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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등해야 건강하다 - 불평등은 어떻게 사회를 병들게 하는가
리처드 윌킨슨 지음, 김홍수영 옮김 / 후마니타스 / 200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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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인 직관에서 공적인 각성으로

- '평등해야 건강하다/ 리처드 윌킨슨 / 후마니타스 / 2008

불평등해서 건강하지 않은 게 아니라 사회가 충분히 경제적으로 성장하지 않아서 그런거 아닌가라고 언뜻 생각할 수도 있는, 아니 이 책을 읽기 전까지는 모두가 그런 생각들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선진국(이런 용어 진짜 된장*_*)의 평균수명이 높다고 알고 있으니까 말이다. 그래서 우리는 국가가 '성장성장'이렇게 주문을 외울때 닥치고 복종 외에 택할 것이 별로 없었다. 속으론 무언가 굉장히 억울해하면서도, 일단은 국가가 잘살아야 '개인'도 있는것이란 논리 앞에서는 '평등'이란 단어를 꺼낸다는 건 딴지만 걸려는 무책임한 1인이 되는 걸 감수해야 했다. 그나마 이젠 '복지'라고 외쳐대는 2000년대가 되었지만 다시 또 누구를 위한 어떻게를 빼고 무조건 '성공'과 '발전'이라는 오래된 망령이 신화처럼 나를 짓누르는 꼴을 보고 있다.

눈뜨고 가위눌리는 이런 조건에서 읽는 <평등해야 건강하다>는 그냥 읽는 것만으로 효력 만빵인 부적을 붙여주는 기분이었다. 책가득한 주옥같은 말씀들이 어찌나 은혜로운지 눈물이 쭈룩쭈룩....."자유는 열등하게 취급받고 싶지 않다는 인간의 욕망에서 출발하기 때문에 불평등으로 가장 심각하게 손상된다." 그럼요 그럼요.....그렇고말구요....

<평등해야 건강하다>의 가장 큰 미덕은 나약하고 취약할 수 밖에 없는 '나'를 설명해주기 때문이다. "소득 불평등이 심해질수록 저축률은 감소하고 부채는 늘어났다", "소비에 대한 압력은 인간을 외부 자극에 점점 더 의존하게 하며, 친화적 상호 작용을 방해하는 사회적 비교와 평가에도 취약하게 만든다"고 말해주는 리처드 윌킨슨의 위로가 너무 따뜻하다.

"당신의 가난이 기회의 평등이라는 공평한 과정의 결과라는 사실을 안다고 해서 마음이 편해지는 것은 아니며, 그 때문에 오히려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사회적 낙인이 강화되고 배제의 고통은 전혀 줄어들지 못할 것이다."(315)

처음 이 책을 읽기 시작할때는 마치 경제서적을 읽듯이 구체적 현실을 직시하게 하는 풍부한 통계적 사실들이 분석적 자료로서 유용하다는 점이 내 맘에 들었다. 그런데 중간 부분을 넘어가면서 나는 치유받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부(富)로부터 자발적으로 자발적으로 등을 돌리고 가난한 자들과 더불어 사는 것 그자체를 성스러운 행위로-낮은 자들과 함께 할 때, 그 사람도 낮은 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 받아들여지기 때문일 것이다-미화하는 것은 다소 문제가 있다."는 말은 내 생각을 개인적인 직관에서 공적인 각성으로 나아가게 해주었다. '시혜'와 '평등'은 분명 다르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후 이책은 내게 심리학이자 상담학으로 다가왔다.

"사회적 지위가 낮은 사람들은 생활 속에서 자신의 존엄성을 끊임없이 위협하는 도전들과 만나게 된다. 어떤 이들은 자신을 짓밟는 거의 전투와 같은 상황에 부딪힐 수도 있다." 매일이 전투처럼 치루어지는 상황에서 사람은 회피하거나 응전하다. 어떤 것이든 지는 싸움이 될 뿐이지만 말이다. "겉보기에는 소심함과 폭력은 매우 다르게 보이지만 이들은 사회적 지위에 대한 도전과 위협에 반응하는 두 가지 대응 방식일 뿐이다."

나를 보게 하고, 사람을 읽게 하는 책, 조금 내가 자란 것같다. 직관에서 각성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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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받지 않을 용기 - 알리스 슈바르처의
알리스 슈바르처 지음, 모명숙 옮김 / 미래인(미래M&B,미래엠앤비)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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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인간폭탄이 되고플 때 안전핀의 위치를 잊어버리길, 살고싶으니까!

