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라네시
수잔나 클라크 지음, 김해온 옮김 / 흐름출판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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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 신께서 애초에 거인들이 살 곳으로 이 집을 만들었다가 알 수 없는 이유로 생각을 바꾸신 것 같다.

 

 

'홀'이라 불리는 집. 미궁.

1층은 조수가 들이치는 곳.

나와 나머지 사람만이 존재하는 곳.

나는 조수간만의 차와 여러 홀들을 탐험하며 조각상들을 구경하고 일주일에 한 번 나머지 사람을 만난다.

그리고 그런 일들을 일지에 기록한다.

과학자이자 탐험가인 내가 하는 일이다.

그리고 나머지 사람은 위대하고 은밀한 지식이 이 세상 어딘가에 있다고 믿고 그것을 찾고 있었다.

 

어딘지 모르는 세계.

홀들로 나누어진 그 세계는 홀마다 조각상들이 있다.

거인 같은 조각상, 인간과 비슷한 크기의 조각상, 어떤 건 인간보다 작은 것도 있다.

그리고 그곳엔 앨버트로스도 있다.

이 모호하고, 어딘지 모르게 쓸쓸한 세상은 왠지 모를 불안과 슬픔을 느끼게 만들었다. 처음엔.

열다섯 명의 인간 중에 살아남은 인간은 나와 나머지 사람뿐.

물고기와 새들만이 살아있다는 느낌을 줄 뿐인 세상.

그 세상을 홀로 끝없이 탐험하는 나는 숫자 대신 이렇게 하루하루를 적어간다.

<앨버트로스가 남서쪽 홀에 온 해 여섯째 달의 열다섯째 날 기록>

 

그때, 시작이 그랬던 것처럼 끝이 느닷없이 찾아왔다.

 





이곳에 예언자가 등장하고, 16번째 사람이 나타난다.

그가 남긴 메시지를 지워버리고 뜨문뜨문 남은 글자들을 읽는다.

그 메시지를 다 읽으면 나는 미칠 수도 있기 때문에...

 

고대인들이 세상을 인식한 방식은 세상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비범한 영향력과 힘을 얻었다.

 

 

고요하고 신비로운 세상.

현 세상에서 빠져나간 신비가 모인 곳.

그 홀들에 있는 조각상은 현생의 역사를 말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마음을 가다듬고, 가장 순수하던 때를 생각하며, 평온함을 느끼는 순간을 찾아간다면

나에게도 그 문이 열릴까?

 

피라네시가 살았던 미궁을 머릿속에 그려본다.

나는 아직 그곳의 느낌을 다 알지 못한다.

하지만 피라네시가 그곳에 머물고 싶어 하고, 그곳을 찾아가는 이유는 알 거 같다.

보이지 않는 세상에 대한 수재나 클라크의 이야기는 아름답다.

이야기가 아름답기 위해서는 그 안에 파묻히는 이야기들이 끔찍해야 한다.

끔찍한 이야기들은 아름다운 세상에 묻혀버렸다.

그곳에서는 모두가 안식을 찾을 수 있을 테니..

 

파라네시는

우리가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세상으로 우리를 데려간다.

그곳에서 모든 걸 잊고 단순하게 살아가고픈 마음이 든다.

지금 세상은 쓸데없이 복잡하니까...

 

지친 사람들의 마음을 물이 들이치는 홀들과 인간의 역사를 이야기하는 조각상들이 어루만져 주고

홀이, 미궁이, 집이

그들을 거둘 것이다. 안전하게...

 

머리를 식히고 싶을 때마다 피라네시가 안내해 주는 미궁을 돌아다니게 될 거 같다...

