캑터스
사라 헤이우드 지음, 김나연 옮김 / 시월이일 / 2021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나는 내 감정을 타인에게 숨기는 데 어려움이 없다. 아마 누구나 곧 알게 될 것이다. 그게 내가 가진 능력이니까.

 

수잔 그린.

45세 싱글.

현재 임신 중.

런던에 아파트를 가지고 있음.

독립적 성격.

누군가에게 관심을 주는 것도 받는 것도 싫어함.

공과 사는 구분. 절대 얽히는 관계는 허용하지 않음.

연애는 좋지만 결혼은 생각 없음.

연애도 질척이는 건 싫음.

필요할 때만 만나고 그 외의 감정 소모는 사절.

 

참으로 이기적이고, 정나미 떨어지는 캐릭터를 만났다.

본인만 합리적인 이 아가씨는 다른 사람들의 유대가 못마땅하고, 그 인간관계를 이해할 수 없다.

철벽녀도 이런 철벽녀가 없다.

그러나 그녀도 10년 넘게 유지하는 관계가 있다.

리처드.

매주 수요일과 목요일 그들은 만난다.

밥을 먹고, 영화나 전시장을 가고, 호텔을 간다.

둘 다 사적으로 얽히지 않은 깔끔한 관계다.

그리고 둘 사이에 아이가 생겼다.

물론 그 아이는 수잔의 아이다. 절.대. 두 사람의 아이가 아니다.

 

이기적이고 융통성 없고, 자기만 옳고, 이성으로만 가득한 수잔 그린.

이 정나미 떨어지는 여자를 읽다 보면 그것이 상처에 대한 방어기제라는 걸 알게 된다.

 

 





"숙부 제가 아까 뭐라고 그랬어요? 누나는 정말 재미가 없는 사람이라니까요. 꼭 세상의 모든 즐거움이랑 기쁨을 다 빨아들이는 블랙홀 같은 사람이라니까."

 

 

수잔에겐 에드워드라는 남동생이 있다.

마흔 넘어서도 엄마에게 빌붙어 술과 파티에 쩔어 사는.

그런 그에게 엄마는 돌아가시며 집에 대한 소유권을 주셨다.

정확하게 말하면 에드워드가 원하는 만큼 그 집에서 살수 있도록 조치를 취해놓고 가신 것이다.

수잔에겐 계획이 있었고, 유산으로 상속받은 집을 팔아서 아이와 함께 살 집을 사려고 했다.

물론 에드워드랑 나눌 생각이었지만 에드가 그 집에 눌러 산다면 그 계획을 언제 실행할지 알 수 없다.

계획대로 되지 않는 걸 못 견디는 수잔은 엄마의 유언장에 대한 부당함을 소송하려고 한다.

 

이성만 존재하고 감정은 없어 보이는 수잔 그린.

그래서 그녀의 모든 결정이 참 못마땅했다.

도대체 이 이야기의 끝이 어디로 갈지 정말 갈피를 못 잡고 읽었다.

갈피는 못 잡았지만 왠지 책을 손에서 놓을 수 없는 흡인력이 있었다는 건 읽은 사람만 아는 비밀~

 

가족의 비밀

아이의 탄생

새로운 사랑

 

비밀은 예상을 뛰어넘는 이야기였고

아이의 탄생으로 인해 그녀는 비로소 복잡한 인간의 내면을 이해하게 되고

은근슬쩍 밀고 들어오는 연하남의 구에는 그녀의 철통같은 마음의 벽을 스르르 허물어 댄다.

게다가 에드워드의 진심은 나조차도 깜짝 놀랐을 정도였다.

 

수잔을 보면서 살면서 보아왔던 사람들 중에 이해할 수 없었던 사람들이 떠올랐다.

그들도 어쩜 말하지 못한 사연으로 그토록 철벽을 치고 사람들에게 냉정했던 게 아닐까.

수잔이 그러든 말든 케이트와 롭은 수잔에게 밀려들어왔다.

아무리 철벽을 치고

외롭지 않다고 믿고

독립적인 인간이 되고자 했어도 케이트와 롭의 꾸준한 관심은 그녀를 혼자이게 하지 않았다.

 

선인장처럼 메마르고 가시로 무장한 철벽녀라고 생각했다.