뭔소리냐고, 그냥 이런저런 세상의 부조리들을 보고 있노라면 나의 부조리한 상황까지 오버랩되면서 꼭지가 확~~돌아버리고 그럴땐 온 몸을 폭탄으로 두르고 가장 부적절한 상황을 만드는 곳에 가서 산화하고 싶어지잖아. 실제 실천을 한다기보다 감정적 상태가 그렇게 된다고, 나만 그런가?! 이런 부조리한 상황 앞에서 내가 너무 나약하고 무기력해서 짜증이 나는거지. 그럴때 그냥 팍 부서져 버리고 싶은거지. 처음부터 너무 격하다. 요즘 쫌 격하게 만드는 일들이 줄줄이 이어지다보니 말이야, 중앙일보개념없는컬럼․천안함․검찰과스폰서․낙태․한명숙사건 등등. 그런데다 거기 달리는 댓글 읽다보면 호흡이 힘들어져. 

감정적으로 추스르기 힘든 시기에 <사랑받지 않을 용기>를 읽는다. 원 제목이 <대답>이었다는 슈바르쳐의 책은 일관되고 명쾌하게 '여성운동'이 가고 있는 길을 보게 한다. 그리고 그녀의 '용기'에 위안을 받는다. 내 안에서 타협하려 하거나, 가끔씩 위축되곤 하는 모습을 보고 슬쩍 비웃음을 날리게도 만든다. 결국은 나로 돌아오는 '운동'의 방향을 이 책의 마지막 장에서 만나며 나는 내 몸의 안전핀을 확인한다. 나를 부수어버리려는 분노는 결국은 '포기'와 '절망'에서 나온다는 걸 알면서도 수시로 때때로 서둘러 끝장을 내버리려는 '자살폭탄테러리스트'가 되고픈 서글픈 욕망을 품는 부실한 영혼인 나, 슬프다.

<사랑받지 않을 용기>에는 "지금 무엇이 문제인가"라는 화두로 11가지의 주제로 현재 여성운동의 지점과 방향을 보여준다. 당장 가장 관심이 가는 '낙태는 살인이야'와 '성매매는 영원할거야'도 아주 실질적 대답이 되어 주었지만 꼭 모두가 읽었으면 하는 부분은 '예언자의 이름으로'와 '그때가 좋았지'이다.

'예언자의 이름으로'는 이슬람 여성들의 희잡을 통해 문화적 상대주의라는 이름으로 저질러지는 폭력적 상황에 대한 통찰을 보여준다. 동향 여성들이 죽음의 위협속에서 두건 착용을 강요당하는 동안 독일의 아프가니스탄 여성은 이슬람 여교사들이 두건을 쓰고 수업을 할 수 있는 권리를 얻기 위해 싸운다는 현실은 여성의 가혹한 삶을 드러내주는 일례에 불과하다.

'그때가 좋았지'는 해체된 가족을 그리워하는 망상을 여지없이 까발려 준다. 따스한 보금자리에 대한 갈망은 당연하지만 "폭력의 희생자가 되고 싶다면 가정을 만드세요"라는 이제까지의 가부장적 가족에 대한 현실인식 위에서 변화된 공동체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성매매와 성폭력, 가정폭력에서 가해자의 특성이 얼마나 유사한지 섬뜩할 지경인데 "가해자는 겉으로 눈에 띄지 않는다. 심지어는 특별히 상냥할 때도 있다. 이런 태도가 피해자를 더욱 불안하게 만들고 현실감각을 더욱 성실하게 만든다. 가해자가 쓰는 방법은 제멋대로 하는 전횡과 종잡을 수 없는 예측불능이다. 그 방법이 피해자가 당하는 무자비한 통제, 사회적 고립과 결합된다. 왜냐하면 이 간수는 자기를 증오하는 포로가 아니라 자기를 사랑하는 포로를 원하기 때문이다....이와 같은 방법을 쓰면 여성들은 복종하게 된다. 매춘이든 포르노든 집에서든 말이다."

슈바르쳐와 함께 겹쳐 떠오르는 한국의 여성운동선배들, 나는 그들이 이루어놓은 것 위에 슬쩍 발하나를 걸치고서는 힘들다고 징징거리고 있다. 지금도 이리 갑갑할 때가 많은데 도무지 그 시절을 어떻게 살아냈을까, 우리의 선배들은?