 

 

 


* 출판사에서 협찬을 받았지만 온전히 내 맘대로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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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스트 듀얼 - 최후의 결투
에릭 재거 지음, 김상훈 옮김 / 오렌지디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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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의 마지막 결투! 하지만 그 죄의 진위는 아직도 알 수 없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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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스트 듀얼 - 최후의 결투
에릭 재거 지음, 김상훈 옮김 / 오렌지디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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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사내를 견고한 방책 안에 가둘 것이다. 그리고 그 안에서 그들은 무자비한 결투에 돌입하게 된다. 도망칠 곳이 없는 결투장 안에서 어느 한쪽이 죽을 때까지 싸움으로써 자신이 한 주장의 정당성을 입증하고, 그들 사이의 다툼에 신이 어떤 판결을 내렸는지를 증명하기 위해서.

 

 

1836년 12월 29일 벌어진 세기의 "결투"

자신의 아내를 강간한 자크 르그리를 고발한 장 드 카루주와 강간으로 고발당한 르그리의 결투였다.

서로 자신의 명예를 위해 결투를 하지만 목숨을 담보로 하는 것이었다.

이날 두 사람 중에 한 명은 죽어야 끝나는 것이 바로 그날의 결투이자 신의 심판이었다.

 

귀족 집안 출신인 기사 카루주와 미천한 신분이었지만 종기사로서 카루주와 우정을 나눴던 르그리.

그들은 카루주가 르그리에게 아들의 대부를 부탁할 정도로 돈독한 사이였다.

하지만 르그리가 카루주를 제치고 자신들의 주군에게 더 사랑을 받고 빠른 출세 가도를 달리면서 우정에는 금이 가기 시작했다.

르그리는 기사 작위를 받지 못했고, 주군의 총애를 받고 있었지만 카루주는 전쟁에도 직접 참여한 진정한 기사였다.

하지만 카루주는 첫 번째 부인과 아들을 잃었고, 새로 맞이한 부인 마르그리트는 그녀의 아버지가 2번씩이나 프랑스 국왕을 배신한 걸로 유명했다.

국왕을 2번씩이나 배신하고도 살아남았다는 사실이 마르그리트의 성격을 좀 더 설명해 주는 계기가 될까?

 

카루주가 집을 비운 틈을 타서 르그리는 루벨이라는 자와 함께 마르그리트를 범하러 왔다.

루벨은 혼자 있는 마르크리트가 문을 열게 만들었고, 르그리는 아무런 제지도 받지 않고 집안으로 들어왔다.

하지만 예상보다 격렬하게 저항하는 마르그리트를 감당하지 못해 루벨을 불러들여서 그녀를 꼼짝 못 하게 하고 육욕을 채웠다.

 

마담, 만약 방금 일어난 일을 다른 사람에게 발설한다면, 당신에게 오는 건 불명예밖에는 없을 것이오. 남편이 이걸 알게 된다면 거꾸로 죽임을 당할 수도 있소. 그러니까 아무 말도 하지 마시오. 나도 입을 다물고 있을 테니까.

 

 

하지만 마르그리트는 침묵하지 않았다.

남편이 돌아오자 그녀는 남편에게만 자신이 당한 이야기를 했다.

중세 시대 여자들은 성폭행을 당했어도, 자신의 남편, 아버지, 또는 남성 보호자의 동의가 없으면 범인을 고소할 수조차 없었다.

카루주는 일단 믿을만한 친척들을 소환해서 이 사실을 알렸다. 그리고 그들은 주군에게 이 사실을 보고하기로 결정했다.

 

 

노르망디의 영주 재판에서 시작된 현지 귀족들끼리의 다툼이, 프랑스 왕국 전체를 뒤흔드는 쟁점으로까지 빠르게 비화했던 것이다.

 

피에르 백작은 르그리의 편을 들어주었고, 카루주는 그 판결에 불복해 국왕에게 상고하고 결투를 신청했다.

 

결투는 형사재판에서 주군이 내린 판결에 불복한 귀족에게는 최후의 상고 수단으로 남았다.

 





작가가 10년 동안 자료를 조사하고 모아서 쓴 이 실제 사건은 지금까지도 수많은 이야기를 간직한 채 살아있다.