건조한 사막에서도 한 줄기 빗방울에 의지해 살아내고, 꽃을 피우는 선인장.

수잔은 선인장을 닮았다.

그녀 안에 꾹꾹 눌러 담아 박제시킨 감정들은 빗방울을 기다리고 있었다.

세찬 소나기가 아니라 가랑가랑 내려서 온몸에 스미는 가랑비.

 

인생은

늘 계획대로 되지 않는다.

그리고 그 계획대로 되지 않는 것에 삶의 묘미가 있다.

 

수잔 그린.

까칠하고, 이기적이고 재수 없었던 그녀가

강인하고, 똑 부러지고, 현명하게 느껴졌다.

더 이상 외롭지 않을 선택을 해나갈 수잔을 열렬히 응원하고 싶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잔류 인구
엘리자베스 문 지음, 강선재 옮김 / 푸른숲 / 2021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렇게 혼자 있던 적이 없었다... 일생을 통틀어 단 한 번도. 그리고 무섭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 스스로가 놀랍다는 생각도 한참 했다. 어둠 속에 혼자 있는 것도. 행성에 단 한 명밖에 없는 사람이라는 것도 전혀 무섭지 않았다... 오히려 안전하다고 느꼈다. 과거의 그 어느 때보다도 안전하다고 느꼈다.

 

 

아무도 없는 곳에서 나 혼자 산다는 건 어떤 기분일까?

 

40년간 개척지 행성에서 일을 하며 살아온 오필리아는 이곳에 남편과 아이들을 묻었다.

하나 남은 아들과 며느리와 살아가던 오필리아.

어느 날 콜로니는 이 행성을 비우기로 한다. 모두 떠나야 했다.

오필리아는 아들 내외를 먼저 보내고 마지막 셔틀을 타기로 했지만 대신 숲으로 간다.

모두가 행성을 떠난 이후 숲에서 나온 오필리아는 비로소 자유를 느낀다.

거추장스러운 옷을 모두 벗어버리고, 사람의 말소리 하나 없는 이 행성의 주인은 이제 오필리아뿐이다.

 

온전히 혼자가 된 오필리아의 모습을 상상하다 나도 같이 홀가분함을 느꼈다.

문득 외로우면 어쩌지? 혼자서 얼마나 견딜 수 있을까? 라는 나의 걱정을 비웃기라도 하듯이 오필리아는 정말 잘 지냈다.

개척민으로 살아온 세월이 헛된 것은 아니었으니까.

어제까지만 해도 남의 집이었던 곳을 드나들며 짜릿함과 동시에 죄짓는 느낌을 받는 오필리아.

오래도록 그녀의 생각을 지배했던 목소리는 끝없이 그녀를 꾸짖고 방해하지만 내면에 새로이 생긴 목소리는 '괜찮다'고 말한다.

아무에게도 인정받지 못하고, 존중받지 못한 70대 할머니 오필리아는 아무런 잔소리도, 참견도, 눈초리도 없는 이 세상에서 70년 만의 자유를 맘껏 누린다.

 

어느 날 이곳에 새로운 생명체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기까지 오필리아의 일상은 평화와 자유 그 자체였다.

괴동물은 직립보행을 하고 손가락과 발가락이 4개였다.

몸짓으로 서로를 탐색해 가는 시간.

두려움 대신 용기로 서로를 알아가는 시간.

이들의 소통이 앞으로 인류가 마주할 수 있는 미래라는 생각이 들었다.

스타트랙의 다양한 우주적 캐릭터들이 떠오르는 장면들이었다.

 

그는 양심의 가책을 느꼈다. 그러고 싶어 하면 안 돼. 그들로부터 인간의 기술을 보호해야 해. 인간의 기술로부터 그들을 보호해야 하기도 하고.

 

 

예의를 지킬 줄 아는 괴동물들.

그녀를 처음으로 중요하게 생각해 주는 생명체를 만났고, 그녀를 처음으로 존중해 주는 생명체를 만났지만 그들이 생각보다 훨씬 똑똑한 생명체라는 것을 알게 되는 순간 오필리아는 그들에게 경계심이 생긴다. 하지만 뭐, 어때? 하는 마음도 생긴다.

이들의 평화로운 소통을 방해한 건 뒤늦게 행성을 조사하기 위해 온 사람들이었다.

