 아니라, 원래가 인간이 아니었다. 인간이 아닌데 인간으로 변신하는 것의 정체성은 무엇일까? 우리가 인간과 인간이 아닌 것을 가르는 기준은 무엇일까? 다윈의 진화론을 통해 인간의 조상이 유인원이라는 것이라는 과학의 증언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인간은 ‘인간’에 의해서만 창조된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인간’의 몸에서 만들어진 정자와 난자가 만나 결합하여 만들어진 것이 ‘인간’이라 불리운다.




인간과 동물의 구별에 관해서 일관된 답이 주어진 적은 없었습니다. 다만, 제 철학자들이 나름대로의 답을 내놓았을 뿐입니다. 유가에서라면 사람과 동물은 본질적으로는 동일한 이(理)에서 나왔으나 그 기(氣)가 다르다고 설명할 것이며(성리학), 인간에게는 사덕과 사단이 있어 나서부터 선하지만, 동물은 사덕과 사단을 가지지 못했고(맹자), 인간에게는 인(仁), 예(禮)가 있는데 동물에게는 없다(공자)라고 했습니다. 즉, 유학에서는 동물과 인간의 구별 기준의 '윤리'와 '도덕'으로 나누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서양철학에서 베이컨은 '아는 것이 힘이다' '이성을 가진 인간은 자연의 주인이 될 자격이 있다'라고 하며 '이성'이 인간과 동물을 나누는 기준이 될 것이다라고 했으며, 데카르트는 여기에 관해서 '인간과 가장 닮은 기계와 인간의 차이라면 '창조성'이다'라고 했습니다. 칸트는 인간이 가진 본유적 이성인 '순수이성'으로 인간과 동물을 나누었습니다. 플라톤은 그 유명한 '인간은 생각하는 동물이다'라는 명제를 제시했습니다. 즉, 서양 철학에서는 인간과 동물의 구별 기준으로 '이성'을 내놓았습니다. 어떠한 학설, 학자의 주장을 따르더라도 '철학적 의미'에서 동물과 인간을 나누는 것은

결국 '필연'이 아니라 '당위' 즉 규범적 판단(~해야만 한다)이므로 완전한 구별에는 무리가

있겠지요. 생물학적 의미에서 인간은 '동물계' '척추동물문'에 속하며 '영장동물과'인 생물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인간은 동물로 구분해야겠지요.7)






그렇다, ‘인간’이란 개념 또한 규범일 뿐이다. 때문에 시대마다 인간의 범위, 즉 ‘인간’으로 대접받는 범위는 매우 달랐다. 노예와 여성이 동급의 소유물로 존재하던 시대에 여성, 즉 ‘아내’들은 재산목록이었을 뿐이고 노예와 같이 평생 봉사와 헌신을 바치는 위치에 있었다. 때문에 그녀들은 우렁이와 같은 존재였다. 그래서 우렁각시에서 ‘우렁’과 ‘각시’는 전혀 모순적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우렁이이면서 각시일 수 있고, 따라서 실제의 ‘아내’와 같은 지위와 역할을 수행한다. 그 역할 수행은 헌신성에서 칭송을 받는 것이었고 부러움의 대상이 되는 것이었지 누군가의 손가락질을 받을 만한 것은 전혀 아니었다.




“남우세스럽게 그게 무슨 짓이야? 남자가 필요하면 차라리 결혼을 해라, 결혼을. 이건 동거하는 거나 마찬가지 아냐. 너 그러다가 혼삿길 막혀. 지영이는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런 선물을 했다니? 당장 돌려줘!”8)



11) 신경아,  앞의 책, 22-23P.




<나의 우렁 총각 이야기>에서 주인공 이소현의 엄마는 배달된 ‘우렁 총각’에 대해 처음부터 무조건 부정적 반응을 보인다. 인간도 아닌 우렁이에게조차 엄마는 ‘총각’이라는 성별 하나만을 문제 삼아 이를 부정하는 것이다. 여기서의 총각은 그저 생물학적 숫컷의 느낌이지 결코 인간 남자가 아니다. 때문에 주인공 이소현조차 그의 역할을 가정부로 한정시키고 있다. 그래서 “나랑 있을 때는 그냥 좀 큰 우렁이야. 자, 봐. 가정부 하나뒀다고 생각하면 된다고. 동거는 무슨 동거야? 그냥 우렁인데.”라며 엄마를 안심시킨다. 만약 이것이 ‘우렁 총각’이 아니고 ‘우렁 각시’이고, 그리고 아버지와 아들의 대화였다면 어떤 대화가 오갔을까? 아마도 상당히 다른 차원의 내용이었을 것이다.