"여성들은 드디어 자신들의 삶과 자유를 만끽할 수 있게 되었는데, 실은 그렇지 못하다. 오히려 마오쩌둥 이전의 중국에서 전족한 발에나 어울렸을 법한 위험천만하게 굽이 높은 신발을 신은 채, 굶어서 아픈 몸을 이끌고 작은 세계를 총총걸음으로 돌아다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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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장의 잎사귀처럼 - <사이보그 선언문>의 저자 다나 J. 해러웨이의 지적 탐험, 다알로고스총서 2
사이어자 니콜스 구디브.다나 J. 해러웨이 지음, 민경숙 옮김 / 갈무리 / 200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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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황적 진실'로 '과학'에 다가가기,  

한장의 잎사귀처럼.....         


자연이라는 본체의 일부인 영장류의 몸은 권력의 지도로 읽혀질 수 있다. 생물학과 영장류학은 본래 정치담론으로, 그 주요 지식대상들은(예를 들어 유기체론과 생태계는) 문화사 전체및 문화정치를 집약하여 보여주는 기호들(요약들)이다.

땅이 평평하다는 게 절대 변할 수 없는 진리라고 믿었던 사람들이 어느날 '니가 지금 서있는 곳은 둥그런 공이고, 거기다 그 공은 빙글빙글 돌고있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 어떤 느낌이었을까. 내가 토마스 쿤의 <과학혁명의 구조>를 읽었을 때 들었던 느낌이 바로 그런 느낌이었다. 그렇게 온다, 사고의 전환은 어느날 갑자기 존재자체를 거꾸로 매다는 느낌으로.

왜 이 얘기를 하냐고? '과학'에 대한 페미니스트의 태클걸기는 페미니즘의 주요 작업 중 하나이고, 나에게 <과학혁명의 구조>와 더불어 절대적 진리자로 '믿음'아니면 '죽음'이라 목을 조르던 자연과학 담론을 확 바닥에 패대기치는 아주 유쾌한 경험을 하게 했기 때문이다.

2012년, 지금 여기에서도 '과학'의 이름으로 이루어지는 '말씀'은 절대적이다. 종교보다 더 큰 기적을 보여주는 '과학'앞에서 나같은 무지렁이가 할 일은 그저 두려움으로 머리를 조아리는 것 뿐인것 같다. 하지만 "생물학은 담론이지, 세계 그 자체가 아니다"라고 말하는 해러웨이와 같은 페미니스트가 있어 'DNA'도 정치적 이론과 실천이 꼬여있는 구성체라고 감히 사고하게 된다.

해러웨이는 '생물학'을 전공했고, 그것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하지만 그녀의 작업은 실험실의 고립된 과학자로서가 아니라 생물정치학이라는 주제로 "편시야적이고 외골수적인 단-문장식 진실들로 환원되지 않는 관계성의 상상력을 주장"한다. 그래서 "결론이 단 하나의 진술이 되는 걸 불가능하게 만드는 것"이다.

생명공학은 현대의 새로운 성경이 되고 있다. '게놈 프로젝트', '유전자 지도' 등 인간이라는 '우주'의 신비를 낱낱이 파헤지고 있는 중이다. 헤러웨이는 생물학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생물공학이 동시대의 사업 및 자본투자의 주요분야로 유전학 기술에 깊이 의존하게 되면서 유전자들을 '물체'로 사고하고, 이것이 연구와 투자를 계속 후원하도록 만들어주는 것에 대해 염려한다. 현대의 과학자들이 "나에게 유전자통제권과 충분한 시간을 준다면 당신의 꿈을 살과 피로 암호화하리라"라고 광고하고 있다는 것이다. 헤러웨이는 이것을 투쟁의 문제라고 한다. "나는 우리 삶의 역사적 구조가 지배를 최소화할 때 생명과학이 어떻게 될지 알 지 못한다. 나는 기본지식이 과거의 세계를 유지하는 데 참여한 것처럼, 생물학의 역사가 새로운 세계를 반영하고 번식시킬 것이라고 나를 설득하고 있음을 안다."고 고백하면서 "이 포스트모던 몸, 이 언제나 취약하고 우연한 개체성의 구성물이 반드시 자동화된 별들의 전쟁터이어야 하는가"라고 묻는다.