 

 

우월하다고 생각하는 자들은 지식으로 무장했지만 지혜는 없었다.

오필리아가 괴동물들과 소통한다는 사실도 믿지 않았고 그들의 지능이 높다는 것도 인정하지 않는다.

 

"이들은 외계인이에요." 리키시가 쉰 목소리로 말했다. "어르신은 아무것도 못해요. 배운 것 없고 참견하기 좋아하는 흔한 할머니잖아요."




이 사람들이 괴동물들만큼 이질적으로 느껴졌다. 다른 점이 있다면 이들은 그를 이해하는 일에 괴동물들보다 관심이 적다는 것이다. "듣지 않으면 들리지 않아요."

 

 

오필리아는 이미 괴동물들에게 소중한 사람이었다.

인간들은 그를 신뢰하지 않았다. 그들은 남겨진 시설을 폐기하고 오필리아까지 데리고 가려고 한다.

오필리아는 이 상황을 어떻게 해결해갈까?

 

내가 오필리아라면 어떤 선택을 했을까?

70 넘은 나이에 쓸모없고, 무능력하고, 거추장스러운 느낌을 받는다면 나 역시 혼자라도 행성에 남았을까?

오필리아는 대담한 여성이다. 평생 동안 그 모습을 숨기고 살았지만..

 

노인은 사회적 가치로 봤을 때 별 볼일 없는 사람일지 모른다.

가진 것이 많던 가진 것이 적던.

그들이 살아온 세월에서 축척한 삶의 기술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것들이라고 생각하는 젊음 앞에서.

 

오징어 게임의 오일남은 언제나 버려진 카드였다.

그러나 그가 속한 팀은 예상을 깨고 살아남는다. 그가 가진 삶의 지혜가 그들을 살린다.

노인이란 그런 존재일 수 있다. 어떤 상황에서도 답을 찾아낼 수 있는 깊이를 담고 있는 사람일 수 있다.

오필리아가 그런 사람이었다.

 

잔류 인구라는 제목과 70대 할머니의 생존기는 특별한 경험을 하게 했다.

새로운 종과의 만남은 지식보다는 지혜를 필요로 하고, 그것은 결국 경험에서 나오는 것이라는 걸 깨닫는다.

언제든 죽을 수 있다는 것에 선택지를 갖게 된다면 그건 어디에서 어떻게 죽을지를 내가 정할 수 있다는 것이다.

오필리아는 이 행성에서 마지막을 보내고 싶었다. 그런 그녀의 마음을 이해하는 건 같은 인간이 아니었다.

괴동물들은 그녀의 선택지를 지킬 수 있게 했다.

이 새로운 이야기에서 나와 다른 누군가를 대할 때 어때야 하는지를 배우게 된다.

오필리아와 괴동물들의 소통은 우리 삶의 모든 인간관계가 어때야 하는지를 보여준다.

서로를 배우는 법을 배워야 한다.

그것은 존중과 이해하려는 노력에서 비롯된다.

 

잔류 인구는 오필리아로 인해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 소설이 될 거 같다.

오필리아가 어디에도 없는 캐릭터 같지만 어디에나 있는 캐릭터라는 걸 알게 될 것이다.

우리들의 엄마가 바로 오필리아이고 나도 곧 오필리아가 될 테니...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라스트 코요테 RHK 형사 해리 보슈 시리즈 4
마이클 코넬리 지음, 이창식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5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보슈는 아무도 믿지 않았고 아무한테도 기대지 않았다. 이제 와서 그런 생각을 바꾸고 싶진 않았다.

 

LA는 지진과 폭동으로 정신없고, 해리의 그 멋진 집은 철거 통지를 받았다.

폴리스 라인 대시 철거 테이프가 둘러진 집.

해리는 집을 조금씩 수리하면서 몰래 숨어 산다.

게다가 그는 현재 정직 상태이다.

그리고 심리 상담 중이다.

마치 세월을 한참 건너뛴 느낌이라 내가 순서를 잘 못 봤나 싶기도 했다.

 

파운즈를 유리 벽 너머로 날려버린 일로 해리는 정직 중이고, 상담치료 중이다.

이 치료에서 결과가 좋게 나와야 다시 복직할 수 있다. 하지만 상담사는 자꾸 해리의 과거를 들춰내고 해리는 과거에 대해 말하고 싶지 않다.