‘우렁 총각’은 결코 남성의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니어야만 이 모녀는 안심할 수 있스며, 엄마는 그가 수컷의 느낌을 주는 것까지도 혹시 딸의 명예를 더럽히는 것이 아닐까 걱겅한다. 그래서 우렁이가 자신을 보았으니 결혼해달라 애원할 때 소현은 결혼할 수 없다고 차갑게 얘기하는 것이다.




“이제 와서 우렁이 따위에게 포획될 수야 없지. 시댁도 없고 부담도 없지만 사회에서 아무런 지위도 가질 수 없는 우렁이. 그런 주제에 나에게 애정을 품었다는 이유만으로 나에게 새로운 관계의 부담을 지우려는 우렁이. 지금까지 나한테 손을 내밀었던 사람들에게 말했듯이, 나는 잘라 말했다. 아직까지 나는 우렁이가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어떤 면에서는더 쉬웠다.”9)



10) 신경아, 앞의 책, 16-17p.










왜 ‘섹스’는 ‘총각’의 봉사목록에 없는가




‘우렁 총각’과 ‘우렁 각시’의 가장 큰 차이는 무엇일까? 각시는 ‘아내’의 역할과 동급인데 비해 총각은 ‘아내’만큼 성실히 일하는데도 그녀의 파트너가 되지 못한다. 전통적인 남녀 역할을 하지 않기 때문일까? 여자는 집안일을 하고 남자는 바깥일을 해야 한다는. 이것도 중요한 차이이겠지만 지금은 2006년이다. 집안에서 집안일이라도 완벽히 해줄 수 있는 남성이 있다면 기꺼이 여성은 동반자로 그를 택하려 할 것이다. 그럼 왜일까? 여기엔 바로 ‘섹스’라는 영역이 문제가 되는 건 아닐까.




결혼은 백년가약이 아니라, 떠난 사람의 절반 이상이 실망하고 길을 되돌아오는 불편하고 지루한 관광코스 같았다....나는 결혼할 이유가 아무것도 없었다. ...지금 이대로라면 어영부영 영어 공부나 하면서, 좋아하는 영화를 보고 게임을 하면서 언제까지라도 시간을 보낼 수 있을 것 같았다....선을 보거나 연애를 해서 결혼을 할 수는 있겠지만, 마음에 드는 남자가 있다 해도, 결혼한 친구들을 보니 결혼할 수는 있겠지만, 마음에 드는 남자가 있다 해도, 결혼한 친구들을 보니 결혼은 과연 그 사람 하나하고만 하는 것이 아니었다. 시댁이 잘나면 잘난 대로 못나면 못난 대로 결혼한 친구들은 모두 시댁 스트레스를 겪고 살았다. 정말 나는 결혼할 이유가 없었다.10)



9) 신경아, 앞의 책, 31p.




주인공 소현은 결혼에 대해서 냉소적이다. 그렇다고 성녀처럼 살기를 바라지도 않는다. 그렇다면 ‘우렁 총각’이야말로 그녀가 필요로하는 부분만을 채워줄 수 있는 유용한 것이 될 수도 있을텐데 소현은 우렁 총각의 결혼해달라는 말에 결국 되팔아버리고 만다.




우렁 총각은 놀라웠다. 일주일이 지나자 집안이 머리카락이나 먼지 하나 없이 반들반들해졌다. 재활용 쓰레기도 종이, 병, 캔 등으로 나뉘어 차곡차곡 묶였고, 냉장고에는 우렁 총각이 만들어 두는 밑반찬이 가득했다....우렁 총각이 만든 음식은 맵거나 짜지 않고 깔끔하고 정갈했다. 가끔 몇 시에 일어난다고 말해 두면 아침을 차려놓고 사라지는 적도 있었는데, 어떻게 하는지 부엌에서 달그락거리는 소리도 내지 않고 국을 끓여, 우리는 귀잖아서 잘 TM지 않는 장식장 속의 고급 그릇들을 꺼내 맛깔스럽게 담아 놓고....개수대에 설거지거리를 담아 놓고 나갔다 오면 식기 건조대에 말끔히 정리되어 차곡차곡 쌓여 있고, 빨래는 빨래통에 쌓일 틈이 없이 베란다 건조대에서 햇빛에 반짝거리며 펄럭였다. 힌 빨래는 모두 한 번씩 삶는 것인지, 얼룩 하나 없어 눈이 부실 지경이었다.11)



8) 신경아, 앞의 책, 21p.