다른 버전의 이야기들이 사실처럼 전해지고, 아무도 진짜 어떤 일이 있었는지 알 수 없다.

그날 결투의 결과만이 있을 뿐.

 

진짜 르그리가 마르그리트를 강간했을 수도 있고

자신보다 빠른 출세를 하며 자신의 길을 막고 있는 르그리에게 반감을 품은 카루주가 아내와 공모해서 벌인 일일 수도 있다.

또는 마르그리트가 외도를 하고 르그리를 핑계 댔을 수도 있다.

진실은 결투로 판가름 났지만 그 진위는 여전히 알 수 없다.

 

하지만 마르그리트가 흔들림 없는 진술을 했고, 르그리가 주군과 함께 어울리며 이런저런 일들을 했다는 것 또한 사실이다.

아이러니한 것은 르그리의 변호사인 르코크는 이 사건의 범인으로 지목된 르그리의 성격에 관한 단서나 개인적인 감상과 내밀한 대화의 일부까지 일지에 기록해 두었는데 그것이 르그리를 평가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는 것이다.

 

사건의 진상을 정말로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이 사건은 세기의 결투로 이름 지어졌고, 결국 중세 시대의 마지막 결투로 남았다.

자신을 성폭행한 남자를 남편의 힘으로 고발하여 그 남편이 결투를 치름으로써 자신의 억울함을 증명받아야 했던 마르그리트.

그녀에게는 결투가 치러지기도 전에 이미 사형 판결이 내려졌다.

나이도 있고, 열병도 도진 남편이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마지막 결투에 참가하는 모습을 보는 그녀의 심정은 어떤 것이었을까?

결혼해서 5년 동안 아이가 없었던 그들에게 그 사건 이후 임신한 그녀는 어떤 마음으로 그 시합을 지켜봤을까?

시합 날 이미 검은 상복 차림으로 결투장에서 죽음을 대기하고 있었던 마르그리트의 마음은 아무도 알 수 없을 것이다.

 

강간으로는 임신하지 않는다. 는 중세식 사고방식으로 얼마나 많은 여자들이 강간당하고 그 작자의 아이를 낳았을지 알 수 없다.

마르그리트가 낳은 아이도 카루주의 아이인지 그날 생긴 아이인지 알 수 없다.

그저 고통만이 남을 뿐이다.

 

라스트 듀얼은 결투에 대한 이야기뿐만 아니라 그 시대의 계급 체계와 그 시대의 전쟁사와 전반적인 시대상을 알 수 있어 중세 시대를 잘 알 수 있는 자료이기도 하다.

하나의 이야기에는 수많은 이야기가 스며있다.

카루주와 르그리의 결투 이야기에도 많은 이야기들이 담겨있다.

그저 몇 줄로 요약해져 전해지는 이야기의 실체를 꼼꼼하게 자료를 수집하고, 이야기를 따라가서 한 편의 시대극으로 엮은 작가의 집념이 대단하게 생각되는 이야기였다.

 

현재 영화로도 상영 중이라 영화는 보지 않았지만 출연 배우는 알았기에 그 얼굴을 떠올리며 읽었다.

타임머신이 있다면 중세 시대로는 가보고 싶지 않다.

그 시대의 여자들은 인간이 아니라 그저 재물에 불과했으니까..

 

그럼에도 마르그리트는 자신의 삶을 살았던 여자였다.

침묵하지 않고 모든 걸 감수했으니까.

그리고 카루주 역시 욕심 많고, 질투심이 있었다고는 해도 자신의 아내의 말을 믿고 끝까지 모든 걸 걸고 싸웠으니 어떤 점에서는 존경할만한 남자였다고 생각된다.

 

짧지만 긴 이야기 속에서 인간과 죄와 신을 한꺼번에 생각하게 되었다.

신을 믿지 않지만 이 이야기 속에서 신은 어느 쪽의 손을 들어 주었을까?