 

이제 그는 세상 속으로 걸어 나갈 준비가 되었다. 세상이 그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든 안 되어 있든.

 

 

30년 전 어머니의 죽음은 초등수사부터 부실했다.

범인은 잡히지 않았고, 어머니의 죽음은 뒷골목에 묻혔다.

직업도 집도 없는 해리는 이제 30년의 세월을 거슬러 가려 한다.

어머니를 죽인 놈은 아마도 거물급인 거 같다.

하지만 그자를 잡으려면 어디를 쑤셔야 할지 해리는 알았다.

그러기 위해 그는 파운즈 경위의 배지 번호를 사용했다.

그의 배지를 훔치기까지 했고.

그것이 어떤 일을 불러올지 그때는 알지 못했다.

 

많은 의심과 확신과 사실은 무너졌다.

범인은 언제나 생각지 못한 곳에서 도사리고 있었고,

사건 역시 언제나 사소한 것이 발단이 되었다.

 

해리는 이 이야기에서 많은 것을 잃었다.

그리고 어쩜 더 많은 걸 얻었을지도 모른다...

 

라스트 코요테.

해리 집 주변을 어슬렁거리던 블루는 지진과 함께 사라진 걸까?

해리는 자신의 전 재산을 털어서 샀던 아슬아슬하지만 아름다운 집을 잃었다.

터전을 잃은 해리.

하지만 그는 벼랑 끝에서 다시 지상으로 발을 디뎠다.

이제부터 해리는 조금은 편하게 형사 일울 하게 될까?

더 이상 벼랑에서 위태롭게 서 있지 않아도 될까?

 

반전 덩어리일 거 같았던 어빙.

아마도 코넬리가 처음 어빙을 설정했을 때와는 다르게 많은 수정을 거친 거 같다.

그게 아니라면 어빙은 또 다른 수법을 위해 해리를 남겨 둔 것일지도...

 

라스트 코요테에서도 역시 해리에게 로맨스가 있다.

이번엔 해리를 근본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여자.

하지만 해리도 그녀를 근본적으로 이해할 수 있을까?

 

웃기게도

자신을 이해하려 했던 여자는 자신의 어두음을 보여주기 싫어서 떠나게 했고

그 어둠마저도 이해할 수 있는 여자는 그녀의 그 어둠 때문에 곁을 주는 게 망설여진다.

그러니 어쩌란 말이냐~ 사랑아!

 

복수는 참으로 쓸데없는 것.

라스트 코요테를 읽으며 다시 한번 느끼게 된다.

해리의 마음의 응어리는 답을 알았겠지만 풀리지 않을 것이다.

영원히...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호메로스의 일리아스 - 신들의 전쟁과 인간들의 운명을 노래하다 주니어 클래식 16
장영란 지음 / 사계절 / 2021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우선 너무나 유명한 '호메로스'라는 이름이 실제로 존재했던 특정 인물을 가리키지 않을 수 있다는 사실이다.

 

 

일리아스, 오뒷세이아는 오래된 고전으로 서양의 고전문학을 읽을 때 반드시 거쳐가는 관문과도 같다.

고전에 관심이 없더라도 그리스 신화에 관심을 가지는 사람들이라면 이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와 오뒷세이아는 필독서나 마찬가지다.

하지만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이 모두 맞는 것일까?

나는 익히 아는 이야기 말고 잘 모르는 이야기를 하고 싶다.

 

호메로스가 실존 인물이 아닐수도 있다?

 

호메로스라는 이름은 '눈먼 사람'을 의미한다.

그리스어로 '호로스horos'가 본다는 뜻이고 거기에 부정의 '메me'가 붙어 '보지 못한 사람'을 뜻한다.

이 유명한 그리스 시인으로 알려진 호메로스는 아마도 실존 인물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는 그리스 암흑기(400~500동안)에 구전으로 전해진 트로이 전쟁의 이야기를 집대성한 사람일 수 있다.

호메로스라는 이름을 상징적으로 사용했을 뿐 일리아스라는 작품을 만든 인물은 아닐 수도 있다.

말하자면 구전으로 전해지는 이야기들을 모아서 일리아스라는 이름으로 책으로 엮은 누군가의 필명일 수 있다는 얘기다.