살림을 완벽히 하는 것으로도 남성들은 충분히 ‘아내’로서 고려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주부’를 만날 수 있다는 것을 너무나 천운으로 여기면서 그렇지만 ‘우렁 총각’은 이것만이 아니다. 소현은 우렁 총각에 대해 “객관적으로 우렁이는 나쁜 남자가 아니었다. 얼굴은 잘생긴 편이고 키도 컸으며, 무엇보다 우렁이 특유의 자상한 성격이 여전했다.”고 말한다. 이런 조건인데도 ‘우렁 총각’에 대한 욕망은 털 끝만큼도 보이지 않는다. “난 처녀도 아니야! 연애할 때 그런 건 다 끝냈다”면서도 우렁이를 성적 끌림이 있는 존재로 보지 않고, 느끼지도 못하는 듯하다. 

남성들에게 ‘아내’역할을 수행하는 것에 가장 큰 부분은 성적 서비스이다. 물론 때로는 주부로서 ‘가사’역할 분담이 크기도 하고, 요즘은 경제적 책임을 함께 지는 것을 더 크게 여기기도 하지만 남성이 여성에게 바라는 서비스에서 가장 큰 부분이 아마도 성적서비스일 것이다. 때문에 ‘성매매방지법’이 서슬퍼런 시국에도 여전히 전국의 성매매업소는 남성들의 지갑으로부터 끊임 없이 돈을 긁어낸다. 요즘은 신종 성매매업소로 인형방12)이라는 것까지 등장했다. 손으로 또는 입으로 남성의 성기를 흥분시켜 사정하게 해주는 ‘대딸방’도 있다. 남성은 자신에게 서비스를 하는 여성에게 감성노동을 기대하고 성적서비스는 당연한 권리라 생각한다.

그런데 소현은 모든 면에서 완벽한 ‘우렁 총각’에게 그저 가정부의 역할만 기대할 뿐이다. 아마도 이것은 여전히 남성이 가지는 아우라 때문이 아닐까? 오랜 역사가 만들어 놓은 규범으로서의 아우라. 우렁이는 결코 여성에게 남성을 대체하지 못한다. 때문에 재생산으로 이어질 섹스를 나눌 수는 없었을 것이다. 거기서 태어나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아직 자신할 수 없었기 때문일까, 아니면 괴물과 섹스하기에 여성은 너무 ‘인간다운’것일까.







나오는 글 - 영웅의 서사에서 성찰의 서사로




<나의 우렁총각 이야기>에서 소현은 결혼에 냉소적이고, 인생을 즐기며 살아가고 있는 포스트모던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 듯보인다. 하지만 ‘우렁 총각’ 에 대해서는 아주 순결한 포즈를 취하며 관계 맺기를 적극 거부한다. 그에게서 받는 서비스는 그저 가정부로서 집안일을 말끔히 해주는 것만 바랄 뿐 유체적, 정서적 교감에 대해서는 진저리를 치는 것이다. 이 것은 여전히 여성은 남자와의 관계 맺기에서 자유로운 입장에 있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즉 그저 ‘섹스’를 즐기는 상대조차도 남자들이 만든 그 규범에 드는, ‘인간’이라 명명된 남자의 역할을 수행하는 일반적 남성이 아니면 결코 그녀의 파트너가 될 수 없다.

그것은 누구에게 치욕이 되는 것일까? ‘우렁 총각’과 동거하거나 ‘섹스’를 한다면 그것은 분명 인간 ‘남성’에게 버림받는 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 아닐까, 즉 ‘우렁 총각’을 ‘남편’과 동격으로 놓는 순간 인간‘남성’에게 그것은 치욕스러운 걱, 자신이 수행해온 남성 역할을 모욕하는 것이 되기 때문에 소현은 ‘우렁 총각’과의 관계에서 그토록 소극적이 될 수 밖에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 글의 미덕은 일반적인 선한 의지를 가진 주인공이 고난과 어려움을 겪다 결국 승리하거나, 결국 실패하더라도 미래의 영광을 약속하는 희생자가 되는 영웅서사(로망스)를 따르지 않고, 자신의 행위에 대한 성찰로 미래를 열어놓고 있다는 것이다.