구디브와의 대담으로 이루어진 책 <한장의 잎사귀처럼>은 해러웨이의 전반적인 이론작업과 삶을 아울러 일별할 수 있게 해준다. 본문 중 구디브는 "낭만적으로 생각하지 않기가 어렵다"고 해러웨이에게 말하는데 해러웨이의 관계맺기 방식은 다른 어떤 그녀의 이론보다 더 실천적으로 보인다. (궁금하면 책을 보시라)

해러웨이의 책 중 '겸손한 목격자'라는 제목이 있다. 나를 사라지게 만드는 종류의 겸손, 신뢰성을 증진시키는 종류의 겸손이 있는데 남성의 겸손이 후자인 반면 여성의 겸손은 비켜서 있는 것에 관한 것이었기에 '겸손'이란 말의 비유작업은 아직 진행중이지만 해러웨이는 자신을 '페미니즘적 겸손'을 가지고, "물질적-기호적"인 실제 세계에서 차이를 만들려는 목표를 가진 채, 인종․계층․젠더․성에 관한 문제들을 힘들게 교차시키도록 요구하는 기술과학 세계 속에 억류되어 있는 것과 관련이 있다고 설명한다. 이런 의미에서 겸손은 자신의 영향력, 권력, 한계들 등을 인식하는 것으로 "겸손한 목격자는 상황적 지식에 몰두 할 수 있는 사람"이다. 해러웨이는 '겸손한 목격자'로서 나에게 말한다. "제가 진정으로 요구하는 건 영속적인 정열과 아이러니라는 겁니다. 즉 정열이 아이러니만큼 중요하다는 거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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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링킹
캐럴라인 냅 지음, 고정아 옮김 / 나무처럼(알펍) / 200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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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독' 에 대한 이만큼 절절한 고백이 또 있을까,   

 '알콜릭'은 나도 가끔은 스스로에게 되묻곤 하는 것이기에 확 당기는 글들이 가득하다. 

"중독성 음주는 본성상 고독한 음주다. 자기 음주의 본질을 바깥세상에 감추기 때문이다. 

그리고 어느 면에서는 자기 자신에게도 감춘다." 훅~~뜨끔하다. 

 알콜릭을 향해 직진해 들어가고, 다시 거기서 나오는 그녀,  

그런데 그 '중독'이 절실한 삶의 이유를 달고 있기에 그 '중독'에 경계를 풀고 싶어진다. 

'중독'은 살기 위한 몸부림이고, 그 몸부림으로 삶을 놓치게 되는 아이러니를 가진다.  

"인생이 움직임을 잃고 색깔을 잃고 마침내 덜컥 멈춰서는 느낌, 우리가 도달한 곳은 

전혀 원하지 않던 곳이고, 탈출구는 짐작되지 않으며, 상황을 변화시킬 방법도 보이지 않는다. 

고통은 격심해진다. 괴로움 속에 허덕이는 동안 우리는 하루하루 위엄을 잃어가고,  

두발은 바닥에 더욱 찐득찐득 들러붙는다. 누군가 이 상황을 설명해주었으면, 

도데체 누구의 잘못인가? 진실은 흐려진다. 다시 한번 폭음에 빠지고  

다음날이면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한다. ...... 

술은 그런 느낌을 내칠 확실하고도 '유일한 방법이다." 

나는 매 순간 여러 중독의 '찰나'를 스쳐간다.  

그 찰나들을 끝없이 연장하고픈 유혹과 동행하는삶을  

'드링킹'에서 지독한 쓰라림으로 만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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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혹에 대하여
장 보드리야르 지음, 배영달 옮김 / 백의 / 200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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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혹으로 모든 걸 끝장내려는 그의 혁명도 한 몫을 하겠지...


보드리야르를 읽으며 마광수가 자연스레 떠오른다. 프로이트의 서자인 그는 여성의 유혹에 기대어 자신을 변명하며 여성은 계속 유혹자로, 자본과 소비의 음탕질로 몸을 휘감은 소비사회 전략으로서의 유혹하는 여자, 야한 여자를 욕망했다. 그를 포장하기 위해 그것을 본질적 쾌락이라 주장하고, 자신을 무해한 인간으로, 그저 그 유혹에 답하는 무기력한 인간으로 그리며 그의 권력을 본질적인 욕망으로 덮어버린다. 
 

하지만 그래도 보드리야르가 탈출하고자 하는 출구로서의 '유혹'은 꽤나 야심찬 전략이었슴을... 별반 '마'선생과는 닮지 않았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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