 

호메로스가 일리아스와 오뒷세이아를 집필했다고 알려져 있지만 사실 두 이야기의 저자가 다를 수 있다는 것도 사실이다.

문헌학자 입장에서 보면 한 사람이 썼다고 하기에는 상당히 다른 가치관을 보여주고 있다.

그럼에도 호메로스라는 이름으로 이 두 작품을 묶어서 전해내려 오는 이유는 그리스 암흑기에 음유시인들로부터 전해내려오는 이야기들을 나중에서야 글로 남겼기에 상징적인 이름의 호메로스를 사용했을 수 있다.

 

 

이 책은 일리아스의 해설본 같다.

집에 있는 일리아스 책을 읽으며 뭔가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면 이 책을 읽어보라 권해주고 싶다.

그리스 문학에서 많이 사용되는 표현들과 그리스 신들이 상징하는 의미와 일리아스에서 다뤄지는 이야기들이 어떤 의미인지를 알려주기 때문이다.

처음에 책을 받고 일리아스 이야기를 읽는 건 줄 알았다. 하지만 이 책엔 이야기와 더불어 그 상황과 표현들에 대한 숨겨진 의미와 우리가 모르고 지나쳤거나 잘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들이 담겨있다. 그래서 일리아스 완역판을 읽은 사람들에게도 유용한 책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오래전 읽었지만 거의 이해하지 못했던 일리아스의 그 방대한 의미를 이 책을 통해서 알아가는 재미가 있었다.

중간중간 삽입된 명화들이 흑백이라 좀 아쉬웠지만 일리아스의 상황에 맞는 그림들이 담겨 있어 좋았고

문단 사이에 일리아스의 표현이나 상황이나 개념들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Tip이 들어 있어서 모호한 부분들을 보충할 수 있어서 좋다.

 

고전이 가진 맹점이 누구나 아는데 실제로 읽은 사람은 별로 없다는 점이다. 그냥 들어 보기만 했거나 읽어 보려 한 적만 있는 책일 뿐이다.

 

호메로스의 일리아스는 서구 정신의 근원과 원형을 담아낸 서사시다.이 이야기는 인간의 삶에서 만나게 되는 분노, 갈등, 전쟁, 권력, 시련, 고통, 사랑, 우정, 용기, 죽음과 영혼 등의 모든 것들을 주제로 삶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작가의 말처럼 들어는 봤지만, 알고 있지만 한 번도 제대로 읽어 보지 못한 사람.

읽었지만 뭔 말인지 이해가 안 됐던 사람.

읽을 엄두가 나지 않는 사람들에게 길잡이가 되어 주는 책이다.

 

장영란 교수의 호메로스의 일리아스는

가장 오래된 고전을 잘 이해하며 읽을 수 있게 길을 알려주는 등대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어둠의 속도
엘리자베스 문 지음, 정소연 옮김 / 푸른숲 / 2021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내가 좋아하지 않는 것들도 내가 좋아하는 것들만큼이나 진짜이다.

 

빛은 어둠이 있어야 존재한다.

정상이라는 개념은 비정상이 있어야 존재한다.

세상은 대칭되는 것들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인간은 불편함을 주는 존재를 견디지 못한다.

쓸모없어 보이고, 걸리적거리고, 존재함으로써 불편함을 느끼게 하는 존재들을 싫어한다.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고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도 있다.

나는 정상일까? 나는 비정상일까?

 

책에는 자폐증은 뇌에 문제가 있다고 쓰여 있었다. 그 말은 나를 반품되거나 버려져야 하는, 결함이 있는 컴퓨터처럼 느끼게 했다.

 

루 애런데일.

이 이야기의 주인공 루의 시선으로 바라본 세상은 내가 알던 세상보다 훨씬 감각적이고 다채롭다.

이 책을 읽는 며칠 동안 나는 다른 시선으로 세상을 보았다.

그리고 나는 나보다 더 진화된 인간상을 만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루와 그의 친구들은 세상을 정확하고 반듯하고 정직하고 올바르게 이해하고 있었다.

그 언저리에서 혼탁하게 세상을 살아가는 정상인들은 모르는 세계다.

 





장애인 고용 비용을 국가로부터 지원받으며 그들에게서 보통 사람들에게는 없는 집중력을 필요로 했던 회사는

우주개발에 투자를 하면서 자폐증을 가진 이들에게 비용이 많이 든다는 속내를 감추고 그들에게 정상인이 될 기회를 준다며 치료에 참가하라고 요구한다.