‘우렁 각시’설화에는 주인공 사내는 착한 심성으로 ‘우렁 각시’를 얻었으나 우렁각시를 탐내는 권력자에 의해 시련을 겪지만 결국 이겨내고 ‘우렁 각시’와 행복하게 살았다거나, 비극적 결말로 끝나는 얘기에서는 결국 우렁 각시를 잃고 자신은 파랑새가 된다는 것으로 끝난다. 이 것은 전형적인 로망스 서사의 틀이다. 하지만 송경아는 <나의 우렁 총각 이야기>에서 ‘우렁 총각’의 애원을 밀어내고 자신에 대한 성찰로 끝 이야기를 한다.




결혼을 아닌데, 세상하고 관계를 조금 바꿔보긴 해야 할 것 같아. 내가 근 일주일을 우렁이를 등 뒤에 두고 지냈잖아. 아무리 사람 형상이 아니라도, 일 주일 동안 원망의 눈빛이 등뒤에서 번쩍거리는데 그거 참 못할 짓이더라. 그런데 그러면서 이런 생각이 드는 거야. 내가 책임질 있고 책임져야 하는 관계를 계속 피해다닌다면, 늘 이 모양 이 꼴이 아닐까. 항상 제로 상태인 것고, 주는 것과 받는 것이 플러스 마이너스 제로 상태를 이루는게 정말 같은 것일까. 어쩌면 상처를 주거나 받더라도 생활이라는 구덩이에 빠져야만 얻을 수 있는 게 아닐까......13)






여성주의가 추구하는 길이 바로 여기에 있을 것이다. 남성지배가 가져온 패권주의와 자본주의의 이전투구에 개입해 같은 방법으로 자리를 차지하거나 그러한 삶에서 타인의 피를 딛고 승리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자신의 자리에서 규범에서 소외되는 또 다른 자리를 돌아보고 성찰하는 것, 그 것이 이러한 성찰적 서사를 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이때의 성찰은 ‘반성’과는 다른 의미이다. 이전에 여성이 강요당한 부족한 생물학적 운명에 대한 반성이었다면, 그러한 비주체적이고 비자율적인 자세에서 벗어나 생산적 미래를 창조하고자 하는 자세가 바로 성찰적 서사를 만드는 본질일 것이다.




우렁이의 원망의 눈초리가, 내가 응당 해야 할 일을 남한테 미룬 사람이 받는 업보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했어. 내가 먹고 자고 싸면서 나오는 것들은 기본적으로 내가 어떻게든 책임져 보려고 해야 하는 것인데, 그걸 남한테 미루려면 돈 뿐 아니라 감정까지도 오가는 것을 허용해야 하는 게 아닐까. 물론 우렁이가 나한테 결혼하자고 한 건 오버였지.....‘돈을 냇으니 서비스를 받으면 끝’이라고 생각하는 것도 어쩌면 그 못지 않은 오버일 수 있는 것 같아서.




‘우렁 각시’를 그저 ‘이게 웬 횡재’냐며 냉큼 아내로 맞아들일 수 있는 남성의 위치와 여성의 위치는 이렇게나 다르다. 단지 ‘가사서비스’만 받고는 여성은 이렇듯 불편해한다. 물론 아쉬움은 있다. 좀 더 적극적으로 ‘우렁 총각’을 남성의 지위에 올려놓고 주종 관계가 아닌 동반자 관계로까지 밀고 나가볼 수는 없었을까 하는 것 말이다. 사랑이 있어야만 ‘섹스’가 가능한 게 아닌데 감히 우렁이랑 어떻게라고만 생각하는 순결함도 아직은 여성이 부여잡고 있는 틀 또는 함정이 아닐까 하는 우려가 든다. ‘우렁 총각’, ‘우렁 각시’가 결코 다르지 않은 괴물이 아닌 ‘인간’으로 환골탈퇴할 그 날이 기다려진다.




1) 거다 러너, <가부장제의 창조>, 당대, 2004, 143p.

 

http://bc8937.pe.ne.kr/’」, 2006/2/17(금).










7) 인터넷, <네이버지식인>,  http://kin.naver.com/db/

 

 

 

 

 



13) 신경아, 앞의 책, 34-35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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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살인자를 변호할 수 있을까? - a True Story 어떻게 살인자를 변호할 수 있을까? 1
페르디난 트 폰쉬라크 지음, 김희상 옮김 / 갤리온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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옮기고나서 쓴 글의 제목 "멈춰라, 너 참 아름답구나!" 괴테가 한 말이라는데, 옮긴이 김희상의 이 말이 참 묵직하게 가슴에 놓이는 책이다.  

지은이 페르디난트 폰 쉬라크는 실제 형법전문 변호사로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쓴 글이라고 한다. 모두 11개의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다.  