결투의 결과와 태어난 아이의 삶이 모순되기에 누가 이겼다고 말하기 어려운 이야기라고 나는 결론지었다.




* 출판사에서 협찬을 받았지만 온전히 내 맘대로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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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 나간 의욕을 찾습니다 - N년차 독립 디자이너의 고군분투 생존기
김파카 지음 / 샘터사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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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이 계획대로 흘러가지 않는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나니, 쓸데없이 기대할 일도 사라진다. 괜한 미련을 남기는 일도 없다. 무엇보다 계획하지 않은 빈틈 사이로 새로운 에너지가 들어온다.

 

 

 

인테리어 디자이너로 시작한 회사 생활을 5년 동안 하다 독립했다.

6년간 작은 브랜드를 만들어 운영하며 살고 있는 김파카.

이 작가의 글을 읽다 보니 나도 이제부터 제2의 인생을 시작하면서 마음을 비우는 법을 배웠다.

마음을 비워야 한다는 건 빤히 아는 얘기지만 그게 어디 쉬운가?

 

무심한 듯 적어간 글들엔 무심하지 않은 내용들이 담겼고

경험에 의한 생각과 감상과 의지는 머리로만 알고 있는 것들을 간접경험하게 만든다.

 

독립하면 일단 먹고사는 것이 젤 문제이고

내가 좋아하고 원하는 삶을 살 거라는 희망은 희망뿐이고

내가 좋아하고, 내가 그리고 싶은 그림은 알아봐 주는 이가 드물고

내 눈에 좋아 보이는 것들은 남들이 거들떠도 안 보고

독보적인 거 같은 나의 취향이 먹고사는 것에 걸림돌이 되는 것은 아닌가가 고민스럽고

돈에 매이고 싶지 않지만 돈이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세상이고

'나만의 무엇' 찾기는 쉬울 거 같지만 어렵기만 하다.

 





독립하고 프리랜서로 살면서 많이 고심하고, 많이 깨닫고, 많이 스스로에게 던진 질문에 답을 찾은 작가의 글이다.

그래서 조금 더 살아 본 나에게도 많은 공감되는 이야기들이 있었고

새삼스레 이것저것 하고 싶은 것들이 생각났다.

 

사실 이렇게 버틸 수 있었던 건, 어제의 내가 일을 해서 벌어둔 돈이 있어서다. 출근하기 싫어도 기를 쓰고 회사에 나가 일했던 그때의 내가, 오늘의 나에게 주는 기회다.

 

 

하고 싶은 일을 하기 위해 하기 싫은 일로 알토란같이 벌어 둔 돈이 하고 싶은 일을 하기 위한 원동력이 되었다.

어쩜 그것이 없었다면 용기를 내지 못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일기와 그림과 글들이 어우러져서 무심하게 담겨 있다.

그 무심한 일기와 그림과 글들이 주는 희망과 설레임과 에너지는 서서히 밀려온다.

누군가에겐 잊고 있던 것을 생각나게 해주고

누군가에겐 미래를 꿈꾸게 해주며

누군가에겐 자신을 알게 하는 힘이 있다.

 

이런 저런 독립에 관한 에세이들을 많이 봤지만

뭔가 마음을 들끓게 하면서도 안정감을 주는 에세이는 처음이다.

아마도 이 에세이를 읽는 동안 집 나갔던 의욕들이 돌아오는 느낌이 들어서일까?

 

각자의 방법을 찾아내고

각자의 길을 가는 와중에도

끝없이 불안하고, 의심하고, 옳은지 그른지에 대한 확신이 없는 사람들에게

이 무심한 에세이를 읽어 보라 말해주고 싶다.

 

이렇게 해야 한다.

이게 길이다.

라는 말 없이도 내가 어떻게 가야 하는 지를 무심하게 알려주는 글이다.

 

무엇보다 욕심내지 않고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걸 했다.

 

 

나도 욕심내지 않고 그냥 내가 할 수 있는 걸 해야겠다.