겉보기엔 자폐증을 치료하는 의료기술이 발전한 것처럼 보이지만 그들의 속내는 이 기술로 자폐인들이 가진 고도의 집중력을 보통 사람들에게서도 끌어낼 수 있는 실험을 위한 것이었다.

말하자면 고도의 집중력을 가진 인간들을 만들어내어 추가 시설과 비용 없이 우주개발에 힘쓰는 인력으로 충원하겠다는 저의가 깔린 프로그램이었다.

루와 그의 동료들은 그 실험의 마루타들이었다.

하지만 아무도 그런 사실들을 알 수 없었고, 회사의 크렌쇼씨는 그들에게 정산인으로 살아갈 치료를 받으라고 요구한다.

 

자폐인은 다를 뿐이지, 나쁘지 않아. 다름이 잘못은 아니야. 달라서 힘들 때도 있지만, 잘못은 아니야.

 

 

치료를 받기로 한 사람과 치료를 거부한 사람 사이에 루가 있다.

루는 뇌에 관한 자료를 검색하고, 책들을 읽으며 자신에게 가해질 치료가 어떤 것인가를 생각한다.

루는 정상인들보다 느리다. 받아들이는 것이.

하지만 진지하다. 그가 하는 모든 것들은 진지하다.

생각하고 행동하지, 행동하고 생각하지 않는다.

루는 모든 패턴을 읽는다. 사람들의 표정과 어조에서 그 사람의 마음을 읽는다.

그래서 싫은데 좋다고 말하고, 좋은데도 싫다고 말하는 걸 이해할 수 없다.

다만 정상인들은 그렇게 한다는 걸 알뿐이다.

정상인이 된다면 사람들과 조금 더 가까워질 수 있고, 빠르게 반응할 수 있을까?

지금 좋아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좋아한다는 표현을 할 수 있을까?

마저리를 사랑하는 마음을 표현할 수 있을까?

 

이 모든 것들은 보통사람이라면 생각할 필요가 없는 것들이다.

그래서 어둠의 속도를 읽는 내내 나는 필치 못한 선택 앞에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놓고 갈팡질팡했다.

나는 그랬지만 루는 갈팡질팡하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이 루 애런데일을 평생 못 잊을 거 같다...

 

 

이 책을 소개할 때 나는 아직 선택권이 존재하지 않는 이 세상에 살아서 좋다고 말했다.

하지만 책을 읽는 동안 나는 지금 현실에서 벌어지고 있는 필요에 의한 <선택> 앞에서 나는 선택을 택했음을 깨달았다.

코로나 백신은 이제 '필수'가 되었고, 그 '필수'를 거부하는 사람들에게 <강압>으로 작용하고 있다.

나 역시 한동안 백신에 대한 믿음이 없었고, 부작용에 대한 검증 없이 마루타가 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백신을 맞지 않고는 앞으로 살아갈 세상에서 나는 더 많은 불편함과 부당함을 감당해야 한다는 사실이 싫었다.

나는 선택했고, 다행히 아무런 부작용 없이 잘 지나왔다.

그러나 부작용은 존재했고, 단지 내가 아닐 뿐이었다.

그랬다고 다른 사람에게 대의를 위해서 마루타가 되라고 강요할 수 있을까?

나도 멀쩡했으니 너도 멀쩡할 거라는 논리는 맞지 않다.

 

우리는 이미 선택의 시대에 살고 있다.

흡연이 그렇고, 코로나 백신이 그렇다.

대다수가 하지 않거나 하는 것을, 하거나 하지 않는 사람들이 설 곳이 점점 사라지고 있다.

불행하게도 나는 이미 <선택>의 시대를 살고 있음이다.

 

루 애런데일의 1인칭 시점의 어둠의 속도는

내게 다른 세계를 알게 해주었다.

느리지만 확실한 사람들에 대한 편견을 조금 덜어내게 해주는 이야기였다.

 

그들의 세계를 정상인이 이해할 수 있도록 이야기를 만들어 준 엘리자베스 문에게 고마울 뿐이다.

어둠의 속도를 통해 나는 방금 존재하고 있지만 전혀 알지 못했던 세계를 배우게 되었으므로...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