이 책을 만나게 된 건 우연히 며칠전 보통은 차를 타고 다니던 거리를 차도 가져오지 않고, 택시도 타고 싶지 않아서 12월에 걸맞는 찬바람을 맞으며 걸었던 때였다. 걷는 중간에 서점이 있어서 그냥 잠시 추위도 피할겸 들어갔다가 신간코너에서 이 책을 보게 되었다. 제목이 일단 끌렸고 잠시 들어서 살펴본 책속의 문장이 꽤나 신선했다. 짧고 군더더기 없는데다 소재도 흥미롭고..... 12월 매일매일이 더더 여유없이 지나는 시간에 코를 박고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는 나를 잠시라도 해방시켜줄 것같은 강렬한 예감에 대부분은 할인이 확실한 인터넷을 이용하는데 잠시의 망설임 끝에 이책을 포함 총 3권을 그냥 질렀다. 커피한잔 안마시면 까짓거 할인율정도의 비용은 아낄수 있다는 얄팍한 위안을 하며 가방안에 묵진한 기대감으로 책3권을 찔러넣고 또 시간이 안나서 며칠을 그냥 가방속에 방치하다 12월의 일요일 어느 하루 오후를 <어떻게 살인자를 변호할 수 있을까>로 채웠다.  

스토리 하나하나 짧지만 녹녹치 않은 인생들의 무게가 그려지고 그것이 '범죄'라는 극단적 재현아래 드러난다. "우리는 노를 잡고 흐름을 거슬러 올라가기 위해 싸웠죠. 하지만, 언제나 쓸려 내려갈 뿐이었어요. 저 과거로." 동생을 욕조에 익사시킨 테레사가 줄친 위대한 캐츠비의 이 문장처럼 이 책에는 스스로 어쩌지 못하는 상황들에 처한 사람/삶의 진실이 그려지기도 하고, 감히 통쾌(?)하다고 생각되어지는 폭력이 등장하기도 하고, 법을 집행하는 사람으로서 지은이 쉬라크가 생각하는 형법에 대한 재판에 대한 가치가 이야기를 통해 전달되기도 한다.  

마지막 이야기 '에디오피아의 남자'는 이 책의 모든 이야기들을 아우르는 듯한 내용이 담겨있다. 여기서 난 예상치 못하게 눈물을 쭈르륵 훌리고 있었다. 책에서 보여지는 삶이 기괴하고 인생이 하도 초라하고, 인간이 너무 남루해서 견디기 힘든 정점에 가 있었는데 이디오피아남자에 이르러 살짝 그 긴장이 맥없이 풀려버렸다. 그래도 사랑하고 그래도 행복을 바라는 사람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지....무작정 마약같은 일시적 방편으로서의 허무맹랑한 위로가 아니라 사람/삶의 진실을 어떻게 바라보아야할지를 아주 슬쩍 이야기속에 풀어놓는 지은이 쉬라크에게 그저 미소짓게 만만드는 '에디오피아의 남자'. 끔찍한 삶의 진실과 동화같은 삶의 희망이 너무 쉽게 포개어져서 이건 꾸며낸 이야기야라고 생각하게 되는, 그래서 더 진짜 리얼스토리라고 믿고 싶어지는....법이라는 비인격적 실체에게도 쉬라크는 인생을 보아야한다고 주장한다. 죄가 있는지를 판단하기 위해서는 사실적 증거가 있으면 되지만 판결이란 각자의 인생이 감당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 처벌이 내려져야 한다는 것, 즉 범죄를 저지른 인간이 어떠한 맥락에서 살아왔으며 그 맥락이 그를 어떻게 범죄로 연결시킨 것인지를 봐야 한다는 것이다.  

12월 많이 울적해지는 시간, 이 책은 잠시나마 위안받고자 한 내 기대를 충족시켜 주었다.  땡큐 '쉬라크', 땡큐 이 책을 만나게 한 우연의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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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꽃들의 입을 틀어막는가
데이비드 뱃스톤 지음, 나현영 옮김 / 알마 / 2010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Not For Sale,

오로지 한  인간이 다른 인간의 소유물로 간주되는 세계를 인정하지 않으려 할 뿐이다.