어디에서 나에게 맞는 길이 열릴지 알 수 없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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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 선샤인 어웨이
M. O. 월시 지음, 송섬별 옮김 / 작가정신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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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건 다 종이를 이겨 만든 가면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나를 아무 죄도 없는 사람으로 그려내고 있다는 걸.

우리 모두 그러지 않니?

 

 

아름다운 이야기였다.

이렇게 표현해도 된다면...

 

루이지애나의 뜨거운 태양과 높은 습도가 에어컨 없이는 견디기 힘든 7,8월 우리의 여름을 생각나게 했고

이야기 속에 표현되는 배경들이 끈적하고 뜨겁게 뇌리에 박혀버렸다.

루이지애나하면 뉴올리언즈가 떠올랐는데 이제는 배턴루지가 생각날 거 같다.

그 여름밤도...

 

한 소년에게 전부였던 소녀가 있다.

육상 선수이고 아무런 거리낌이 없이 명랑하고 즐거웠던 인기 많던 소녀.

그 소녀가 폭력에 짓밟히던 밤

소녀의 집 앞 떡갈나무 위에서 그 조짐을 느꼈던 소년이 있었다.

뭔가 일이 벌어지고 있음을 감지 하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은 소년.

그리고 뭔가 단서를 보았지만 일기장에만 적어두었던 사람.

그걸 보고도 입을 다물었던 사람들.

 

강간은 매시간 되풀이된다.

피해자의 머릿속에서.

어느 범죄소설에 실렸던 문장이다.

 

내가 네 명의 용의자 중 한 사람이었다는 사실을 말해야겠다.

내 말을 들어주려무나.

 

 

1인칭 시점에서 말하는 이야기는 독백 같고, 고백 같다.

소년 시절엔 알 수 없었던 감정들을 어른이 되어서야 이해하게 된 그가 똑같은 시절을 보내게 될 자신의 아들에게 남기는 이야기다.

그래서 이 이야기는 고백이면서 독백이다.

자신을 닮기를 바라지만 자신보다는 좀 더 나은 남자가 되길 바라는 아버지의 심정이 어른이 되어서도 끝내 해결하지 못한 '감정'에 대해 아들에게 이야기를 하게 한다.

너도 겪을 일이지만 내 실수에서 너는 더 나아가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딸의 친구와 바람이 나 가정을 버렸던 아버지를 둔 소년.

사랑했던 소녀가 짓밟히는 순간 그 소녀의 집 앞 떡갈나무에서 훔쳐보기를 위해 쌍안경을 들고 소녀를 기다리던 소년.

무언가 안 좋은 사건이 벌어지고 있음을 예감하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은 죄책감을 가진 소년.

사랑하는 소녀를 위해 한 모든 행동이 그녀에게 더 많은 상처가 되었음을 깨달은 소년.

그 소녀를 이해하고 싶어서 그녀의 옷차림, 행동들을 따라 했던 소년.

어느 날 갑자기 큰 누나를 사고로 잃은 소년.

그 슬픔을 느끼지 못한 채로 어른이 되어 마주한 누나의 일기장에서 잘 알지 못했던 누나의 비밀과 함께 '그날'의 범인까지 알아버린 어른의 모습을 한 소년.

 

그 짧은 순간 나는 우리 남자들 내면에는 위협적인 존재가 될 수 있는 가능성과 겁쟁이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이 둘 다 있다는 사실을 이해했다는 것이다.

 

어떤 남자가 되어야 하는지를 몰랐던 소년.

아버지가 되어서야 모든 감정을 이해하게 된 소년.

그 소년은 자신의 아들에게 평생 씻을 수 없었던 실수와 사랑과 상처와 사람들과 고향을 이야기한다.

 

사랑에 대한 이야기이자

사람에 대한 이야기이고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자

어린 시절에 대한 아쉬움이고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는가에 대한 성찰이자

어떤 사람으로 키워야 하는지를 고민하는 부모의 마음이다.