; <누가 꽃들의 입을 틀어막는가> 데이비드 뱃스톤

세상엔 두 부류의 인간이 있는 것 같다. 나도 '인간'이라고 소리소리쳐야 하는 이들과 '인간'임을 굳이 밝힐 이유가 없는 이들. 자본과 권력을 가진 이들은 자신들을 '주인님'으로 신격화되는 자리에 있어서 굳이 인간일 이유가 없다. 지나친 '권리'의 행사로 늘 피로한 이들과 그들에 의해 여차하면 '노예'로 취급당하며 늘 피해의식을 지닐 수밖에 없는 이들. 이런 이분법으로 세상을 보고, 이런 이분법으로 세상이 돌아가지 않기 위해 역사는 이제껏 피를 흘리고 있다. <누가 꽃들의 입을 틀어막는가>는 그 피흘리는 역사의 현재적 상황을 보여준다. 인류모두가 인간으로서의 보편적 권리라는 '인권'을 가지고 있다고 얘기하는 2012년에 벌어지고 있는 일, 보편적 권리인 '인권'은 결코 그냥 존재하는 것으로 얻어지지 않는다는 걸 이책은 정말 박진감(?)있게 그린다.

 

1단원 '세상은 혼자인 아이에게 결코 관대하지 않다'와 4단원'꺽인 꽃은 더 이상 꽃이 아니다'는 우리에겐 익숙한 현실이다. 스스로 선택했다고 여겨지는 여성들의 구조화된 성적 인신매매의 현장에 대한 이야기, 그곳에 있는 이들은 "꾸준한 물갈이 때문에 여자들은 좀처럼 서로 신뢰하고 연대의식을 느끼는 관계를 맺지 못했다. 그들은 같은 악몽을 꾸었지만 각자 외로이 고통을 견뎠다."(53) "학대는 신체적 구타를 넘어 전 범위에 걸쳐 있다. 포주의 목적은 여성들의 감정과 정신을 완전히 장악하는 것이다."(86)

이러한 조건 속에서 포주들은 사람배달을 아웃소싱하면 전세계에 걸쳐 네트워킹을 형성해놓았다. 나쁜자본의 관례대로 움직이는 이들의 방식은 상대적 빈곤과 이를 방관하는 사회조건에서 끔찍한 속도와 위력으로 번성한다. "지하경제는 성 노예를 중심으로 구축된다. 착취를 통해 지하 경제를 살찌우는 것은 뮌헨이든 프놈펜이든 리마든 마찬가지다."(271) 여기에 덧붙여야겠지, 서울도, 대구도, 한국의 모든 곳도 마찬가지다.

3단원 '고통의 과거를 태우는 꽃들'은 아이들에게 가해진 폭력적 상황이 어떻게 이들의 영혼을 잠식하는지, 가해자가 되도록 강요된 아이들의 비극이 가슴을 처연하게 한다. 그 안에서 "여성들은 가난과 사회적 고립이라는 두 악마와 외롭게 싸우느니 이미 익숙한 악마와 함께 사는 편을 택"한다는 것, 우간다에서 만이 아니라 지금 우리사회 가정폭력상황에서도 이미 익숙하게 보아오던 장면이다.

 

6단원 '지금 이름 모를 꽃들이 죽어가고 있다'에서 인신매매에 대응하는 폴라리스의 다섯가지 전략이 나온다. 첫째, 노예제 폐지론자들은 자기 지역의 인신매매 시장 규모를 축소하는 데 주력해야 한다. 둘째, 인신매매 피해자들에 대한 인식을 바꾸어야 한다. 셋째, 누가 범죄자인지를 제대로 밝혀야 한다. 넷째, 법률의 제정과 사법기관중 법원이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다. 마지막 다섯째는 모든 소비재의 공급 사슬을 추적하여 생산 경로를 밝히는 것이다.

이미 우리는 알고 있고, 하려고 한다. 하지만 "포주들은 이제 기세가 오를대로 올랐습니다. 경찰도 사법제도도 전혀 무서워하지 않습니다. 감히 자기들에게 손가락 하나 댈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지요. 무법자들이 활개 치고 다니는 것은 다 우리가 자초한 일입니다. 문제를 인식하고 해결하지 못한 우리 미국인들의 잘못입니다."(316)라는 자백처럼 우리 사회가 자초한 일을 풀어나가야 한다.

 

전세계적으로 활약하고 있는 반인신매매 단체들의 활동이 정말 멋지게 그려지고 있다. 하지만 결코 그일이 멋지지 않다는 걸 안다. 하지만 해야 하는 일이기에 그들이, 우리가 있어야만 하기에, 그건 바로 우리자신을 지키는 일이기에 할 뿐이고, 할 수 밖에 없는 일인데 그래서 멋지게 보인다는 것, 참 아이러니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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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만원 세대 - 절망의 시대에 쓰는 희망의 경제학 우석훈 한국경제대안 1
우석훈.박권일 지음 / 레디앙 / 200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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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개미지옥은 탈출하는게 아니라 허물어버리는거야, 아니 지워버리는거야!

- 우석훈의 <88만원세대>를 읽는다

88만원세대에게 건네는 그의 말 "가장 필요한 것은 그들만의 바리케이드와 그들이 한 발이라도 자신의 삶을 개선시키기 위해 필요한 짱돌이지, 토플이나 GRE점수는 결코 아니"라는 것. 지금 우리에게 경제성장이 모든 것을 해결해줄 것이라는 론도 형식으로 끊임없이 세뇌하듯이 울려 퍼지는 스산한 바람소리 같은 마왕의 목소리를 대응하기 위해 개인은 자신의 소비를 절제하는 더 생태적 인간이 되어있어야 할 것이고, 시스템은 낭비를 줄이고 경제적 약자를 더 고려하는 방식으로 변해야 할 것이고, 이미 많은 것들을 쥐고 있는 기성세대가 아직 그렇지 않은 다음 세대를 위해서 더 많은 것들을 양보하는 형태로 바뀌어 있어야 할 것이라는 우석훈의 당부를 듣는다.

박권일의 에필로그에 있는 "희망고문"이라는 말이 어찌나 와 닿는지. 희망을 보여주는 것 자체가 고문의 한단계라는 것. 88만원세대에서 말하는 현제 경제상황과 사회환경에 대한 해석은 너무 지당해서 오히려 할 말이 없다. 자본에 포박된 삶을 태어나면서, 아닌 모태소비라 해도 좋을 지경인 체로 태어나 무차별적 마케팅과 조작의 대상으로 전락하는 세대, 독립적 동거와 섹스는 생각도 못하고 1318을 세대착취, 인질경제 속에서 보내고 20대가 되어 맞이하는 세계는 승자독식게임에 의해 움직이는 대부분이 비정규직인 평균적으로 전세는 물론 결혼도 하기 어려운 세대가 된다. 성형수술과 영어연수가 세대적 평균임금을 오려주지도 않는데 '자신'이 무언가가 부족해서라는 강박으로 끝없이 스펙을 쌓고 있는(요는 이것도 자본에 포박당해 쥐어짜지는 현상이라는 것이지)세대에 '희망'은 어떤 느낌의 고문이 되는걸까.

유럽과 그나마 우리보다 낫다는 일본을 비교하면서 오히려 무력감은 더해진다. 68세대이후 사회민주주의가 심화되었는데 우리386세대 이후 왜 학력경쟁은 더 치열해지고 학벌간 차별은 이리도 심화되었는데 그러면서 학비는 세계최고수준이 되어갔다. 학문수준은 그와 절대 비례하지 않는데도.

"젊은 여성에게 대형할인매장에서 오가는 차를 향해 인사를 시키는 나라는 전 세계에서 일본과 한국 뿐이다...불행을 비교하는 것처럼 비참한 일도 없다. 그러나 한국사회가 극단적인 승자독식 체제로 흘러가면서 승자와 패자만 나뉘는 것이 아니라 패자들 사이에서도 또다시 변종 승자독식 게임이 벌어지게 된다."(197) 그의 해석중 나에게 가장 강렬했던 말이다.

베틀로얄이라는 일본영화를 아는지. 이왕 잡아먹힐거 조금이라도 늦게 잡아먹히긴 위한 개미지옥게임. "공부안하면 죽인다"와 "돈 가져오지 않으면 너는 죽는다"는 협박속에 살고있는 우리는 모두 이 개미지옥게임에 떨어진 것과 같다는 것. 이 개미지옥을 인정하고 싶지않다. 그런데 우리는 심리적 개미지옥안에 들어와있다. 그걸 우리 스스로 자꾸 인정하고 따라가면서.

방법은 있다. 있다고 말한다. '마피아 경제'로 불릴 정도로 깡패 집단의 권력이 높다는 우리나라, 지금 이 세대에게도 방법은 있다고 우석훈은 말한다. 첫문단에서 말했던 그 '당부'에서 시작해보자. 내 마음속 지옥을 허물어뜨릴 수 있는 사람은 바로 나뿐이니 말이다. 에효...힘겹다....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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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차를 주문하는 방법
츠지야 켄지 지음, 송재영 옮김 / 토담미디어(빵봉투) / 200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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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유머'라는 처방이 매우 갈급할 때가 있다.
노력해도 '픽'소리내서 웃을 수 없는 순간이
아주 간혹 찾아오면 외부에서라도 처방을 받고 싶어진다.
아무리 심각하고 힘들 때라도 가볍게 한번 입꼬리 올리고 웃을 수 있는 힘이 있다면
나도, 주변의 누군가도 회피하거나 절망하지 않고, 포기하지 않고
그 순간을 견뎌낼 수만 있다면 그 순간은 '성장'의 과정이 된다고 나는 믿는다.  