 

한편으로 너를 최선의 남자로 키워낼 수 없을 것 같다는 두려움이 든다. 당연히 과거의 나보다 나을 뿐 아니라, 내가 되고 싶었던 그런 남자로 말이야.

나는 우리의 시작이 순조로웠으면 해. 나는 우리 둘이 이 세상 속에서 좋은 남성으로 살아갔으면 해.

 

 

나이 차가 많은 누나들의 삶.

젊은 여자에게 남편을 빼앗긴 엄마의 삶.

열다섯에 평생 지울 수 없는 상처를 가진 린디의 삶.

그들에게 상처를 준 남자들, 그러나 아무런 죄의식을 갖지 않는 남자들을 바라보며 이 세상에서 좋은 남자로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임을 알게 된 소년은 아들의 아버지가 되어서야 묵직한 마음의 짐을 느끼게 된다.

딸을 가졌을 때 느낀 불안과는 다른 마음의 짐.

 

많은 감정을 느끼게 하는 좋은 성장소설이라는 생각을 하며 읽다가 마지막 부분에서야 이 이야기가 정말 아름다운 이야기라는 걸 느꼈다.

주위에 롤 모델이 없었던 소년은 자신의 아들에게 자신의 어린 시절 지울 수 없는 실수를 이야기하며 "우리 둘이 이 세상 속에서 좋은 남성으로 살아갔으면 해." 라고 말한다.

이 한 문장에서 나는 벌써 세상이 많이 달라지고 좋아진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가슴이 뭉클해졌다.

 

오래전 영어회화를 들었던 학원에서 쫑파티를 할 때 우리보다 나이가 많았던 아저씨가 있었다.

결혼한 지 5년이 되었다는 아저씨에게 우리는 물었다.

"아이는 언제 낳으실거예요?"

"글쎄.. 더 준비가 되면요."

"결혼하신지 5년이면 준비 많이 하신 거 아니에요?"

"음... 나는 아직 준비가 안됐다고 생각해요. 우리가 강아지 한 마리를 키울 때도 먹이고, 재우고, 훈련시키는 과정이 필요하잖아요? 동물을 키우는데도 이런 정성을 들여야 하는 데 하물며 인간을 키워내는 일인데 아무 준비 없이 낳을 수는 없다고 생각해요."

 

상당히 무례했던 어린 아가씨들의 질문이었지만 열심히 설명해 주시는 그분의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물론 그 말을 그때는 이해할 수 없었다.

아이가 생기지 않아서 그런가 보다고 우리끼리는 그렇게 결론 내렸었다.

하지만 살면서 그분의 말씀이 가끔 생각날 때가 있다.

어른들은 낳으면 저절로 알아서 큰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건 대가족 사회에서 서로의 울타리가 되어 살았던 시절이거나, 온 동네가 누구 집에 밥숟가락이 몇 개 있는지를 알 정도로 서로를 챙기던 시절에나 있는 얘기다.

 

마이 선샤인 어웨이. 이 이야기는 그분을 떠올리게 했다.

아마 그분은 좋은 아버지가 되었을 거라고 믿는다.

마이 선샤인 어웨이의 그 소년처럼...

 

내겐 누군가를 도울 기회가 있었음에도 나는 돕지 않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그 후로 오랫동안 나는 그때의 결심이 나라는 사람 그 자체라고 느끼며 내 죄를 목걸이처럼 걸고 살았다.

 

 

성장소설이자 자기 성찰의 이야기이지만 방관자들의 이야기이기도 한 마이 선샤인 어웨이.

이 소설은 이런 이야기다. 라고 단정할 수 없는 품위가 있는 이야기였다.

아들을 키우고 있는 모든 부모들의 필독서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내겐 다섯 명의 조카가 있는데 공교롭게도 모두 남자아이들이다.

그 아이들의 부모들에게 이 책을 선물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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