나에 대해, 나의 상황에 대해 '픽'소리내서 웃을 수 있는 힘을 찾기위해 

나를 피식 입꼬리 올리게 하는 내용을 담은 책을 읽는다.  

그런데 막상 웃음을 주는 구절이라고 말하려니 부담스럽다.

왜냐 눈물의 코드보다 사람마다 더 제각각인게 웃음의 코드이니까.
아마도 '어찌 저런 말들에 웃을수 있지'하는 이들이 사뭇 많을듯도 하다.
하지만 그래도 하련다, '웃음의 코드'가 다르다면 '타인의 취향'으로 생각해주길 바라며.

 

<홍차를 주문하는 방법> 츠지야 켄지/토담미디어/2002

츠지야켄지는 철학과교수이다. 그의 글들은 속물적이고 무책임한 말들로 난무하다. 그런데 그래서 계속 낄낄거리게 된다. 자신의 치졸함과 나약함을 드러내고 그것을 합리화하는 속보이는 변명과 뻔뻔한 주장들이 나를 위로해주는 느낌이다. 나 자신을 까발리고 속시원히 대놓고 비웃게 만드는 힘이 그의 웃음의 코드다.

그중에서도 가장 나를 실신하도록 웃게 만들었던 이야기는
“나는 아침형인간이다, 아침에 가장 생산적인 일을 하니까.
그 생산적인 일은 무언가, ‘잠’을 자는 것이다.“

이만큼 실소를 금할 수 없게 만드는 합리적 변명(^^)이 있을까. 그래 모든게 생각하기 나름이라니까....ㅋㅋ

또다른 이야기는
“늙은 사람들은 젊은 사람들을 보며 너희도 곧 늙겠지라고 생각하며 참고
젊은 사람들은 늙은 사람들을 보며 너희도 곧 죽겠지라고 생각하며 참는다“는 것,

와우와우와우~~ 삶을 직면시키는 촌철살인의 댓거리가 아닌가!

그리고 이어지는 이야기들.....

186쪽.

Q : 고독합니다. 어떻게 하면 좋습니까.

A : 고독은 스토커나, 빚 받아 주러 다니는 사람이나 살인마와 함께 사는 것보다는 휠씬 바람직한 상태입니다. 그래도 고독이 싫다면 반성해보십시오. 당신은 자기만을 사랑하고 있지는 않은지, 이런 상대라면 싫다는 등 자기자신부터 사랑을 거부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요. 자기 이외의 것을 사랑하시오. 개라도 바퀴벌레라도 사랑하면 친구가 되어 줍니다. 자주 '혼자 잠드는 외로움'이라고 말합니다만 이불 속에는 진드기가 몇만 마리나 있고, 몸 안에도 몇만 마리 이상의 세균이 살고 있습니다. 당신은 결코 혼자 살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177쪽

어린이는 매일 부모나 선생님으로부터 '이거 해라' '이런 인간이 되어라'는 말을 듣고 있다.(나는 지금까지도 듣고 있다.) 그 내용도 '게임을 하지마라' '손수건을 잊어버리지마라' '거짓말을 하지마라' 등 어른이라도 이룰 수 없는 목표뿐인 것이다........(내가 불량스러워지지 않은 것은 주변에 훌륭한 인간이 없는 덕분이다.)

180쪽

이것은 기묘한 일이 아닐까. 3천엔 내고 하고 싶지 않은 일도, 3천엔 받을 수 있다면 꼭 하고 싶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198쪽

나는 책을 정리하는 데 시간을 낭비하기 보다는 찾는데 시간을 낭비하는 것을 선택했기 때문에 10년 정도 전부터 미정리의 상태가 계속되고 있다.

209쪽 (계획이 무산되고 만 이유)

나는 완벽한 인간이 아니다. 적어도 그것을 기분좋게 인정할 겸허함이 있다. 그래서 매년 여름방학이 되면 무뎌진 신체를 연마함과 동시에 느슨해진 정신을 바로잡으려고 결심하고 있다. 하지만 여름방학이 끝날 무렵이 되면 언제나 그렇듯 신체를 연마하거나 느슨해진 정신을 바로잡으려면 강철같은 정신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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